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그림자 노동 - 이반 일리치 본문

세상마주보기

그림자 노동 - 이반 일리치

초원위의양 2016. 10. 23. 23:45

이반 일리치

 

1926년 오스트리아 빈 태생으로 아버지는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20세기 초반엔 뛰어난 사상가들이 많이 출현했는데, 이들은 인류 역사에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사건들(대공황,  1,2차대전)을 세 번 겪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처참한 망가짐을 목도한 사람들이었고, 이성 상실의 시대를 본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이 시대 사상가들은 생각이 깊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거나 극단적으로 불신하거나 한다.

 

타임지는 이반 일리치를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라 칭했고, 가디언지는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했다. 뉴욕 타임즈는 주류 체제를 떨게하는 지식의 저격수라는 수사를 이반 일리치에게 헌사했다. 이반 일리치는 12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고 전해지고, 박사학위도 5~6개 정도 보유했다고 한다. 1951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사제 서품도 받았다. 교수직을 제안 받기도 했지만 이를 마다하고 뉴욕 빈민가에서 보좌신부로 지냈다고 한다.

 

그림자 노동이란?

 

이반 일리치는 인류 역사상 노동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는 자급자족 노동(자기가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기 위해 하는 노동. 생산품 만들어냄)이고 두 번째는 임금노동(남이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노동. 임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이다. 그리고 세 번째를 그림자노동(가사노동, 돌봄 노동. 보수가 없다.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이라고 했다. 그림자 노동은 매우 희한한 노동이다. 그림자노동은 임금노동을 잘 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보수 노동이다 라고 이반 일리치는 규정했다. 즉 임금 노동을 위한 그림자이다 라는 의미였다. 

 

이반 일리치가 말한 그림자 노동은 단순히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적 노동이 아니었다. 이는 자본이 임금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시스템 중의 하나라고 봤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 시스템을 떠나 살기는 너무 어렵다. 원시시대엔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는 자급자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현대 시스템에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민중들이 임금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교육 후에 민중들은 노동시장에 나간다. 운좋게 일자리를 얻으면 하루에 열 몇시간씩 일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돌봐야 하는 자식이 있기 때문에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일을 해선 안되는 존재다. 부모는 자녀를 돌봐야 하기에. 자본은 이를 위해 분리를 시킨다. 남자가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일을 한다. 하지만 주부들은 남편들이 일할 수 있도록 돌봄 노동을 한다. 미래의 노동자인 애들이 잘 클 수 있도록. 하지만 이 노동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그림자 노동은 무보수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다. 그림자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경쟁시킨다. 가정주부는 그림자 노동은 아주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준다. 남편 밥을 잘 해 먹여야 하고, 자녀들을 잘 먹여야 좋은 노동자가 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남편 보필 잘해야 회사가서 열심 일해 출세합니다. 이와 같은 강박을 심어주고 경쟁을 붙이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그림자 노동도 상품화된다. 

 

재벌들은 가정주부들에게 ‘그림자 노동을 잘 못하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면 돼’라며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한다. 보수를 주기는 커녕 이들을 경쟁시시켜서 더 나은 그림자 노동자가 되고픈 열망을 갖게 한 후 상품을 판다. 요리학원, 숙제도우미, 각종 학원이 그렇다. ‘애들교육 잘 시켜야죠. 그게 잘 안되면 우리에게 돈을 주면 가르쳐줄게요.’라며 상품화를 가속화한다.

 

그림자 노동의 본질은 돌봄이다. 내 가족을 돌보는 것은 운명이며  사랑에 기반한 것이다. 이처럼 본능적인 노동을 자본주의 시스템은 숭배의 대상으로 만든다. ‘가족을 돌보는 것은 본능을 넘어서는 가치 있는 일이야. 그러니까 너희는 숭고한 일을 할 때 돈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열심히 해. 얼마나 아름다워. 엄마답게 사는 것. 엄마로서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 이것 아름답지 않니?’ 자본주의는 이런 것을 가르친다.

 

아이낳고 나면 자기 삶이 없어진다. 그림자 노동을 더 잘하기 위해서 돈도 막 쓴다. 그리고  이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이것을 잘하면 주위에서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부의 삶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초원에 있는 얼룩말도 새끼를 낳고 본능적으로 보호를 한다. 초원에 사는 얼룩말은 내 새끼가 옆집 새끼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경쟁하지 않는다. 그냥 본능적인 돌봄이다. 이를 위해서 대가를 치르지도 않는다. 

 

핵심은 이렇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동물과 달라서 하나의 군락을 이루고 문화를 형성했다면 인간은 그 문화를 지탱하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그림자 노동이란 것은 새로운 인간을 사회 구성원으로 키우는 일이다, 임금 노동자를 지탱해주는 돌봄(밥, 교육 등)인 그림자 노동에 대해선 누가 대가를 치뤄줘야 할까? 인간의 사회 시스템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기에 당연히 사회적 노동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자 노동하면서 학원비 내고, 요리학원 다니고, 돈을 쓰면서 그림자 노동을 하는 건 말이 안된다. 이 그림자 노동에 대해서 사회적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돌봄 노동이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보육의 사회화는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의 공공화 반드시 필요하다. 누리과정 교육의 경우 맞벌이면 하루종일 이용하게 하고 외벌이면 6시간 밖에 이용 못하게 하는 일은 해선 안된다. 

 

돌봄 노동을 착취의 도구로 이용한다면 돌봄 노동의 대가를 자본이 치러야 한다. 그걸 왜 맞벌이냐 아니냐로 구분하는가. 아이들의 교육은 무상으로 해야 한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대학까지 무상으로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왜 교육이 가정의 책임인가? 교육을 받아서 새로운 노동자들이 사회에 나가고 나면 이익을 보는 것은 자본과 사회인데 그렇다면 자본과 사회와 국가가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유럽에선 일반적인 것이다. 

 

가사노동, 돌봄 노동, 무보수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림자 노동은 당연히 사회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출처: 김용민의 뉴스브리핑, 이완배 기자의 경제의 속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