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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떠돌이 철학자 에릭 호퍼 본문
뒤늦게 에릭 호퍼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세상엔 그가 없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국가, 인종, 문화 등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감동과 통찰을 선사해 주고 있다. 평생을 행상, 식당 보조 웨이터, 야적장 인부, 사금채취공, 부두노동자 등으로 살았던 인물이기에 그가 남긴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는 풍미가 가득하다. 어릴적 시력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광적인 독서 습관은 에릭 호퍼의 사상이 형성되도록 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글에서 생생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에릭 호퍼의 인생과 독서 습관 덕택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에릭 호퍼가 남긴 자서전으로 그가 썼던 다른 책들에서보다 떠돌이 철학자로서의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에릭 호퍼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경험했던 가난함과 굶주림은 그의 생을 빚어가는 양분이 되었다. 젊은 시절 노동과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다가 이른 결론은 자살이었다. 자살도구로 수산염을 구입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삶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며 자살이라는 결론은 방랑하는 삶으로 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에릭 호퍼는 여기 저기를 떠돌며 일하며 방랑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에릭 호퍼는 떠돌다가 방문했던 샌디에이고 엘센트로의 임시수용소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모든 사상을 세워나가는 데 기초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곳 수용소에서 한 달 여간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속성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성찰하게 되었다.
이 책은 에릭 호퍼의 자서전이라고 하지만 주로 그의 생애를 통해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과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 중 인상적인 사건은 스틸턴 박사와의 만남이다. 독학으로 지식을 쌓았던 에릭 호퍼는 토마토 모종의 성장에 대한 아주 단순한 호기심으로 인해 식물학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웨이터로 일하던 식당에서 독일어로 된 책을 어렵게 읽고 있던 스틸턴 교수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스틸턴 교수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는데 에릭 호퍼가 실마리를 던져주는 데에까지 이어졌다. 에릭 호퍼는 스틸턴 교수의 연구소에서 일할 수도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까지 했지만 다시 떠돌이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스스로 이러한 지식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어째서 궁핍하고 어찌보면 비참해 보이는 삶을 살아갔던 것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스스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통해 철학적,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던 에릭 호퍼에게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의 대답은 몽테뉴의 수상록일 것 같다. 사금 채취공으로 일할 때 산속에서 눈으로 인해 발이 묶였을 때 읽으려고 가져갔던 이 두꺼운 책에서 에릭 호퍼는 자신과 마주쳤다고 표현했다. 그는 수상록을 읽으며 마치 몽테뉴가 자신에 관해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수백 년 전 다른 나라의 사람이 마치 자신의 내면에 깊숙히 잠재된 생각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느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나에게도 너무나도 유명해서 마치 읽은 느낌이 드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어보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일어나게 했다. (아마도 이 다음 번 책은 수상록이 될 것 같다.) 도대체 수상록에 어떠한 내용이 실려 있기에 에릭 호퍼라는 한 인간을 이렇게 감동시킬 수가 있는 것인지 무척 흥미로워졌다.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인생에서 사랑 이야기는 빠질 수 없는 소재이다. 이리저리 떠돌며 일하고 책만 읽었을 것만 같은 에릭 호퍼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한 식당에서 일하던 중에 만났던 헬렌이라는 여인에게 에릭 호퍼는 한 눈에 반했다. 그녀와의 경험을 50년이 지나서 자서전에 그 경험을 쓰는 순간에도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생생하다고 에릭 호퍼는 표현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졌다. 헬렌과 진정으로 즐겁고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그였지만 그녀의 기대를 정당화하는 데 자신의 여생을 소비하는 것은 불행한 생각이 들어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다시 떠돌이 노동자의 삶을 선택했다. 에릭 호퍼가 헬렌과의 즐거웠던 만남을 자서전에 넣은 것을 보면 그녀를 진정 사랑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는 그녀와 함께 정착하지 않았던 것일까? 한 때의 감정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에릭 호퍼는 그녀와 함께 살면 한순간의 평화도 갖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쓰고 있다. 에릭 호퍼에게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젊은 시절 떠돌이 노동자로 살아가던 에릭 호퍼는 2차 세계대전 중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곳에서 부두노동자로 여생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에릭 호퍼는 길 위에서의 삶과 부두에서의 삶이 극적인 변화는 아니라고 했다. 그 불안정성은 독특하게 비슷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에릭 호퍼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운영되는 독특한 구조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하다. 시대와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내가 노동의 현장과 노동조합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문화적 충격과 에릭 호퍼가 경험했던 것이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 사람들이 교육 받은 사람보다 나눔에 더 여유가 있다는 생각은 감상적이라는 에릭 호퍼의 표현이 마음에 와 닿는다.
에릭 호퍼의 아주 짧은 생의 순간들을 마주한 후 ‘길 위의 철학자’라는 제목은 그의 삶과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떠돌이, 방랑자라는 에릭 호퍼의 자기 인식은 어찌보면 자신의 삶에 대한 정직한 대면에서부터 온 것이리라. 에릭 호퍼라는 매력적인 인물과 그의 생애,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은 수 년 전부터 안정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는 내 마음의 연못에 잔잔하지만 힘 있는 물결을 일으킨다. 왜 좀더 일찍 에릭 호퍼를 알지 못했을까 하는 강한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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