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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고통의 나라 대한민국 시민에게 필요한 것 본문
한겨레 21 1117호(2016년 6월27일 발행)는 여전히 필자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에게는 닥치지 않았지만 지난 1년 동안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겪어온 고통스러운 현실을 ‘고통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다룬 기사 때문이다. 기사에는 사람들은 이미 잊었을지도 모르는 메르스 사태에서부터 구의역 사고로 숨진 청년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를 그득하게 채우고 있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어 곁에 두고 곱씹으며 읽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고통의 나라’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은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운 좋게도 고통이 피해간 필자와 같은 사람들은 내가 희생양이 되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하며 살아간다. 이 나라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어 각자가 파편화되어 있는 참으로 불행한 나라다.
어디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지 막막하다. 게다가 최근엔 고위 공무원, 기업 경영자, 종교지도자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이들이 기본적인 도덕성마저 쓰레기통에 쳐 넣는 것을 보며 인간이란 존재에 실망하게도 된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사랑과 돌봄, 생명 존중, 공감과 배려 등의 가치마저 너무나 쉽게 부정되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 인간이란 존재, 그리고 회복해야 할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리처드 노먼의 책 ‘On Humanism’ 2판을 완역한 <삶의 품격에 대하여>는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특징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인간으로서 회복해야 할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종교적 믿음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도덕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해 논하고 있어 비리와 성추문 등을 일으키며 실망을 안겨주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가진 우리들에게 적절한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과거 종교가 제시하던 삶의 목적 혹은 존재의 의미를 부정한다. 대신에 종교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들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덕적 가치를 서로 공유하고 의미있고도 만족스러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바닥을 치게 만드는 이 나라에도 도덕성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리처드 노먼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특징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신의 정신 상태와 경험에 대해 자각’하는 ‘의식 consciousness’을 꼽았다. 의식이 있기에 우리는 “자신의 정신 상태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그것을 생각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102쪽)할 수 있다고 썼다. 이것은 한겨레 21 1117호에서 김상봉 교수가 언급했던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과도 맥이 통한다. 저자는 ‘의식’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판단하려면,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품으려면,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려면 의식이 필요하며, 이 의식이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데 선행조건이 된다.”(103쪽)
“의식의 소유가 우리의 삶에 가치와 목적을 부여하는 일에 본질적인 선행 조건이 되는 것 같다.”(117쪽)
국민의 고통과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권에만 눈이 멀어 있는 정치인들,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재벌기업들, 성추문과 돈 문제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종교지도자들 등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한없는 회의가 밀려온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비인간적이었던 나치의 강제수용소 안에서 ‘여전히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열망이 그래도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고 고백했던 프리모 레비를 생각하니 인간성이 상실된 이 사회에 오히려 인간성 회복의 열망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주의에 맞서 저자는 평등의 추구, 불의에 맞선 투쟁, 억압받는 집단의 저항,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관념, 웃고 즐김, 공포와 두려움 등 인간은 보편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우리 민중들 역시 불의에 맞서 투쟁하여 자유를 쟁취해 왔고,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하여 촛불로 저항하기도 했고, 여전히 고통속에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지지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가 기댈 것은 우리들 민중 자신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이 전달하는 이익과 손해의 수령자다. 동시에 인간은 자기 나름의 감정과 믿음을 가진 의식적인 주체이며, 선을 위해서건 악을 위해서건 나름의 선택을 하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마땅히 두 종류의 관심을 모두 가져야만 하며,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자 동시에 타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이 그들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180쪽)
이 나라에서 고통을 줄여나가기 위해 우리 마음을 가득채우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걷어내고 나와 너가 동일한 주체라는 것을 진심으로 인식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적이라 여겼던 ‘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라는, 단순한 감정의 행복이 아닌 너와 내가 함께 객관적으로 번영하는 상태를 이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저자가 언급한 '지적인 능력보다는 특수한 상황에서 현실을 꿰뚫어 보는 실천적인 지능과 타인의 욕구와 경험을 공감하며 동일시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또한 나와 우리 이웃의 삶에 의미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봐야 한다. 이 때 리처드 노먼이 개인적인 관점에서 제안한, 우리의 삶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고 계속 살아가고 싶게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창조적 성취를 통한 보람, 지적탐구에 따라오는 만족 , 타인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기쁨,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유. 이러한 것들은 저자도 인정했듯이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내용이지만, 때때로 진부한 것들에 진리가 담겨있기도 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인생은 무의미하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서사적 예술 혹은 이야기가 깃든 예술이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기에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고 찾는 데 가치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 예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와 그레이엄 스위프트의 소설 <워터랜드>를 소개하면서 서사적 예술이 가진 가치를 주장한다. 모든 서사에 특수한 경험을 가진 특수한 개인들이 등장하는데 그 삶과 경험은 우리도 동일시할 수 있는 삶과 경험이기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우리 삶에 적용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삶을 의미 있게 하는 목적이 외부에 있지 않으므로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그 도구로 서사적 예술을 이용해 볼 것을 권한다. 우리가 원하는 도덕성을 갖춘 이상적인 사람과 사회는 아마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는 취약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고통의 나라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안엔 나와 너, 우리가 함께 번영하기를 원하는 이상이 잠재되어 있다. 서사적 예술을 통해 ‘지성과 상상력과 감성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며 살아낸다면 이 이상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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