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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청각 장애, 슈퍼 파워가 되다 본문
시끌시끌한 까페에 앉아 있다가 두 귀를 꼭 막아봅니다.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입을 유심히 관찰해 보지만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뭐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친구와 마주앉아 있다가 갑자기 친구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듣는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청력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장애를 경험해 보지 않고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시시 벨(Cece Bell)이라는 작가의 귀여운 그림책 <엘 데포>를 읽고 나서 청력을 잃은 이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네 살때 급작스러운 뇌수막염으로 인해 청력을 잃었던 작가 본인의 경험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 것입니다. 고도 난청을 가진 어린 아이가 정상적인 친구들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경험한 불편함, 상처, 깨달음 등이 각 에피소드마다 담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실이었습니다. 청력을 잃어 엄마의 말을 들을 수 없게 된 작가에겐 엄마가 사라진 것 같았다고 합니다. 시시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그린 장면들의 말풍선이 비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청력을 잃게 되면 소리를 내는 대상이 사라지는 정도의 상실감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인공 시시는 잃어버린 존재를 조금이나마 찾기 위해 보청기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친구와의 대화는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답답해 간단한 대화조차 쉽지 않습니다. 시시는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에 같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 가게 되지만 그곳 역시 시시에겐 낯선 공간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아직도 너무 낯설고 또 너무 달랐어요. 우리는 많은 시간을 각자의 행성을 타고 떠돌았어요.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같은 우주에 있었죠."(33쪽)
시시는 특수 학교에 적응하는 대신 일반 학교에 다니는 걸 도전하게 됩니다. 시시는 이제 학교에서 생활하기 위해 거대한 포닉 이어라는 학교용 보청기를 착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이크와 세트로 되어 있어 선생님이 마이크를 목에 걸고 말하면 시시의 보청기로 소리가 전해지도록 해 주는 장치입니다.
학교에선 시시를 위해 선생님들이 항상 마이크를 목에 걸고 다녔기 때문에 시시는 선생님들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휴지를 뜯어 닦고 물을 내리는 소리조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시는 이것을 '다른 사람은 모르는 신기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나중에 시시가 다름을 장애가 아닌 차이로 인식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시시는 자신이 어디에 있어도 언제나 거품 속에 따로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보청기를 신경쓰지는 않지만 너무 제멋대로인 친구, 공통된 관심사는 있지만 시시의 청력 문제에 유난을 떠는 친구 등과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시시는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는 텔레비전과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
시시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보청기를 한 아이를 보게 됩니다. 텔레비전 속 아이들은 그 친구를 ‘데포’(귀머거리)라 불렀는데 시시는 이 말에 꽂힙니다. 그리곤 자신에게 '엘 데포'(엘은 the라는 뜻입니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죠.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게 된 순간이었을까요?
어느 날 시시는 집 앞에 사는 마사라는 한 살 어린 동생을 만납니다. 마사는 시시가 보청기를 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시시를 대해주었습니다. 게다가 마사는 소리를 크게 내려고하지도 않고 입을 이상하게 움직이지도 않았죠. 물론 자기 멋대로 하지도 않았구요. 시시는 드디어 진짜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사와 놀다가 시시가 나뭇가지에 눈을 다치는 사고가 납니다. 마사는 귀가 안들리는 시시에게 또 다른 장애를 안겨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시시를 피하게 됩니다. 시시의 눈엔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마사는 자신의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어렵사리 만난 친구를 잃어버리게 된 시시는 너무나 슬퍼합니다.
5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된 이웃 친구는 시시의 보청기에 호기심을 가집니다. 시시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다는 비밀을 알게된 친구는 마이크를 목에 걸고 시내를 다니며 성능을 테스트해 보게 됩니다. 이 때 아이들이 시시에게 관심을 가지고 신기해하며 놀라워하기도 했습니다. 시시는 민망하기는 했지만 친구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만족스러워 합니다.
게다가 이 테스트 중에 같은 반 친구와 마사가 만나 나누는 대화를 시시는 듣게 됩니다. 이 대화를 통해 마사의 진심을 시시가 알게 되면서 마사와 다시 한번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마사가 죄책감에서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마사에게도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어 시시는 기뻐합니다.
학교에서 시시는 남다른 능력을 이용해 자습 시간에 친구들이 놀 수 있도록 망을 봐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습니다. 시시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특별한 능력으로 반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시의 도움으로 반 친구들은 신나는 자습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시시는 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한걸. 나는 평생토록 남들처럼 듣고 싶었어. 하지만 내게는 다른 아이들은 없는 슈퍼 파워가 있어. 그리고 그걸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 재미 있어."(217쪽)
시시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싫어했던 보청기, 타인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인정하고 그것이 좋을 때도 있다는 걸 하나씩 알아갑니다. ‘다름’이 ‘장애’가 아닌 ‘차이’로 변화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죠. 작가의 말에서 시시 벨이 쓴 글이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나는 정상 청력 아이들에 둘러싸인 난청 어린이였습니다. 나는 남들과 달랐고, 다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속으로도 또 겉으로도 나는 소리를 못 들어서 남들과 다르고, 그것을 장애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 했습니다."
"지금은 난청이 내 작은 일부라고 생각하고, 감추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난청을 약간 불편한 일로 여기고 축복으로도 여깁니다. 원할 때면 언제라도 세상의 소리를 끄고 평화로운 정적 속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것?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 되었습니다. 약간의 창의력과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 어떤 다름도 놀라운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것이 우리의 슈퍼 파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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