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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서재에서 발견한 단아한 진주 본문
하얀색 바탕 한 가운데에 놓인 진주 조개 하나. 살짝 벌어진 진주조개 안에 단아하게 놓여 있는 진주 하나. 피천득님이 쓴 인연이란 수필집의 표지다. 이렇게 단촐하면서도 책을 잘 표현한 표지가 또 있을까 싶다. 한장 한장 넘기면서 나타나는 아름답고 신선한 수필들을 읽어가며 느껴지는 것은 노인 피천득님의 젊음이고, 표지의 진주와 같은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아름다움이다. 어쩜 이리도 아름답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인지. 피천득 선생은 '그 동안 나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을 위하여 글을 써 왔다'라고 쓰고 있다. 책이 만들어지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통해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 공감하게 된다. 나는 인연이라는 책을 통해 피천득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되어 참으로 기쁘다.
이 책을 통해 수필이라고 하는 장르에 깊이 빠져들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겪는 모든 순간, 주위의 사람 혹은 사물들, 스쳐지나가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가 되는 환상적인 장르가 수필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의 차례를 읽어나가다 보면 피천득 선생이 보고, 듣고, 경험한 많은 주제들에 대한 요약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든다. 어찌 그 긴 인생을 이 짧은 몇 편의 글로서 다 공감할 수 있겠냐마는 이 몇 편의 짧은 글들을 통해 피천득이라는 인간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게 된는 것 같은 생각은 나만의 착각일 수 있겠으나 아주 즐거운 착각이었다. '수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피 선생은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18page)라고 표현한다. 이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피 선생이 이렇게 표현한 것을 아주 공감하게 된다. 참으로 한가함을 느끼게 하고, 속박에서 벗어난 듯 하고, 우아하며 산뜻함을 깊이 느끼게 된다. 수필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유'라고 할 수 있겠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것 같이 차갑게 느껴지는 요즘이어서 그런지 피 선생이 계절을 노래한 수필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특히 봄을 노래한 몇 편의 글들에서는 피 선생의 젊음에 대한 동경 혹은 찬미하는 마음을 느껴볼 수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껴지는 회한, 후회, 안타까움과 같은 심정들에 앞서 피 선생은 젊음을 바라보며 글을 써내려간 듯 하다. 나는 아직 젊디 젊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나이 듦에 대한 안타까움은 역시나 가지게 된다. 허나, 봄을 기다리며 젊음을 노래한 노 선생의 글을 보니 나는 더 기운이 나고 희망을 가지게 된다. 젊음을 이야기하다보니 '여성의 미'라는 솔직함이 묻어나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도 청춘의 정기를 잃으면 시들어 버리는 것이지만, 착하게 살아온 과거, 진실한 마음씨, 소박한 생활 그리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희망, 이런 것들이 아름다움의 퇴화를 상당히 막아낼 수 있을 것(44page)이라고 쓰고 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삶을 바라보는 피 선생의 눈은 솔직하면서도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을 볼 수 있는 혜안이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너무 많다'(58~59page)라는 글에서는 비성경적이어서 개인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종교를 가진 이들이 간혹 하게 되는 생각일 것 같은 재미 있는 상상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후손이 30억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들 하나하나를 돌보아 주실 수 없게 되었다. 하나하나를 끔찍이 생각하고 거두어 주시기에는 우리의 수가 너무 많다.' 하나님에 대해 토라져 있는 상태가 바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아닐까 한다. 지금은 이 글이 쓰여질 때보다 많아진 것이 더욱 더 많다. 인터넷이라는 무한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보의 바다, 수도 없이 새롭게 생겨나는 매체들, 더욱 넘쳐나는 책들, 그 때보다 두 배는 많아진 지구위 사람들. 이런 많아짐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과 머릿속은 더욱 더 복잡해지고 산만해져만 간다. 슬프다.
딸 서영이가 등장하는 수필들에서는 아버지가 딸을 향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들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 서영이 이야기가 나오는 글들에서는 유쾌함이 묻어 난다. 서영이의 유치원 시절 딸을 바라보며 쓴 듯한 '찬란한 시절'에서 피 선생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그 시절을 추억한다. '유치원 시절에는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다.'(109page) 나의 작은 딸도 아직 유치원에 다닐 만큼 자라지는 않았지만, 이 아이를 보며 피 선생이 말한 찬란한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낀다. 나의 작은 딸은 요즘 모든 것이 신비롭고 재미난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 화려한 장난감이 없어도, 많이들 가지고 있는 전동 자동차가 없어도, 택배 박스에 포장으로 온 뽁뽁이를 매만지며 한 없이 즐거워하는 나의 작은 생명체. 그 아이를 보고 있으니 피 선생이 딸 서영이를 보면서 어떤 감정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서영이에게 쓴 편지는 아빠가 느낄 수 있는 딸을 향한 사랑, 이 세상 딸 가진 아빠들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스런 마음이 깊이 묻어난다. 나 역시 우리 딸을 향해 이런 편지를 쓸 날이 오겠지? 벌써부터 설레인다.
한 여인과의 '인연'에 대해 쓴 글 역시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다. 살아가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피 선생이 '인연'에서 표현한 것과 같은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 같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137page) 한 창 아이러브 스쿨이라는 인터넷 서비스가 인기를 누리게 될 때 한 번쯤은 어릴 적 추억속의 친구들을 만나보지 않았을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희미한 추억을 찾아가 보고자 옛 친구들을 만나보면, 때론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즐거운 착각 속에 빠지게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피 선생의 글에서처럼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인연'들도 있었다. 다시금 그 흐릿한 기억 속 시절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라는 수필은 살아가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글이 아닐까 생각한다. 피 선생은 자신이 사랑하는 생활에 대해 세 페이지 정도를 써 내려 가고 있다. 아,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지? 피 선생의 글을 향하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로 돌려 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이와 같이 써 내려갈 수 있을까? 일단 두려움이 앞섰다. 내가 사랑하는 것? 써 내려갈 목록이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까지도 내가 사랑하는 생활에 대해서 써보지 못하고 있다. 과연 나는 내가 살아하는 것들을 몇 가지나 쓸 수 있을까?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곧 써볼 생각이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생활들에 대해서.
피 선생이 상해에 있을 때 보았던 광경을 글로 옮겨 놓은 '은전 한 닢'이 기억에 남는다. 늙은 거지가 한 이 말을 읽으니 마음속에서 묘한 울림이 생겨난다. '나는 한푼 한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돈 마흔 여덟 닢을 각전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다양' 한 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222page) 무엇인가를 어디다가 쓰기 위해서 가지기보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가끔씩 있는 데 이 늙은 거지의 마지막 대답이 그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어 이 글이 기억에 남는다. 살아가다 보면 분명히 이런 때가 있다. 무엇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갈망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피 선생의 수필들에는 젊음 감성이 넘쳐 난다. 겉은 젊어도 속이 늙은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 '인연'이라는 수필집은 나를 포함한 우리 젊은이들에게 젊음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감성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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