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밥 딜런(Bob Dylan)과 노벨문학상, 그리고 미국 문학 본문

세상마주보기

밥 딜런(Bob Dylan)과 노벨문학상, 그리고 미국 문학

초원위의양 2016. 11. 2. 00:20

뉴욕 타임즈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밥 딜런에 관한 의견이 올라왔습니다. 딜런이 노벨상 수상 소식 이후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같습니다. 딜런이 과연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입니다. 특히 미국 문학계에 종사하는 작가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 보입니다. 정식 작가라고 하기는 좀 부족한 가수가 자신들을 제치고 명예를 차지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밥 딜런이 다음달 수상식이 열리기 전까지 입을 열어 의견을 말할까요? 아니면 이대로 침묵하며 노벨상 수여를 거정할까요? 멋지기는 참 멋집니다. 물론 밥 딜런에게 상금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큰 경제적 보상과 명성을 더할 수 있는 기회인데 기뻐하기는커녕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가 참으로 멋있습니다. 노벨위원회를 지금까지처럼 무시하면서 수상을 거부하면 더욱 멋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텔레그래프와 한 인터뷰에선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래 기사와 같은 의견을 쓰며 딜런의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작가는 민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암튼 노벨상 수상식까지는 한 달 여가 남아 있으니 딜런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겠죠. 바라기는 자신들을 마치 신과 같이 여기는 스웨덴 한림원에게 ‘나 안받을래’ 한마디 하고 유유히 돌아서는 딜런의 모습도 보고 싶긴 합니다.



출처: Adam Kirsch, The meaning of Bob Dylan’s silence, The New York Times

 

1964년 여름 밥 딜런은 자신의 네 번째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을 냈습니다. 이 앨범엔 go ‘way from my window / leave at your own chosen speed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It ain’t me babe 라는 노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I’m not the one you want, babe / I’m not the one you need.

 

그 해 가을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면서 위 노래와 비슷한 조로 말했습니다. 사르트르는 가장 명예로운 상황일지라도 스스로를 제도에 예속되게 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딜런은 상상 속의 사랑하는 이에게 말했고 사르트르는 스웨덴 한림원에 말했지만 메시지는 비슷했습니다. “만약 네가 나는 나인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면 날 내가 아닌 것으로 만들지 마”

 

우리는 딜런이 52년 전 가을 사르트르 사건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사르트르의 발걸음을 따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찌보면 딜런은 사르트르보다 더 한 것 같기도 합니다. 딜런은 상을 거절하지도 않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딜런은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고 스웨덴 한림원의 전화에도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딜런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수상 소식이 팝업으로 나오다가 이내 사라졌습니다. 딜런이 시킨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노벨상 수상자들로부터 많은 감사를 받아왔던 스웨덴 한림원은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림원의 한 회원은 딜런의 행동이 무례하고 오만하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예기치 않은 일들에 많은 시적 정의가 있습니다. 1993년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 노벨상을 받은 이래 거의 4반세기 동안 노벨 위원회는 미국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 미국인이 노벨위원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딜런에게 노벨문학상을 주는 것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되어 왔던 모든 위대한 미국인 소설가와 시인들에게 모욕이었습니다. 거의 분명한 메시지는 전통적인 미국 문학은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스꽝스러운 개념이지만 스웨덴 한림원에게는 인정되는 생각입니다. 2008년 한림원의 Horace Engdahl은 미국인 작가들이 문학의 거대 담론에 진정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그것은 무시라고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딜런이 미국 문학의 명예를 위해 침묵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는 비범한 시적 힘을 가진 서정적 작품이라는 이유로 수상한 퓰리쳐상(Pulitzer Prize)을 결국 받았습니다. 딜런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딜런은 인간적으로도 작사가로서도 이해하기가 항상 어려웠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딜런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의 침묵을 이해하고 그것을 칭찬하기 위한 최선의 길은 아마도 사르트르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사르트르의 나쁜 신념(bad faith) 개념이 그렇습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에서 나쁜 신념을 진실의 반대라고 설명합니다. 나쁜 신념은 인간이 단순이 그 자신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해 집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스스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모든 일을 너무 정확하고 열정적이고 번지르르하게 하는 까페 웨이터를 예로 듭니다. 그는 웨이터 역할을 하는 웨이터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된다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다른 사람을 위한 객체나 역할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유를 유지하는 것, 좋은 신념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그것인 불안한 방식일지라도 우리가 실제로 그런 존재로 규정되지 않고,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존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을 실존주의라고 부릅니다. 딜런은 이 실존주의의 최고의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완전히 무명인 채로, 구르는 돌처럼 사는 것은 사르트르가 말한 좋은 신념 안에서 사는 것이고, 딜런의 삶의 이상한 부분들은 명성이라는 엄청난 압박을 마주하고도 이 자유를 유지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1964년 뉴요커에서의 프로필에서 딜런은 “더 이상 사람들을 위해 곡을 쓰고 싶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쓰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노벨상 후보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규정하게 하는 것이고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객체 및 공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노벨상은 나쁜 신념의 궁극적인 사례입니다. 소수의 스웨덴 비평가들이 신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고, 대중은 노벨상 수상자가 문학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 이 모든 허상들이 독자와 필자 사이의 개인적으로만 만날 수 있는 문학의 진짜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딜런이 아직은 상을 받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스웨덴 한림원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걸 거절하고 있는 그는 진정한 예술가적, 철학적 자유가 무엇인지 실증해주는 멋진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