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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을 땐 이 소설을 읽어요 본문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12월 31일과 다음 해 1월 1일이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해 아침이라고 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참 이상하다 생각하곤 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새로운 느낌은 해뜬 후 아침이슬처럼 금새 사라져 버리니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과는 모순되게도 저 역시 연말연시엔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살아갈 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봤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합니다. 까페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에 끊임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들의 인생은 어떨까 궁금해 하고, 텔레비전에서 보는 유명인들의 삶을 동경하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대부분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의 나로 돌아와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에 매력을 느끼고, 그 삶에 호기심이 생긴다 해도 선뜻 그 길로 발걸음을 내딛기는 쉽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책임들에 묶여 있으니까요. 뭐라도 해보려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이내 마음을 접곤 합니다.
어짜피 바꿀 수도 없는 인생인데 다른 인생을 상상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인생 혹은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는 건 일단 재미있습니다. 또 과거의 선택들은 바꿀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인생에서 내가 마주치게 될 상황에서 하게 될 선택에는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재미와 유익은 소설을 읽으면서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는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테니까요.”(33쪽)
언젠가는 이런 편지를 남기고 충동적으로 일상을 떠나는 상상을 해 봅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제 상상을 실현하는 모델입니다. 그는 평범한 어느 아침에 만난 한 외국여인, 그로 인해 찾아가게 된 책방, 책방에서 만나게 된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일상이라는 강력한 중력에서 빠져나와 책을 쓴 이의 인생을 찾아 나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한 문장은 소설 속 주인공뿐만 아니라 제 마음에도 파장을 일으킵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수만 가지 선택지를 생각하면 내가 경험한 부분은 잠재적인 내 존재에 정말 아주 작은 부분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항공권 구매 사이트를 열고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비행기표를 검색해 봅니다.
‘그래서 저도 비행기를 타고 소설 속 주인공을 따라 리스본으로 떠났습니다.’라고 이 글을 급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전 그레고리우스처럼 훌쩍 떠날 수는 없습니다. 주인공은 이혼을 해서 가족도 없고, 오랜 시간 돈도 쓸 줄 몰라서 여유자금도 많았답니다. 그렇지 않은 전 책을 읽으며 그레고리우스의 충동적 여행에만 동승해 봅니다.
처음엔 책 한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문장 하나에 매력을 느껴 일상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이 멋져보였습니다. 책을 쓴 이를 만나서 그가 저자와 저자의 삶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주인공이 책의 저자의 삶을 추적하는 여정에서 만나는 인물들 하나하나에 제 자신을 이입해보게 됩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은 기본적으로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두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마데우 프라두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을 찾아가며 그에 대해 알아갑니다. 그와 동시에 그레고리우스 본인의 인생 여정도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지점들에서 소설은 독자를 자신,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이끕니다.
소설 속에 소개되는 또 하나의 책을 쓴 저자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 어린 시절부터 무척 똑똑했던 사람. 포르투갈 독재 시대 판사로 일했던 아버지 아래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의사가 된 그. 그가 마주한 중요한 선택의 순간. 독재에 충실히 부역하던 경찰 간부 멩지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해 그의 앞에 놓였을 때 그가 했던 고민과 선택. 그로 인해 펼쳐지는 복잡한 삶...
“그러니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승리를 거둔 극기를 칭찬하고 자기 통제의 기쁨을 즐기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249쪽)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정말 하찮은 거니까. 하지만 멩지스가 건강해져서 제복을 다시 입고, 살해 명령을 계속 내린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자세하게 상상해보라고요. 자, 이제 자기 자신을 판단해보시죠.”(252쪽)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소설은 저를 다양한 삶의 상황으로 이끕니다. 소설에는 중심 인물인 프라두의 인생 뿐만 아니라 그와 엮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죽을 뻔한 자신을 살려준 오빠에게 강박적인 사랑을 품고 살아온 여동생 아드리아나, 아마데우 프라두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만났던 동료들, 그의 오랜 친구, 그가 사랑했던 여인...
소설을 읽어가면서 만나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인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을 알고나면 모두가 특별한 인생입니다. 스쳐가는 모든 인생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등장 인물 하나 하나의 삶과 선택의 순간들에 나를 이입해 생각하기에 딱 좋은 소설입니다. 이런 상상들은 아마도 제가 살아갈 인생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와 더해 이 소설의 매력이 또 있습니다.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소설 속에서 창조된 작가의 인상깊은 문장들입니다.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쓴 페터 비에리는 소설 속에서 제3의 작가가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독자들에게 선사합니다. 소위 문장 수집가들에게는 보물과 같은 책이 될 것입니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55쪽)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77쪽)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116쪽)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고.”(141쪽)
“호기심과 질문, 의혹과 논거, 생각하는 즐거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218쪽)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220쪽)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5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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