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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 구조, 깨뜨릴 수 있을까? 본문
인류 불평등의 역사를 탐구한 ‘불평등의 역사’
지난 10월 민주노총은 각 지역 본부들을 중심으로 “불평등 타파”를 구호로 내걸고 집회를 열었다. 코로나19 감염확산 우려에도 불구하고 총파업대회를 진행했던 이유는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에게 불평등이 그만큼 절박한 문제라 생각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총파업대회를 통해 불평등이 문제인 이유와 평등이 왜 중요한지 시민들의 광범위한 공감을 얻어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 소위 ‘능력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과정이 공정하다면 그 결과로 오는 불평등은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학력, 시험 등의 결과로 인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한국식 능력주의가 공고한 사회에서 불평등을 타파하자는 구호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혹은 노력이 부족한 패배자들의 외침으로 들릴 가능성이 높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을 논할 때 불평등이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먼저 세심하게 논의함으로써 공감을 얻어낼 필요가 있다.
불평등, 왜 문제지?
영국의 세계적 석학 리처드 윌킨슨은 <평등이 답이다>에서 한 사회의 신뢰 수준, 범죄율, 사회 계층 이동성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이 불평등에 있음을 일깨웠다. 이후 <불평등 트라우마>에서 불평등이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탐구했다. 리처드 윌킨슨은 불평등한 경험과 환경이 사회에 속한 인간의 사고, 행동양식, 그리고 정신건강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우리 나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도 연구보고서(자산가격 변화가 경제적 불평등과 대외경제 변수에 미치는 영향 분석, 2019.12.30)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불평등이 인간과 그 구성원들이 속한 사회에 광범위한 문제를 일으키는 유해한 요소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불평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러면 우리는 불평등을 ‘타파’할 수 있을까? 발터 샤이델이 쓴 <불평등의 역사>를 보면 한국을 포함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 같다는 전망을 하게 된다. 발터 샤이델은 원시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를 톺아보며 불평등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불평등을 크게 허물었던 네 가지 요인을 제시했다.
불평등의 역사와 평준화의 네 기사
책에 따르면 기술(도구) 발전, 농경시대 토지와 가축의 소유, 다음세대로 부를 전달하게 한 제도, 정치적/군사적 권력, 제국의 형성, 현대 사회의 경제발전과 도시 성장 등으로 인해 불평등은 크게 증가해 왔다. 그러나 불평등 수준은 영속적으로 커지기만 하지는 않았다. 인류 역사의 몇몇 지점에서는 불평등이 크게 완화되는 ‘대압착’을 경험했다. 발터 샤이델은 이를 ‘평준화의 네 기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치명적 대유행병. 이들 ‘평준화의 네 기사’는 발터 샤이델이 인류 역사에서 뽑아낸 평등화 메커니즘이다. 책을 읽기 전에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진보적 분배/복지정책, 노동 운동, 민주화 등이 인류에게 평등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는 매우 다른 결론이었다. 게다가 저자는 책의 시작부터 불평등 해소에 대해 회의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세계대전은 비교적 짧았고, 그 여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잠잠해졌다. 최고 세율과 노조 조직률은 떨어지고, 세계화가 부상하고, 공산주의는 자취를 감추고, 냉전 시대는 끝나고,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은 희미해졌다. 이 모든 게 최근 불평등이 부활한 이유를 더 이해하기 쉽게끔 만든다. 전통적인 격렬한 평준화 동력은 현재 휴면기에 들었고, 가까운 미래에 귀환할 가능성은 낮다.”(28쪽)
발터 샤이델은 기술적/경제적 발전과 국가 형성의 상호작용으로 불평등이 증가했고 불평등 수준이 정점에 이르는 시점에서 이를 약화시키는 격렬한 충격이 필요했다는 자신의 핵심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책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세계 대전에서부터 근대 이전에 있었던 대규모 전쟁, 그리고 혁명 중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인류에게 일시적으로나마 평등을 가져다 주었다.
중국 당나라 귀족의 종말, 서로마 제국의 붕괴와 같은 국가 실패 혹은 체제의 붕괴 역시 불평등을 무너뜨리고 평준화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인류의 상당수가 죽음에 이름으로써 비로서 불평등의 정도가 완화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이처럼 잔혹한 네 가지 범주에 속하지 않는 평준화 동력은 없었던 것일까?
저자는 전쟁이나 혁명이 없는 상태에서 추진되었던 토지개혁, 채무 면제, 노예 해방 등도 불평등을 줄이는 데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심각한 충격을 가져왔던 경제 위기들도 잠시 나마 불평등을 주춤하게는 했지만 이내 회복되는 과정에서 평준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불평등을 더욱 가속화했다. 또 한가지 놀라웠던 점은 민주화 조차 그 자체로 소득 불균형을 초래하는 경제 발전을 가져온다는 사실이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평준화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하나는 위기 시에 급진적인 정책적 개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갖가지 공산주의 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대전과 대공황의 충격은 많은 부분을 이런 특정한 맥락에 빚진, 다른 상황 아래서라면 실현 가능하지 않았을 평준화 정책 방안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 교훈은 한층 간단하다. 요컨대 정책 입안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거듭해서 국가 내 물질적 불균형의 압착을 이끌어낸 것은 인간의 통제 영역 밖에 있거나 당대에 실행 가능한 모든 정치적 의제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는 폭력적 힘이었다. 평준화의 가장 효과적인 메커니즘 중 어느 것도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565쪽)
불평등을 깨뜨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평등을 이룬다는 것은 유토피아 같은 이상적 환상인걸까? 계속되는 경제 발전, 경쟁 시장, 교육, 기술 발전으로 인한 자동화, 세계화, 노조의 영향력 약화 등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요소들로 가득한 현 시대엔 불평등 타파의 희망은 내려놓는 것이 좋을까?
역사에서 경험한 대압착과 같은 불평등 ‘타파’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평등의 해악을 인정하면서도 피흘리는 희생이 따라야 평등이 온다는 겁박 같은 주장에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대압착까지는 아니어도 불평등의 ‘수준’을 충분히 좁히는 노력을 해 나가야 한다. 책의 말미에 발터 샤이델은 “더 커다란 경제적 평등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모두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그것이 항상 비명과 울음 속에서 탄생했음을 기억하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협박처럼 들리는 이 말 중 ‘극소수의 예외’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대중 동원 전쟁의 결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도시국가의 강력한 시민 계급 체제와 폴리스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재산 축적을 방지했던 고대 그리스의 사례가 있었고, 세계 대전 후 누진 세제 및 노조의 활성화로 인해 불평등의 회복 속도가 상당히 늦어졌던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도 저자는 전쟁의 결과라고 해석했지만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저자는 세제 개혁, 보편적 의료서비스, 독과점 해소 등 다양한 평화적 불평등 해소 방안들에 대해 정치적 실행 가능성이 매우 낮고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정치적 실행 의지가 강력하고 구성원들이 이 의지를 지지한다면 불평등의 수준이 좁혀지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시대는 불평등의 역사를 새로 쓰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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