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택배로 김장 보냈다."

매년 김장철이 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께 받는 메시지입니다. 부모님께 메시지를 받은 다음 날엔 택배 기사님에게 "고객님의 택배를 안전하게 배송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현관 앞에 쌓인 김장박스 사진과 함께. 신속한 배송에 놀라면서도 그 무거운 김장박스를 엘리베이터도 없는 3층에 올려다 놓으신 배송기사님께 미안한 맘이 들곤 합니다.

우리나라 택배는 정말 놀랍습니다. 왠만한 물건은 하루이틀이면 배송이 완료되고 온라인 쇼핑의 경우엔 오전에 주문하면 당일에 상품을 받아볼 수도 있습니다. 이토록 편리한 서비스를 빈번하게 이용하면서도 그 과정에 있는 노동자들을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김장이나 쌀 같이 무거운 물건을 배송받았을 때 배송기사님께 느끼는 미안함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책 표지ⓒ 보리


그런데 택배 서비스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까대기>라는 만화책을 읽고 나서는 무거운 물건을 현관 앞까지 올려다 놓는 택배 기사님에 대한 미안함 이상의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나는 너무나 편하게 이용하는 택배지만 그 편리함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다른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게다가 고된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이상한 고용 형태와 택배 업계의 구조로 인해 노동자로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택배 회사는 택배 지점들과 위탁계약을 맺고 택배 지점들은 택배 기사와 배송 영업을 위탁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택배 회사의 배송 서비스를 한 단계 거쳐 위탁 받은 택배 기사는 택배를 배송한 후 건 당 수수료를 받습니다.

택배 기사들 대부분은 개인사업자로 자신들이 소유한 차로 일합니다. 수수료 수입으로 얻은 수익금 중 기름값과 차량유지비, 부가세, 전화비, 식대, 지점 운영비 등을 제하고 나면 택배 노동자들의 수입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택배 회사가 정한 배송 및 분실/파손 정책과 명령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고가 나서 다쳐도 택배 기사 자신이 처리해야 하고 배송이 잘못되어도 계약 위반으로 기사가 책임져야 합니다. "개인사업자인데 개인사업자의 자율성은 없고 노동자인데 노동자의 권리는 없는" 특수고용직으로 일하는 택배 노동자들의 사정을 이종철 작가가 자신의 경험담과 함께 담담하게 알려줍니다. 

책에서는 또 다른 하청구조도 보여줍니다. 택배 회사는 운수 회사에게 택배 운송 하청을 줍니다. 운수 회사는 화물차 운전 기사들에게 일감을 주고 수수료와 번호판 대여료 등을 받아갑니다. 어떤 이유로 운임료 지급이 미뤄지게 되면 화물 기사들은 돈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돈으로 화물차를 운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물 기사들은 화물차 운영과 생계를 위해 빚을 지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형 택배 회사의 출현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형 택배 회사는 택배 운송료를 낮추며 점유율을 높여갔고 시장의 40% 이상을 장악했습니다. 건당 천원하던 배송 수수료는 절반 가까이 떨어져 기사들은 더 많은 택배를 배송해야 이전만큼의 소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운송해야 할 물량은 많아지고 배송은 빨라져야 하니 모든 업무에서 속도가 중요해졌습니다. 노동자의 안전과 보호는 뒷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물 운송기사, 택배 기사, 까대기 알바 등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을 감수하면서도 위태로운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 환경을 이런 구조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시장에 맡겨 놓은 결과가 이렇다면 정부가 나서 택배 서비스와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노동에 대해 한 번쯤은 재고해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의 역할을 생각하다 보니 가까운 미래에 도래하게 될 자동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도 걱정됩니다. 택배 산업 구조를 보면 자동화의 물결에 크게 타격을 입을 것 같아 보입니다. 이미 아마존은 물류창고에서 로봇을 활용하면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고, 중국의 알리바바 역시 신규 물류센터에 로봇을 도입해 24시간 일하는 시스템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술이 택배 산업에도 적용된다면?

물론 아마존의 경우 물류센터에서 상자를 옮기던 직원들을 도입한 로봇을 관리하는 역할로 고용을 전환하였다고도 합니다만 로봇 기술이 지금보다 더 훌륭해진다면 어떨까요. 게다가 아마존은 드론으로 배송하는 기술도 가열차게 개발하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차는 화물운송에 가장 먼저 적용될 것으로 예상하기도 합니다.

택배 회사의 중앙 물류센터, 물류센터에서 지점을 오가는 간선 화물차, 지점에서 배송을 담당하는 택배 기사, 물류센터에서 택배 상하차 노동을 하는 까대기 알바 노동자. 택배 산업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로봇을 활용하는 자동화 기술에 매우 적합해 보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엔 이 노동들이 로봇에 의해 대체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은 택배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여러 단계의 하청 구조와 고된 노동 속에서 고생하고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엔 이들 중 상당수는 실업의 위협에 놓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래를 너무 부정적으로 그려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택배 산업 구조를 보면서 최근 기술 혁신인지, 착취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여객운송 산업에서의 갈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지금의 택배 산업 구조와 그 안에서의 노동환경과 노동자에 대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데 만화책 한 권 들고 앉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괜한 걱정을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최근 지속되는 기술혁신에 대한 소식들을 접하다보니 택배 산업에 미칠 영향까지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집니다.

<이명박과 그 일당들의 대국민 사기극을 파헤친 12년간의 탐사보도! 4대강 다큐멘터리 영화 '삽질' 원작>

“강은 누구의 것인가?” 오마이뉴스 김병기 기자가 쓴 <4대강 부역자와 저항자들>을 읽기 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물음이었습니다. 강 주변에서 강이 주는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강의 주인일까요? 아니면 일종의 공공자원으로서 강이 있는 나라 모든 국민들의 것일까요?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자연마저도 누군가가 소유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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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책에서 정수근 시민기자가 말했듯 “강은 인간만을 위한 공간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강은 스스로 살아 있는 생명체이고 다양한 생명들이 공존하는 생태계”라는 것도 다시금 환기합니다. <4대강 부역자와 저항자들>에는 누구의 것도 아닌 자연의 선물, 강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탐욕스럽고도 뻔뻔한 이야기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먼저 주변에 손에 잡힐 만한 물건들은 치우시기 바랍니다. 책을 읽다가 열받아서 주변 뭔가를 집어 던질 수 있습니다. 또 깨질만한 것들은 읽는 자리에서 멀리 두십시오. 역시나 분노로 탁자를 내리쳐 물건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혈압이 높으신 분들도 이 책을 펼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병세가 악화될 수 있습니다.

‘부자되세요’ 대통령을 뽑은 비용과 그가 남긴 부채

“국민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로 대통령이 된 이명박. 국민들의 탐욕을 효과적으로 자극해 표를 얻은 그는 공약으로 내걸었던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국민들이 반대하자 4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꿔 재정사업을 추진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반대 의견을 내는 시민단체를 파렴치한 단체로 몰아 제압했고, 엄청난 홍보비로 언론을 제어했으며, 사업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교수는 각종 연구용역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환경영향 평가 등도 법을 교묘하게 피해 졸속으로 진행하고, 사업 예산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습니다. 이렇게 4대강 사업은 22조 원이라는 엄청난 세금이 투입되며 강행되었습니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이 완료된 후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흐르는 강을 막아 악화된 강의 수질은 ‘녹조라떼’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키며 조롱거리로 전락했습니다.

온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줄 것 같았던 대통령을 뽑아 치른 비용은 4대강 사업 예산만 22조 원입니다. 게다가 4대강 주변 공원 조성 및 유지, 부실시공된 16개 댐 보수, 바닥보호공 보수, 녹조 제거 작업 등을 포함해 매년 6천억~1조원 가량의 세금이 4대강 유지관리 비용으로 사용됩니다. 이 세금을 복지에 사용했다면 어땠을까요?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의 말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국립대학 학생들을 공짜로 학교에 다니게 하면 1년에 2조원이 듭니다. 30조원이면 15년을 무료로 가르칠 수 있는 돈이죠. 전체 대학생들의 등록금을 무료로 하면 1년에 7조 원입니다. 최근에 아동 수당을 1인당 월 10만 원씩 주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 돈이 연간 3조원입니다. 고등학생들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한다면 1년에 2500억 원이면 됩니다. 4대강에 투입된 30조원을 복지에 사용했다면 국민들이 많은 혜택을 누렸을 겁니다.”(165쪽)


죄값을 치러야 할 사람들

4대강 사업은 이명박의 오만과 탐욕으로 덧칠된 사기극이었다고 김병기 기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학자, 정치인, 관료, 재벌, 검찰, 법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부역자들이 있었기에 이 사기극이 가능했다고 밝힙니다. 특히 언론은 국가의 재정사업을 검증하기는커녕 홍보비를 받아먹으며 사기극을 포장하기에 바빴습니다. 이 책은 국민 모두가 읽으며 아파해야 하겠지만 특별히 부역 언론인들이 반드시 읽고 반성하면 좋겠습니다.

김병기 기자 등 저항자들은 12년간 ‘대국민 사기극’을 추적하며 주범인 이명박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묻습니다. 박석순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 이만의 전 환경부장관, 김철문 전 청와대 행정관, 정종환 전 국토해야부 장관,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심명필 인하대 명예교수, 권도엽 전 국토해양부 장관 등을 끈질기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4대강 사업에 대해 책임있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기극에 부역한 대가로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뻔뻔하게 4대강 사업을 찬양하는 이도 있었고, 부역의 결과로 얻은 연구용역 참여실적으로 더 잘나가는 교수가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현 정부가 반드시 해야할 과제를 김병기 기자가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환부를 도려내듯이, 썩은 부역자들의 죗값을 물어야 한다. 고름을 짜내듯이, 영혼을 팔아 호가호위하면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상식을 세워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지난 과오를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군 이래 최악의 사업이라는 4대강 사업의 아픔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10-11쪽)


또 다른 4대강 사업을 방지하려면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은 감사원 감사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예산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규명되지 않았으며, 이 거대한 사기극에 대해 처벌받은 이도 없습니다. 김병기 기자가 책에서 강조했듯 청문회라도 열어서 책임이 있는 이들을 철저하게 밝혀내고 처벌해야 합니다. 책임자 확인 및 처벌과 함께 또 다른 사기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책에 소개된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법률에 반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회는 막대한 손실을 낸 예산 낭비 사업에 대해 처벌하는 일명 ‘링컨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공공재정 허위 부정청구 등 방지법’을 통해 국가 재정을 옳지 않게 사용한 행위에 대해 처벌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가장 필요한 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문재인 정부는 4대강 사업 이후로 소요되는 국가 예산을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하면 좋겠습니다. 국민들 각자가 우리들 세금이 어떻게 버려질 수 있는지 뼈아프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마이뉴스라는 채널을 통해 4대강 사업의 실체를 밝혔던 ‘4대강 독립군’들의 역할을 정부가 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들 대다수에게 사기극의 실체를 알리기에는 오마이뉴스라는 채널은 한정적입니다. 흐르는 강을 가로막았던 보를 열었을 때 살아나는 금강을 생생하게 보여줬던 사실들을 주요 공중파를 활용해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4대강 주요 보 혹은 댐들을 개방할 것인지, 더 나아가 철거할 것인지 논의가 계속될 것인데 이 때에도 명확한 사실이 국민들에게 공유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4대강 사업은 언제든지 다시 출현해 국민들의 세금을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4대강 사업 저항자들의 12년 간의 분투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책을 덮으며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저항한 최병성 목사(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4대강 사업이라는 괴물은 탐욕이 꿈틀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 살고 있다.”(162쪽)

지상파 아침 방송에서 20대 여성이 인터뷰를 하다가 두 팔을 들어 풍성한 겨드랑이 털을 보여준다면 시청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풍성한 겨드랑이 털 뿐만 아니라 그 여성의 다리에도 털이 길게 자라 있다면 어떨까요? 이런 여성을 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여성스럽지 못하다’며 미간을 찌푸릴 것입니다. 겨드랑이와 다리에 난 털을 깔끔하게 면도하는 것이 ‘여성답다’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2012년에 영국의 한 아침방송 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방송에 출연한 주인공 에머 오툴은 이를 계기로 온갖 미디어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여성 체모 세계 대표’에 등극했다고 스스로를 칭했습니다. 이 여성은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이라는 틀에 따라 여성성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과 그것을 타파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1년 반 동안 제모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습적인 사회적 여성성에 반기를
 

 
‘여성 체모 세계 대표’ 에머 오툴이 면도를 하지 않은 행동은 사회가 규정하는 ‘여자다움’과 그녀가 그것에 저항하려 했던 실험들 중 하나였습니다. 에머 오툴은 관습적 여성성 타파를 위한 다양한 실험들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경험과 생각을 <여자 다운게 어딨어>라는 책에 꾹꾹 눌러 담아냈습니다.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여자다움’이라는 압박이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를 어떻게 견고하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의사가 “공주님입니다!”라고 외친 순간부터 우리의 몸은 우리를 정의하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부호화되고 의상이 입혀진 신체는 우리를 남성과 여성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서 사회 내에 인위적인 구분을 만들며 어떤 젠더의 사람들이 정체성을 당당하게 수행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그러니 우리가 수행하는 여자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그로부터 이득을 보는지. 그리고 새로운 각본을 써보자.”(26-27쪽)


가정과 학교에서의 교육, 각종 미디어, 어렸을 때 놀이 등을 통해 배운 여성이라는 사회적 기준은 여성의 선택을 큰 폭으로 제한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여성들은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노동시장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로 선택한 것일까요? 여성들은 정치권에 들어가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까요? 여성들은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역설합니다.

면도를 그만두기로 선택했던 저자도 계절이 바뀌면서 탱크톱이나 치마를 입고 외출을 하면서 느끼는 사람들의 조롱섞인 시선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문제에 대해 “아침 출근 때마다 정상적이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과 자리를 비울 때마다 동료들이 당신의 체모에 대해 뭐라고 수근거릴지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선택지가 이 둘뿐이라면 그것을 진짜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생물학적 성도 스펙트럼

저자는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자기 정체성이 정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별을 연극에서 주어지는 하나의 역할로 보고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저자는 몸에 난 털을 없애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남장도 해보고 삭발도 해 봅니다. 이렇게 달라진 ‘분장’에 따라 자신을 유형화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에머 오툴은 생물학적 성별의 차이도 하나의 역할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또한, 우연히 참가하게 된 단체 누드 촬영에서 남녀 사이의 신체 차이가 그리 확연하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자는 생물학적 성별을 근거로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들이 불공평할 수 있고, 개인의 신체적, 지적 능력과 연관성도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생물학적 성도 사회적 젠더와 마찬가지로 ‘스펙트럼’이라는 말이 인상에 남습니다.

인터넷 서비스 가입, 병원 입원 등을 위해 개인정보를 적는 란을 보면 성별은 남자와 여자뿐입니다. 생물학적 성별은 당연히 남녀 둘 뿐이라 인식해왔던 제게 ‘간성’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저자가 다시금 알려주었습니다. 생물학적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강제하게 된 이유가 성별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저자는 알려줍니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가 다양한 남성적, 여성적 특징을 지니는데다 간성까지 존재하니 성을 스펙트럼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성을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이 불평등한 우리 사회 내에서 신체의 차이가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간성을 인정하고, 생물학적 성이 이분법이 아닌 스펙트럼임을 인정하고, 젠더가 생물학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런 합리화는 힘을 잃는다. 이는 곧 남녀 사이의 사회적 불평등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한다.”(158쪽)


갈등 없는 변화는 없다

에머 오툴은 이분법적 성역할에서 해방된 세상을 위해 위와 같은 신체적 행동에 더해 ‘말에서 성별을 없애려는 실험’도 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남성 관련 어휘는 칭찬, 긍정의 의미로, 여성 관련 어휘는 모욕,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며 젠더 이분법을 공고히 해왔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성차별적 편견이 녹아 있는 어휘나 표현들의 대안을 찾아보는 시도를 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저자가 제안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 대명사 사용, 성별이나 장애에 대한 편견이 섞이지 않은 새로운 욕 발명, 경멸적인 표현들을 칭찬으로 바꾸기 등을 해보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언어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점을 기억하고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들에서 성별에 따른 편견을 없애가는 노력을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학습한 성차별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에머 오툴은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요즘 대한민국의 젊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분노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도 다르게 행동하는 여성으로 생활하면서 주변 세계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적 세상은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머 오툴은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거나 화나게 만들지 않고서 성역할을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변화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며, 그것이 올바른 변화일 경우 기존 체제의 저항이 더욱 강렬했던 것을 저도 조직 생활을 통해서 경험한 바 있습니다. 에머 오툴은 대표 ‘프로불편러’라 할 수 있겠습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메시지를 부드럽게 전달해야 한다고, 보다 상냥하게 굴어서 남자들도 이 운동에 합류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건 헛소리다. (중략)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빠와 남동생에게 제 몫의 집안일을 하라고 부탁해왔다. 크리스마스나 가족모임이 있어 집에 올때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여자가 남자의 시중을 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성차별적인지 일깨우려 애썼다. 결국은 어느 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집에 가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제야 문제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정말 놀랍고 감사하게도, 그들은 변하려 노력하고 있다.”(351-2쪽)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에어 오툴이 독자에게 제안하는 노력들 중 남성으로서 제가 해볼 만한 시도들을 찾아봤습니다. 문학, 영화, 텔레비전, 공연 등에 내재된 성차별적 요소들을 찾아보고 문제를 제기하기,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성차별적, 인종주의적, 계급주의적, 장애인 차별적인 언어습관을 발견하고 고치기, ‘남자다움’이라는 관습적 사회적 역할에 도전하는 실험들(치마 입어보기 등)을 고안해 실천해 보기. 그리고 <여자 다운게 어딨어>와 같은 책을 계속 읽으며 페미니즘 배우기.

여성이라면 저자가 했던 체모 기르기, 남장해보기, 삭발 등 여성의 신체에 씌워진 사회적 금기에 도전해보는 시도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미디어에서 규정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순응하지 않는 자기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실험들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로 인해 불편해 하는 주위 세계에 아랑곳하지 않기.

"아빠 나 이 게임 하나만 깔면 안돼?”
“아빠 나 유튜브 봐도 돼??”
“아빠 나 밤 늦게까지 놀면 안돼?”
“아빠 나 젤리 좀 먹어도 돼?”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은 아직까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없습니다. 뭔가를 하려면 엄마아빠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또 어떤 일들은 엄마아빠가 허락을 해주지 않아서 시도조차 못하기도 합니다. 아빠가 내거는 조건에 응하며 끈질기게 협상을 하다가 한숨을 푹 쉬며 불만스런 표정으로 딸은 묻곤 합니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데?”

하하! 언제부터 아이 마음대로 하게 해 줄까요? “너도 아빠 만큼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하렴.”이라고 대답하면 딸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얼굴엔 불만이 한가득입니다. 저 역시 온갖 불만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초등학생인 딸의 마음을 얼마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미 어른이 된 후 아이를 바라보기에 딸의 마음을 온전히 공감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면 한없이 높디 높은 나무에도 쭉쭉 뻗은 가지도 쉽게 닿겠지
어른이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돌던 어려운 질문도 풀릴거야
어른이 되면 콜라 실컷 마시고 늦게 잘 거야 또 출근도 내맘대로
아침이 오면 눈알 다 빠지도록 밤 새서 만화책만 볼 거야 다 괜찮겠지 어른이니까"

어른이 되면 아무리 버겁고 힘겨운 짐도 버텨낼 수 있겠지 씩씩하게
어른이 되면 밤마다 날 괴롭힌 괴물들도 무찌를 수 있겠지 용감하게
어른이 되면 엄만 재미없는 척 유치한 거라며 참는 것들 다 할 거야 난
아침이 오면 눈부신 햇살 아래 온종일 뒹굴 대며 놀거야 다 괜찮겠지 어른이니까”

-뮤지컬 <마틸다> ‘어른이 되면’ 중에서-


아이의 불만을 생각하다 이전에 봤던 뮤지컬 <마틸다>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어릴 땐 정말 어른이 되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른이 되니 뮤지컬 속 아이들의 노래처럼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더군요.생각만큼 씩씩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시간도 원하는대로 쓸 수 없습니다.

‘어른이 되면 하라’는 아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아이,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공감해주지 못하는 아빠.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녀와의 대화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 입장을 생각하고 부모와 말할 수는 없으니 아빠인 제가 동심을 회복해 어린 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동심을 회복해 보고자 뮤지컬의 원작인 <마틸다, 로알드 달 지음>를 읽습니다.
 

 

아이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못된 부모를 둔 소녀 마틸다. 그런데 마틸다는 세 살 때 스스로 읽기를 터득하고 그 이듬해엔 마을 도서관에 다니며 고전 문학작품들을 모조리 독파할 정도로 똑똑합니다. 사기를 쳐 돈을 벌면서 그것을 자랑하는 아빠에게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건 나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감한 아이이기도 합니다. 마틸다는 자신을 막 대하는 아빠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당찬 아이입니다.

현실에선 아이가 어른을 골탕먹이는 것이 무척 어렵겠지만 이야기 속에선 가능합니다. 마틸다는 아빠 모자에 접착제를 듬뿍 발라놓기도 하고, 친구에게 앵무새를 가져다가 부엌 벽난로에 숨겨놔 유령이 있는 것처럼 해서 아빠 엄마를 골탕먹입니다. 샴푸통에 과산화수소를 넣어서 아빠 머리가 탈색되게 하기도 합니다. 깜짝 놀라 허둥대는 부모를 보며 마틸다는 통쾌해 합니다.

마틸다의 부모만큼 못된 건 아니지만 가끔씩은 어리다는 이유로 아이를 제지하는 아빠를 보면 제 딸도 저를 골탕먹이고 싶을 때가 있겠지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아빠는 하면서 나는 왜 못하게 하는데?”라는 말을 들을 땐 참 난처합니다. 곤란해 하는 제 모습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는 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럴때면 제 딸도 마틸다처럼 통쾌하겠죠? 아이앞에 떳떳한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딸 교육에도 관심이 없는 부모탓에 마틸다는 또래보다 조금 늦게 학교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마틸다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주는 담임 하니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선생님은 마틸다의 총명함을 알아채곤 마틸다의 성장을 위해 교장선생님과 마틸다의 부모님에게 마틸다의 천재성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니선생님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니선생님은 마틸다를 자세히 관찰하고 마틸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관계를 맺어갑니다.

집안의 폭군이 아빠였다면 학교에서의 폭군은 트런치불 교장선생입니다. 교장선생님은 수업 중 트집을 잡아 아이들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해머던지기를 하듯 아이들을 던져버리는 무지막지한 사람입니다. 교장선생님의 폭력에 맞서 선생님을 골탕먹이려는 친구들도 있지만 교장선생님에게 호된 반격을 당하곤 합니다. 친구 중 하나가 교장선생님 물컵에 도마뱀을 넣어 골탕먹이려 할 때 마틸다는 자신에게 생각만으로 물건을 움직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틸다는 물컵과 함께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비밀을 마음 속에 꼭꼭 감추고 있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틸다가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기이한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롭고 이해심 많은 어른이었다.”(171쪽)


자신의 능력에 스스로도 놀랐던 마틸다는 고민 끝에 자기 재능을 알아봐줬던 하니선생님에게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마틸다를 매우 많이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하니선생님은 마틸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임에도 선생님은 가능하면 마틸다를 이해하려는 쪽으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떻게 그런 능력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믿을 수 밖에요. 이 일을 통해 마틸다와 하니선생님은 서로를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어느 날 하니선생님도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사를 마틸다에게 말합니다. 불행한 인생사가 모두 하니선생님의 이모인 트런치불 교장선생님으로 온 것이란 사실을 안 마틸다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마틸다는 하니선생님의 복수를 위해 생각으로 물건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되도록 열심히 연습합니다. 물건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마틸다는 드디어 하니선생님의 삶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복수를 감행합니다. 하니선생님의 이모인 트런치불 교장선생님이 그 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폭로함으로써 복수를 완성합니다.

책에 나오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너무 극단적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무관심한 마틸다의 아빠와 엄마, 서슴없이 아이들에게 폭력(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언어 등의 억압)을 휘두르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제게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요. 하지만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제압하려는 욕구가 제 마음 한구석에 항상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마틸다의 재능을 알아채고 진심으로 도우려는 마음을 가진 하니선생님처럼 아이들을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어른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른이 되었어도 억압과 위협에 쫄아 위축되어 있을 때도 많은데 마틸다처럼 쫄지않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도 갖추고 싶어집니다. 아이들과 함께 마틸다를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들로부터 의외의 위로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한강,<소년이 온다> 중에서-

인간이 권력을 얻기 위해선 못할 짓은 없는 걸까요? 죽어야 하는 이유도 모른채 무참히 짓밟혔던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물음은 또 한 번 5월을 맞은 2019년 시민의 하나인 제 머릿속에서도 떠나지 않습니다. 당시 출판된 지 두 해가 지났던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힘겹게 읽으며 ‘5.18 민주화운동’을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지도 3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틈나는대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책, 기사, 영화 등 기록물들을 접하며 5.18을 조금은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은 여전히 ‘나’의 이야기는 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이 고통의 역사를 겪지 않은 이들에게 그것이 온전히 내 이야기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기억하고 진실과 대면하며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있을 뿐.

역사 왜곡을 좌시할 수 없다! 교과서를 펴자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 학살의 주범들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여전히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을 보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5.18의 진실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왜곡하려는 이들이 이 땅에서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이유는 온전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독재의 잔당들과 의식들을 몰아낼 수 있을까요?
 

 
올 해엔 각 가정에 5.18 교과서를 한 권씩 마련해 온 가족이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5.18기념재단이 기획하고 김정인, 김정한, 은우근, 정문영, 한순미 다섯 사람이 함께 쓴 <너와 나의 5.18>엔 ‘다시 읽는 5.18 교과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그 동안 5.18 기록물들이 민주화운동 당시 사실을 확인하고 알리는 역할을 했다면 이 책은 역사적 사실에 더해 5.18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를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합니다.

특히 5.18을 둘러싼 왜곡과 거짓말, 망언이 국회에서까지 남발되고 있는 요즘 2019년의 대한민국 시민들이 집중해서 살펴볼 부분은 이 책 5장(5.18, 진실과 거짓말: 그들은 왜 5.18을 왜곡 조작하는가?)과 6장(모두의 5.18로 가는길)입니다. 살았어도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온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아픔을 주지 않도록 전 국민적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5.18

5장에서 은우근 교수는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주체, 왜곡조작의 내용, 왜곡의 이유와 영향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5.18당시 군사반란 세력이 남겨놓은 유산을 먹고 살아가는 현재 극우세력과 그들에게 협력하는 언론들은 여전히 거짓으로 확인된 사안들을 가지고 논란을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이러한 행태를 그냥 두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은우근 교수가 인용한 문구들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처음에 부정되고, 그다음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괴벨스, 나치의 선전장관)

“그것을 행했다라고 나의 기억이 말한다. 그것을 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나의 자존심이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마침내 기억이 굴복하고 만다.”(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196쪽)


극우세력들의 가당치도 않은 왜곡과 날조를 그동안은 무시해 버렸으나 은우근 교수의 지적을 접하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은우근 교수는 국회, 법원 등 국가와 시민사회가 역사적 진실과 법률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하는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의 의도를 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날조의 의도에 그들이 감추려 했고 또 감추려 하는 5.18의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점과 평가의 다양성을 보장한다 하더라도 반인륜적 행위와 반민주적 범죄를 미화하는 것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이는 과거 청산이 근본적으로 미진한 탓이기도 하다…무엇보다 교육을 통해 5.18의 의의와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 진실이 널리 알려지고 학습될 때, 사회 전체가 민주주의를 향해 확실하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231쪽)


정부와 시민사회는 역사 왜곡 세력들이 우리 역사와 민주주의를 유린하려는 행위들를 면밀히 살피고 처벌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면 엄격하게 벌해야 할 것입니다. 이전처럼 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쉽게 사면하고 용서해서는 지금까지와 같은 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은우근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왜곡과 날조를 방관하면 우리 사회의 건강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나’의 5.18로 나아가는 길

김정한 교수는 6장에서 ‘어떻게 하면 5.18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함께 하자고 제안합니다. 우리 사회가 5.18을 ‘달력에서만 기억하는 기념일’로 여기게 되면 5.18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여전히 진행중인 고통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18에 죽어간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기념은 끝나지 않았다는 김정한 교수의 말을 다시 읽게 됩니다.

전 세계인이 공감하게 된 홀로코스트의 사례를 들며 김정한 교수는 우리도 5.18의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감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합니다. 홀로코스트가 인류의 비극이 되기까지는 서적, 영화, 연근 등 문화 매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홀로코스트의 당사자들의 경험을 ‘개인화’하여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희생자들이 ‘보통의 나’와 동일시 된 것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사례처럼 5.18도 소설, 시, 만화,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으로 재현되어 왔지만 대중들의 심리적 동일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김정한 교수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안내를 통해 그동안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관찰했던 소설, 만화, 영화 등을 ‘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피해자라면? 혹은 가해자라면?’이라는 질문을 하며 찬찬히 읽었습니다.

“‘나’는 군인이 쏜 총에 하나뿐인 혈육 진우를 잃었다!”
“‘나’는 군인이 쏜 총에 졸지에 엄마를 잃었다!”
“‘나’는 국민을 향해 총을 쏘는 군인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총을 들었다!”
“‘나’는 살았으나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으나, 결국 ‘나’는 폭도라 불리고 말았다!”

“‘나’는 아무 죄도 없는 가녀린 소녀를 죽였다!”
“‘나’는 평생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평생 속죄와 참회의 삶을 살고자 한다!”
“나도 사실은 용서를 빌고 싶었다!” (본문에서 발췌 248~252쪽)


5.18 희생자의 외침, 그리고 가해자들의 고백이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 ‘다시 읽는 5.18 교과서’를 통해 이전에 읽었던 5.18관련 기록물들을 찾아보며 다시 한번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5.18국립묘지를 참배하러 간 학생들이 비석에 쓰인 이름과 사연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추모하는 <오월상생>이라는 애니메이션처럼 “죽어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마음으로” 돌아보고 있습니다.

“5.18이 국가 주도의 기념일과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과거로만 기억되는 한, 5.18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의 꿈은 실현되기 어렵다. 우리 모두가 5.18을 1980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에도 일어날 수 있는, 그렇지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감성으로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 5.18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동시에 모두의 5.18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259쪽)

어린 아이를 둔 부모님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자녀들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해주셨겠죠? 아마도 자녀의 성별에 맞게(?) 선물을 준비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마트에 들렀다가 어린이 장난감 코너를 지나가는데 장난감을 성별에 따라 구별해 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여자 아이들 장난감은 대체로 핑크색계열이고, 남자 아이들 장난감은 파란색계열입니다.

 

마트 어린이 장남감 코너ⓒ 이훈희

 
장난감 코너를 이렇게 구분해 놓은 건 여자 아이들은 핑크색을 좋아하고 남자 아이들은 파란색을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성별에 따라 색상을 구분해 놨기 때문에 아이들이 선호하는 색상이 만들어지는 걸까요? 여자 아이 둘을 키우면서 딱히 색상에 대한 선호를 두지 않으려고 했음에도 아이들이 핑크색 장난감들을 좋아했던 것을 보면 유아기 때 선호하게 되는 색상은 타고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책표지ⓒ 나눔의집

 
일본인 작가 호리코시 히데미도 어린 딸이 핑크색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의문을 갖기 시작해 <여자아이는 정말 핑크를 좋아할까>라는 책을 썼습니다. 엄마가 블랙 마니아여도, 칙칙한 색 옷만 입어도 여자아이들은 유아기 때 대체로 핑크색에 빠져든다는 점을 저자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딸 둘을 둔 아빠인 제게도 흥미로운 주제이고 의문이었습니다.
 

“국경을 초월해서 이렇게 많은 여자아이들이 핑크(혹은 프린세스, 반짝반짝거리는 것, 요정 등)를 좋아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회적인 영향일까? 아니면 여자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핑크를 좋아하도록 타고나는 것일까? 설령 이것이 타고난 성질이라 할지라도 왠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핑크색에 왜 이런 찜찜함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과연 핑크색에서 또 다른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12쪽)


아이가 고정된 성역할에 갇히지 않기를

부모로서 아이들이 가능하면 특정한 틀에 갇히지 않고 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이가 어느 한가지를 너무 좋아하게 되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어려서부터 성별에 따른 성역할에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틀에 갇혀 살아가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자 역시 자신의 딸이 미용, 소꿉놀이, 요리 등 기존의 여성 역할을 답습한 장난감들에 영향을 받아 고정된 성역할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민과 의문을 이 책에 차근차근 풀어냈습니다. 핑크가 어쩌다가 여자의 색이 되었는지 역사를 살피고, 기존 여아용 장난감과는 다른 접근을 하면서 핑크에 저항하는 운동을 소개합니다. 더 나아가 여성의 사회진출, 특히 이공계 분야로의 진출문제까지 핑크와 연관지어 이야기합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선 핑크색과 여자아이의 관계를 넘어 핑크와 남자아이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 부분을 통해 저도 ‘남자다움’이라는 기존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나뉜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범위를 생각보다 크게 제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같은 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합니다.

핑크는 여성의 색? 역사는 짧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시대엔 여성 중심 문화가 활기를 띠었는데 이 때 귀부인들은 핑크색 옷가지, 가구, 식기 등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장미를 사랑한 마리 앙투아네트, ‘퐁파두르 핑크’라는 사기그릇 색에 이름이 사용된 퐁파두르 후작부인 등이 유명한 인물들입니다. 기원은 기껏해야 200여년 정도이고 이런 경향이 심화된 것은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고 하니 ‘핑크=여성의 색’이란 편견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여성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보석, 스타킹, 하이힐, 리본과 레이스 등을 19세기 이전 서양에선 남성들이 권력 과시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과 민족학이 계기가 되어 화려한 장식은 열등한/미개한 혹은 하류계층 남성들이 하는 것이란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른 남성이 예쁜색이나 장식을 좋아하는 것을 ‘계집애 같은’ 행위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프랭클린 루즈벨트ⓒ 나눔의집

 
무엇보다 신선했던 건 책에 실린 30개월 무렵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진이었습니다. 1884년 사진인데 레이스 달린 치마, 끈 달린 구두, 긴 머리를 보면 딱 여자아이입니다. 당시엔 특별히 남녀 구분 없이 아이들에게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아동심리학이 등장하면서 남자 아이들의 자위, 동성애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가설 등으로 인해 남아들 옷이 ‘남자다워’지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 미국에서 핑크는 여성스러움의 상징이 됩니다. 핑크와 여성이 밀접하게 연결된 역사는 결코 길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자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핑크색 용품들로 둘러싸이게 된 이유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추정하는데 그럴법 합니다.
 

“전쟁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무엇보다도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이 풍요로움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이 전쟁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가정적인 존재임을 어필해야 한다. 그래서 핑크색 옷을 입고 남편에게 헌신하는 순종적인 모습,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스러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적절한 백치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당시에 핑크가 여성성과 강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찍이 여성들의 ‘입신 출세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42쪽)


아들이 핑크를 좋아하고 귀여움을 추구한다면?

책에서 다룬 여자아이와 핑크색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보다 관심이 갔던 부분은 남자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압박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여아용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브로니’들은 또래 아이들에게 조롱과 무시를 당한다고 합니다. 제 어린시절을 돌아봐도 그랬던 것 같고, 책을 읽으면서 남자아이가 핑크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떠올려보니 뭔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여성스러움보다는 남성스러움에서 벗어나는 이미지에 보다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게도 기존의 성별 이미지가 고착되어 있는 것이겠죠. 남자아이에게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미국의 경우 귀여움을 추구하는 남자아이들이 심하게 차별을 당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남자아이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자는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취향에 대한 억압을 받게 되는 사회를 ‘숨막히는 사회’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남자아이에 대한 억압에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 제안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이는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는 만큼 남성이 가정에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아이 자신이 ‘가와이’를 버리는 일 없이 그 영역에서 감성을 다듬어 간다면, 성장한 뒤에 여성에게 ‘순진무구한 객체로 있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남성 부재의 육아 현장에서는 남성성을 텔레비전 방송이나 소년 만화, 게임 등에서밖에 배울 수가 없다. 대중문화는 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표현이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점점 더 치우치기 마련이어서 배틀이나 경쟁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아이가 롤모델로 삼을만한 현실적인 남성상을 기르기 어렵게 만든다.”(238쪽)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을 가진 부모들로 인해 자녀들이 억압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남자아이가 핑크색이나 귀여운 것을 좋아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저자는 콜린 스톡스 씨의 TED 토크를 인용하면서 남자아이를 겨냥한 영화에서 배우는 남성성은 주로 폭력으로 악인을 쓰러트리는 영웅이 주류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콜린 스톡스 씨가 말한 것처럼 아들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시급해 보입니다

“만국의 노동자(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문구인데 너무 유명해서 공산당 선언을 다 읽지 않은 사람들도 한 두번 쯤은 들었봤을 익숙한 말입니다. 최근에도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거나 광장에 모여 시위를 할 때 자주 사용되는 구호이기도 합니다. 매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이 외침을 떠올리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가슴 한 켠에서부터 힘이 솟아납니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꾹꾹 눌러 담은 공산당 선언은 출판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노동자 민중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분업과 기계화로 인해 단순한 도구나 부품처럼 사용되던 노동자들은 사회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19세기 후반 노동자들 중심의 투쟁으로 사회변혁을 이뤄냈던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남미 등지에서 이 선언이 혁명으로 실현되기도 했습니다.

<공산당 선언>만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도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내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저작이 있습니다. 당시 노동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박노해가 쓴 시집 <노동의 새벽>입니다. 1984년 현장 노동자의 손에서 나온 이 시집은 ‘잊혀진 계급’이라는 노동자들의 “영혼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이 목소리들이 모여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84의 노동자 vs 2019의 노동자

노동자 박노해가 노동 현장의 아픔과 분노, 그리고 희망을 시에 담아낸지 35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얼마나 나아진 환경에 있을까요? 평균적으로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 환경이 좋아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노동현장에선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와 안전문 사이에 끼어서, 석탄 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서…

"인간의 삶이란, 노동이란
슬픔과 분노와 투쟁이란
오래되고 또 언제나 새로운 것"
 -스무 살의 새벽 노래-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대기업 혹은 공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잊혀진 계급’인 것 같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각종 임시직 노동자로 잘게 나누어져 노동자들끼리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 노동현실은 세월이 흘러가는 것만큼 비례해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노동현장엔 오래된 슬픔과 분노와 투쟁이 존재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멈출 수 없지>라는 시에서 보여준 노동자의 모습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사장님, 경찰, 판검사, 공무원 등 힘있는 사람은 박노해 노동자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입니다. 박노해 시인이 꿈꾸던 “서로를 받쳐 주는, 모두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가면 갈수록 바쁘게 뛰어야 하는
갈수록 가진 것 없고 졸라매야 하는
고도로, 번영으로
급성장하는
우리는 복지국가 대한민국
뺑이치는
노동자” 
-멈출수 없지-


‘노동’의 자리를 꿰어찬 ‘근로’

더구나 우리 사회는 박정희 개발 독재 시대를 보내면서 ‘노동’을 지우고 그 이름을 ‘근로’로 대체했습니다. 여기에는 노동자를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국가에 부역하는 근로자로 삼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의 주인공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아니었고 권력과 부를 가진 사용자들이었습니다. 이 국가적 세뇌에 노동자들 스스로도 저항하지 못하고 노동이란 이름을 빼앗긴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노동절’도 ‘근로자의 날’로 바꿔버렸습니다. 노동자는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산업 역군인 근로자가 된 것입니다. 노동법도 근로기준법입니다. 심지어 헌법에서조차 노동은 지워지고 근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국회의원들도, 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는 노동부 공무원들도, 신문도, 방송도, 심지어 노동자를 스스로도 ‘노동자’나 ‘노동’이라는 단어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형식적인 민주화를 이뤄냈다고 하는 87년 이후로도 노동자는 언제나 사회의 주변인이었습니다. 극우 언론들에선 귀족노동자라는 말을 만들어냈지만 노동자는 여지껏 귀족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 박노해가 꿈꿨던 “노동의 햇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이 시집을 읽으며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지를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노동자로 어떻게 살 것인가?

노동자 박노해는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깊은 불안을 느꼈습니다. “죄진 적도 없고/ 노예살이 머슴살이하는 것도 아닌데/ 풍요로운 웃음이 하늘에 닿는/ 안정과 번영의 대한민국 땅에서/ 떳떳하게 생산하며 살아가는데/ 왜 이리 종놈처럼 불안한 세상살이인가?”라면서 마음을 토로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자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자 박노해가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하루를 보낸 후 조촐한 밥상을 앞에 두고 평온한 저녁을 맞이할 소박한 꿈을 갖기 위해 노동자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에서 시작하면 좋을 지 실마리를 35년전 박노해 시인의 시 속에서 찾아봅니다. 당시 20대였던 박노해 노동자는 생각하지 못하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말만 앞세우는 것도 물론 허울 뿐인 삶이라 봤습니다. 우선은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서
생각도 못 하고 사는 놈은 죽은 송장이여
말도 못 하는 놈은 썩은 괴기여
테레비만 좋아라 믿는 놈은 얼빠진 놈
이빨만 까는 놈은 좆도 헛물
실천하는 사람,
동료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노동자만이
진실로 인간이제
진짜 노동자이제” 
-진짜 노동자-

“그래, 어둠에서 어둠으로
끝없는 노동 속에 절망하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
슬픈 눈물로 기름 부어 타오르며
우리들 손에 손 맞잡고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말자
우리 품에 안아야 할
포근한 석양빛의 휴식과 평화
우리들의 권리를 찾을 때까지
슬픔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마주 잡은 손들을 놓치지 말자” 
-석양-


연대를 통해 노동의 햇새벽으로

의식이 깨어난 노동자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는 함께 손을 마주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극도로 분열되어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노동자 계층. 이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마땅히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외쳤던 것처럼, 박노해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힘을 모으는 것 뿐입니다. 그나마 상황이 나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먼저 손을 내밀어 취약한 환경에 있는 노동자들을 품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랑스러운 노동자의 이름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헌법에서 ‘근로’를 지우고 ‘노동’을 되찾고, ‘근로기준법’을 ‘노동법’으로 바꾸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도 이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먼 일인 것 같아 보이지만 내년 총선에선 노동자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더 많아질 수 있도록 후보자들을 면밀히 살피고 투표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말로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알았던 20대 박노해 시인의 고백을 되새기며 2019년 ‘노동절’을 보내고 싶습니다.

“노동운동을 하고부터
동료와의 깊은 신뢰와 나눔과 사랑 속에
참말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네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신뢰와 사랑 속에
동료를 위해 사는 것처럼 큰 희열이 어디 있을까
라면 한 개 쓴 소주 한 명을 노놔 먹어도 웃음꽃이 피고
불안함과 경계가 없이 너나가 우리로 다 함께
환히 열린 하나 됨 속에서 해방의 기쁨을 나는 맛보네
나의 눈물이 동료들의 웃음이 되고
나의 고통이 동료들의 기쁨이 되고
나의 아픔이 우리들의 희망이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뜻깊은 생인가” 
-아름다운 고백-

봄꽃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4월. 꽃을 즐길 수 있는 주요 거리들엔 완연한 봄을 맞이하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필자의 고향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부도로 가는 길도 주말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일 게 눈에 보입니다. 이 지역은 서울 근교에 있는데다 꽃구경도 하고, 바다내음도 맡고, 해산물 요리도 즐길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저도 고향집을 방문할 때면 가족들과 종종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가는 길목 선감도라는 곳에 선감학원이라는 소년 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1982년까지 운영되었다고 하니 충격이었습니다. 지난 해 오마이뉴스 이민선 기자가 쓴 <소년들의 섬>이라는 책을 통해서 뒤늦게 알았습니다. 평소 종종 다니던 곳에 이토록 잔혹한 국가폭력의 역사가 있었다니…가까운 주변에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 검색창에 선감도를 입력하니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뜻있는 사람들이 선감도 수용소의 잊혀진 아픔을 기억해내고 진실을 밝히려 노력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일본 식민지 말기에 만들어져 1982년까지 운영되었던 선감학원은 4.3이나 5.18과 같은 국가폭력 사건들만큼 폭넓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뼈아픈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선 기자는 선감학원에서의 인권유린 속에서도 살아 남았던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의 여전히 고통스러운 인생이야기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어렵게 듣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아픈 역사가 오롯이 담긴 책이어서 수월하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름은 학원, 실제는 지옥같은 수용소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나쁜 짓을 할 것 같은 8~18세 소년들을 잡아다가 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소년 감화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 잔인한 인권유린 시설을 해방 후에도 없애지 않은 채 군사독재 시절까지도 운영했습니다. 박정희 독재 시절엔 사회를 정화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납치하기도 하고, 미아보호소에서 막무가내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선감도로 끌려온 아이들은 강제노동과 폭력(성폭력)에 시달리며 죄수처럼 살았습니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너무 어린 시절부터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기에 지옥같았던 수용소를 벗어나서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수용소를 나와서도 아무런 기반 없이 혼자 힘으로 세상을 버텨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기억을 힘겹게 떠올리며 저자의 인터뷰에 응했을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책장 한장을 넘기는게 미안할 지경입니다.

수용소에서 그리고 이후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이 책 한 권을 읽고서 감히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삶이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이야기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뒤늦게 비극적 역사를 알게 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선감학원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에 기억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이 사건의 진실이 조금이라도 알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이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앞장서왔던 역사학자 정진각 소장은 처절하게 삶을 이어온 피해자들에게 지금이라도 국가 차원에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정 소장의 노력만으로는 힘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 책을 읽고 선감학원에 대해 알게 된 시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정 소장과 뜻을 모은 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폭력 사건들 만큼 논의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부나 경기도는 선감학원의 비극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없다.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 또한 거의 없었다. 정 소장을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이 선감학원의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선감학원의 비극 대부분은 아직도 피해자들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20쪽)


선감학원을 거친 삶은 고통 그 자체

1963년 선감학원에 수용되었던 열 살 남짓 된 쌍둥이 형제 중 형은 이듬해 작은 꽃신 하나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왜 끌려왔는지도 모른 채. 관도 없이 묻혔던 형의 유골이 발굴되었을 때 유골을 받아든 사람은 가까스로 생존해 이제는 환갑이 넘은 쌍둥이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이 기억하는 선감학원은 굶주림과 지독한 매질이었습니다. 형이 죽은 후 동생은 운좋게 선감학원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이후의 삶도 그리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선감학원을 겪은 뒤에는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어요. 늘 불안한 거에요. 그러다 보니 앞장설 일이 생겨도 나설 수가 없고, 사람 사귀는 것도 두렵고.”(47쪽)


동생은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막노동, 운전 등 평생을 성실히 일했지만 사글셋방에서 살고 가족도 없다고 합니다. 인터뷰에 응했던 당시에도 허드렛 일이라도 찾아 일해야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파괴해버린 국가폭력 사건인데 가해자도 책임자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이 더욱 원망스럽습니다.

서울에 있는 삼촌 집에 가다가 남루한 옷차림을 이유로 경찰에 납치되듯 끌려갔던 한일영씨의 인생도 상상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어머니와 삼촌이 버젓이 있었음에도 경찰에게 잡혀 아동보호소에 들어간 후 선감도로 이송된 한일영씨 역시 강제 노동, 굶주림, 폭력을 겪으며 지옥같은 고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동상이 걸려도 제대로 치료 받지도 못해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도 발을 자르지 않아 다행이라 여겨야 했던 삶…

선감학원에 수용된 지 3년 만에 한일영씨는 죽음을 무릅쓰고 이웃 섬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섬 주민들은 선감도에서 탈출해 온 소년들을 겁박해 노예로 부렸습니다. 악귀와 같은 독재 정권 아래 국민들이 어떻게 악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감도 주변 지역 주민들은 소년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았습니다. 탈출했던 이웃 섬에서 노예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한일영씨는 다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13살에 찾아가던 삼촌집에 18살이 되어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공무원이 납치해 선감도로 보내기도

지금은 스님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곽은수씨는 부모와 형제가 있었음에도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갑자기 나타난 차에 실려 수원시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곽은수씨는 공무원에게 납치되어 선감학원에 수용된 경우였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졌던 폭력입니다. 물리적 구타뿐만 아니라 선배들로부터 성폭행까지…그는 선감학원을 ‘약한 이는 고통속에서 죽거나 고통을 못이겨 도망치다 죽는 동물들의 세계’였다고 말합니다.

곽은수씨는 잡혀간 지 8년만에 선감도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호적도, 주민등록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탈출한 지 5년만에 선감학원을 찾아가 엄청난 매질을 당하고 성장증명서를 받아와 호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에 적응해 사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다 절에서 만난 스님들의 도움을 통해 성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다 비장하게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곤두박질쳤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나를 잡아가지 않았다면! 그 생각이 안 떠나니까 속에서 뜨거운 게 막 올라와서 괴롭고, 그럴 때마다 찾아서 복수하고 싶고…다 용서하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에요…너무 비참하잖아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죠. 지금도 꿈속에서 ‘기상’이라는 소리를 들어요. ‘제2반 인원보고’ 하고 소리 질러서 같이 자던 스님들 깨우기도 하고요. 공무원한테 붙잡혀 오는 꿈도 꾸고, 선착순 하는 꿈도 꾸고요. 국가에서 저지른 일이니, 국가로부터 사과라도 받아야겠어요.”(155쪽)


진실규명과 사과, 배상이 이뤄지기를

이분들 이외에도 인터뷰에 응한 선감학원 생존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묻게 되고, 악독한 국가 아래서 시민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자문하게 되는 역사입니다. 저자는 선감도에 끌려온 소년들이 걸었을 길을 걸으며 길의 끝자락에 있는 박물관에서 작은 꽃신을 보며 선감학원의 진실을 확인해야겠다 다짐했습니다.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은 생존자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민선 기자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나서 후련해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보며 포기하기 않고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이 책이 우리 역사를 알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아픈 심장을 부여잡고 오늘을 살아가는 생존자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선감학원이라는 잔혹한 국가폭력의 진상이 시민들에게 더욱 알려지고 진실이 규명되는 것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배상이 이루어 지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년에 채 10권이 되지 않는 1인당 독서량(13세이상) 통계를 언급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 걱정이라는 기사들은 매년 되풀이됩니다. 이런 기사들을 보면 저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책을 진짜 안읽네. 큰일이네.’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우리는 왜 독서량이 적다고 걱정할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책을 읽지 않아도 문제는 없지만 독서가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헤르만 헤세는 <독서의 기술>에서 “삶으로 이끌어 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책이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3색볼펜 읽기 공부법>을 쓴 사이토 다카시에게 독서는 “다른 사람의 사상과 철학을 폭넓게 수용하는 행위”이며 “여전히 유효한 공부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입니다. 앤 라모트는 <쓰기의 감각>에서 책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기도 하고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꾸준히 책을 읽어오면서 저 역시 독서가 유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독서의 유익을 말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책을 수십 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독서가와 작가들은 가장 기본적인 지식 습득에서부터 자아발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독서가 유익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하토야마 레히토라는 작가는 정말 실제적인 독서의 유익과 독서 방법을 제안합니다.
 

책 표지ⓒ 가나출판사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후 여러 기업들을 거치며 성공한 삶을 살아온 저자는 <하버드 비즈니스 독서법>이라는 책으로 자신의 독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그는 당면한 문제 해결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 독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히 실용적 독서법의 극단에 있는 읽기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고, 독서 자체보다는 독서를 통해 비즈니스 세계에서 어떤 결과를 냈는가에 목적을 둔 독서법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처음 봤을 땐 뭔가 속물적인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서문에서 저자가 말한 “읽기만 하는 독서의 함정”이라는 문구에 끌림이 있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독서가 무조건 실천으로 옮겨져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유용한 지식을 얻었다’거나 ‘깨달음을 얻었으니 만족스럽네’ 정도로만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하토야마씨가 말하는 독서방식도 참고해 볼 만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를 빈번하게 만나는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하고 실용적인 독서법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많이 혹은 빨리 읽고 아무런 변화나 성과가 없는 것보다는 “한 페이지 또는 한 줄만 읽었더라도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실용적 독서라면 굳이 꺼려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과제 해결’에 책을 읽는 목적을 둔 저자가 하는 말들은 상당히 유쾌하면서도 매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독서량이 아니라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이다.’, ‘독서의 목적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에 대한 자기 의견을 가져야 한다.’ 등의 문구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힘”입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정해진 답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사회적 배경이 모두 비슷하고,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자기 의견을 가지는 것보다 상대의 생각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논의나 대립보다는 결국 평범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41-42쪽)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 기업들이 국제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근본 이유를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급변하는 세계 비즈니스 환경에서 위기를 겪고 있는 국내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새겨들을 만한 조언입니다.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겐 저자가 제안하는 과제 해결을 위한 실천형 독서가 시급히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중요한 문장이나 부분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책의 내용을 지금 자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라고 저자는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때문에 저자는 속독이니 다독이니 하는 기술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물론 저자의 독서법은 모든 종류의 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독자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비즈니스 환경, 즉 경제나 경영관련 실용도서를 이렇게 읽자는 제안입니다.

저자의 독서법은 네 가지 문구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 ‘지금 필요한 10권의 책’, ‘이 책들을 눈에 띄는 가까운 곳에’, 그리고 ‘실천’. 즉 자신이 당면한 과제를 늘 떠올릴 수 있고,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책의 권수를 10권 이내로 줄여 그것들에서 얻은 통찰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저자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경영세계에 있는 만큼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토야마식 독서법에서 제가 얻은 교훈 한가지는 ‘책 처분’에 관한 것입니다. 실상은 한번 들춰보지도 않을 책으로 책장을 채워두지 말라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도 왠지 모르게 읽을 것 같은 생각에 만지작거리고 다시 책장에 꽂기를 반복하다 먼지만 소복하게 쌓인 책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실천거리 하나를 얻었습니다. 읽지 않을 책 처분!
 

“그냥 종이일 뿐이잖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절대로 다시 보지 않을 테고, 공간만 아깝지. 만약 다시 봐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사면 되지 않아?”(67쪽)


그렇습니다. 필요하면 다시 사면 됩니다. 왠지 이번에는 책장에 쌓여가며 제게 부담을 주고 있는 책들을 상당히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금 저에게 필요없는 책들은 과감하게 처분하고 새로운 책들을 친구로 들일 것입니다.

실용과 실천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저자에게도 독서하는 방식에 변화는 찾아옵니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끊임 없이 마주할 때는 그와 관련된 실용적인 책들을 읽었으나, 이후엔 자신의 성장을 위한 독서,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 시대의 흐름을 읽기 위한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역시 업무상 문제 해결 목적 이외에는 애독가들이 말해왔던 것과 같은 독서의 유익을 누려왔던 독서가입니다.

이 책의 제목만 보고서 언뜻 흔한 자기계발서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어쩌면 피해왔을지도 모르는 극단적으로 실용적인 독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입니다. 역시 책은 어떤 면에서 보나 우리에게 유익을 건네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안 읽는다 걱정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어떤 책, 어떤 목적이라도 좋으니 책을 읽어봅시다!

‘왜 사는가?’라는 물음. 보편적인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사람들은 신학, 철학, 예술 등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탐구해 왔습니다. 여전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답은 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사람들은 여전히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사람이 왜 사는 걸까요?’라는 물음에 ‘풀이 자라는 데, 토끼가 자라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냥 사는 것이다. 왜 사느냐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보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상용 시인도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왜 사냐 건 웃지요”라며 답이 없는 물음에 웃음으로 대답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태도와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공허함을 느낄 때, 소중한 무엇 혹은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열망하던 것을 얻고 난 후에도 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용도가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노인들에게, 열정은 넘치지만 열정을 쏟아부울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에게도 왜 사는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솟아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고민 속에 괴로워하다 끝모를 우울에 빠져 상담가를 찾거나 심한 경우엔 병원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예기치 않게 병에 걸리고 나니 삶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전보다 더 많이 찾아보게 됩니다. 투병하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살면서 저자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어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을 맞게 되는 때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데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살면서 저자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어도 감당하기 벅찬 상황을 맞게 되는 때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데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강제 수용소에서 얻은 결론

빅터 프랭클 박사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수감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수감자들은 처음엔 지독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에 대한 혐오와 무감각 상태에 이릅니다. 박사 자신도 옆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것이 일상이 되어 시체를 바라보면서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무뎌지지 않으면 극심한 환경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수용소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버텨내는 수감자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수용소의 체험을 기술했습니다. 지적인 활동을 통해 감수성을 키워왔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들, 수용소 안에서도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사람들 등은 도처에 고통이 만연한 수용소에서도 내면을 지켜나갔다고 저자는 썼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사소한 행복들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니었음은 당연합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상황에 지배당해 이와 같은 사소한 행복들을 느낄 여유는 없었습니다. 대체로 수감자들은 운명에 지배당한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를 기피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며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인간은 주변 환경에 지배당해 아무런 정신적 자유를 갖지 못하는지, 수용소와 같은 환경에서 인간은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인지’ 의문을 품습니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수용소에서도 타인을 위로하거나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음을 확인하면서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고 결론내립니다. 어찌보면 매우 희박한 사례를 가지고 내린 결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상황에만 지배되지는 않는다는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도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본문 인용)

 

이와 같은 결론을 언뜻 보면 사회 구조적인 실패로 인한 개인의 실패를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혹은 의지 없음으로 돌리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상황에 놓인 인간이 반드시 상황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인간의 내적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어떻게 찾을까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삶에서 겪게되는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인간의 내적 자율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본문 인용)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빅터 프랭클 박사의 접근 방식도 기본적으로 법륜 스님이나 김상용 시인의 태도와 유사합니다. 저자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사랑하는 이,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 로고테라피라는 기법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력을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봤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책임감”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선, 진리, 아름다움 등을 체험, 자연과 문화를 체험,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3)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본문 발췌 인용)

다만 주의할 점은 시련에 대한 관점입니다. 시련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미를 발견하고자 굳이 시련을 겪을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단지 시련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자기 학대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가 관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공허감, 육체적/정신적 고통, 삶의 유용성을 상실한 느낌 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관점으로 인간 존재를 정의합니다. 즉 인간이 ‘고통을 성취로, 죄를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삶을 수 있고, 일시적인 삶에서도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관점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본문 인용)

‘왜 살아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강제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아직 이루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간직하고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 박사의 조언을 따라가 보면 어떨까요? 저자는 우리의 삶을 영화에 비유했습니다. 저도 요즘 겪는 시련을 영화에서 고통스런 한 장면을 지나고 있는 것이겠구나 여겨보려 합니다.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본문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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