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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초원위의양 2016. 3. 16. 21:45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 문예출판사 | 2009-11-10


  당신은 행복하고 싶은가? 아니 지금 당신은 행복한가? 이런 물음 앞에 서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이 시대, 특히 현재의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가당키나 한 말일까? 행복이라는 가치를 찾아보기가 더욱 힘겨워진 사회를 살아가다보니 행복은 점점 더 잊혀져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걸까? 수십 년도 더 지난 러셀의 책이 더 눈에 들어온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행복이란 감각의 회복이 가능할까? 러셀이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을 빌려보자.


  러셀은 책의 서두에서 행복은 크게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고 쓰고 있다. 행복은 사회제도와 개인 심리(심리도 일정부분 사회제도의 산물이기도 하다)에 영향을 받는다. 사회제도 변혁은 장기적이고 큰 과제이며 미래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개인의 문제 즉, 사회제도 내에서 어떻게 행복에 이를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러셀은 이러한 행복을 논하기 전에 어떠한 전제에서 그의 논의를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러셀은 양식과 주택걱정이 없고, 충분한 수입이 있으며, 충분히 건강한 이들이 일상적인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러셀은 불행의 주요 원인을 잘못된 세계관 혹은 좋지 못한 생활 습관에 있다고 보고 있다. 자신의 예를 들면서 자신이 행복한 조건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어떠한 갈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대부분 손에 넣었으며, 달성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포기했던 것이 행복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자신에 대한 편견이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러셀은 자신의 결점에 무심해지는 방법을 훈련함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러셀의 제안을 상세히 따라가 본다.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란 제목의 책에서 행복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행복하지 않은 즉, 불행한 원인을 생각하고 있다. 러셀이 말한 불행의 원인은 염세 혹은 허무주의, 경쟁, 권태, 피로, 질투,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에 대한 공포이다. 수십 년 전에 쓴 글임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원인들이라 생각된다. 


  염세주의 혹은 허무주의는 쾌락 추구 끝에 찾아오는 음울한 결론을 말한다. 이는 시대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받는 요인이다. 전쟁, 가난, 폭력 등 사회적 분위기가 원인이 되어 찾아오게 되는 불행이다.  자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만큼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을 때 이러한 경향이 발생한다. 


  경쟁은 성공을 위한 투쟁이라고 다시 쓸 수 있는데, 이는 타인보다 우월해지지 못함에 대한 불만족을 나타낸다. 불행의 직접적 원인은 경쟁에서의 성공을 행복의 주요 원천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우월에 대한 갈망, 경제적 성공에 대한 집착, 경쟁의 습관화 등 경쟁을 인생의 주요한 목표로 가지게 되면 신경의 피로, 도피현상이 나타나며 쾌락에의 추구까지도 사업처럼 긴박하고 어려운 일로 만든다. 이럴 경우 건전하고 조용한 기쁨을 삶의 조화로운 이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초등학교, 아니 그 이전부터 치열한 경쟁에 놓인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 자신들을 투영한 어리석은 부모들이 득시글대는 한국사회가 행복이라는 감각을 망각해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러셀이 지목하는 불행의 원인 중 권태는 현재의 상태보다 더 유쾌한 다른 상태를 비교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때, 어떤 일에 대한 욕막이 좌절된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권태의 반대는 자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극의 추구가 증가하고 있는 현대 사회는 권태로부터 끊임 없이 빠져나가려 애쓰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권태는 한편으로 건설적일수도 있고 또 한 편으로는 파괴적일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양'이다. 이럴 경우 권태를 견디는 힘을 길러줄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의 즐거움은 주로 약간의노력과 창의력에 의해서 어린이 스스로가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찾아내는 것이라야 한다. 러셀은 지나친 권태와 자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지의 생명 리듬, 즉 차는 때와 기우는 때, 완만함 등을 참고할 것을 제안한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대지의 생명과 단절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다.


  피로 또한 지나칠 때에는 행복에 장애가 된다. 육체의 피로는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상당부분 해소되었지만 신경적인 피로는 급격히 늘어났다. 낯선 것에 항상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피로를 배가하기도 한다. 피로를 다루기 위해서는 생각을 적절히 통제할 필요가 있다. 걱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고민하고 그 문제가 대단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신경적 피로는 감소하게 된다. 걱정이라는 것은 무의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조금 더 큰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걱정은 공포의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포는 그것에 친숙해질 정도로 직시함으로써 기술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것이다.


  질투는 어린 시절의 불행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고 러셀은 말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차별, 동료로부터의 경멸, 사랑받지 못한 느낌 등을 통해 비교하는 습관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멋지게 성공한다고 해도 질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자신보다 더 성공적인 사람이 반드시 있고, 그런 사람이 없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속 성공에까지 질투를 느끼기 때문이다. 질투심에 휩싸인 소년들에게 자기 자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성장할 수 있게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대에는 질투가 만연하고 있다. 본능을 만족시키는 생활을 확립하고 행복의 본질은 단순함에 있음을 재확인하자. 


  죄의식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죄를 지은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는 유아시절 왜곡된 도덕 교육 탓일 경우가 많다. 술과 담배의 경우엔 거의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이다. 거짓말이나 성에 관한 느낌도 마찬가지이다. 죄의식은 또한 자좀심이 결여된 열등감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너그럽고 관대한 태도는 안정과 자기 신뢰의 결과인데, 이러한 태도를 함양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장점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된 생각을 가지고 있게 되면 피해망상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생긴다.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 뒤 그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고 하는 일부의 자산가들은 피행망상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동기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이타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업적을 과대평가 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이들이 자신에 대해 자신과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박해하고 싶을 정도로 자신에게 골몰해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심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경향을 가지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러셀의 제안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은 여론에 대한 공포이다. 현대사회는 도덕과 신념이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다. 호의적 환경이 행복에 필수적인 요건 중의 하나임을 기억한다면 여론에 대한 공포는 행복을 위협하는 중대한 요인이 될 수 있다. 불필요한 체면보다는 무관심이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들은 상당한 수입의 손실을 보더라도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여론을 경멸하는 것 또한 여전히 여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같은 취미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사회적 교제를 이룸으로써 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


  러셀은 이와 같이 불행의 원인에 대해 먼저 기술한 후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가고 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추상적 물음에 효과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지 못할 때 행복이 아닌 것을 찾아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러셀은 행복의 원인을 바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먼저 말함으로써 자신의 논리에 살을 채워간다. 러셀은 행복에는 분명한 행복(동물적 행복 혹은 심적 행복)과 공상적인 행복(정신적 행복 혹은 지적 행복)이 있다고 보았다. 전자는 우물 파는 정원사와 같이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개방된 것이고 후자는 교육 받은 것에 차이가 있을 경우 기쁨을 얻는 활동에 차이가 있는것과 같이 읽고 쓸줄 아는 이에게만 개방된 것을 말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논의를 이어간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근본적 행복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우호적인 관심에 달려 있다. 의무감에서가 아닌 진정한 관심이 필요하다. 가능한 한 폭넓은 관심을 가져라. 그리고 가능한 한 당신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물이나 인간에 대해 적대적이기보다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라"


  러셀이 생각하는 행복은 열의, 사랑, 가족, 일, 일반적 관심사, 노력과 체념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생각하기에 따라 우리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행복의 원인들이라 생각한다. 시대는 지나고 세월은 흐르지만 인간의 본성은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러셀은 열의를 이야기하면서 성찬 앞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를 삶에 대한 태도로 비유하고 있다. 건강한 식욕을 가진 사람은 음식을 즐기고 적당히 먹을 것이다. 음식에 굶주림을 인생에의 열의라 할 수 있겠다. 식사에 실증을 느끼는 이는 염세주의자 혹은 허무주의자이고, 의무감에서 하는 식사는 금욕주의자와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대식가는 인생에서 난봉꾼이고, 미식가는 인생의 쾌락의 절반은 반미학적이라 비난한는 괴팍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외부적 관심과 지나침에 대한 적절한 경계가 필요하다. 취미나 욕망도 전반적 생활의 틀에 맞아야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정, 사회의 존경과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러셀이 열의를 인간 본성의 일부로 보고 있지만 열의의 제한은 문명사회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적절한 조절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흔하디 흔한 단어가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은 열의를 촉진하지만, 사랑의 결핍은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사랑의 표현이 안정감을 느끼는 한에서는 인생에 대한 열의의 표현일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의 표현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사랑은 이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사랑의 최고 유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서로의 생명을 주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에는 흡혈적 유형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사랑에 대해 러셀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랑, 각자를 각자의 선을 위한 수단으로 볼 뿐아니라 공동선을 가진 결합체로 보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행복에 득이 되기도 하고 실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여성에게 있어, 특히 현대의 여성에게 있어 양육과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어찌보면 여성은 가족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네 어머님의 잔소리와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가족을 소홀히 여기고 전과 같이 쾌할한 매력을 유지했더라면 아마도 가족들은 그 여자를 사랑했을 것이다. 가족이 행복의 원인이 됨에도 현대 사회에서는 주택문제, 도시집중, 부모 자녀와의 민주적 관계 등으로 인해 부모됨의 환희가 상당부분 상실되고 있음을 러셀은 지적하고 있다. 러셀의 그 시대에도 현대 우리가 겪고 있는 가정 안의 문제들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성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부모가 되는 것은 심리적으로는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의 가장 지속적인 행복이다. 


  도 가족과 마찬가지로 양면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독창성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지시가 지나치게 불쾌한 것이 아닌 한 하루의 일과표를 지시받는 편이 확실히 더 유쾌하다. 일은 권태의 예방책이 되며, 휴일의 즐거움을 더 느끼게 하는 요소이다. 또한 성공과 야심을 달성시킬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장기적으로 일관성 있는 목적은 행복의 본질적 요소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관성은 주로 일을 통해 얻어진다. 


  일반적 관심사는 반드시 하루의 일로 소모된 능력을 더 이상 발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어야 한다. 관심의 대상은 의지나 신속한 결단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감정적 피로를 일으키거나 잠재의식과 의식을 동시에 지배할 만큼 자극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 관심은 균형감각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 불행이 닥쳤을 때 사고를 새로운 방향 혹은 현재의 불행과 거리가 먼 방향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삶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킬 필요가 있으며, 자신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핵심적 관심 이외의 많은 부차적 관심을 갖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와같이 러셀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 이외의 주변에 대한 관심은 다양하게 확대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행복에 있어 노력과 체념의 적절한 조화 혹은 균형이 필요하다. 인생의 행복은 저절로 굴러들어오지 않고, 일정부분의 성취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희망적 체념은 원대한 꿈 앞에 작은 불행을 포기할 수 있게 해 주며 사소한 것들에의 정력 낭비를 막아준다. 또한 체념은 어떤 일들을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희망적 체념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과 대면하려는 용기가 내포되어 있다. 첫 순간에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기만자가 빠져들기 쉬운 실망과 환멸에 대한 방패가 될 수 있다.


  러셀은 참으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반복해 말하지만 과거 수십 년 전의 생각들이 지금에 있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고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의 감각에 무뎌져서, 아니 한국의 경우엔 행복을 빼앗겨서 행복을 망각해가는 우리들에게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라는 이 책은 어려운 외부적 환경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지켜가며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제안을 제공한다. 물론 책의 서두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행복은 어찌보면 사회 제도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일수 있다. 그렇기에 현재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일반 대중들에게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러셀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를 둘러싼 외부환경에 언제까지나 우리 삶을 저당잡히고 살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우리 마음 속에 솟아나는 행복의 기운이 우리의 외부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할 것이라는 믿음을 변치않고 가지고 있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남자나 여자는 피할 수 있는 불행과 피할 수 없는 불행, 병과 심리적 갈등, 투쟁과 가난과 악의로 가득 찬 세계에서 각 개인에게 맹공을 퍼 붓는 불행의 무수한 원인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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