봄꽃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4월. 꽃을 즐길 수 있는 주요 거리들엔 완연한 봄을 맞이하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필자의 고향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부도로 가는 길도 주말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일 게 눈에 보입니다. 이 지역은 서울 근교에 있는데다 꽃구경도 하고, 바다내음도 맡고, 해산물 요리도 즐길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저도 고향집을 방문할 때면 가족들과 종종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가는 길목 선감도라는 곳에 선감학원이라는 소년 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1982년까지 운영되었다고 하니 충격이었습니다. 지난 해 오마이뉴스 이민선 기자가 쓴 <소년들의 섬>이라는 책을 통해서 뒤늦게 알았습니다. 평소 종종 다니던 곳에 이토록 잔혹한 국가폭력의 역사가 있었다니…가까운 주변에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 검색창에 선감도를 입력하니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뜻있는 사람들이 선감도 수용소의 잊혀진 아픔을 기억해내고 진실을 밝히려 노력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일본 식민지 말기에 만들어져 1982년까지 운영되었던 선감학원은 4.3이나 5.18과 같은 국가폭력 사건들만큼 폭넓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뼈아픈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선 기자는 선감학원에서의 인권유린 속에서도 살아 남았던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의 여전히 고통스러운 인생이야기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어렵게 듣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아픈 역사가 오롯이 담긴 책이어서 수월하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름은 학원, 실제는 지옥같은 수용소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나쁜 짓을 할 것 같은 8~18세 소년들을 잡아다가 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소년 감화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 잔인한 인권유린 시설을 해방 후에도 없애지 않은 채 군사독재 시절까지도 운영했습니다. 박정희 독재 시절엔 사회를 정화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납치하기도 하고, 미아보호소에서 막무가내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선감도로 끌려온 아이들은 강제노동과 폭력(성폭력)에 시달리며 죄수처럼 살았습니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너무 어린 시절부터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기에 지옥같았던 수용소를 벗어나서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수용소를 나와서도 아무런 기반 없이 혼자 힘으로 세상을 버텨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기억을 힘겹게 떠올리며 저자의 인터뷰에 응했을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책장 한장을 넘기는게 미안할 지경입니다.

수용소에서 그리고 이후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이 책 한 권을 읽고서 감히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삶이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이야기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뒤늦게 비극적 역사를 알게 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선감학원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에 기억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이 사건의 진실이 조금이라도 알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이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앞장서왔던 역사학자 정진각 소장은 처절하게 삶을 이어온 피해자들에게 지금이라도 국가 차원에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정 소장의 노력만으로는 힘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 책을 읽고 선감학원에 대해 알게 된 시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정 소장과 뜻을 모은 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폭력 사건들 만큼 논의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부나 경기도는 선감학원의 비극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없다.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 또한 거의 없었다. 정 소장을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이 선감학원의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선감학원의 비극 대부분은 아직도 피해자들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20쪽)


선감학원을 거친 삶은 고통 그 자체

1963년 선감학원에 수용되었던 열 살 남짓 된 쌍둥이 형제 중 형은 이듬해 작은 꽃신 하나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왜 끌려왔는지도 모른 채. 관도 없이 묻혔던 형의 유골이 발굴되었을 때 유골을 받아든 사람은 가까스로 생존해 이제는 환갑이 넘은 쌍둥이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이 기억하는 선감학원은 굶주림과 지독한 매질이었습니다. 형이 죽은 후 동생은 운좋게 선감학원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이후의 삶도 그리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선감학원을 겪은 뒤에는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어요. 늘 불안한 거에요. 그러다 보니 앞장설 일이 생겨도 나설 수가 없고, 사람 사귀는 것도 두렵고.”(47쪽)


동생은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막노동, 운전 등 평생을 성실히 일했지만 사글셋방에서 살고 가족도 없다고 합니다. 인터뷰에 응했던 당시에도 허드렛 일이라도 찾아 일해야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파괴해버린 국가폭력 사건인데 가해자도 책임자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이 더욱 원망스럽습니다.

서울에 있는 삼촌 집에 가다가 남루한 옷차림을 이유로 경찰에 납치되듯 끌려갔던 한일영씨의 인생도 상상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어머니와 삼촌이 버젓이 있었음에도 경찰에게 잡혀 아동보호소에 들어간 후 선감도로 이송된 한일영씨 역시 강제 노동, 굶주림, 폭력을 겪으며 지옥같은 고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동상이 걸려도 제대로 치료 받지도 못해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도 발을 자르지 않아 다행이라 여겨야 했던 삶…

선감학원에 수용된 지 3년 만에 한일영씨는 죽음을 무릅쓰고 이웃 섬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섬 주민들은 선감도에서 탈출해 온 소년들을 겁박해 노예로 부렸습니다. 악귀와 같은 독재 정권 아래 국민들이 어떻게 악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감도 주변 지역 주민들은 소년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았습니다. 탈출했던 이웃 섬에서 노예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한일영씨는 다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13살에 찾아가던 삼촌집에 18살이 되어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공무원이 납치해 선감도로 보내기도

지금은 스님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곽은수씨는 부모와 형제가 있었음에도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갑자기 나타난 차에 실려 수원시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곽은수씨는 공무원에게 납치되어 선감학원에 수용된 경우였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졌던 폭력입니다. 물리적 구타뿐만 아니라 선배들로부터 성폭행까지…그는 선감학원을 ‘약한 이는 고통속에서 죽거나 고통을 못이겨 도망치다 죽는 동물들의 세계’였다고 말합니다.

곽은수씨는 잡혀간 지 8년만에 선감도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호적도, 주민등록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탈출한 지 5년만에 선감학원을 찾아가 엄청난 매질을 당하고 성장증명서를 받아와 호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에 적응해 사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다 절에서 만난 스님들의 도움을 통해 성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다 비장하게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곤두박질쳤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나를 잡아가지 않았다면! 그 생각이 안 떠나니까 속에서 뜨거운 게 막 올라와서 괴롭고, 그럴 때마다 찾아서 복수하고 싶고…다 용서하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에요…너무 비참하잖아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죠. 지금도 꿈속에서 ‘기상’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제2반 인원보고’ 하고 소리 질러서 같이 자던 스님들 깨우기도 하고요. 공무원한테 붙잡혀 오는 꿈도 꾸고, 선착순 하는 꿈도 꾸고요. 국가에서 저지른 일이니, 국가로부터 사과라도 받아야겠어요.”(155쪽)


진실규명과 사과, 배상이 이뤄지기를

이분들 이외에도 인터뷰에 응한 선감학원 생존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묻게 되고, 악독한 국가 아래서 시민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자문하게 되는 역사입니다. 저자는 선감도에 끌려온 소년들이 걸었을 길을 걸으며 길의 끝자락에 있는 박물관에서 작은 꽃신을 보며 선감학원의 진실을 확인해야겠다 다짐했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은 생존자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민선 기자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나서 후련해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보며 포기하기 않고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이 책이 우리 역사를 알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아픈 심장을 부여잡고 오늘을 살아가는 생존자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선감학원이라는 잔혹한 국가폭력의 진상이 시민들에게 더욱 알려지고 진실이 규명되는 것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배상이 이루어 지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년에 채 10권이 되지 않는 1인당 독서량(13세이상) 통계를 언급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 걱정이라는 기사들은 매년 되풀이됩니다. 이런 기사들을 보면 저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책을 진짜 안읽네. 큰일이네.’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우리는 왜 독서량이 적다고 걱정할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책을 읽지 않아도 문제는 없지만 독서가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헤르만 헤세는 <독서의 기술>에서 “삶으로 이끌어 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책이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3색볼펜 읽기 공부법>을 쓴 사이토 다카시에게 독서는 “다른 사람의 사상과 철학을 폭넓게 수용하는 행위”이며 “여전히 유효한 공부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입니다. 앤 라모트는 <쓰기의 감각>에서 책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기도 하고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꾸준히 책을 읽어오면서 저 역시 독서가 유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독서의 유익을 말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책을 수십 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독서가와 작가들은 가장 기본적인 지식 습득에서부터 자아발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독서가 유익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하토야마 레히토라는 작가는 정말 실제적인 독서의 유익과 독서 방법을 제안합니다.
 

책 표지ⓒ 가나출판사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후 여러 기업들을 거치며 성공한 삶을 살아온 저자는 <하버드 비즈니스 독서법>이라는 책으로 자신의 독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그는 당면한 문제 해결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 독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히 실용적 독서법의 극단에 있는 읽기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고, 독서 자체보다는 독서를 통해 비즈니스 세계에서 어떤 결과를 냈는가에 목적을 둔 독서법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처음 봤을 땐 뭔가 속물적인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서문에서 저자가 말한 “읽기만 하는 독서의 함정”이라는 문구에 끌림이 있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독서가 무조건 실천으로 옮겨져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유용한 지식을 얻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으니 만족스럽네’ 정도로만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하토야마씨가 말하는 독서방식도 참고해 볼 만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를 빈번하게 만나는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하고 실용적인 독서법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많이 혹은 빨리 읽고 아무런 변화나 성과가 없는 것보다는 “한 페이지 또는 한 줄만 읽었더라도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실용적 독서라면 굳이 꺼려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과제 해결’에 책을 읽는 목적을 둔 저자가 하는 말들은 상당히 유쾌하면서도 매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독서량이 아니라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다.’, ‘독서의 목적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에 대한 자기 의견을 가져야 한다.’ 등의 문구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힘”입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정해진 답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사회적 배경이 모두 비슷하고,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자기 의견을 가지는 것보다 상대의 생각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논의나 대립보다는 결국 평범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41-42쪽)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 기업들이 국제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근본 이유를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급변하는 세계 비즈니스 환경에서 위기를 겪고 있는 국내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새겨들을 만한 조언입니다.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겐 저자가 제안하는 과제 해결을 위한 실천형 독서가 시급히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중요한 문장이나 부분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책의 내용을 지금 자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라고 저자는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때문에 저자는 속독이니 다독이니 하는 기술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물론 저자의 독서법은 모든 종류의 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독자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비즈니스 환경, 즉 경제나 경영관련 실용도서를 이렇게 읽자는 제안입니다.

저자의 독서법은 네 가지 문구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 ‘지금 필요한 10권의 책’, ‘이 책들을 눈에 띄는 가까운 곳에’, 그리고 ‘실천’. 즉 자신이 당면한 과제를 늘 떠올릴 수 있고,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책의 권수를 10권 이내로 줄여 그것들에서 얻은 통찰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저자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경영세계에 있는 만큼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토야마식 독서법에서 제가 얻은 교훈 한가지는 ‘책 처분’에 관한 것입니다. 실상은 한번 들춰보지도 않을 책으로 책장을 채워두지 말라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도 왠지 모르게 읽을 것 같은 생각에 만지작거리고 다시 책장에 꽂기를 반복하다 먼지만 소복하게 쌓인 책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실천거리 하나를 얻었습니다. 읽지 않을 책 처분!
 

“그냥 종이일 뿐이잖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절대로 다시 보지 않을 테고, 공간만 아깝지. 만약 다시 봐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사면 되지 않아?”(67쪽)


그렇습니다. 필요하면 다시 사면 됩니다. 왠지 이번에는 책장에 쌓여가며 제게 부담을 주고 있는 책들을 상당히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금 저에게 필요없는 책들은 과감하게 처분하고 새로운 책들을 친구로 들일 것입니다.

실용과 실천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저자에게도 독서하는 방식에 변화는 찾아옵니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끊임 없이 마주할 때는 그와 관련된 실용적인 책들을 읽었으나, 이후엔 자신의 성장을 위한 독서,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 시대의 흐름을 읽기 위한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역시 업무상 문제 해결 목적 이외에는 애독가들이 말해왔던 것과 같은 독서의 유익을 누려왔던 독서가입니다.

이 책의 제목만 보고서 언뜻 흔한 자기계발서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어쩌면 피해왔을지도 모르는 극단적으로 실용적인 독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입니다. 역시 책은 어떤 면에서 보나 우리에게 유익을 건네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안 읽는다 걱정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어떤 책, 어떤 목적이라도 좋으니 책을 읽어봅시다!

‘왜 사는가?’라는 물음. 보편적인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사람들은 신학, 철학, 예술 등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탐구해 왔습니다. 여전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답은 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사람들은 여전히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사람이 왜 사는 걸까요?’라는 물음에 ‘풀이 자라는 데,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냥 사는 것이다. 왜 사느냐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보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상용 시인도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왜 사냐 건 웃지요”라며 답이 없는 물음에 웃음으로 대답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태도와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공허함을 느낄 때, 소중한 무엇 혹은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열망하던 것을 얻고 난 후에도 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용도가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노인들에게, 열정은 넘치지만 열정을 쏟아부울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게도 왜 사는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솟아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고민 속에 괴로워하다 끝모를 우울에 빠져 상담가를 찾거나 심한 경우엔 병원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예기치 않게 병에 걸리고 나니 삶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전보다 더 많이 찾아보게 됩니다. 투병하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살면서 저자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어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을 맞게 되는 때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데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살면서 저자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어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을 맞게 되는 때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데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강제 수용소에서 얻은 결론

빅터 프랭클 박사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수감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수감자들은 처음엔 지독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에 대한 혐오와 무감각 상태에 이릅니다. 박사 자신도 옆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것이 일상이 되어 시체를 바라보면서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무뎌지지 않으면 극심한 환경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수용소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버텨내는 수감자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수용소의 체험을 기술했습니다. 지적인 활동을 통해 감수성을 키워왔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들, 수용소 안에서도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사람들 등은 도처에 고통이 만연한 수용소에서도 내면을 지켜나갔다고 저자는 썼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사소한 행복들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니었음은 당연합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상황에 지배당해 이와 같은 사소한 행복들을 느낄 여유는 없었습니다. 대체로 수감자들은 운명에 지배당한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를 기피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며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인간은 주변 환경에 지배당해 아무런 정신적 자유를 갖지 못하는지, 수용소와 같은 환경에서 인간은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인지’ 의문을 품습니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수용소에서도 타인을 위로하거나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음을 확인하면서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고 결론내립니다. 어찌보면 매우 희박한 사례를 가지고 내린 결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상황에만 지배되지는 않는다는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도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본문 인용)

 

이와 같은 결론을 언뜻 보면 사회 구조적인 실패로 인한 개인의 실패를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혹은 의지 없음으로 돌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상황에 놓인 인간이 반드시 상황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인간의 내적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어떻게 찾을까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삶에서 겪게되는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인간의 내적 자율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본문 인용)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접근 방식도 기본적으로 법륜 스님이나 김상용 시인의 태도와 유사합니다. 저자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사랑하는 이,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 로고테라피라는 기법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력을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봤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책임감”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선, 진리, 아름다움 등을 체험, 자연과 문화를 체험,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3)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본문 발췌 인용)

다만 주의할 점은 시련에 대한 관점입니다. 시련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미를 발견하고자 굳이 시련을 겪을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단지 시련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자기 학대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가 관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공허감, 육체적/정신적 고통, 삶의 유용성을 상실한 느낌 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관점으로 인간 존재를 정의합니다. 즉 인간이 ‘고통을 성취로, 죄를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삶을 수 있고, 일시적인 삶에서도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관점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본문 인용)

‘왜 살아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강제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아직 이루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간직하고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 박사의 조언을 따라가 보면 어떨까요? 저자는 우리의 삶을 영화에 비유했습니다. 저도 요즘 겪는 시련을 영화에서 고통스런 한 장면을 지나고 있는 것이겠구나 여겨보려 합니다.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본문인용)

얼마 전까지만해도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르던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별다른 걱정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에 4-5cm정도인 용종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몇 달 뒤 용종을 떼내기 위해 대장내시경을 예약하고 속을 비운 후 병원에 갔습니다. ‘약 들어갑니다’라는 간호사의 말과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잠에서 깬 저를 보며 간호사는 담당의사와 상담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담당의사 앞에 앉았습니다.

담당의사는 걱정스런 얼굴로 이건 그냥 용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99%정도 ‘암’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네??? 매년 건강검진을 해도 지극히 정상이었고, 매일 운동도 하는 내가 암이라구요? 전혀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담당의사는 이왕 이렇게 된거 빨리 수술일정을 잡는게 어떻겠냐 물었습니다. 충격을 받을 겨를도 없이 암 담담의사와 상담 후 수술일정을 잡고 이틑 날 암이 생긴 부위를 잘라냈습니다.

대장암 3기. 다행히 암세포가 다른 장기까지 옮겨가진 않았지만 혈관을 타고 어딘가로 이동한 흔적이 있어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지내고 있습니다. 살면서 이런 중병에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매우 건강한 편이었기에 수술 후 그리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병상에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니, 내가 왜?’였던 것 같습니다.

고통 중에 발견한 위로의 책

뭔가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아파해주고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과는 별개로 스스로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잠시 쉬어야 했기에 의도치 않게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고통을 견디는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위로가 되는 책은 없을까 찾아보다가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나쁜 날들에 필요한 말들>
 

 
말 그대로 ‘나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제게 저자인 앤 라모트는 ‘삶에서 뭔가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고통스러울 때 어디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왜 내가 이런 몹쓸 병에 걸린거지?’라고 묻고 있는 제게 “왜? 라는 질문이 쓸모 있었던 적은 거의 없다”는 저자의 말이 훅 치고 들어왔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할 일을 찾아 열심히 하고, 가능한 한 삶을 즐기고, 버틴다”고 했습니다. 답이 없는 물음을 반복하기 보다는 고통을 버티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자는“우리는 악몽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 일이 끔찍하지 않은 척, 고통스럽지 않은 척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나쁜 일들을 예쁜 희망으로 포장하려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소리없이 찾아온 질병을 견뎌야 하는 제게 고통스러울 땐 충분히 고통스러워해도 된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저와 비슷하게 몸이 아파 고생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몸이 아픈 것보다 더 큰 고통 앞에선?

돌봐주는 가족이 있고, 걱정해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면 몸이 아픈 것은 견딜 만한 고통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만약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고통스러운 사건의 당사자가 된다면? 이런 고통과 상실감 앞에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테러,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을 때를 사례로 들며 살아가는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저자의 물음에 우리 국민들이 겪어 온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최근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가 철거되었다는 소식에 유가족들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사 후 간절히 원했던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우리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또 여전히 고통속에 있을 유가족들에게 ‘잊지않겠습니다’라는 말 말고 내가,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하게 됩니다.

“고통과 마주한 우리 대부분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다. 우리는 커다란 고통과 절망에 빠진 그들을 억지로 일으키려고 하지 않고 그저 그 옆에 앉아 그들이 느끼는 고통을 같이 느낀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자비로운 선물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동반자가 되려면 우리는 ‘해야만 한다고’생각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며, ‘우리’가 고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견딜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그저 견디며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본문 인용)


앤 라모트의 이 말에서 ‘기억’이외에 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합니다. 참사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 사회 구축이라는 운동에 힘을 보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고통의 시간을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유가족들의 고통을 없애줄 수는 없을 것이지만, 마련된 공간 속에서 그 시간을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함께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문득,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을 때

질병, 참사 등을 겪지 않아도 삶이 버거운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의미가 희미해져 버릴 때 한없이 무기력해지곤 합니다. 무엇에서, 어디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할 지 모른 채 그저 하루가 또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음을 앤 라모트는 말합니다.

“선생님들은 우리의 마음이나 존재, 인격을 충만하게 해주는 진실만이 우리를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 대부분이 좋은 성적이나 일자리를 얻으려고, 가장 좋은 대학이나 회사에 들어가려고, 몸무게를 줄이려고 열심히 쳇바퀴만 돌렸던 까닭은 바로 이래서다.”(본문 인용)


인생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묻게 되는 시기를 한번 쯤은 반드시 겪게 될텐데 이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이런 시기를 보내는 이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진짜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조언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앤 라모트는 조금 다른 접근 방법을 제안합니다.

자기 내면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자기만의 슬픔이나 상처에 빠져 세상에서 자기만 불행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들’에 눈을 돌려볼 것을 제안합니다. 나 아닌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보고, 미술, 음악 등 창의적인 활동을 해 보고, 자연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보고, 때로는 달콤한 간식 먹기에 집중해 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존재를 충만하게 해 주는 진실을 '지금 하루'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아이의 웃음, 엄마와 함께 나눈 일상적인 대화,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지난 봄 심었던 씨앗에서 튼 작은 싹. 일상을 스쳐 지나가는 소소한 것들이 때로는 우리를 웃고 울게 한다. 슬픈 날도 주고, 기쁜 날도 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하루가 당신에게 가장 큰 의미다. 의미는 집중하기, 주목하기, 관심 갖기에 있다. (중략) 내가 있는 그 자리, 그 순간에 벌어지는 것들에 마음을 주고 눈길을 주는 것, 그 속에서 나와 함께하는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고 간직하는 것.”(본문 인용)


저 개인적으로는 몸이 아파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내 보고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가 써놓은 이야기들을 통해 어느 정도 끝이 보이는 몸의 고통을 버티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 조금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끊임 없이 일어나는 사회적 참사와 그 당사자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회 구성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들.

‘나쁜 날들’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이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처럼 ‘어떤’ 사람들은 고통의 시간을 지나가는 데 조금의 위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위로를 줄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책은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버티며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이 조금의 위로라도 받을 수 있기를…

쓰기의 감각

작가
앤 라모트
출판
웅진지식하우스
발매
2018.09.17.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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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책 한권 내보는 게 꿈이다.”

동료들과 회식을 하다가 이런 소망을 종종 듣곤 합니다. 하지만 책을 내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했던 분들에게서 책을 냈다는 소식을 아직까지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분들은 막연하게 책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할 뿐 실제로 글을 쓰지 않기(혹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글을 쓴다고 해도 그것이 책이라는 완성된 형태로 나오려면 누군가(편집자)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여기까지 도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꿈은 대부분 회식자리에서의 꿈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한편, 수줍게 책을 건네며 이번에 책을 냈다고 말하는 지인도 있었습니다. 이분은 책을 내는 것을 딱히 꿈꾸지는 않았지만 일기쓰듯 인터넷에 올렸던 글들이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 소망 중 하나인 책 쓰기가 이렇게 이뤄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글쓰기 혹은 책 출판이라는 꿈을 향한 여정의 첫 갈림길은 뭐가 되었든 글을 쓰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단 무엇이라도 써야 꿈을 이룰 가능성이 단 1%라도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노트를 펼치거나 컴퓨터를 앞에 두고 있으면 한없이 막막하기만 하죠.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글쓰기 강좌를 들을 수도 있고 글쓰기 모임에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글쓰기를 가르쳐주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수많은 글쓰기 책들 중에서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겐 글쓰기 기술이나 기법을 알려주는 책들보다는 일단 쓰기 시작할 수 있는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용기를 주는 책이 좋습니다. 이런 면에서 글쓰기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겐 앤 라모트가 쓴 글쓰기 조언집 <쓰기의 감각>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면 뭐가 좋은데요?

저자가 글쓰기와 책, 그리고 작가되기에 대해 쓴 내용들을 읽다보면 글쓰기와 책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됩니다. 앤 라모트는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글을 쓰고 읽다보면 삶에서 탐험할 거리가 많아지고, 자신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관찰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글쓰기와 읽기를 통해 한마디로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이토록 작고 평평하고 딱딱한 사각형 종이에서 수없이 많은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 그 세계들은 때로 당신에게 노래를 불러 주고, 위로와 평안을 주기도 하고, 당신을 흥분시키기도 한다. 책은 우리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가르쳐 준다. 공동체나 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보여 준다. 책은 당신이 실제로 겪어보지 못하는 많은 경험들로 가득 차 있다.”(57쪽)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알려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소소한 체험들이 글로 모여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만으로도 글쓰기는 매력이 있어 보입니다. 다만 글쓰기가 그리고 작가가 되는 것이 마냥 즐겁고 신나는 일만은 아니라는 점을 앤 라모트는 정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본격적으로 글쓰기 조언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지금 당장 훌륭한 작가가 되기를 바라겠지만, 어쩌면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책이 출판될 가능성이나 그것으로 재정적인 안정을 얻을 확률, 마음의 평화나 심지어 기쁨을 얻을 가능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게다가 “아무리 글쓰기에 능숙해지고 책과 이야기와 기사를 많이 발표한 작가가 된다 하더라도, 글 쓰는 일이 그들이 바라는 것을 모두 충족시켜 주지 않을 거”(35쪽)라고.

글쓰기가 인생에 유익한 것은 분명하지만 작가로 사는 삶은 상상하는 것만큼 밝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사실 첫머리부터 유명한 작가의 글쓰기 비법을 기대했던 이들에겐 실망스러울 수 있는 조언이지만 현실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솔직한 말이라서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쓰기 비법

사실 저자가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는 이 책의 원 제목 Bird by Bird에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앤 라모트의 오빠는 새에 관한 보고서를 써야 했는데 마감 하루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오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앤 라모트에겐 인상깊게 남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새 한 마리 한 마리 차근차근 처리하면 돼.”(63쪽)


너무나도 당연한 조언이긴 합니다만 앤 라모트에게 글쓰기는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저자조차 “실제로 내가 무엇이라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말로 조잡한 초고를 쓰는 것뿐이다.”(67쪽)라고 말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글감으로 삼아 엉망인 것 같아보여도 일단 한 번 써 보는 것.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글쓰기 비법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추천하는 사소한 글감에는 학창시절 점심 도시락, 유명 작가들에 대한 질투심, 누군가와의 전화 통화, 만났던 사람, 만남에서 했던 이야기, 반전 있는 대사, 멋진 말 등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내가 듣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15분만에 포기하지 말 것,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받아 적어 볼 것을 앤 라모트는 제안하고 있습니다.

작가들이 글을 쓰고 읽는 이유

글을 쓰려고 할 때 위와 같은 구체적인 조언에 더해 앤 라모트와 같은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들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저자에게 글 혹은 책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선물이었습니다. 암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유방암에 걸려 죽어가는 친구를 위해 책을 썼습니다.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나눠주는 법을 배우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글을 쓰고 나니 성취감이 따라와 또 글을 썼습니다.
 

“작가가 되는 일이 엄청난 만족을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어떤 일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책을 출간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 말이다. 나는 이 사실을 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서 그것이 여전히 거기 있는지 확인한다. 비록 글 쓰는 시간은 대부분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지만, 나는 마음 깊이 비밀스러운 성취감을 품고 산다.”(323쪽)


글을 쓴다는 것. 쉽게, 자연스럽게 되기는 어렵지만 매력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설사 책이라는 완성된 형태로 결과물을 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글을 쓰는 것은 인생에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기에 무엇인가를 쓴다는 건 언제나 깨어 있고 사유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게 하는 사유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글쓰기는 가치가 있습니다.

앤 라모트는 글쓰기를 통해서 인생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글쓰기를 인간에게 풍요와 생기를 줄 수 있는 성직과도 같은 일이라고까지 여깁니다. 게다가 글쓰기는 보다 깊은 읽기의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눈으로 글을 읽기 시작한다는 것은 글쓰기가 주는 또 다른 선물입니다. 삶과 사람, 그리고 세상을 보는데 있어 새로운 ‘눈’ 여러 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읽는 일은 우리의 고독을 덜어 준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깊고 넓게 확장시킨다.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다. 작가들이 예리한 산문과 적확한 진실로 우리의 머리를 흔들어 놓을 때, 나아가 우리 자신이나 인생에 대해 웃음 짓게 만들 때, 우리는 낙천성을 되찾는다. 우리는 인생의 불합리라는 불협화음에 맞춰 춤을 추는 시도를 하거나, 적어도 따라서 손뼉을 친다. 거듭거듭 짓눌리는 대신 말이다. 그것은 바다에서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어올 때 배 위에서 노래를 하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화난 풍랑을 잠재울 수는 없지만, 노래는 배 위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바꿀 수 있다.”(352쪽)


10여 년 전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둔 직장인 이씨. 이씨는 해 뜨기 전 이른 아침 회사로 가는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지난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조금 늦게까지 예능프로를 보느라 부족했던 잠을 통근버스에서 보충합니다. 회사에 도착해 메일을 확인하고, 보고서도 쓰고, 협력사와 회의도 합니다. 바쁜 하루 일정이기는 하지만 업무 중간 중간 동료들과 차도 마시며 잡담할 시간은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야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씨는 법정 노동 시간 안에서만 일하면 됩니다.

한편, 이씨가 출근하고 나서 곧 일어난 아이들은 엄마를 깨웁니다. 이씨의 아내는 두 아이에게 아침밥을 차려 먹이고, 아이들이 학교와 어린이집에 갈 수 있게 준비시킵니다. 초등학생인 첫째 아이가 집을 나서고 나서도 이씨의 아내는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시간까지 놀아줍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와서 설거지, 청소 등을 하고 나면 어느 새 시간은 점심시간에 가까워집니다.

오후에 잠시 숨을 돌릴라 치면 곧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 합니다. 어린이집에서 둘째 아이를 데려와 놀다 보면 초등학교 방과후 학교를 마친 첫째 아이가 집으로 옵니다. 두 아이를 씻기고 있는데 남편 이씨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옵니다. 이씨의 아내는 저녁밥을 차려 두 아이와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합니다. 가사를 분담하기는 하지만 남편이 집에 돌아와도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는 집안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씨 아내의 노동엔 법정 노동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씨는 위와 같은 노동으로 월급을 받아 가정 생활을 유지합니다. 이뿐 아니라 이씨의 활동은 경제활동을 측정하는 GDP산출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출퇴근 시간도 없는 이씨 아내의 노동에는 보수가 주어지지도 경제활동 결과를 산출하는데에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아내의 돌봄 노동으로 이씨가 독립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활동은 국가경제를 말할 때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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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경제학의 큰 결함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경제활동의 상당히 큰 부분을 배제해 왔습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쓴 카트리네 마르살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애덤 스미스로부터 시작된 주류 경제학과 그 기저에 놓인 가정에 큰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며 어머니의 돌봄을 받았음에도 경제를 말할 때 이 부분을 쏙 빼먹었습니다.

“매일 아침 15킬로미터를 걸어가서 식구들에게 필요한 땔깜을 모아 오는 11세 소녀는 국가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총 경제 활동을 측정하는 GDP를 계산할 때 그녀는 포함되지 않는다. 경제 성장에도 중요하지 않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정원을 가꾸고, 형제자매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집에서 기르는 소의 젖을 짜고, 친척들의 옷을 만들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 활동 중 어떤 것도 주류 경제학 모델의 생산 활동에 포함되지 않는다.”(31쪽)


애덤 스미스는 개인들의 자기 이익 추구와 자유시장이 경제를 돌아가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애덤 스미스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자와 상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식사를 차려주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경제학자들도 알고 있지만 단순화와 예측가능성을 위해 외면하는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는 경제학 모델의 가정과 현실에는 없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모델에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인간 모델을 만들기 위해 경제학은 인간에게서 감정, 이타심, 배려, 연대감을 배제하고 인간이 합리적, 이기적이며 환경에서 독립적인 존재라 단순화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니얼 카너먼 등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이지 않고 감정에 지배되는 면이 상당하다는 점을 증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경제학에서의 인간모델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경제학

주류 경제학의 문제는 위와 같은 잘못된 가정만이 아닙니다. 경제학은 성별에 따른 차별을 합리화하는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여성은 ‘내재된 자기희생적 특성’으로 인해 경제적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경제학은 생산성이 낮기에 여성 보수가 낮으며, 출산할 것이기에 고등 교육을 위해 남성만큼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 모델에선 차별마저도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경제학은 감정, 육체, 의존성, 연대감, 자기희생, 부드러움, 자연, 예측불가능성, 수동성, 인간관계 등을 모두 여성의 특징이라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더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집안일에 맞게 태어났다,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효율적인 분업이다, 보수가 없는 집안일의 경험과 지식은 집밖 활동에서 쓸 수 없다는 근거없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얼토당토 않는 주장들 보다는 저자의 이 물음이 보다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잘 돌보는 사람이 더 날카로운 애널리스트가 될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부모 노릇을 하면서 우리는 경제학자, 외교관, 잡역부, 정치가, 요리사, 간호사의 역할을 모두 해내지 않는가?”(64쪽)


최근 수십 년 동안 성차별을 없애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나아져 왔지만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여전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자에 따르면 여성은 일터에서 책임감을 증명하기 위해, 여성의 자리는 집이라는 편견을 없애기 위해 남성보다 더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하는 능력뿐 아니라 가정을 돌보는 능력까지도 여성들은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터에 나선 현대의 여성들은 무거운 등짐을 지고 남성들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되면 모든 것이 충돌한다. 서로 분리돼야 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갑자기 한데 섞인다. 출근할 때 버려두고 온 사적인 자아 곁에 임신한 배까지 두고 나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보수를 받고 일하는 직장에 가정의 흔적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 이상의 그 무엇을.”(100쪽)


다시 고쳐써야 할 경제학

경제적 인간(합리성, 이기적)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한 지 30년도 넘었지만 경제학은 여전히 이 가정을 포기하지 않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사회속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존적 존재이며 이성과 감정을 둘 다 가지고 행동하지만 경제학은 현실의 인간을 여전히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은 저자가 말하듯 현실의 인간 특성을 고스란히 고려해 이론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경제이론은) 인간은 작은 아기로 태어나 쇠약해져서 죽고, 어디 출신이든, 얼마를 벌든, 어디에 살든 상관없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피부를 그으면 살이 베이고 피가 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통점은 육체에서 시작한다. 추우면 몸을 떨고, 달리면 땀을 흘리고, 태어날 때 울고, 아기를 낳을 때 비명을 지른다. 몸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삶과 연결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인간은 몸을 삭제해 버렸다. 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다.”(253쪽)


또한 이 경제적 인간 개념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또 하나의 성별인 여성을 경제학 이론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저자가 강조하듯 경제와 그 중심에 있는 시장을 이해하려면 “인구의 절반이 하루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글 서두에 있는 이씨가 자유롭게 직장을 다닐 수 있는 이유는 하루 종일 돌봄 노동에 시간을 들이는 그의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성평등 관점에서 경제학을 바라보며 역사적으로 공고한 편견 혹은 결함있는 경제학을 다시 구성하자고 제안합니다. 인간의 관계성과 의존성, 공감과 연민/연대, 비합리성, 취약성이 고려되고 왜곡된 남성성/여성성 개념에서 탈피한 인간을 모델로 하는 경제학을 다시 배우고 싶습니다. 카트리네 마르살의 이 책은 페미니즘으로 고쳐쓴 경제학 입문서 사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페미니즘의 관점은 불평등부터 인구 증가, 복지 혜택, 환경, 그리고 노령화 사회가 곧 직면하게 될 돌봄 인력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깊은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이상의 훨씬 큰 문에제 관한 것이다. 현재까지는 페미니즘 혁명의 절반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성들을 더해서 젓는 것까지는 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깨닫고, 그 새로운 세상에 걸맞도록 사회, 경제,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298-299쪽)


길 잃기 안내서

작가
리베카 솔닛
출판
반비
발매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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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고 어느 새 작심삼일을 10번을 할 만큼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올 해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까 고민하는 동안 벌써 한 달이 흘렀습니다. 이제 새해 결심을 목록으로 적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 설날이 지나지 않았고 기해년은 시작되지 않았으니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으며 2019년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 봅니다.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가는 인생여행에서 어떤 길을 걸어볼까 고민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서 걸어온 길을 계속 따라갈 것인지, 중간에 만나는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잠시 멈춰서서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며 생각할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어떤 길로 나아갈지 고민하고 있는 제게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제목의 노랫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길이 거기 있으니까 가는거야.”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거야.”
“그냥 니 갈 길 가. 이 사람 저 사람 이러쿵 저러쿵 뭐라 해도 상관 말고 그냥 니 갈 길 가.”
“이 길이 내 길인지 니 길인지 길이기는 길인지 지름길인지 돌아가는 길인지는 나도 몰라.”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너처럼 아무 것도 몰라.”
-<그건 니 생각이고> 노랫말 발췌 -


살아가는데 내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무엇인가 선택을 해야 할 때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조언을 구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나의 삶을 살아본 것이 아니기에 내 길을 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노랫말을 통해 재확인합니다.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내 길이 된다는 말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 움츠러드는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선택을 해야 할 시기를 맞을 때면 길을 잃고 싶지 않아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는데 이제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생애 마지막 도착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길을 따라가던 그 길을 가는 동안 즐길 수 있다면, 나만의 가치를 발견하며 걸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래서 때론 길을 잃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다 장기하의 노랫말과 함께 리베카 솔닛이 쓴 매력 넘치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길 잃기 안내서>. 어떤 여정에서 길을 잃는 것은 왠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길을 잃을 수 있게 안내하는 책이라니. 단 한번 뿐인 인생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 되는 걸까요? 길을 잃게 되면 그 만큼의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길을 잃는다는 것이 제겐 그리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리베카 솔닛은 위와 같은 제 생각을 뒤집어 놓습니다. 저자는 길을 잃는다는 것을 “미지를 향해 문을 열어두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 문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들이 들어오고, 그 문을 통해 우리들 자신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길을 잃어버림은 원래의 길을 찾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새로운 길을 찾는 계기라며 ‘길 잃기’에 담긴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길을 잃는 것, 그것은 관능적인 투항이고, 자신의 품에서 자신을 잃는 것이고, 세상사를 잊는 것이고, 지금 곁에 있는 것에만 완벽하게 몰입한 나머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희미해지는 것이다. 베냐민의 말을 빌리자면 길을 잃는 것은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고,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불확실성과 미스터리에 머무를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그냥 길을 잃었다(get lost)는 표현 대신 자신을 잃었다(lose oneself)는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에는 이 일이 의식적 선택이라는 사실, 스스로 택한 투항이라는 사실, 지리를 매개로 하여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신 상태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19-20쪽)


저자의 제안에 따라 적극적으로 길을 잃어보면서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스스로를 확장시켜 가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잘 모르는 상황이나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앞에서 종종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게 되는데,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대로 길을 잃어보는 경험을 하게 되면 낯선 것들을 좀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장소가 처음 가보는 장소였기에 길을 잃는 것에 전문이었던 탐험가들처럼 인생을 대하고 싶어졌습니다.

혈기왕성했던 청년기를 지나고 중년에 이르면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안정에의 추구는 어쩌면 영영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가 지평선의 푸름을 바라보며 그 푸름에 취해 그곳까지 다가간다고 해도 지평선의 푸름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어떤 것은 영영 잃어버린 상태일 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멀리 있는 한 우리가 영영 잃지 않는다.”(68쪽)


중년의 초입에 이르고 보니 무엇인가 새로운 곳에 발을 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보다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고 그러다보니 행동은 신중해지는 것을 넘어 머뭇거리게 됩니다. 일상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가능하면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이들어서 실수를 하게 되면 쉽게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 두렵기 때문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이런 제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이는 절대적으로 현재만을 산다. 그러나 그 현재는 드라마와 무모함의 현재,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현재다. (중략) 성인기는 신중한 예상과 철학적 기억으로 이루어지고, 그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느리고 착실하게 길을 찾는다. 하지만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154쪽)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지 어언 한 달이 지나고 있는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 역시 내가 싫어했던 선배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는 시기에 새해 계획 혹은 새해 목표 목록을 적어볼까 생각하다 형식적인 목록보다는 고착화된 혹은 정형화된 삶에서 벗어나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곳으로 발을 내딛어 보자는 결심 하나만을 적었습니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무모했고, 충동적이었던 때. 이런 저런 실수를 반복하며 때론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고, 되돌아가기도 했던 조금 더 어렸던 시절. 이리저리 길을 찾아보며 미지의 영역으로 탐험하듯 살았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좌충우돌하며 나만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리베카 솔닛이라는 길 잃기 안내자를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는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던 제 인생에 다시 물고를 터준 책이 될 것 같습니다.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아가야 할 길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물길을 내지 못하고 그냥 땅속으로 사라지게 될까봐 두려워서 새로운 길을 내지 않고 고여있으려는 중년에 진입한 저는 다시금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선원에서 설법 시간에 저자가 참석해 들었던 초콜릿을 팔던 맹인의 일화에 인용된 ‘알아차림’ 수련이 기억에 남습니다. 적극적으로 길을 잃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정신의 회복성이라고 부를 만한 능력,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기꺼이 맞을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데 제격인 훈련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내 삶을 진지하게 따져본다면, 오늘 오후 내게 벌어질 일을 미리 알 순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 일을 너끈히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철석같이 자신할 순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중략) 정말로 나는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없죠. 하지만 모르면 몰라도, 높은 확률로, 오늘 오후는 보통의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중략)

하지만 우리가 알아차림을 실천하다 보면, 일상에 존재한다고 여기고 싶은 그 합리성 아래 깔린 것이 드러나면서 꽤 흥미로운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대화, 자신의 머릿속을 흐르는 이야기들과 마음 속을 흐르는 감정들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영역에서는 세상이 그다지 질서 정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아가 안전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다 보니 지난 수백, 수천 년 이어져온 알아차림 수련에서 사람들은 늘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음 어떻게 하면 이 과정에서 펼쳐질지도 모르는 것들에 지나치게 겁먹지 않고 그렇다고 무사안일하게 회피하지도 않으면서 알아차림을 실천할 수 있을까?”(275-6쪽)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작가
슈테판 클라인
출판
뜨인돌출판사
발매
2017.06.19.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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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2월이 되면 머리속에서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라는 알람이 울립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연초 새해 목표 목록을 아주 오랜만에 들춰보며 지나온 한 해의 성과를 가늠해 봅니다. ‘음, 이 정도면 잘 살았군’하고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하지만 어떤 항목에선 ‘이걸 내가 썼나?’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그리곤 생각합니다. ‘와, 진짜 시간이 빨리 지나갔네. 왜 이렇게 1년이 짧지?’ 연말연초엔 ‘시간’ 이야기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갈까?”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는걸까?”
“왜 이렇게 시간이 부족할까?”


아마도 다들 위와 같은 질문을 해 보셨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커집니다. 게다가 왜 항상 시간은 부족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궁금증에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시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책이 있습니다. 슈테판 클라인이 쓴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를 보면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경험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간을 더 신중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 조언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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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붙잡기 위해선 내면의 시간을 이해해야

저자는 시계가 돌아가는 시간과 내가 경험하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시간에 대한 느낌은 외부의 시간과 인간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현상이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을 잘 다스리려면 내면의 시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내면의 시간을 잘 다룰 줄 알게 되면 하루 24시간을 더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다고 저자는 쓰고 있습니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두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매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귀중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하여 삶의 속도는 가끔 우리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빨라진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스스로 시간에 대한 느낌을 조절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쫓기는 기분이나 평온한 마음도, 과거를 회상하며 느끼는 풍요로움이나 공허함도 외부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10쪽)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여러 편리한 도구들의 도움으로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여유시간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대인들은 왠지 항상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참으로 매력적인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루하루를 ‘맞춤복’처럼 이용할 수 있는데 ‘기성복’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딸깍딸깍 흘러가는 시계의 시간은 동일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충분히 조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즉,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불쾌한 순간은 지독히도 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간을 연장시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주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간 감각이 달라진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면 시간이 지나는 것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계속 의식하면 몇 초도 길게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경험상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주의 집중 훈련으로 풍요를!

시간의 흐름을 조종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입니다. 우리가 지루할 때 다른 데 주의를 돌려 시간을 짧게 느끼는 경우를 경험하기는 하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연장시키는 기술은 좀처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기술을 터득해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해진 하루 더욱 풍성하게 누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년 12월에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자는 주의집중 혹은 몰입 훈련을 통해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단순한 예로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잡지를 볼 때 평소 보지 않던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살펴보거나, 그림을 볼 때 아주 작은 부분들에까지 관심을 두고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자가 지각훈련이라고 말하는 이 훈련을 통해 우리는 ‘지금’에서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감각적 인상들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시간은 더 풍요롭고 길게 느껴진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활기찬 대화를 나누었던 1시간은 멍하니 몽상에 잠겼던 1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질 것이다. 시간에 더 많은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우리는 인생을 더욱 길게 느낄 수 있다.(중략) 온전한 현재에 사는 사람은 인생을 구성하는 순간들을 더 자세히 지각할 뿐 아니라 그런 순간들을 만끽할 수 있다.”(108, 109쪽)


나이와 비례하는 시간의 속도를 늦추려면

글의 서두에 던진 질문 중 나이가 먹을 수록 시간이 왜 빨리 흐르는지도 저자는 설명합니다. 우리는 정보의 양을 가지고 시간을 느끼는데, 새로운 것 혹은 변화를 많이 경험할수록 시간을 길게 느끼게 됩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젊을 때 새로운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어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경험은 평범해져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 같아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날아가는 듯한 시간을 붙잡고 싶으신가요? 언제든 풍성한 기억을 소환할 수 있도록 체험한 것을 메모하거나 사진으로 남기면 좋다고 합니다. 또 두뇌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노년의 시간을 연장하고 싶은 분들은 “습관을 바꾸거나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고 우리의 시간감각을 새롭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항상 부족한 시간, ‘시간을 발견’해 채우다

현대인들은 거의 무한정으로 몰려오는 감각적 자극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향유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많은 자극들에 주의를 계속 분산시킬 것인지, 아니면 향유할 수 있는 자극 몇 가지를 선택하든지.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일정표에 빈 공간이 없도록 시간을 빽빽하게 채우곤 합니다. 저자가 지적하듯 시간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는 경우 분주함과 공허감을 오가게 됩니다.

저자는 집중력 부족, 스트레스, 의욕부진 때문에 사람들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제대로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도 했습니다. 이 세가지 원인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앞서 말한 ‘집중력 훈련’, ‘자신의 통제 하에 놓이는 시간 마련’, ‘적당한 동기부여와 선택’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매일 바쁘다. 우리는 어떤 일을 진정으로 만끽하기 위해 다른 일을 의식적으로 팽개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일깨운다. (중략) 그리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느끼는 기쁨보다는 시간이 부족하여 하지 못하고 남겨두는 일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 것이다.”(218-9쪽)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풍요로운 인생을 위해 ‘시간을 발견’하는 6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저는 이 여섯 가지 방법을 ‘지금’부터 연습해 보려고 합니다. 이 방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함께 책을 열어보시죠. 흐르는 시간을 잡아둘 수는 없겠지만 이전처럼 시간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시간의 강에 나룻배를 띄워 여행하듯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걸크러시 세트

작가
페넬로프 바지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8.09.20.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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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노벨위원회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발표했을 때 온 세계가 놀라워했습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에 55년만에 여성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물리학상은 1901년부터 2018년까지 112번 수여되었는데 그 중에 여성은 몇 명이었을까요? 네, 2018년을 포함해 단 세 명이었습니다. 이는 물리학상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닙니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688명 중 여성은 단 21명 뿐입니다.

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의 10%정도라고는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성별비율은 과학분야 종사자의 성비에 훨씬 못미칩니다. 왜 그럴까요?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노벨상을 탈 만큼 뛰어나지 않아서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코펜하게 대학 Liselotte Jauffred 교수와 동료들은 성별에 따라 노출되는 환경이 노벨상수상자 성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했습니다.(Gender bias in Nobel Prizes)

Liselotte Jauffred 교수팀은 여성연구자들이 그들의 경력상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까지 많은 편견과 장애를 뚫어야 한다는 점이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의 사례로 결혼이나 육아는 남성연구자들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여성연구자들에게는 경력상의 장애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노벨상 수상자의 성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저자들인 케르스틴 뤼커와 우테 댄셸도 지적했듯이 세계사 속에서 여성들은 비범한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일부 사람들이 성평등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에 이르기까지도 성별이라는 거대한 벽이 여성들을 막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왔습니다. ‘여자가 왜 이렇게 힘이 세?’, ‘여자가 무슨 과학자가 되려고 해?’, ‘여자가 무슨 의사가 되겠다고’, ‘여자는 간호사나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하는거지’…마치 선천적으로 여성에게만 마땅한 일이 있는 것 같은 편견은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증명한 여성들이 여기 있습니다.
 

  
페넬로프 바지외라는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했던 대표적인 여자들 30명에 대한 이야기를 <르몽드> 공식 블로그에 연재했습니다.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린 이 연재물을 모아 저자는 <걸크러시 1, 2>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냈던 여자들의 삶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산부인과 의사부터 아파치 부족의 전사, 최초의 여성용 수영복을 고안한 수영선수, 무민 시리즈의 창조자, 무용가이자 레지스탕스 활동가, 등대지기, 황제에 이르기까지…세상의 편견을 깨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당당히 걸어나간, 시대도 문화도 다양한 여성 15인의 호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걸크러시 1 소개글)

“래퍼, 우주비행사, 탐사보도의 창시자, 동물의 대변인, 육상 선수, 화산학자, 싱어송라이터, 페미니스트 활동가, 과학수사의 선구자, 록 스타까지…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당시 사회의 규범에 맞서 싸우고 스스로 인생의 새로운 막을 훌륭하게 열어젖힌 여성 15인의 호쾌하고 감동적인 삶의 초상!”(걸크러시 2 소개글)


이들 중 ‘무서움’이 전공인 배우 마거릿 해밀턴(1902~1985)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 배우라고 하면 예쁜 외모가 주된 경쟁력이었으나 마거릿은 자신의 장점인 무서운 외모를 내세워 배역을 따냈습니다. 마거릿은 1938년 오즈의 마법사에서 불의의 화재 사고에도 불구하고 마녀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하지만 마녀가 너무 심하게 무서워서 마거릿의 촬영분 절반 정도는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마거릿은 무섭게 하는 걸로는 최고라는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코를 고치라는 충고에 “왜? 내 코가 얼마나 훌륭한데! 미쳤나봐 그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존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책에는 해당 인물에 대한 주된 사건 혹은 에피소드가 너무 짧게 압축되어 있어 감질맛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소개한 인물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게도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등대지기로 소개된 조르지나 안출라타(1908~2001)에게도 눈길이 갔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을 갖는 것이 꿈이었던 조르지나는 미국 롱아일랜드 해안 절벽에 집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해안은 해를 거듭할수록 계속 침식되어 그녀의 집까지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조르지나는 포기하지 않고 갈대와 모래주머니를 이용해 배수 시스템을 만들어 해안절벽의 침식을 막아냈습니다.

그 때 롱아일랜드에 있던 등대 하나도 동일한 위험에 처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등대를 지키고 싶어했으나 관할단체에선 예산 등의 이유로 등대 폐쇄를 결정합니다. 그 때 조르지나가 나서 자신의 집에 적용했던 배수시스템을 등대에도 만듭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요. 마을의 상징을 지켜내고자 했던 조르지나와 그 동료들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 또한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이 책에는 대여섯 페이지로 아주 간략하게 소개된 인물의 더 깊은 삶을 찾아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엘리자베스 코크런(핑키,1864~1922)입니다. 핑키는 홀어머니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직업전선에 나섰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15세에 초등학교 교원 양성학교에 입학하지만 학비가 없어 퇴학당하고 맙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핑키는 ‘여자들은 이럴 때 쓸모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고 분노에 차 해당 기사를 쓴 논설위원에게 편지를 씁니다.
 

“기사: 여자의 자리는 집이다. 여자가 바느질이나 아이 돌보기를 등한시하면 사회는 무너진다. 직업이 있는 여자란 괴상망측하다.”

“핑키가 논설위원에게 : 당신이 모르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전하자면, 그 세상에서는 여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답니다.”(68쪽)


이를 계기로 핑키는 기자가 되고(필명을 넬리 블라이로 함) 여성 노동자들의 빈곤, 이혼을 원하는 여성이 거쳐야 하는 지난한 투쟁, 공장의 근로조건 등을 기사로 썼습니다. 넬리의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해당 기업들은 신문에서 광고를 빼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결국 넬리는 해당 신문사를 나와 당시 조지프 퓰리처가 이끌던 ‘뉴욕 월드’에 지원합니다. 넬리는 정신병원을 취재하라는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23세에 ‘뉴욕 월드’ 기자가 됩니다.
 

“넬리 표 기사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우선 사회의 치부를 들추는 취재 대상 선택. 예를 들자면 로비, 빈곤층 의료 실태, 수감자 확대…하지만 더 중요한 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당시 수감자, 극빈자, 파업 노동자 등의 편에 서서 사건을 전하는 기자는 넬리가 유일했다.”(71쪽)


넬리는 세계일주를 하며 기사와 책을 쓰기도 하고, 결혼한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아 큰 성공을 거둬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던 건강보험, 높은 급여, 도서관 등을 제공하는 근로환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참을 수 없는 기자 근성으로 오스트리아로 떠나 종군기자로 전쟁의 참상을 보도했습니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사회 부정부패, 노동자의 삶, 고아들의 인권, 각종 부조리’ 등을 지적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녀가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은 탐사보도의 창시자인 넬리에게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자”라는 이름을 부여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뉴욕 기자협회는 그녀를 기려 ‘넬리 블라이’상을 만들고 훌륭한 성과를 내는 젊은 기자에게 매년 상을 수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위에 아직도 ‘여자가 무슨~’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그들 눈 앞에 이 책 두 권을 들이밀면 되겠습니다. 저자는 단 30명의 인물만 짧은 이야기로 압축해서 소개했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찾아갔던 여자들에 대한 입문서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각 주인공들, 그리고 그들 곁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삶을 더 깊이 있게 찾아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전태일평전

작가
조영래
출판
돌베개
발매
2001.09.01.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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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대한민국은 이 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날은 청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짧은 22년의 생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기일이 돌아와서 지난 달 전태일 열사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최저임금, 탄력근로제, 주당 노동시간, 청년 일자리, 광주형 일자리 등 노동관련 이슈들을 접하면서도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노동 운동사에 상징적 인물이 된 전태일 열사의 사상과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의 삶을 열정적으로 전해준 <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을 통해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죽어가면서도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당연한 권리를 찾아주고 싶었던 청년 전태일의 마지막 부탁은 그의 죽음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1970년 vs 2018년

지금 우리 나라 어느 노동현장도 전태일 열사가 일하던 1960년대 평화시장의 상황만큼 열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밀폐된 닭장’ 같은 작업장에서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을 일하는 십대 여공들. 한 달 휴일은 기껏해야 이틀. 그렇게 일해봐야 일터로 오는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턱없이 낮은 임금. 일하는 기간이 늘어갈수록 얻게 되는 것은 직업병으로 인해 병들어가는 몸.

‘괜찮은 일자리가 없네’, ‘청년 실업률이 높네’, ‘비정규직이 늘어가네’ 하는 등의 이슈들을 보며 노동자들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딱 전태일 열사의 세대인 부모님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로 살아오신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 세대가 겪은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요즘 세대가 물러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전 세대들 말처럼 물론 절대적인 노동환경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끊이지 않고 늘어만 가는 외주화와 효율추구로 인한 노동자들의 죽음 소식, 커져만 가는 정규/비정규직 임금격차, 법으로 강제하려고 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장시간 노동 문제 등을 생각하면 여전히 우리 사회 노동환경은 생각보다 많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전태일 열사가 법을 준수하라며 외쳤던 당시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4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법정 1일 노동시간은 8시간입니다. 물론 주5일 근무, 최근의 주당노동시간 제한 등 노동시간 줄이기에 진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법의 실효성, 연간 노동시간 등을 고려하면 1일 8시간 노동은 일부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꿈과 같은 일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노동 문제가 단칼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노동자, 기업, 정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랜 시간 논의를 지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과거 독재 및 권위주의 정부들, 그리고 기업들은 그렇다쳐도 촛불 시민의 지원으로 권력을 위임 받은 현재 정부에서조차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이달 초 현 정부의 지지부진한 개혁과 후퇴하는 노동제도 등을 규탄하는 민중대회가 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민심의 실망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태일 열사도 이와 흡사한 실망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각성하게 된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사람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는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한마디도 못하고 살아왔던 자신과 당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보회 회원들 몇몇과 함께 전태일 열사는 당시 노동현장 실태 조사를 벌입니다. 설문 응답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근로기준법 준수여부를 감독하는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노동현장을 감독해야 하는 공무원의 반응은 냉랭했고 그를 내쫓다시피 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전태일 열사는 노동청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평화시장 노동조건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노동자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정부기관이 오히려 기업주의 편에 서 있는 답답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기업들을 관리해야 할 정부기관은 오히려 기업과 결탁하여 기업의 편에 서 있는 절망적 현실에 전태일 열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투쟁밖에 없었습니다. 2018년의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촛불을 들었던 노동자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면 촛불 정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언론들이 툭하면 왜곡하는 고임금 노동자들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로만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경험했던 좌절을 2018년의 노동자들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광주형 일자리’와 전태일이 꿈꿨던 모범업체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전태일 열사였지만 노동현장을 경험하면서 투쟁과 더불어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이름하여 모범업체.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직원들을 인간답게 대우하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구상하며 사업계획서를 썼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노트 30페이지에 걸쳐 필요한 설비, 가격, 인원, 인건비, 생산제품 종류와 판매 방법 등을 상세하게 담은 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사업계획은 당시로선 혁명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전태일 열사 본인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목적과 취지는 훌륭하지만 이를 위해 자본을 대줄 만한 투자자를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업계획서에 담긴 정신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목적>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226쪽)


전태일 열사가 쓴 모범업체 사업계획서에 있는 업체 설립 목적을 읽으면서 최근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이슈가 떠올랐습니다. ‘광주형 일자리’는 새로운 노동시장 혹은 기업에 대한 구상입니다. 노동자, 기업, 정부(지방자치 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 노동자는 일할 만하고 기업가는 투자할 만한 기업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노동자의 임금 부문의 양보 등 다양한 사회적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사IN 2018년 12월 11자 기사(우리시대의 질문 ‘광주형 일자리’)에서도 지적했듯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정권 변화에 따른 일자리의 지속성, 경영 책임, 생산 제품의 종류, 연봉 문제, 하청 구조 개혁의 비현실성, 헌법상 보장된 노동권 제한 등 문제가 될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기존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을 설득할 만한 당위성이 있느냐에서도 부족해 보입니다.

정부입장에선 신속하게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다고 성과를 알리고 싶을 것입니다. 기존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 임금수준 등 앞으로 일어나게 될 갈등에 불안하기에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정부, 모델 기업에 투자할 기업, 기존 산업에 속한 노동자들, 그리고 새로운 노동구조에 뒤따를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전태일 열사의 모범업체 설립 목적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전태일 사상을 되새길 때

<전태일 평전>에는 그의 불우했던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죽음까지가 영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사, 배움에의 열망, 노동현장에서의 경험 등을 접하고나니 전태일 열사의 인간적인 모습이 깊게 다가옵니다. 험난한 노동환경에서 당연하게 강렬한 노동투사가 될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해 준 평전을 통해 그가 왜 그렇게 투쟁할 수 밖에 없었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태일 열사가 가장 밑바닥의 삶을 체험하면서 얻은 인간과 인간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 “나의 또 다른 나”라는 타인에 대한 인식,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노예의식에서 벗어나 주체적 인간으로서 바로 서는 각성, 다른 이들까지도 주체성을 가지도록 함께 이끄는 연대행동의 사상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마주했던 진정한 적은 기업주도 아니었고 정부 기관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나와 있듯이 전태일 열사가 싸워야 했던 대상은 “억압하는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와 힘”이었습니다. 자신이 본 인간과 사회의 모순, 그것을 가져오게 한 억압적 구조와 그 파괴적 영향을 전태일 열사는 폭로하고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 시대 노동절 행사 때도 떠들어대던 “이 나라 경제성장은 묵묵히 땀흘려 일하는 산업 전사들의 헌신의 덕분”이라는 말. 너무나도 익숙해서 진리같이 여겨지는 이 말. 우리 사회는 어쩌면 경제성장 우선이라는 미신을 붙들고 여전히 다른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부, 국회, 노동자, 기업가 등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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