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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 전 조지 오웰이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초원위의양 2020. 1. 20. 21:08

2020년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된 <동물농장>과 <1984>를 쓴 조지 오웰(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 1903.6.25~1950.1.21)이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명작으로 인정받는 소설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조지 오웰이지만 그는 다양한 영역에서 글을 썼습니다. 기일을 맞아 그의 유명한 소설들을 다시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조지 오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책도 읽어볼 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이 저널리스트로서 쓴 기사와 칼럼을 선별해 담은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또 다른 조지 오웰을 소개합니다. 조지 오웰의 기사들을 엮어 책을 만든 김영진씨는 조지 오웰이 다루는 다양한 관심사들을 평등, 진실, 전쟁, 미래, 삶, 표현의 자유라는 여섯 가지 주제 아래 모았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조지 오웰의 생각들을 맥락 있게 읽을 수 있는 점이 좋습니다.

특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지금 우리 사회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상당히 밀접하게 닿아 있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난민 등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역사와 진실의 문제, 특정한 이념에 대한 광신적 추종,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 노동 문제에 이르기까지 마치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칼럼을 쓴 건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조지 오웰은 여러 사회 문제와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에 그의 글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밝혔듯 그는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우물 밖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신경 쓰도록" 만들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의 글에서 상당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혐오와 역사왜곡은 무지의 소산

지난해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도착했을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막연한 반감으로 그들을 거부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조지 오웰 당시 유태인 난민을 거부했던 영국의 현실과 비슷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하는데 마치 지난 해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던 우리 사회에 하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 사회 시민들은 더 악랄해지지 않도록 이제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난민들에게 '돌아가라'며 쫓아낼 때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건지 정확히 이해하도록 설명해 줄 수는 있다. 조금이라도 지식을 얻고 나면 사람들이 조금은 덜 악랄하게 굴지도 모른다."(51쪽)


몇 년 전 국정교과서 문제로 우리 사회는 역사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 대한민국의 뿌리가 언제 어디에 있느냐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좀 더 최근에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책으로 논란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대중이 믿는 진실이 언제나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조지 오웰이 역사와 진실 문제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 집니다.
 

"나치 버전으로 쓰인 전쟁과 나치가 아닌 이들이 묘사하는 전쟁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이 중 어느 쪽이 역사로 남겨질지는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전투의 결과가 결정할 것이다.(93쪽)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중략)전체주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만 통제하는 게 아니라 미래도 통제하려 든다.(96쪽)"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힘과 역할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노동 혹은 노동자라는 말을 이상하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이면서도 말입니다. 게다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정규직, 비정규직, 프리랜서,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으로 분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이 연대할 때 만들어지는 힘에 대한 인식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 듯 합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연대할 때 함께 생존할 수 있습니다.

조지 오웰이 우리 사회 노동자들에게 '사보타주'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 노동자들이 점점 잊어버리고 있는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힘에 대해서도 조언합니다. 노동자들이 가진 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강조합니다. 전쟁과 같은 반인륜적인 일에 맞서 할 수 있는 방식도 제안합니다.
 

"사보타주는 원래 프랑스어다. 프랑스 북부와 플랑드르 지방의 사람들 중 주로 농민과 노동자가 신는 묵직한 나무 신발이 있다. 그게 바로 '사봇 sabots'이다. 오래 전에 고용주에게 불만을 품은 노동자 여럿이 돌고 있는 기계에 사봇을 던져 기계를 고장 낸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행위에 사보타주라는 이름이 붙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보타주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값나가는 재물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141-142쪽)
"기계를 향해 사봇을 던진 벨기에의 노동자들은 한 가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평범한 노동자는 막대한 힘을 가진 중요한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가 곧잘 간과하는 사실이다. 사회의 원동력은 육체 노동자의 노동에 기반하고 있으며 노동자에게는 사회의 작동을 멈춰버릴 힘이 있다."(143-144쪽)
"기계를 망가뜨릴 만한 기회나 용기는 없어도 기계가 더디 작동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다. 이를테면 가능한 제일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꾀병을 부리고, 원자재를 헤프게 쓰면 된다. 이럴 땐 게슈타포 입장에서도 책임을 따져 묻는 게 쉽지 않다. 소극적 사보타주는 전쟁 물자 생산에 끊임없이 잡음을 만들어낸다."(145쪽)

 


저널리즘의 역할

마지막으로 저널리스트로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언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가짜 뉴스를 생산해내는 언론이 여전히 주류에 있고, 진짜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악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대중들을 호도하는 일에 열심인 신문과 방송도 없어지지 않는 우리 사회입니다. 권력을 제대로 감시하고 진실을 시민들에게 알리려는 소수의 언론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조지 오웰은 '저널리즘의 역할'이라는 글에서 한 저널리즘 교육기관 학과 부소장의 편지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저널리즘의 목적은 피곤한 사업가의 주머니에서 돈을 터는 것, 사회의 나쁜 면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 독자가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엔 "이 세상은 변할 리가 없고, 대중은 언제나 속아왔으며 앞으로도 기꺼이 속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얼간이들일 뿐"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우리 시민들은 결코 얼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고 진실을 스스로 찾아가며 혁명을 이뤄왔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시민들에 더해 언론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진실을 알리는 제 역할을 하게 된다면 시민들의 권한을 위임받은 국민의 머슴들이 제 주인 위에 군림하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저널리스트로서 조지 오웰이 남긴 글들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언론인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시대에 조지 오웰은 언론인으로서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지 오웰을 추억하며 그가 가진 언론인으로서의 매력을 느껴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