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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일은 있으면 좋겠는데 일하기는 싫어 본문
“아빠! 회사 꼭 가야해?”
내일은 일하러 가야해서 놀아줄 수 없다는 말에 초등학생 딸이 제게 종종 묻곤 합니다. 딸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너 장난감도 사주고 용돈도 주려면 돈 벌어와야지!” 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회사에 다니는 혹은 일하는 첫번째 목적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도 딸은 이제 제법 커서 아빠가 회사에 가는 목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눈치입니다.
“아빠! 난 뭔가를 연구해서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아빠는 꿈이 뭐였어?”
하아...이건 난이도가 좀 있는 질문입니다. 어릴 때 장래 희망란에 과학자라고 적었던 것을 희미하게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 로봇 만화를 좋아했었으니까 아마도 지금으로치면 제 꿈은 로봇 공학자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딱 맞는 분야는 아니지만 명함에 리서치 엔지니어라고 새기고 다니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얼추 어릴 적 꿈을 이뤘다고 우길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소망하던 꿈에 대충은 비슷하게 다가가 생활하고 있으니 저는 직업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어릴 때 바라던 직업을 가지면 자아실현을 한 것일까요? 자아실현을 한 저는 왜 돈벌러 회사에 간다고 대답할까요? 내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일터인데 왜 출근하기는 싫을까요?
현대인들에게 일이란?
폴커 키츠라는 작가도 <오늘 일은 끝!>이라는 책에서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쓴 말인지 알겠지만 단어를 바꿔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직업 혹은 직장생활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로 고치는 것이 보다 명확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일, 노동, 직업을 구분해 사용해야 할 것 같아 사전(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일: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
노동: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직업: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
‘일’은 중립적 혹은 긍정적인 느낌인 반면 ‘노동’과 ‘직업’은 생계와 연결되어 고달플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일은 노동이나 직업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폴커 키츠는 현대 사회에서 ‘직업’이 ‘일’과 동일한 지위를 얻게 되었기에 ‘일로 자아실현을 한다는 건 거짓말이다’라고 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일(직업)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일은 사회에서 우리의 자리를 지정해 주고, 사회는 우리를 이용해 무언가를 한다. 일은 우리에게 일과를 부여하고, 우리를 집에서 나와 타인과 접촉하게 한다. 일을 원하지만 일이 없는 자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심각한 병에 걸릴 수도 있다. 일을 잃는다는 것은 파트너를 잃는 것처럼 삶을 파괴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이다.”(19-20쪽)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은 스릴 넘치기도 하고 세상을 더 멋진 곳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성취감을 느끼게도 하고 일터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아를 실현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바는 이것이 예외적인 사례라는 것입니다.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이런 말은 다른 세상 이야기입니다.
직장생활에 대한 환상 걷어내기
폴커 키츠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들로 포장되어 온 직장생활의 환상들을 걷어내고 ‘일’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자고 말합니다. 아마도 많은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말할 때 포장된 환상들을 저자는 아래 일곱가지로 정리했습니다. 평소 제가 접하던 말들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직장에 있으면서 열정이 솟아날 때가 얼마나 있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열정에 대한 과장된 환상으로 인해 저 역시 일하면서 열정을 느끼지 못하면 내가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동감합니다. 사실 열정이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꿈꾸는 직업은 실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꿈의 직업’이란 것이 전혀 없다. 요술 지팡이를 든 요정이 찾아온다 해도 그들은 어떤 일을 소원으로 말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사회가 기대하듯, 열정을 불태울 일 말이다. 그들은 일에서 열정을 발견한다고는 상상할 수 없고, 일에서 열정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만족감을 이끌어 낸다. 일은 그 여러 영역 중 하나에 불과하다. (중략) 원래는 ‘인생’과 ‘직장생활’이 동의어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 대신 머릿속에 ‘꿈의 직업’이라곤 절대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40-41쪽)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로 의미를 너무 높은 곳에 두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로 인해 다른 대부분의 일들은 의미 있다고 하기엔 너무 사소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을 거창하게 바꾸지’ 않으면 의미를 부여하기가 너무 어려운 세상입니다. 직업으로 자아실현을 한다는 말 또한 아주 예외적인 소수에게만 맞는 말입니다. 이 구도에서 벗어나 일과 직업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해지기
‘우리는 돈 때문에 일한다’는 걸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저자는 말합니다. 또 저자는 ‘적절한 보수’를 언급합니다. 전일제로 일한다면 가족의 주거와 양식을 해결할 수 있는 정도를 적절하다 말하지만 부동산 투기로 주거비용이 한껏 부풀려진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선 왠만한 전일제 노동으로는 적절한 보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구조적 한계는 있지만 일에 대한 환상을 걷어 낸 세상을 상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저자가 비판하는 점은 사회에서 설정된 일과 직업에 대한 높은 기준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에서 혹은 직장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않아도, 일할 때 열정을 느끼지 못해도, 자신의 일이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인생에는 직업 이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듯 “일(직업)은 하나의 모자이크 조각”일 뿐입니다.
폴커 키츠는 다수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만족이라는 상태를 재발견”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한 ‘적절한 보수’만큼이나 애매하고 상대적인 표현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만족’이란 무엇인지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책이 인생 행복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직장생활을 솔직하게 대하는 것만으로도 예기치 않은 만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저자가 솔직하게 그려본 이런 회사 어디 없을까요?
“이 회사는 여러분이 일하며 행복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제품 혹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생계를 경제적으로 유지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은 사회에 의미를 가집니다. 일의 역할은 여러분 인생에 의미를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의 의미는 여러분 스스로가 책임지면 됩니다. 우리 회사는 요란스럽게 부산을 피우거나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뭔가 있어 보이게 연출하지 않고, 매일 맡은 바 일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일은 시간과 돈의 교환입니다.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한 보수를 지급받으며, 우리 회사는 한 사람 몫의 임금을 받는 한 사람이 세 사람 몫의 일을 처리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여러분에게 인생의 의미를 주지 않듯, 여러분은 회사에 인생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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