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둔 직장인 이씨. 이씨는 해 뜨기 전 이른 아침 회사로 가는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지난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조금 늦게까지 예능프로를 보느라 부족했던 잠을 통근버스에서 보충합니다. 회사에 도착해 메일을 확인하고, 보고서도 쓰고, 협력사와 회의도 합니다. 바쁜 하루 일정이기는 하지만 업무 중간 중간 동료들과 차도 마시며 잡담할 시간은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야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씨는 법정 노동 시간 안에서만 일하면 됩니다.

한편, 이씨가 출근하고 나서 곧 일어난 아이들은 엄마를 깨웁니다. 이씨의 아내는 두 아이에게 아침밥을 차려 먹이고, 아이들이 학교와 어린이집에 갈 수 있게 준비시킵니다. 초등학생인 첫째 아이가 집을 나서고 나서도 이씨의 아내는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시간까지 놀아줍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와서 설거지, 청소 등을 하고 나면 어느 새 시간은 점심시간에 가까워집니다.

오후에 잠시 숨을 돌릴라 치면 곧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 합니다. 어린이집에서 둘째 아이를 데려와 놀다 보면 초등학교 방과후 학교를 마친 첫째 아이가 집으로 옵니다. 두 아이를 씻기고 있는데 남편 이씨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옵니다. 이씨의 아내는 저녁밥을 차려 두 아이와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합니다. 가사를 분담하기는 하지만 남편이 집에 돌아와도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는 집안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씨 아내의 노동엔 법정 노동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씨는 위와 같은 노동으로 월급을 받아 가정 생활을 유지합니다. 이뿐 아니라 이씨의 활동은 경제활동을 측정하는 GDP산출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출퇴근 시간도 없는 이씨 아내의 노동에는 보수가 주어지지도 경제활동 결과를 산출하는데에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아내의 돌봄 노동으로 이씨가 독립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활동은 국가경제를 말할 때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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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경제학의 큰 결함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경제활동의 상당히 큰 부분을 배제해 왔습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쓴 카트리네 마르살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애덤 스미스로부터 시작된 주류 경제학과 그 기저에 놓인 가정에 큰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며 어머니의 돌봄을 받았음에도 경제를 말할 때 이 부분을 쏙 빼먹었습니다.

“매일 아침 15킬로미터를 걸어가서 식구들에게 필요한 땔깜을 모아 오는 11세 소녀는 국가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총 경제 활동을 측정하는 GDP를 계산할 때 그녀는 포함되지 않는다. 경제 성장에도 중요하지 않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정원을 가꾸고, 형제자매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집에서 기르는 소의 젖을 짜고, 친척들의 옷을 만들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 활동 중 어떤 것도 주류 경제학 모델의 생산 활동에 포함되지 않는다.”(31쪽)


애덤 스미스는 개인들의 자기 이익 추구와 자유시장이 경제를 돌아가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애덤 스미스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자와 상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식사를 차려주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경제학자들도 알고 있지만 단순화와 예측가능성을 위해 외면하는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는 경제학 모델의 가정과 현실에는 없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모델에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인간 모델을 만들기 위해 경제학은 인간에게서 감정, 이타심, 배려, 연대감을 배제하고 인간이 합리적, 이기적이며 환경에서 독립적인 존재라 단순화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니얼 카너먼 등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이지 않고 감정에 지배되는 면이 상당하다는 점을 증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경제학에서의 인간모델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경제학

주류 경제학의 문제는 위와 같은 잘못된 가정만이 아닙니다. 경제학은 성별에 따른 차별을 합리화하는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여성은 ‘내재된 자기희생적 특성’으로 인해 경제적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경제학은 생산성이 낮기에 여성 보수가 낮으며, 출산할 것이기에 고등 교육을 위해 남성만큼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 모델에선 차별마저도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경제학은 감정, 육체, 의존성, 연대감, 자기희생, 부드러움, 자연, 예측불가능성, 수동성, 인간관계 등을 모두 여성의 특징이라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더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집안일에 맞게 태어났다,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효율적인 분업이다, 보수가 없는 집안일의 경험과 지식은 집밖 활동에서 쓸 수 없다는 근거없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얼토당토 않는 주장들 보다는 저자의 이 물음이 보다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잘 돌보는 사람이 더 날카로운 애널리스트가 될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부모 노릇을 하면서 우리는 경제학자, 외교관, 잡역부, 정치가, 요리사, 간호사의 역할을 모두 해내지 않는가?”(64쪽)


최근 수십 년 동안 성차별을 없애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나아져 왔지만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여전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자에 따르면 여성은 일터에서 책임감을 증명하기 위해, 여성의 자리는 집이라는 편견을 없애기 위해 남성보다 더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하는 능력뿐 아니라 가정을 돌보는 능력까지도 여성들은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터에 나선 현대의 여성들은 무거운 등짐을 지고 남성들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되면 모든 것이 충돌한다. 서로 분리돼야 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갑자기 한데 섞인다. 출근할 때 버려두고 온 사적인 자아 곁에 임신한 배까지 두고 나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보수를 받고 일하는 직장에 가정의 흔적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 이상의 그 무엇을.”(100쪽)


다시 고쳐써야 할 경제학

경제적 인간(합리성, 이기적)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한 지 30년도 넘었지만 경제학은 여전히 이 가정을 포기하지 않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사회속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존적 존재이며 이성과 감정을 둘 다 가지고 행동하지만 경제학은 현실의 인간을 여전히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은 저자가 말하듯 현실의 인간 특성을 고스란히 고려해 이론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경제이론은) 인간은 작은 아기로 태어나 쇠약해져서 죽고, 어디 출신이든, 얼마를 벌든, 어디에 살든 상관없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피부를 그으면 살이 베이고 피가 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통점은 육체에서 시작한다. 추우면 몸을 떨고, 달리면 땀을 흘리고, 태어날 때 울고, 아기를 낳을 때 비명을 지른다. 몸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삶과 연결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인간은 몸을 삭제해 버렸다. 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다.”(253쪽)


또한 이 경제적 인간 개념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또 하나의 성별인 여성을 경제학 이론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저자가 강조하듯 경제와 그 중심에 있는 시장을 이해하려면 “인구의 절반이 하루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글 서두에 있는 이씨가 자유롭게 직장을 다닐 수 있는 이유는 하루 종일 돌봄 노동에 시간을 들이는 그의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성평등 관점에서 경제학을 바라보며 역사적으로 공고한 편견 혹은 결함있는 경제학을 다시 구성하자고 제안합니다. 인간의 관계성과 의존성, 공감과 연민/연대, 비합리성, 취약성이 고려되고 왜곡된 남성성/여성성 개념에서 탈피한 인간을 모델로 하는 경제학을 다시 배우고 싶습니다. 카트리네 마르살의 이 책은 페미니즘으로 고쳐쓴 경제학 입문서 사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페미니즘의 관점은 불평등부터 인구 증가, 복지 혜택, 환경, 그리고 노령화 사회가 곧 직면하게 될 돌봄 인력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깊은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이상의 훨씬 큰 문에제 관한 것이다. 현재까지는 페미니즘 혁명의 절반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성들을 더해서 젓는 것까지는 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깨닫고, 그 새로운 세상에 걸맞도록 사회, 경제,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298-299쪽)


길 잃기 안내서

작가
리베카 솔닛
출판
반비
발매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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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고 어느 새 작심삼일을 10번을 할 만큼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올 해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까 고민하는 동안 벌써 한 달이 흘렀습니다. 이제 새해 결심을 목록으로 적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 설날이 지나지 않았고 기해년은 시작되지 않았으니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으며 2019년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 봅니다.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가는 인생여행에서 어떤 길을 걸어볼까 고민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서 걸어온 길을 계속 따라갈 것인지, 중간에 만나는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잠시 멈춰서서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며 생각할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어떤 길로 나아갈지 고민하고 있는 제게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제목의 노랫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길이 거기 있으니까 가는거야.”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거야.”
“그냥 니 갈 길 가. 이 사람 저 사람 이러쿵 저러쿵 뭐라 해도 상관 말고 그냥 니 갈 길 가.”
“이 길이 내 길인지 니 길인지 길이기는 길인지 지름길인지 돌아가는 길인지는 나도 몰라.”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너처럼 아무 것도 몰라.”
-<그건 니 생각이고> 노랫말 발췌 -


살아가는데 내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무엇인가 선택을 해야 할 때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조언을 구하게 되는데 그들 역시 나의 삶을 살아본 것이 아니기에 내 길을 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노랫말을 통해 재확인합니다.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내 길이 된다는 말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 움츠러드는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선택을 해야 할 시기를 맞을 때면 길을 잃고 싶지 않아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는데 이제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생애 마지막 도착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길을 따라가던 그 길을 가는 동안 즐길 수 있다면, 나만의 가치를 발견하며 걸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래서 때론 길을 잃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다 장기하의 노랫말과 함께 리베카 솔닛이 쓴 매력 넘치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길 잃기 안내서>. 어떤 여정에서 길을 잃는 것은 왠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길을 잃을 수 있게 안내하는 책이라니. 단 한번 뿐인 인생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 되는 걸까요? 길을 잃게 되면 그 만큼의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길을 잃는다는 것이 제겐 그리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리베카 솔닛은 위와 같은 제 생각을 뒤집어 놓습니다. 저자는 길을 잃는다는 것을 “미지를 향해 문을 열어두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 문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들이 들어오고, 그 문을 통해 우리들 자신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길을 잃어버림은 원래의 길을 찾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새로운 길을 찾는 계기라며 ‘길 잃기’에 담긴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길을 잃는 것, 그것은 관능적인 투항이고, 자신의 품에서 자신을 잃는 것이고, 세상사를 잊는 것이고, 지금 곁에 있는 것에만 완벽하게 몰입한 나머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희미해지는 것이다. 베냐민의 말을 빌리자면 길을 잃는 것은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고,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불확실성과 미스터리에 머무를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그냥 길을 잃었다(get lost)는 표현 대신 자신을 잃었다(lose oneself)는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에는 이 일이 의식적 선택이라는 사실, 스스로 택한 투항이라는 사실, 지리를 매개로 하여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신 상태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19-20쪽)


저자의 제안에 따라 적극적으로 길을 잃어보면서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스스로를 확장시켜 가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잘 모르는 상황이나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앞에서 종종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게 되는데,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대로 길을 잃어보는 경험을 하게 되면 낯선 것들을 좀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장소가 처음 가보는 장소였기에 길을 잃는 것에 전문이었던 탐험가들처럼 인생을 대하고 싶어졌습니다.

혈기왕성했던 청년기를 지나고 중년에 이르면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안정에의 추구는 어쩌면 영영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가 지평선의 푸름을 바라보며 그 푸름에 취해 그곳까지 다가간다고 해도 지평선의 푸름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어떤 것은 영영 잃어버린 상태일 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멀리 있는 한 우리가 영영 잃지 않는다.”(68쪽)


중년의 초입에 이르고 보니 무엇인가 새로운 곳에 발을 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보다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고 그러다보니 행동은 신중해지는 것을 넘어 머뭇거리게 됩니다. 일상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가능하면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이들어서 실수를 하게 되면 쉽게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 두렵기 때문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이런 제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이는 절대적으로 현재만을 산다. 그러나 그 현재는 드라마와 무모함의 현재,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현재다. (중략) 성인기는 신중한 예상과 철학적 기억으로 이루어지고, 그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느리고 착실하게 길을 찾는다. 하지만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154쪽)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지 어언 한 달이 지나고 있는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 역시 내가 싫어했던 선배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는 시기에 새해 계획 혹은 새해 목표 목록을 적어볼까 생각하다 형식적인 목록보다는 고착화된 혹은 정형화된 삶에서 벗어나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곳으로 발을 내딛어 보자는 결심 하나만을 적었습니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무모했고, 충동적이었던 때. 이런 저런 실수를 반복하며 때론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고, 되돌아가기도 했던 조금 더 어렸던 시절. 이리저리 길을 찾아보며 미지의 영역으로 탐험하듯 살았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좌충우돌하며 나만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리베카 솔닛이라는 길 잃기 안내자를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는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던 제 인생에 다시 물고를 터준 책이 될 것 같습니다.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아가야 할 길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물길을 내지 못하고 그냥 땅속으로 사라지게 될까봐 두려워서 새로운 길을 내지 않고 고여있으려는 중년에 진입한 저는 다시금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선원에서 설법 시간에 저자가 참석해 들었던 초콜릿을 팔던 맹인의 일화에 인용된 ‘알아차림’ 수련이 기억에 남습니다. 적극적으로 길을 잃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정신의 회복성이라고 부를 만한 능력,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기꺼이 맞을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데 제격인 훈련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내 삶을 진지하게 따져본다면, 오늘 오후 내게 벌어질 일을 미리 알 순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 일을 너끈히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철석같이 자신할 순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중략) 정말로 나는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없죠. 하지만 모르면 몰라도, 높은 확률로, 오늘 오후는 보통의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중략)

하지만 우리가 알아차림을 실천하다 보면, 일상에 존재한다고 여기고 싶은 그 합리성 아래 깔린 것이 드러나면서 꽤 흥미로운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대화, 자신의 머릿속을 흐르는 이야기들과 마음 속을 흐르는 감정들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영역에서는 세상이 그다지 질서 정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아가 안전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다 보니 지난 수백, 수천 년 이어져온 알아차림 수련에서 사람들은 늘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음 어떻게 하면 이 과정에서 펼쳐질지도 모르는 것들에 지나치게 겁먹지 않고 그렇다고 무사안일하게 회피하지도 않으면서 알아차림을 실천할 수 있을까?”(275-6쪽)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

작가
슈테판 클라인
출판
뜨인돌출판사
발매
2017.06.19.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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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2월이 되면 머리속에서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라는 알람이 울립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연초 새해 목표 목록을 아주 오랜만에 들춰보며 지나온 한 해의 성과를 가늠해 봅니다. ‘음, 이 정도면 잘 살았군’하고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하지만 어떤 항목에선 ‘이걸 내가 썼나?’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그리곤 생각합니다. ‘와, 진짜 시간이 빨리 지나갔네. 왜 이렇게 1년이 짧지?’ 연말연초엔 ‘시간’ 이야기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갈까?”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는걸까?”
“왜 이렇게 시간이 부족할까?”


아마도 다들 위와 같은 질문을 해 보셨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커집니다. 게다가 왜 항상 시간은 부족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궁금증에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시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책이 있습니다. 슈테판 클라인이 쓴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를 보면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경험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간을 더 신중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 조언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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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붙잡기 위해선 내면의 시간을 이해해야

저자는 시계가 돌아가는 시간과 내가 경험하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시간에 대한 느낌은 외부의 시간과 인간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현상이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을 잘 다스리려면 내면의 시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내면의 시간을 잘 다룰 줄 알게 되면 하루 24시간을 더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다고 저자는 쓰고 있습니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두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매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귀중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하여 삶의 속도는 가끔 우리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빨라진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스스로 시간에 대한 느낌을 조절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쫓기는 기분이나 평온한 마음도, 과거를 회상하며 느끼는 풍요로움이나 공허함도 외부 상황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10쪽)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여러 편리한 도구들의 도움으로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여유시간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대인들은 왠지 항상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참으로 매력적인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루하루를 ‘맞춤복’처럼 이용할 수 있는데 ‘기성복’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딸깍딸깍 흘러가는 시계의 시간은 동일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충분히 조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즉,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불쾌한 순간은 지독히도 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간을 연장시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주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간 감각이 달라진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면 시간이 지나는 것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계속 의식하면 몇 초도 길게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경험상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주의 집중 훈련으로 풍요를!

시간의 흐름을 조종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입니다. 우리가 지루할 때 다른 데 주의를 돌려 시간을 짧게 느끼는 경우를 경험하기는 하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연장시키는 기술은 좀처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기술을 터득해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해진 하루 더욱 풍성하게 누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년 12월에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자는 주의집중 혹은 몰입 훈련을 통해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단순한 예로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잡지를 볼 때 평소 보지 않던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살펴보거나, 그림을 볼 때 아주 작은 부분들에까지 관심을 두고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자가 지각훈련이라고 말하는 이 훈련을 통해 우리는 ‘지금’에서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감각적 인상들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시간은 더 풍요롭고 길게 느껴진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활기찬 대화를 나누었던 1시간은 멍하니 몽상에 잠겼던 1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질 것이다. 시간에 더 많은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우리는 인생을 더욱 길게 느낄 수 있다.(중략) 온전한 현재에 사는 사람은 인생을 구성하는 순간들을 더 자세히 지각할 뿐 아니라 그런 순간들을 만끽할 수 있다.”(108, 109쪽)


나이와 비례하는 시간의 속도를 늦추려면

글의 서두에 던진 질문 중 나이가 먹을 수록 시간이 왜 빨리 흐르는지도 저자는 설명합니다. 우리는 정보의 양을 가지고 시간을 느끼는데, 새로운 것 혹은 변화를 많이 경험할수록 시간을 길게 느끼게 됩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젊을 때 새로운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어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경험은 평범해져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 같아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날아가는 듯한 시간을 붙잡고 싶으신가요? 언제든 풍성한 기억을 소환할 수 있도록 체험한 것을 메모하거나 사진으로 남기면 좋다고 합니다. 또 두뇌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노년의 시간을 연장하고 싶은 분들은 “습관을 바꾸거나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고 우리의 시간감각을 새롭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항상 부족한 시간, ‘시간을 발견’해 채우다

현대인들은 거의 무한정으로 몰려오는 감각적 자극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향유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많은 자극들에 주의를 계속 분산시킬 것인지, 아니면 향유할 수 있는 자극 몇 가지를 선택하든지.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일정표에 빈 공간이 없도록 시간을 빽빽하게 채우곤 합니다. 저자가 지적하듯 시간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는 경우 분주함과 공허감을 오가게 됩니다.

저자는 집중력 부족, 스트레스, 의욕부진 때문에 사람들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제대로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도 했습니다. 이 세가지 원인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앞서 말한 ‘집중력 훈련’, ‘자신의 통제 하에 놓이는 시간 마련’, ‘적당한 동기부여와 선택’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매일 바쁘다. 우리는 어떤 일을 진정으로 만끽하기 위해 다른 일을 의식적으로 팽개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일깨운다. (중략) 그리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느끼는 기쁨보다는 시간이 부족하여 하지 못하고 남겨두는 일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 것이다.”(218-9쪽)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풍요로운 인생을 위해 ‘시간을 발견’하는 6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저는 이 여섯 가지 방법을 ‘지금’부터 연습해 보려고 합니다. 이 방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함께 책을 열어보시죠. 흐르는 시간을 잡아둘 수는 없겠지만 이전처럼 시간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시간의 강에 나룻배를 띄워 여행하듯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걸크러시 세트

작가
페넬로프 바지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8.09.20.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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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노벨위원회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발표했을 때 온 세계가 놀라워했습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에 55년만에 여성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물리학상은 1901년부터 2018년까지 112번 수여되었는데 그 중에 여성은 몇 명이었을까요? 네, 2018년을 포함해 단 세 명이었습니다. 이는 물리학상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닙니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688명 중 여성은 단 21명 뿐입니다.

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의 10%정도라고는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성별비율은 과학분야 종사자의 성비에 훨씬 못미칩니다. 왜 그럴까요?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노벨상을 탈 만큼 뛰어나지 않아서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코펜하게 대학 Liselotte Jauffred 교수와 동료들은 성별에 따라 노출되는 환경이 노벨상수상자 성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했습니다.(Gender bias in Nobel Prizes)

Liselotte Jauffred 교수팀은 여성연구자들이 그들의 경력상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까지 많은 편견과 장애를 뚫어야 한다는 점이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의 사례로 결혼이나 육아는 남성연구자들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여성연구자들에게는 경력상의 장애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노벨상 수상자의 성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저자들인 케르스틴 뤼커와 우테 댄셸도 지적했듯이 세계사 속에서 여성들은 비범한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일부 사람들이 성평등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에 이르기까지도 성별이라는 거대한 벽이 여성들을 막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왔습니다. ‘여자가 왜 이렇게 힘이 세?’, ‘여자가 무슨 과학자가 되려고 해?’, ‘여자가 무슨 의사가 되겠다고’, ‘여자는 간호사나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하는거지’…마치 선천적으로 여성에게만 마땅한 일이 있는 것 같은 편견은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증명한 여성들이 여기 있습니다.
 

  
페넬로프 바지외라는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했던 대표적인 여자들 30명에 대한 이야기를 <르몽드> 공식 블로그에 연재했습니다.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린 이 연재물을 모아 저자는 <걸크러시 1, 2>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냈던 여자들의 삶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산부인과 의사부터 아파치 부족의 전사, 최초의 여성용 수영복을 고안한 수영선수, 무민 시리즈의 창조자, 무용가이자 레지스탕스 활동가, 등대지기, 황제에 이르기까지…세상의 편견을 깨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당당히 걸어나간, 시대도 문화도 다양한 여성 15인의 호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걸크러시 1 소개글)

“래퍼, 우주비행사, 탐사보도의 창시자, 동물의 대변인, 육상 선수, 화산학자, 싱어송라이터, 페미니스트 활동가, 과학수사의 선구자, 록 스타까지…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당시 사회의 규범에 맞서 싸우고 스스로 인생의 새로운 막을 훌륭하게 열어젖힌 여성 15인의 호쾌하고 감동적인 삶의 초상!”(걸크러시 2 소개글)


이들 중 ‘무서움’이 전공인 배우 마거릿 해밀턴(1902~1985)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 배우라고 하면 예쁜 외모가 주된 경쟁력이었으나 마거릿은 자신의 장점인 무서운 외모를 내세워 배역을 따냈습니다. 마거릿은 1938년 오즈의 마법사에서 불의의 화재 사고에도 불구하고 마녀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하지만 마녀가 너무 심하게 무서워서 마거릿의 촬영분 절반 정도는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마거릿은 무섭게 하는 걸로는 최고라는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코를 고치라는 충고에 “왜? 내 코가 얼마나 훌륭한데! 미쳤나봐 그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존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책에는 해당 인물에 대한 주된 사건 혹은 에피소드가 너무 짧게 압축되어 있어 감질맛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소개한 인물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게도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등대지기로 소개된 조르지나 안출라타(1908~2001)에게도 눈길이 갔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을 갖는 것이 꿈이었던 조르지나는 미국 롱아일랜드 해안 절벽에 집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해안은 해를 거듭할수록 계속 침식되어 그녀의 집까지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조르지나는 포기하지 않고 갈대와 모래주머니를 이용해 배수 시스템을 만들어 해안절벽의 침식을 막아냈습니다.

그 때 롱아일랜드에 있던 등대 하나도 동일한 위험에 처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등대를 지키고 싶어했으나 관할단체에선 예산 등의 이유로 등대 폐쇄를 결정합니다. 그 때 조르지나가 나서 자신의 집에 적용했던 배수시스템을 등대에도 만듭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요. 마을의 상징을 지켜내고자 했던 조르지나와 그 동료들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 또한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이 책에는 대여섯 페이지로 아주 간략하게 소개된 인물의 더 깊은 삶을 찾아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엘리자베스 코크런(핑키,1864~1922)입니다. 핑키는 홀어머니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직업전선에 나섰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15세에 초등학교 교원 양성학교에 입학하지만 학비가 없어 퇴학당하고 맙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핑키는 ‘여자들은 이럴 때 쓸모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고 분노에 차 해당 기사를 쓴 논설위원에게 편지를 씁니다.
 

“기사: 여자의 자리는 집이다. 여자가 바느질이나 아이 돌보기를 등한시하면 사회는 무너진다. 직업이 있는 여자란 괴상망측하다.”

“핑키가 논설위원에게 : 당신이 모르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전하자면, 그 세상에서는 여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답니다.”(68쪽)


이를 계기로 핑키는 기자가 되고(필명을 넬리 블라이로 함) 여성 노동자들의 빈곤, 이혼을 원하는 여성이 거쳐야 하는 지난한 투쟁, 공장의 근로조건 등을 기사로 썼습니다. 넬리의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해당 기업들은 신문에서 광고를 빼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결국 넬리는 해당 신문사를 나와 당시 조지프 퓰리처가 이끌던 ‘뉴욕 월드’에 지원합니다. 넬리는 정신병원을 취재하라는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23세에 ‘뉴욕 월드’ 기자가 됩니다.
 

“넬리 표 기사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우선 사회의 치부를 들추는 취재 대상 선택. 예를 들자면 로비, 빈곤층 의료 실태, 수감자 확대…하지만 더 중요한 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당시 수감자, 극빈자, 파업 노동자 등의 편에 서서 사건을 전하는 기자는 넬리가 유일했다.”(71쪽)


넬리는 세계일주를 하며 기사와 책을 쓰기도 하고, 결혼한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아 큰 성공을 거둬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던 건강보험, 높은 급여, 도서관 등을 제공하는 근로환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참을 수 없는 기자 근성으로 오스트리아로 떠나 종군기자로 전쟁의 참상을 보도했습니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사회 부정부패, 노동자의 삶, 고아들의 인권, 각종 부조리’ 등을 지적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녀가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은 탐사보도의 창시자인 넬리에게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자”라는 이름을 부여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뉴욕 기자협회는 그녀를 기려 ‘넬리 블라이’상을 만들고 훌륭한 성과를 내는 젊은 기자에게 매년 상을 수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위에 아직도 ‘여자가 무슨~’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그들 눈 앞에 이 책 두 권을 들이밀면 되겠습니다. 저자는 단 30명의 인물만 짧은 이야기로 압축해서 소개했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찾아갔던 여자들에 대한 입문서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각 주인공들, 그리고 그들 곁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삶을 더 깊이 있게 찾아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전태일평전

작가
조영래
출판
돌베개
발매
2001.09.01.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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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대한민국은 이 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날은 청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짧은 22년의 생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기일이 돌아와서 지난 달 전태일 열사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최저임금, 탄력근로제, 주당 노동시간, 청년 일자리, 광주형 일자리 등 노동관련 이슈들을 접하면서도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노동 운동사에 상징적 인물이 된 전태일 열사의 사상과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의 삶을 열정적으로 전해준 <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을 통해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죽어가면서도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당연한 권리를 찾아주고 싶었던 청년 전태일의 마지막 부탁은 그의 죽음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1970년 vs 2018년

지금 우리 나라 어느 노동현장도 전태일 열사가 일하던 1960년대 평화시장의 상황만큼 열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밀폐된 닭장’ 같은 작업장에서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을 일하는 십대 여공들. 한 달 휴일은 기껏해야 이틀. 그렇게 일해봐야 일터로 오는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턱없이 낮은 임금. 일하는 기간이 늘어갈수록 얻게 되는 것은 직업병으로 인해 병들어가는 몸.

‘괜찮은 일자리가 없네’, ‘청년 실업률이 높네’, ‘비정규직이 늘어가네’ 하는 등의 이슈들을 보며 노동자들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딱 전태일 열사의 세대인 부모님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로 살아오신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 세대가 겪은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요즘 세대가 물러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전 세대들 말처럼 물론 절대적인 노동환경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끊이지 않고 늘어만 가는 외주화와 효율추구로 인한 노동자들의 죽음 소식, 커져만 가는 정규/비정규직 임금격차, 법으로 강제하려고 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장시간 노동 문제 등을 생각하면 여전히 우리 사회 노동환경은 생각보다 많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전태일 열사가 법을 준수하라며 외쳤던 당시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4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법정 1일 노동시간은 8시간입니다. 물론 주5일 근무, 최근의 주당노동시간 제한 등 노동시간 줄이기에 진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법의 실효성, 연간 노동시간 등을 고려하면 1일 8시간 노동은 일부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꿈과 같은 일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노동 문제가 단칼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노동자, 기업, 정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랜 시간 논의를 지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과거 독재 및 권위주의 정부들, 그리고 기업들은 그렇다쳐도 촛불 시민의 지원으로 권력을 위임 받은 현재 정부에서조차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이달 초 현 정부의 지지부진한 개혁과 후퇴하는 노동제도 등을 규탄하는 민중대회가 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민심의 실망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태일 열사도 이와 흡사한 실망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각성하게 된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사람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는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한마디도 못하고 살아왔던 자신과 당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보회 회원들 몇몇과 함께 전태일 열사는 당시 노동현장 실태 조사를 벌입니다. 설문 응답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근로기준법 준수여부를 감독하는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노동현장을 감독해야 하는 공무원의 반응은 냉랭했고 그를 내쫓다시피 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전태일 열사는 노동청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평화시장 노동조건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노동자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정부기관이 오히려 기업주의 편에 서 있는 답답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기업들을 관리해야 할 정부기관은 오히려 기업과 결탁하여 기업의 편에 서 있는 절망적 현실에 전태일 열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투쟁밖에 없었습니다. 2018년의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촛불을 들었던 노동자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면 촛불 정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언론들이 툭하면 왜곡하는 고임금 노동자들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로만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경험했던 좌절을 2018년의 노동자들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광주형 일자리’와 전태일이 꿈꿨던 모범업체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전태일 열사였지만 노동현장을 경험하면서 투쟁과 더불어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이름하여 모범업체.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직원들을 인간답게 대우하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구상하며 사업계획서를 썼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노트 30페이지에 걸쳐 필요한 설비, 가격, 인원, 인건비, 생산제품 종류와 판매 방법 등을 상세하게 담은 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사업계획은 당시로선 혁명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전태일 열사 본인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목적과 취지는 훌륭하지만 이를 위해 자본을 대줄 만한 투자자를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업계획서에 담긴 정신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목적>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226쪽)


전태일 열사가 쓴 모범업체 사업계획서에 있는 업체 설립 목적을 읽으면서 최근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이슈가 떠올랐습니다. ‘광주형 일자리’는 새로운 노동시장 혹은 기업에 대한 구상입니다. 노동자, 기업, 정부(지방자치 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 노동자는 일할 만하고 기업가는 투자할 만한 기업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노동자의 임금 부문의 양보 등 다양한 사회적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사IN 2018년 12월 11자 기사(우리시대의 질문 ‘광주형 일자리’)에서도 지적했듯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정권 변화에 따른 일자리의 지속성, 경영 책임, 생산 제품의 종류, 연봉 문제, 하청 구조 개혁의 비현실성, 헌법상 보장된 노동권 제한 등 문제가 될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기존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을 설득할 만한 당위성이 있느냐에서도 부족해 보입니다.

정부입장에선 신속하게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다고 성과를 알리고 싶을 것입니다. 기존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 임금수준 등 앞으로 일어나게 될 갈등에 불안하기에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정부, 모델 기업에 투자할 기업, 기존 산업에 속한 노동자들, 그리고 새로운 노동구조에 뒤따를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전태일 열사의 모범업체 설립 목적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전태일 사상을 되새길 때

<전태일 평전>에는 그의 불우했던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죽음까지가 영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사, 배움에의 열망, 노동현장에서의 경험 등을 접하고나니 전태일 열사의 인간적인 모습이 깊게 다가옵니다. 험난한 노동환경에서 당연하게 강렬한 노동투사가 될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해 준 평전을 통해 그가 왜 그렇게 투쟁할 수 밖에 없었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태일 열사가 가장 밑바닥의 삶을 체험하면서 얻은 인간과 인간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 “나의 또 다른 나”라는 타인에 대한 인식,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노예의식에서 벗어나 주체적 인간으로서 바로 서는 각성, 다른 이들까지도 주체성을 가지도록 함께 이끄는 연대행동의 사상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마주했던 진정한 적은 기업주도 아니었고 정부 기관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나와 있듯이 전태일 열사가 싸워야 했던 대상은 “억압하는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와 힘”이었습니다. 자신이 본 인간과 사회의 모순, 그것을 가져오게 한 억압적 구조와 그 파괴적 영향을 전태일 열사는 폭로하고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 시대 노동절 행사 때도 떠들어대던 “이 나라 경제성장은 묵묵히 땀흘려 일하는 산업 전사들의 헌신의 덕분”이라는 말. 너무나도 익숙해서 진리같이 여겨지는 이 말. 우리 사회는 어쩌면 경제성장 우선이라는 미신을 붙들고 여전히 다른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부, 국회, 노동자, 기업가 등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헝거

작가
록산 게이
출판
사이행성
발매
2018.03.08.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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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생이 녹아 있는 몸에 대한 고백록, 록산 게이 <헝거>

가슴속에 자신만의 상처와 아픔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나름의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고 해도 과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무던하게 살아온 인생을 돌아봐도 ‘행복한 인생’ 보다는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때문에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 정도야 다들 겪는 거 아닌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엔 보통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는 인생도 있습니다. 아픔이 너무 커서 과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공감할 수 있을지, 아니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을 할 만큼 아픈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할 때조차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어두웠던 과거지만 힘겹게 힘겹게 <헝거>라는 책을 통해 자신을 내보인 작가 록산 게이의 삶이 그렇습니다.
 

“이 책은 이제까지 작업했던 그 어떤 책보다 쓰기 어려웠다. (중략) 나 자신과 내 몸이 살아온 인생을 직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나 그래도 꾸역꾸역 한 자씩 써 내려간 이유는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작업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내 몸에 대한 고백록을 쓰면서, 내 몸에 대한 이런 진실들을 당신들에게 털어놓으며 나의 진실, 오직 나만 아는 나의 진실을 털어놓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사람들이 그다지 듣고 싶어하지 않는 진실일 수도 있다. 나 또한 듣기 불편할 때도 있었다. (중략) 여기에서 당신에게 나의 강렬한 허기의 진실을 펼쳐 보였다. 마침내 여기에 연약하고 상처받고 지독하게 인간적인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339쪽)


록산 게이는 열두 살 때 또래 남자애들에게 강간을 당한 이후 자신의 몸과 그 몸이 살아내야 했던 삶이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는지, 그 진창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치유하며 살아왔는지를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어린 시절 성폭행을 겪은 저자는 그와 같은 폭력을 피하기 위해 뚱뚱해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역겨워지면 남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는 안전을 위해 거대한 몸을 갖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록산 게이를 사람 자체로 보지 않고 그녀의 몸을 먼저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녀에겐 다시금 파괴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나 인간으로서의 가치, 특히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외모를 기준으로 판단되는 문화 속에선 강간과는 또 다르게 저자를 파괴해갔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그 과거는 여전히 록산 게이의 몸에 새겨져 있어 항상 그녀를 괴롭혔고, 현재의 몸은 항상 비만이라는 무절제와 나약함의 상징으로 비난받았습니다.

대학 2년을 마쳤을 때 록산 게이는 인터넷 채팅에서 알게된 남자를 만나러 샌프란시스코로 떠납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을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폰섹스 회사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몇 달을 내키는대로 살다 또 인터넷에서 만난 여성과 함께 미네소타로 옮겨가 지내기도 합니다. 결국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상의 세계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가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나를 잊는 편이, 내 삶을 추스르려 노력하거나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는 것보다 쉬웠다. 여전히 망가진 상태였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틀어져버렸고 다시는 옳게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을 때의 그 자포자기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나 노력없이 사는 것이 좋았다.”(121쪽)


이처럼 스스로를 ‘실종’시켰던 시절들을 뒤로하고 록산게이는 삶을 추스리기로 합니다. 대학에도 다시 가고 글쓰기도 계속합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는 박사학위를 시작하게 될 정도로 회복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피부색처럼 절대로 숨길 수 없는 뚱뚱한 몸으로 살아야했던 록산 게이는 통제력 없는 자신의 나약함, 자신의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부정적 감정으로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자신의 몸을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시선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거대한 록산 게이의 몸을 보며 그녀가 절제하지 못하고 나약한 의지를 가졌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제 시건 역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이어트 광고, 연예인들의 몸에 대한 언론의 호들갑, 외모지상주의 등은 미국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 정체성의 우선 순위에 놓여 있습니다. 록산 게이의 고백을 읽으며 한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의 사이즈만을 보고 무심코 판단해 버렸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록산 게이는 40대가 되어서야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게 됐던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길거라고 추측해왔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기혐오에 빠져 있기 보다는 “모든 불쾌한 소음을 차단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와 20대 내내 저질렀던 실수를 용서하기로 노력하는 편이, 그 실수를 저지른 나에게 동정심을 갖는 편이 훨씬, 훨씬 더 쉽다”는 것을.

그녀가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문신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에 자신의 선택을 표시함으로써 자기 몸의 주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덜 수치스러워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몸과 화해하며 회복해 갔습니다. 또한 요리를 하면서 자신이 좋은 음식과 보살핌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쁨을 얻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록산 게이는 치유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나의 슬픈 이야기 대부분은 이제 과거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참지 않는 것들이 생겼다. 혼자라는 건 짜증 나는 일이지만 나에게 끔찍한 기분을 안겨주는 사람과 같이 있느니 혼자 있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나의 가치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 사실을 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나의 슬픈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이 싫어도 이 이야기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슬픈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내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될 것이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깨달을수록, 나의 가치를 깨달을수록 그 짐은 가벼워질 것이다.”(280-281쪽)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자가 과거의 상처에서 말끔하게 치유되어 현재는 성공적인 삶의 궤도에 오른 자신의 삶을 스스로 빛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은 여전히 회복해가는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을 어떻게 거쳐오고 있는지를 말하는 책이어서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록산 게이와 유사한 아픔을 겪은 여성들이 많을 것인데, 그들이 저자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깊이 공감하며 함께 치유되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뚱뚱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왜 저 지경이 될 때까지 그냥 둔거지? 의지가 없거나 게으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단지 뚱뚱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것이었습니다. 록산 게이가 말한 것처럼 “뚱뚱한 사람들을 괴롭히면 살을 빼게 될 거라고, 몸 관리를 하게 될 거라고”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몸 너머에는 록산 게이의 삶처럼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아픈 이야기가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외모를 보고 너무나 쉽게 그 사람과 몸을 동일시해 버리는 방식, 그 몸을 바라보는 비난의 시선에서 벗어나 먼저 그 사람의 역사를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록산 게이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살아왔던 경험을 이야기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그 몸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 몸과 이 몸으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던 경험은 나의 페미니즘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바꾸었다. 내 몸에서 산다는 일은 다른 사람을 향한 공감과 동정의 범위를 넓혀주고 다른 사람들 몸의 진실에 대해 알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다양한 신체의 종류에 대한 (용인을 넘어) 포용과 인정의 중요성을 확실히 가르쳐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몸의 존엄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더 신중한 단어인 사이즈란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사이즈가 좀 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될 수 있고 최소한 지난 20년 동안 그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나의 또 다른 정체성도 마찬가지였다. 이 몸이 불러오는 혼란과 수치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존중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 몸은 회복 탄력성이 크다. 내 몸은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 내 몸은 존재감이라는 힘을 제공하기도 한다. 내 몸은 강력하다.”(332쪽)


수영일기

작가
오영은
출판
들녘
발매
2017.07.14.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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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지난 해 2월 저를 제외한 가족들이 한 달여 정도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퇴근 후 자유시간이 생겼습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불현듯 수영이 떠올랐습니다. 꾸준히 운동을 하며 몸관리를 해왔기에 몸이 건장한 편인데 수영장만 가면 가족들에게 비웃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그 몸으로 수영장 바닥을 딛고 뛰어다니냐, 몸이 아깝다’면서 놀리곤 했습니다.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물에만 들어가면 당연히 헤엄을 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게 물 속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물놀이를 여러번 다녀봤지만 수영장을 가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잠수와 걷기 뿐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수영을 제대로 배워서 여름 휴가 때는 가족들 앞에서 멋지게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다짐했습니다. 지난 해 겨울의 한파도 제 결심을 막지 못했습니다. 직장 근처에 있는 수영장을 물색해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영장에 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어떤 수영복을 사야 할지,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 앞에 달랑 수영복만 입고 있을 수 있을지, 수영장에는 어떻게 들어가는지 등 온갖 걱정거리들이 몰려왔습니다. 결국 주변에 수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수영복, 물안경, 수영모자를 장만했습니다. 수영장에 들어가는 순서도 몇 번을 물어 확인을 하고 머리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 봤습니다.

드디어 첫 수영강습날이 되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수영장이 있는 체육센터에 들어갔습니다. 지인이 알려준대로 번호표 발급기에 회원증 바코드를 찍고 번호표를 받았습니다. 락커룸에 들어가 입고 온 옷을 벗어 사물함에 넣었습니다. 수영복 주머니를 들고 초보티를 내지 않으려고 의연한 척 걸어가는데 알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고수들이 왠지 ‘처음 오셨나봐요?’라고 물어볼 것만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힐긋힐긋 훔쳐보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샤워를 하고 수영복과 수영모자를 착용했습니다. 물안경도 옆 사람들처럼 수영모자 위에 걸쳤습니다. 나름 성공적으로 첫 수영장 입성 의식을 치렀습니다. 샤워실을 나와 탁 트인 수영장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이전 시간 강습을 끝낸 사람들과 먼저 온 사람들이 물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물에 들어가서 물장구라도 쳐볼까 했는데 이용객들이 갑자기 물에서 나와 수영장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아, 준비운동 시간이었습니다. 강사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다같이 하나! 둘! 준비운동을 하는데 어찌나 어색한지 옆사람, 앞사람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 눈을 피했습니다. 아마도 수영장에 처음 온 사람 티가 팍팍 났을 겁니다. 설레면서도 어색하고 민망한 준비운동이 끝나고 각자의 강습반으로 흩어져 생애 첫 수영강사님과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물 속에 들어가 수영을 배울 채비를 마쳤습니다.

아마도 많은 수영인들이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첫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가 수영인으로 첫 발을 뗄 때 이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한 책을 만났습니다. 패션일러스트레이터 오영은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펴낸 <수영일기>입니다. 오영은 작가는 여행 중 수영장 풍경을 그리다가 수영의 매력에 빠져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고 합니다.

뜬금없이 수영을 시작한 것, 수영 강습 첫 날의 설레임과 걱정거리, 초급반부터 상급반까지 배우게 되는 네 가지 영법 이야기, 수영을 하게 되면서 달라지게 되는 일상, 먹을거리 이야기, 수영장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등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제가 경험한 과정과 너무나 비슷해서 책이 놓여있던 매대 앞에서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작가의 그림과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어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사 가지고 와서도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유머가 깃든 귀여운 스타일의 일러스트로 그려낸 수영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림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니 왕초보를 위한 물에 얼굴 담그기, 발차기, 수영장에서 올라오기 등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자유형, 평영, 배영, 접영, 턴과 스타트, 물잡기 등 수영을 본격적으로 연습할 때 필요한 방법들이 수영교본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최근 개인 자유수영 시간엔 실제로 이 책에서 본 그림을 떠올리면서 각 영법을 연습해 보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수영방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또 한가지 100% 공감하게 되는 부분은 ‘수영과 다이어트의 상관관계’입니다.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허벅지도 터질 듯이 아프고 팔 근육도 빵빵해져서 곧 박태환 선수같은 몸매가 될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왠걸요. 퇴근 후 저녁시간 수영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힘들게 운동을 했기 때문에 보상으로 치킨, 떡볶이 등을 스스로에게 선물했습니다. 또 그냥 먹고싶어서 먹는 야식은 내일 수영을 위한 동기부여로 탈바꿈되기도 했습니다.

오영은 작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영을 하고 나오는 길에선 어젯밤 먹은 치킨 칼로리는 불태웠겠지 생각하고, 내일은 오리발을 끼고 수영하는 날이니 밤에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된다고 하고, 수영을 하기 위한 동기부여로 피자, 순대, 떡볶이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모습. 그리고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며 살이 좀 빠졌나 생각하다 “그냥 전보다 더 건강해진 걸로”라는 결론을 내리는 작가의 모습에 아마도 많은 수영인들은 싱긋 웃으며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주는 또 하나의 재미는 작가가 수영을 하면서 그렸던 작품들입니다. 작가는 #수영스타그램이라는 해시태그로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이 작품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테이크아웃 커피컵, 화장실 세면대, 거품이 잔뜩 일어 넘치고 있는 맥주잔 등을 수영장으로 변신시키며 수영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수영일기>는 한 번쯤은 오영은 작가와 같은 상상을 해 보셨을, 수영의 매력에 빠진 분들이라면 매우 공감하면서 읽어볼 수 있는 매력있는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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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2월 물에 뜨지도 못하는 왕초보가 처음 수영을 배우기 시작해서 올 해 10월까지 1년 8개월을 꾸준히 강습을 받으며 연습했습니다. 이젠 저도 초보 수영인들이 모두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상급반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급반이 되면 완전 수영을 잘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수영을 하면 할수록 배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더군요. 오영은 작가께 부탁하고 싶습니다. 상급반 이후의 이야기들로 수영일기 2를 만들어주시면 안될까요?


프랑켄슈타인

작가
메리 셸리
출판
문예출판사
발매
2008.06.02.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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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창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MIT Technology Reviews)를 보다가 2018년 주목할 만한 10대 기술 목록에 인공배아 기술이 올라 있는 것을 봤습니다. 이 기사는 난자와 정자 없이 줄기세포만을 사용해 쥐 배아를 성장시킨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자들의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줄기세포를 이용해 인공배아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 때 실험실에서 성장하게 될 배아, 즉 생명에 대한 윤리 논쟁은 불가피합니다.

생명 창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생명공학뿐만 아니라 로봇 및 인공지능 연구로도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신체를 가지든 가상 공간의 시스템으로 존재하든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창조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사고능력을 갖추게 되는 시점이 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에서도 윤리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연구자 사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은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고 싶은 것일까요?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생명 혹은 사고하는 존재를 창조하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은 수많은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들을 통해 다양한 상상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한 극단에선 인간이 창조한 대상을 통제하지 못하게 될 때 일어날 일들에 극단적인 두려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선 인공지능 로봇과의 행복한 공존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메시지를 던지기에 고전이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미래는 디스토피아로 그려지기도 하고 유토피아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도 현대 생명공학 및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서 제기되는 과학기술의 윤리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소설로 시작해 영화, 만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메리 셸리는 생명을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나 지난 책인데도 최근 현대 과학분야에서 일어나는 윤리 논쟁에 바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고전이라 불리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읽는 것이겠지요. 각고의 연구로 여기저기서 부분 부분을 모아 조립한 거대한 신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조인간을 만든 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창조한 메리 셸리는 적정한 선을 넘는 지식과 기술을 추구한 결과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경고합니다.

메리 셸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를 창조하게 될 때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을 상정했습니다. 그녀는 멈출줄 모르는 창조 열망을 가진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피조물을 창조자 자신도 공포를 느낄 정도의 괴물로 그렸습니다. 메리 셸리는 도를 넘는 창조 열망을 괴물같은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위협으로 봤던 것이겠지요. 핵무기와 같은 현대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미친 충격적 경험을 고려한다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현대의 과학기술자들은 작품속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신의 자질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위대해지려고 열망하는 것보다 자신의 고향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배우기 바란다.”(58쪽)


메리 셸리의 이 소설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많은 장르의 작품들이 만들어져왔기 때문에 소설의 줄거리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작품속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통해 메리 셸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늘날 과학기술분야 연구자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진보했을까?

메리 셸리 시대의 인간과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간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인류는 점점 나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해 오긴 한걸까요? 작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괴물의 눈을 빌려 인간을 바라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을 창조했을 때 이 피조물이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괴물이라 두려워하거나 무턱대고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들을 만나 고통을 경험하며 괴물이 되어갔습니다.

괴물은 인간들을 피해 달아나다 발견한 오두막에서 한 가족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들을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배워갑니다. 그는 이 가족을 관찰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고 이 가족의 가난과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가족들을 돕기도 합니다. 인간들로부터 이유없는 핍박을 받았지만 이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소통의 희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수용될 자신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들을 알아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토록 강하고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이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떤 때는 순전히 악의 근원에서 태어난 자식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귀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소. (중략) 오랫동안 나는 한 인간이 어떻게 동족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법과 정부 따위가 왜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하지만 악과 살육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품었던 의혹은 사라지고 역겨움과 혐오감이 몰려와 고개를 돌리고 말았소.”(153-154쪽)


메리 셸리가 봤던 인간들의 악과 살육의 역사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왔고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 때문에 괴물이 되기로 선택했던 피조물조차 역겨움과 혐오감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던 역사를 가진 인간들은 메리 셸리의 시대와 비교할 때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 시대에도 많은 프랑켄슈타인들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탐구와 창조 열망에 가득찬 생명공학자들과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창조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대표적입니다. 과학기술 분야에 있는 연구자들은 종종 어떤 기술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려고 합니다. 자신은 가치중립적인 기술을 만든 것일 뿐 기술을 활용하는 문제에까지 개입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과학을 응용한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도 사람들입니다.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열망 추구에 대한 책임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특히나 생명을 다루는 연구라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괴물은 자신의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어찌 생명을 가지고 그렇게 놀 수 있는거요?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본분을 다하겠소.”라며 호소합니다.

이런 수준의 생명창조가 가능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의 경우엔 로봇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해야할 의무를 이행하기로 했다면 이 괴물은 분노로 가득차 인간들을 죽이는 대신 프랑켄슈타인의 훌륭한 동반자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현대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연구결과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게 될 상황에까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류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능력들을 썩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거네. (중략) 감정과 이성을 지닌 존재를 창조해낸 일을 생각하면 나 자신을 평범한 과학자로 생각할 순 없었지. 하지만 내가 과학자로서 첫발을 내디딜 때, 힘을 복돋아주었던 그러한 생각 때문에 지금 내가 먼지 구덩이 속에 깊숙이 처박힌 거네. 나의 모든 생각과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고, 전능함을 갈망하던 대천사처럼 나는 영원한 지옥에 갇히게 된거지. (중략) 나는 천국을 밟는 상상에 빠져들었고 내 능력에 기뻐했고 그 연구의 성과를 생각하며 기쁨에 타올랐지. (중략) 한데 지금 나는 얼마나 몰락했는가!”(283-284쪽)


현대의 프랑켄슈타인들도 인류에게 유용함을 제공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썩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상상이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최근 점점 가속되는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속도를 보면 충분히 그럴법 합니다. 많은 연구들에 대해서 창조자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창조물을 만드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합의와 통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쁜 페미니스트

작가
록산 게이
출판
사이행성
발매
2016.03.14.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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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운동, 가정과 노동현장에서의 성차별, 성역할 편견 등 페미니즘 논쟁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말에 점차 피로감을 느끼는 듯 합니다. 이 정도로 이슈가 되고 있으면 우리 사회가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성차별 문제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발전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를 찾는 길은 멀고 더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필요만큼 진보적이지 않다.”(157쪽)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가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에서 한 말은 미국 사회에 대한 것이었지만 우리 사회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여성들의 삶을 숫자나 통계상으로 보면 과거보다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에서 말하는 기저효과가 성평등 영역에도 적용되기에 ‘옛날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는데도 여성들이 만족할 줄 모른다’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페미니즘이 완벽한 이론이나 운동일 수는 없겠지만 오랜 세월 가부장제 아래서 살아온 우리 사회엔 페미니즘이 가진 한계나 결점들이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부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른 지 몇 해가 지난 요즘에도 페미니즘을 여성 우월주의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만날 정도이니 ‘모든 영역에서 성차별을 없애자는 운동’은 여전히 더욱 알려져야 합니다.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칭한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 운동의 결점과 한계,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결점과 한계를 인정합니다. 모든 사건 사고에 일관적이지도 논리정연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그리고 과거보다 꽤 나아졌다고 하는 사회 속에 여전히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혐오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노력하는 한 여성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지나가는 장난이고 농담인데 그냥 웃고 넘겨요. 외모로 칭찬 좀 할 수 있지 뭘 그래요?’와 같은 노랫말, ‘가해자를 염려하고 피해자의 결점을 찾아내는’ 성폭력 사건 기사, ‘여성 대상 폭력이 너무나 쉽게 소재로 사용되는’ TV와 영화 등에 대해 가볍게 넘어가지 않고 잘못된 점들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사회는 급격히 변하지만 여성을 대하는 방식은 여전하고, 우리는 아직도 선조들이 싸웠던 바로 그 문제들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이어지는 성폭력 관련 판결들, 그 사건들을 다루는 기사들, 이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주변 남성 동료들의 반응을 보면 저자가 말한 의식의 진보는 우리 사회에서도 요원해 보입니다. 특히 인터넷 상에선 여성들이 성차별적 사건들에 한 마디 하거나 성평등을 지지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라도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인신공격을 하기 일수입니다.

록산 게이가 소설, 영화/드라마, 법률 등에 스며 있는 여성차별 혹은 혐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사람이야”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동일한 시선을 경험합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으니 이쯤에서 분노를 거두고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좀더 거대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유명인들도 있었습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대체로 여성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130쪽)


저자는 계속해서 인기있는 책,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에 스며 있는 성역할, 페미니즘, 여성 등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점들을 다양한 사례로 이야기해 줍니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처럼 불편한 느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속한 ‘문화적 관습과 세계관’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록산 게이가 말한 ‘자신이 속한 젠더 포지션을 극복하고 저항’하려면 저 역시 좀 더 민감한 젠더 감수성을 가져야 하겠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젠더 감수성이 점차 섬세해져 가고 있는 현상들도 간혹 보입니다. TV프로그램이나 강연에서 예전에는 그냥 웃고 넘어갈 만한 상황이나 발언들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공적인 토론의 자리에 올라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이전보다 섬세한 젠더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젠더에 대한 민감하고 섬세한 감수성은 또 다른 심각한 차별 문제인 인종에까지도 확장될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기를 지니지도 않았는데 죽임을 당하고도 그를 죽인 사람은 정당방위였다며 무죄를 선고받은 트레이번 마틴 사건과 보스턴 마라톤 테러를 자행한 범인 조하르 차르나예프에 대한 대중의 동정을 비교해 보여줍니다. 성에 대한 편견만큼 인종에 대한 편견 역시 강력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미국은 원래 인종차별이 심했던 나라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제주도로 들어온 난민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분열적 대응에서 인종적 편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외국인 노동자나 국제 결혼으로 우리 나라에 온 동남아시아 국가 여성들에 대한 대우와 시선에 편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성차별 문제는 다른 차별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민감한 젠더 감수성 더 나아가 인권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록산 게이는 “나와 다른 문화적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상상해야 할 때는 더욱 철저히 냉정하게 여러 차례 질문해 봐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곱씹으며 기억해야 할 명제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록산 게이가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표현했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부족한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 실수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불완전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보다 민감하고 섬세한 젠더 감수성을 갖춰가는 남성으로 성장해가고 싶습니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솔직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트위터에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과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다 쓴다. 블로그에 내가 요리한 음식을 올린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에 나가고 싶고, 이렇게 하면서 더 좋은 여성이 되고 싶다. 나의 현재와 과거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내가 어디에서 비틀거렸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전부 다 털어놓고 싶다.

 

어떤 페미니즘 이슈를 이야기하건 간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375쪽)


100가지 질문으로 본 북한

작가
쥘리에트 모리요, 도리앙 말로비크
출판
세종서적
발매
2018.06.04.
평점

리뷰보기

 
201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두 나라 정상의 세 번째 만남과 그 결과에 온 나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에서의 해방, 열강들에 의한 분단과 전쟁 이후 지난한 갈등 관계를 수십 년 동안 이어오던 두 나라가 드디어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최근 정상회담 모습을 보면 두 나라가 언제 전쟁을 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지난 4월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올해 1차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의 소탈한 말투에 친근감을 느낄 정도로 남쪽 사람들의 심리적 긴장도 상당히 해소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북쪽 나라를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여전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한’인 것 같습니다. 특히 전쟁과 전후 시기를 거쳐온 세대에겐 북한은 여전히 때려잡아야 할 공산당 혹은 빨갱이들의 나라일 뿐입니다.

전쟁 이후 어려운 시기를 살아온 세대의 자식 세대인 저도 북한을 하나의 독립국가라기보다는 언젠가는 우리가 품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일부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 정도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시절 공산당이 싫다던 이승복 어린이 신화를 들었고, 군대에 징병당해서는 철책 근처에 머무르며 대치하고 있는 저 너머 사람들이 우리의 주적이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라긴 했지만 독일처럼 흡수 통일을 하게 되면 독일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겪게 될거란 이야기를 들으며 통일은 섣불리 하는게 아니란 것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기쁘고도 슬픈 행사를 보게 될 때는 그래도 통일은 되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손자까지 세습하며 인민들을 수탈하는 체제를 생각하면 북한의 지배층을 좋게 볼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나라 북한입니다.

막연한 이미지로만 인식해오던 ‘북한’을 이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웃 나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분단된 한 민족이라는 과거의 집착을 내려놓고 이제는 흘러온 시간만큼 달라진 차이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분단 후 대한민국 만큼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변화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인 듯 합니다. <100가지 질문으로 본 북한>이라는 책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해하는 첫 발을 내딛어 봅니다.

이 책은 북한전문가인 쥐리에트 모리요와 도리앙 말로비크가 수 년간 취재하여 내놓은 결과물입니다. 저자들은 이 보고서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과 한국 중심의 편향된 정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역사, 북한의 정치, 지정학, 북한의 최근 상황, 경제, 사회와 문화, 선전 7가지 분야에 대한 총 100가지 궁금함에 개괄적으로 답하는 형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상세한 정보보다는 전반적인 모습을 그려봄으로써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언론 종사자들은 상사들로부터 더 충격적인 뉴스를 제공하라는 상시적 압박을 받는다. 정보망은 제한되어 있다. 북한을 분석하는 일은 종종 공식적 출현이나 텔레비전 연설, 혹은 북한 언론, 또는 북한을 도망친 탈주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공식 석상에서 한 인물이 사라지면 즉각 처형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 활동가들에 근거한 이 정보들은 대개 한국 정보부에 의해 발표되고, 이어 미디어에 의해 최소한의 거리도 두지 않고 확산되고, 극화된다. 소문은 세계를 돌고, 매번 더 비열한 묘사들이 덧붙여진다.”(295쪽)


저자들은 그 동안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혹은 황당 무계한 정보들이 나돌았던 이유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한 정보들이 이렇게 왜곡되거나 날조되어 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두 국가가 직접 소통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서로에 대한 이와 같은 오해들은 점차 줄어들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와 ‘지정학’ 부분에선 사실 크게 새로울 만한 점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눈길이 가는 부분은 ‘정치’, ‘현실’, ‘경제’를 다룬 2, 4, 5부입니다. 정치 부분에선 최근 김정은 위원장으로 이어진 후계 준비, 김정은 위원장의 등장으로 달라지고 있는 정치 구조,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하는 세력 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권력 승계 작업이 생각했던 것보다 치밀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북한의 지배체제가 쉽사리 붕괴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 체제에 반하는 이들은 숙청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강제노동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다가 특별사면으로 출소해 살아나온 탈북자의 증언은 충격적입니다. 사형을 피해 수용소에 간다고 해도 살아나올 확률이 매우 적으며 이 증언자의 경우 수용소 생활을 마친 후 몸무게는 30kg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니 그곳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할 지 짐작할 만합니다.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과거와 그리 많이 달라지진 않은 듯 합니다.

숙청과 함께 유아기부터 받는 철저한 교육, 개인간 감시 체계는 북한 체제를 유지해 온 주된 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북한에서도 과거 강조되던 이데올로기보다는 개인들의 잘살고 싶은 욕망이 북한사회 변화의 동력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도 이 변화의 조짐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고 개인 통제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 보지 않을 것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 세력이 어떤 방향으로 북한을 이끌어 갈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경제 부문에 있어선 2000년대 초 소규모 사설 시장을 허용하였고, 요식업, 교통 분야에선 자본주의적 모델이 더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외화를 거래해 주던 환전상들이 대출도 해주고 있고, 여전히 금융거래가 불법이기는 하지만 시장경제의 싹을 받아들인 이상 금융 흐름을 통제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북한에도 ‘더 벌기 위해 더 일한다’는 생각이 세를 얻고 있다고 하니 자본의 힘이 북한의 경제와 사회구조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지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날, ‘시장 세대’의 구성원들은 이념에 대한 무관심이 커졌다는 점을 공유하며, 확실한 가치인 돈을 통해 삶을 즐기려 한다. 만약 그들이 정권에 충성을 바친다면 이는 정치적 신념보다는 민족주의에 의한 것이다. 15년 후쯤 그들의 자식들, 즉 최고의 안락함 속에서 자라고, 바깥 세계의 이미지를 접하고, 가족 내에서 이념의 세뇌교육을 받지 않은 그 아이들은 분명 ‘다른 것’을 갈구할 것이다. 더 많은 정상, 여행, 여가, 사업할 자유 등… 어쩌면 그때가 정권의 다음 도전이 될 것이다. 즉 이 신세대의 갈망에 답하고, 그들의 꿈에 맞는 활력 넘치는 세계를 제공하는 것. 물론 권력을 잃지 않고.”(277쪽)


최근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유지되고 두 나라의 교류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양국의 관계가 진전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북한쪽의 반응을 보면 체제 유지를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하던 핵무기의 효력은 다했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내어줄 것은 과감히 내어주고 체제보장과 경제라는 실익을 얻으려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들이 언급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그들의 갈망에 더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주안점을 둬야 하는 영역은 인터넷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구가 많지는 않지만 “과학과 신기술에 매료되는 한국의 ‘괴짜’ 혼은 38선 남북이 똑같다.”는 저자들의 말처럼 북한 인민들에게까지 인터넷 서비스가 보급될 경우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는 예측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김정은 위원장 정권은 이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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