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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레즈비언의 사랑과 결혼,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네 본문
누군가를 새로 만나서 나를 소개해야 할 때 보통은 이름, 하는 일, 취미생활, 가족관계 등을 말하곤 합니다. 말하다 보면 그것들이 ‘나’라는 존재를 충분히 정의하지 못하는 것 같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하는 일, 관심사, 가정과 사회에서의 위치와 역할, 정치적 입장 등에 대해 더 말한다 해도 그것들이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정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에 대해 그리 큰 고민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나란 존재를 충분히 정의하고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도 살아가는데 큰 불편함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체성을 말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 한가지일 뿐인 성적 정체성 때문에 불편을, 불편을 넘어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소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적 정체성이, 성적 지향이 사회에서 주류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억압과 차별, 심지어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이상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죄악시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저 역시 성소수자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봤었습니다.
성적 지향이 나와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정상’이 아니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성 정체성과 성소수자에 대해 기사나 책 등을 통해 조금씩 알아갈수록 내가 가졌던 생각과 시선이 얼마나 큰 편견이었나 확인하게 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사회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하게 말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책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김규진 지음)를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또 한꺼풀 벗겨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부터 이성애자였지?
“나는 대체 언제부터 레즈비언이었던 걸까? 처음으로 여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때?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칭하기 시작했을 때?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그 질문을 한 주체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이성애자는 자신이 언제부터 이성애자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걸까?”(18-19쪽)
저도 성소수자들에 대해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해하곤 했었습니다. 뭐 궁금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성애자들에게는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런 물음을 하는 제 생각의 바탕에는 성소수자가 나와는 다른 자연스럽지 않은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동성애에 따라 붙는 문란한 이미지로 인해 동성간의 사랑은 뭔가 다를 것이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레즈비언인 저자가 상대를 생각하며 “언니를 보면 설레었다. 핸드폰 알림이 울리면 언니일까 기대가 됐고, 보고 싶어서 어른 주말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마음은 이성애자인 제가 사랑하는 상대를 생각하던 마음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혼이 대세인데 결혼을 원하지만
동성애자들은 서로 마음이 맞으면 결혼보다는 대체로 편하게 동거를 하겠거니 단순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이 또한 이성애자의 결혼은 보통 혹은 정상이고 동성애자의 결혼은 특별한 무엇인가 혹은 비정상이라는 편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저자의 주변 동성애자들이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비혼이 대세인 시대에 오히려 동성애자들은 결혼을 원한다니 새로웠습니다.
“이렇듯 변화하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혼인 수호자들은 바로 동성애자들이다. 미혼으로 남을 완벽한 핑계를 버리고 한 사람과 살고 싶어 하다니, 세간이 생각하는 문란한 이미지와는 조금 괴리가 있다. 적어도 내 주변의 동성애자들은 변화하는 시대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결혼에 집착했다.”(67쪽)
우리 나라는 동성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신혼부부 특별공급 주택 청약, 부부간의 재산 문제, 대출, 세금공제, 건강보험료, 수술동의서 등 보장받아야 할 권리 및 생활에 필요한 혜택을 제공받지 못합니다. 저자는 이런 현실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례를 남겨보고자, 그리고 행복해지고 싶어서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어쩌다 보니 시끄럽게 일을 벌이게 되었다. 실명과 사진을 걸고 레즈비언의 삶과 결혼에 대한 얘기를 블로그에 연재하고, 회사에서 신혼여행 휴가를 받은 일 가지고 요란 벅적하게 인터뷰를 해 포털사이트 메인에 올리고, 공중파 뉴스에 출연하여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사명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활동들을 이어간 동력은 대의보다는 나 개인의 편의였다. 그냥 내가 좀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175쪽)
“가끔 도무지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중략) 하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례들을 믿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축제도 벌여보고, 친구들을 불러 결혼식도 열어보고, 마일리지 가족합산도 신청하고, 회사에 돈이랑 휴가도 달라고 해보고.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사회는 변한다. 앞으로도 조금 더 나를 믿고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야겠다.”(184-185쪽)
그들은 생각보다 많고 같은 인간이다
커밍아웃했던 몇몇 유명 연예인들과 미디어에 이따금씩 노출되는 사례들로 인해 성소수자가 말 그대로 정말 ‘소수’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뭔가 더 특별한 사연이나 계기가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차별하고 억압하고 혐오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정체를 밝히기 어려울 뿐입니다.
“사회에 퀴어는 많아요. 동성애자가 전체 인구의 2~5% 정도라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굉장히 많은 숫자거든요. 한국에만 100만명에서 250만명 쯤 되니까요. 그들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당연히 사회의 일부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앗, 방금 지나친 그 사람! 동성애자일 수 있습니다.”(200쪽)
저자는 비장한 톤으로 동성애자 혹은 성소수자 차별을 철폐하자 주장하기보다는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커밍아웃 팁, 프러포즈 방법 등 자신의 평범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회사에서 저자가 신혼여행에 대한 경조금과 휴가를 신청했을 때 “동성애자라고 해서 남들 이상으로 증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라는 말이 우리 사회 전체의 당연한 반응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류가 아닌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견고한 장벽을 두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저자와 같이 새로운 선례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점은 사회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희망적 신호로 보입니다. “미정부의 승인을 받고, 결혼식도 공개적으로 하고, 언론에 알려져도” 여전히 법적으로 미혼 여성인 저자와 저자의 와이프가 우리 나라에서도 똑같은 인간으로, 부부로 받아들여지는 날을 맞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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