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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사는 것이다

초원위의양 2019. 12. 10. 20:41

매일 곁에 두고 읽는 묵상집, 박노해 사진에세이 <하루>

연말연시. 또 한 해가 흘러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온 나날들을 돌아볼 것이고 또 새롭게 맞이할 한 해를 계획할 것입니다. 연말이 되니 저 역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나 돌아보게 됩니다. 달력, 다이어리, 스마트폰 메모 등을 찾아보며 지나온 한 달 한 달, 하루 하루를 추적해 봅니다. 자연스레 ‘하루’의 의미도 생각하게 됩니다.

“‘하루’. 참으로 평범하고도 경이롭고, 흔하고도 무서운 말이 ‘하루’다. 하나의 물방울이 온 하늘을 담고 있듯 하루 속에는 영원이 깃들어 있는 일일일생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하루는 저 영원과 신성이 끊어진 물질에 잠긴 시간이 되고 말았다. 지금 시대는 돈이 없이는 살 수 없고 돈이 있어도 삶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로부터 인생은 늘 ‘준비’에서 또 다른 ‘준비’로 흘러가고, 지금 여기의 삶은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디는 고통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 인류 역사에서 오직 현대의 인간만이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오늘’뿐인 삶을 유보시킨다. 그러나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12쪽)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유랑하며 찍은 사진에 짧은 시를 곁들여 엮은 사진에세이 <하루>의 서문에서 시인 박노해는 ‘하루’를 위와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의 멋스러우면서도 정확한 표현에 공감하며 나에게 “평범하고도 경이롭고, 흔하고도 무서운’ 하루들은 어떠했었나 돌아봅니다.

항암치료약을 허리춤에 차고서 일터로 향했던 하루들. 더이상 견디기 힘들어 일터로 향하는 걸음을 몇 달간 멈추고 치료받던 하루들. 이 멈춤으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보냈던 하루들. 감사하게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어 일터로 다시 돌아가 지내온 하루들. 암이 재발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하루들. 이런 ‘하루’들이 모여서 나의 한 해가 되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질병과 그로 인해 느낀 삶의 덧없음이 하루를 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박노해 시인이 말했던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염려하며 오늘 뿐인 삶을 유보하며 사는’ 삶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습니다. 암을 진단받고 수술받고 치료받는 동안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는 선물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늘 주어지는 것 같은 하루였지만 다른 ‘하루’였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일상을 접고 세계여행을 떠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루를 완전히 다르게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일터와 집, 병원을 오가며 평범하고 흔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만 그 하루에 만나는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소소한 대화, 일상에서 지나치던 풍경,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들에 경이로움이 덧입혀졌을 뿐입니다.

 

 

에디오피아, 버마, 수단,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인도, 티베트, 볼리비아, 페루, 중국, 라오스. 박노해 시인이 둘러보며 사진을 담아 온 지역들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일상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도 ‘하루’가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그 하루의 순간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카메라에 담아 일상에 깃든 감동을 전합니다.

아침마다 꽃을 꺾어 불전에 바치며 하루를 시작하는 버마의 소녀, 씨감자를 심는 인도네시아의 농부들, 지하 갱도에서 일하고 나와 햇빛에 눈이 부신 볼리비아의 광부, 한자리에 모여 앉아 우애와 환대를 전수하는 파키스탄 마을의 노인과 아이들, 햇살과 바람이 젤 좋을 땐 길게 놀자며 참교육을 하는 선생님, 황야에 서서 책 한 권에 깊이 빠져 있는 한 소녀.

너무나도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의 여러 하루를 마주하며 내 하루의 순간들을 비춰봅니다. 참 바쁘고 분주한 하루, 그럼에도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는 하루, 함께 있는 동료의 얼굴 표정도 기억나지 않는 하루.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지만 왠지 나의 시간이 아닌 것 같은 하루들. 책 <하루>를 보다 박노해 시인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내가 나 자신의 하루를 살지 않는다면 무언가 내 하루를 앗아가고 만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나를 연구해 자원으로 써먹어 간다. 모든 악의 세력이 지배하려는 최후의 목적지, 세계화된 자본권력이 점령하고자 하는 최후의 영토는 나 개인들의 내면과 하루 일과가 아닌가.”(12쪽)

이렇게 빼앗긴 하루를 살아가다보면 껍데기만 남아버릴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이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는 전혀 새로운 하루임을 박노해 시인이 담아온 사진과 글귀들을 보며 다시 확인합니다. 하루를 진정한 나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를 연구해 자원으로 써먹어 버리는 세상에서 알맹이로 살아가지 못하리라는 점도 기억합니다.

삶에 가득한 불안을 채우려고 자극적인 것을 찾고, 소비하고, 소유하려고 하기보다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뿐입니다. 이럴 때 박노해 시인이 모아온 사진과 글을 보면 힘이 납니다. 그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듯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감동할 줄 아는 힘과 감사하는 힘 그리고 감내하는 힘”이.

오늘도 가방에 넣어 온 박노해 사진에세이 <하루>를 꺼내들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선물로 주어진 하루의 삶을 마음껏 누렸는가? 하루를 남김없이 살았는가? 진정한 나로 하루를 살았는가? 연말연시 뿐만 아니라 매일 같이 곁에 두고 하루를 곱씹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묵상집입니다. 우리는 긴 호흡으로 삶을 살아내야 하니까요.

““내가 태어나던 날 아빠는 오크 나무를 심었어요.
스무 살이 되면 나무그늘에 앉아 책을 읽자고.
100년이 지나면 아름드리 나무가 되고
300년이 흐르면 푸른 숲을 이룰 거라고.
그러니 대를 이어 가꿔가도록 잘 일러야 한다구요.”
소중한 것들은 그만큼의 시간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법.
우리 삶은 긴 호흡으로 푸른 나무를 심어가는 것.”

- 나무를 키우는 소녀(85쪽)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