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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여성의 날, 남성들이 참석해 기념하면 좋겠다 본문
여성, 인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여성의 권리 선언>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날입니다. 회사가 매년 여성의 날 행사에 참석하는 여성조합원들에게 근무일수 하루를 빼주는 걸 보면서 ‘여성들은 좋겠네’ 하고 부러워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어떤 남성조합원은 왜 남성의 날은 없냐며 볼멘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엔 남성들이 이처럼 생각없이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남성의 날은 왜 없냐고?
여성의 날을 따로 정해서 기념한다는 건 그만큼 여성이 소외되어 왔기 때문임을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최근 몇년 동안 많은 남성들이 ‘이제는 성평등이 이루어졌다’ 혹은 ‘역차별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렇지 않다 생각합니다. 남성으로 태어나 살면서 집과 회사에서 느끼는 건 역시 아직도 매일 매일은 ‘남성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일등 남편이 되는 건 아주 쉽습니다.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내다버리는 제 모습을 옆집에서 보면 됩니다. 어느 주말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사진을 SNS에 올리면 됩니다.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행사가 있을 때 하루 휴가를 내 엄마들 틈에 앉아 있으면 됩니다. 회사에선 여성 직원들에 비해 그냥 신뢰를 받습니다. 남성위주 사회에서 남성은 아무런 장치 없이 숨쉴 수 있지만 여성은 우주복에 산소통을 짊어져야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들은 산소통 없이 숨쉬기 위해 투쟁해야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쟁취하지 않으면 저절로 권리가 주어지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근대적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올랭프 드 구주도 프랑스 혁명 시기에 <여성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며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대가로 처형당해야 했습니다. 여성들은 인간이라면 누릴 권리를 얻기 위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투쟁의 역사를 알면 어이없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성도 인간임을 선언하다
“프랑스 혁명의 시기, 드 구주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혁명이 내건 자유와 평등이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비판하며 글로써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 결과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처벌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의정 연설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8-9쪽)
이 조그만 책에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국제연합 여성 차별 철폐 선언’, 짧은 말로 긴 울림을 주는 페미니즘 명언록’이 실려 있습니다. 1789년 출판된 올랭프 드 구주의 주장과 이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1967년 유엔의 선언문을 읽어보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세계가 얼마나 진보했고 또 동시에 얼마나 정체되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부분을 현대의 소수자 권리 문제에 적용할 것인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올랭프 드 구주의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17개 조항에 ‘여성’ 대신 지금 우리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넣어 읽으면 되겠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엔 ‘여성’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우리 사회에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범주가 꽤 세분화되었습니다. 성소수자, 난민, 대책없이 죽음에 내몰리는 노동자들 등을 ‘여성’ 대신 넣어 읽으면 됩니다.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자유, 소유, 안전, 그리고 억압에 저항할 권리. 기본적인 것을 얻어내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투쟁이 있어왔는지를 이해한다면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지사지’만큼 뻔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내가 저 입장이라면’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혐오와 차별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200년이 흘렀어도 또 선언이 필요했다
“국제연합 헌장, 세계 인권 선언, 국제 인권 규약, 국제연합과 전문 기구의 여타 규범이 존재하며, 인권의 동등함과 관련하여 진보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 자행되고 있다고 인정됨을 고려하고,”(54쪽)
올랭프 드 구주가 참정권을 주장하고 죽임을 당한 이래로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성은 여전히 차별당해 왔음을 유엔 총회 결의안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차별적인 기존의 법, 관습, 규제, 관행을 폐지하고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적절한 법적 장치”가 필요함을 선언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에 적절한 강제 장치가 필요합니다.
투표권, 피선거권, 공직에서 일할 권리, 국적 취득 권리, 재산권, 이동권, 교육받을 권리, 노동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결혼이나 임신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누렸어야 하는 조건들이 1960년대까지도 여성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도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논란이 되는 것 자체가 성평등한 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좁디좁은 가정생활을 생각과 상상과 지식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여자들은 위험해진다. 독서를 하면서 여자들은 사회가 미리 정해두지 않았던 지식과 경험을 흡수한다.”(90쪽, 슈테판 볼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인용)
투쟁 혹은 혁명은 언제나 한계를 가집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함께 움직여가야 합니다. 슈테판 볼만이 쓴 것처럼 보편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룹의 깨달음과 투쟁을 통해서 공고하게 이어져 오던 관습에 작은 균열은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험해지는 책 읽는 여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남자들이, 기존의 지위를 누리는 이들의 깨달음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성도 남성도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인간 여성이 취하는 모습을 정하는 것은 그 어떤 생물학적, 정신적 또는 경제적 운명도 아니다. 여성이라고 하는, 이 남자와 고자 사이에 있는 중간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은 문명 전체이다. 어떤 개인을 타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개인의 중재가 필요하다. 만약 아이들이 홀로 존재한다면, 자신들의 성별이 다른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75쪽,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인용)
여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남성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 남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살아왔기에 여성들이 여전히 경험하고 있는 차별적 구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공감력의 부족은 성평등 문제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약자 그룹에도 동일하게 작동하게 될 것이기에 두렵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올해 세계 여성의 날 행사는 예년 만큼 진행되지 못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면 좋겠습니다. 올 해 제한된 상황에서 제가 선택한 것은 책을 읽고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여성의 날 행사에 직접 참석해 기념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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