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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목숨을 걸지 않고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는 사회가 되려면 본문
지난 4월 17일 삼성은 ‘무노조 경영’이라는 반헌법적 경영 방침에서 한 발 물러나 노조를 인정하고 협력업체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를 직접고용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2013년 7월 14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출범 이래 노동조합은 이 두가지를 얻어내기 위해 5년을 싸워왔고 그 과정에서 2명의 동료를 잃었다고 합니다.(‘골리앗 삼성 이긴 다윗’ 합의서 쓴 날은 세상 뒤집은 날_오마이뉴스 4월 18일)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노동조합설립을 위해 노동자가 왜 목숨을 버릴 정도로 싸워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어도 꿈쩍하지 않던 회사가 검찰 수사 등의 압박에 마지못해 노동조합을 인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경영의 걸림돌로 여기는 회사는 삼성만이 아닙니다. 노동조합 설립을 막으려하거나 결성된 노동조합을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들을 언론을 통해 종종 만나게 됩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노동조합인데 언론 등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노동조합의 이미지는 너무나 부정적입니다. 회사 사정과는 상관없이 임금인상을 요구한다거나 무작정 떼를 쓰는 듯한 이미지로 그려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한편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 것인지, 노동조합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노동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헌법이나 노동법을 읽으며 공부해 노동조합 활동 혹은 노동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노동운동을 다룬 <송곳>같은 만화는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의 필요성, 노동조합의 역할, 사용자와의 관계 등에 친숙하게 다가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최규석 작가의 <송곳>은 웹툰으로 연재되다가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기도 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작가의 훌륭한 작품은 연재보다는 한데 모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장을 넘기며 보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총 여섯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된 <송곳>을 뒤늦게 구입해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매 에피소드에 있는 등장인물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하며 읽었습니다. 대한민국 노동현장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초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각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걸림돌’같은 인간들에게서 변화가 시작된다
작품의 배경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가는 대형마트입니다.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다 같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트에서 직접 채용한 정규직이 있고, 비정규직도 있고, 협력업체에서 파견을 보낸 직원도 있고. 겉으로 보기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고용형태에 따라 급여나 처우 등은 차이가 나는 현장이 작품에 그려져 있습니다.
외국계 대형마트 푸르미. 복잡한 노동생태계 안에서 나름대로 균형있게 운영되는 듯 보였던 이곳에 어느 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판매사원들을 해고라라는 지시가 내려옵니다. 관리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이 지시를 눈 딱 감고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불법이든 합법이든.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타납니다. 판매과장 중 한 명인 이수인 과장이 그랬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공을 꿈꾸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군의 부정선거 압력에 복종할 수 없었던 사관생도. 이수인은 조직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을 말했다가 조직으로부터 노골적인 괴롭힘을 당합니다. 결국 이수인 생도에게 상해를 입히기까지 하는 조직. 이수인은 병원에 입원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다음에 같은 상황이어도 이렇게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될 자신이 두렵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육사를 무사히 졸업해 장교로 복무를 시작하지만 군대에서의 노골적인 불법들에 저항하다 견디지 못하고 결국 10년 만에 전역했던 유별난 청년 이수인. 이런 청년이 외국계 유통회사에 들어와 만난 현실은 자신이 경험했던 사관학교,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수인이 지나온 삶을 통해 깨달은 것은 일어나는 일들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면 나 하나는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항상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던 이수인은 회사의 불법적인 해고 지시에도 또 걸림돌이 되는 선택을 하고 맙니다. 이수인 과장은 회사의 지시에 대항하고자 노동조합을 조직하게 되고 힘겨운 또 하나의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관학교,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도 걸림돌에 대한 반응은 비슷합니다. 회사의 명령을 따르는 상사와 동료들은 이수인을 괴롭히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합니다.
이수인은 고민하다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을 돕는 노동상담소를 찾아갑니다. 상담소에서 노동법을 강의 중인 구고신 소장의 말 중에서 이수인의 귀에 들어와 박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말하는 듯한 말. “시키면 시키는대로 못 하고 주면 주는대로 못 받는 인간들. 세상의 걸림돌 같은 인간들”. 노조에 우호적인 프랑스 회사가 왜 노조를 거부하는 것인지 이수인이 묻자 구고신 소장은 대답합니다.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사람은 대부분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는거요. 노동운동 10년 해도 사장 되면 노조 깰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게 인간이란 말이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1권 204-205쪽)
이 말은 정말 이 세상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신입사원 때 ‘저런 선배는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흘러 선배가 되면 내가 욕하던 선배의 모습이 되어 있기도 하고, 부모님께 듣기 싫었던 그 말을 부모가 되어서 하고 있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구고신 소장이 했던 저 말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규석 작가의 이런 대사들은 만화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와 마음에 박힙니다.
자신이 속한 마트의 지점에서 노조를 만들겠다는 이수인을 구고신은 만류합니다. 회사의 지시를 따라 판매직원들만 내보내면 되는, 자신의 싸움도 아닌 데 섣불리 나서지 말라면서. 하지만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같은 인간”(1권)이었던 이수인은 싸움에 뛰어들고 맙니다.
다양한 노조파괴 전략과 노동자의 투쟁
작품의 스토리는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직원들을 괴롭히는 회사의 다양한 방법과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업체의 향응 접대 자리에 있던 노조원을 모략해 해고시키기, 직원들의 약점을 잡아서 노동조합을 탈퇴하라고 압박하기, 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 회유하기, 사문화된 취업규칙을 꺼내 사소한 트집을 잡아 직원들 괴롭히기, 교활하고 폭력적인 관리자 배치 등 회사의 노조파괴 전술은 다양하고도 집요합니다.
작품에는 위와 같은 회사의 집요한 공격들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노동조합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인 노동상담소 구고신 소장은 변호인으로, 상담가로 때론 투쟁전략가로 노동조합을 도우며 투쟁을 이어갑니다. 헌법에 보장된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한 노동조합 활동이 투쟁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회사의 압박과 회유에 굴복해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노동자들 간의 갈등, 노동조합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노동자들의 고민, 정규직/비정규직/협력업체 파견직 등 속한 위치에서 오는 노동자 각자의 이익과 갈등, 노동운동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노선 차이에 따른 노동운동 조직 간의 갈등 등이 작품 전반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노동조합을 조직해 가는 과정에서 회사의 전방위적 압박에 노조원들 간의 갈등이 커질 때 주인공 이수인 과장이 한 말에 노동조합의 역할과 목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대하는 태도,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의 위치 등이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가실 분들은 나가셔도 됩니다. 탈퇴한 분들은 배신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은 무게를 견딜 수는 없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와 함께 싸우다 우리보다 먼저 쓰러진 것뿐입니다. 저는 부상당한 동료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아직 노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저보다는 여러분들께 여러분들보다는 반달치 월급때문에 탈퇴한 사람들에게, 탈퇴자보다는 가입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입 자격도 불확실한 계약자들에게 노조는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더 절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지 않은 노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남으시면 더 고생할 겁니다. 고생한 사람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면 모두가 성공할 것이고 실패하면 아마도 우리만 실패할 겁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짐만 지세요.”(3권 194-197쪽)
목숨을 바치지 않아도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려면
회사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 노동조합은 결국 파업이라는 마지막 투쟁카드를 꺼내듭니다. 회사는 노동조합이 파업을 시작한 지 3일만에 직장폐쇄라는 극단적 조치로 맞섭니다. 노동조합과 회사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주인공 이수인 과장은 말합니다.
“도망도 쳤고, 비겁한 순간도 많았고, 타협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절차 지켜서 정리해고 명단 올리라고 했으면, 아마… 눈 질끈 감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직원을 괴롭혀서 내보낼 수는 없는 거잖습니까? 사람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잖아요. 우리 조합원들도 각자가 넘을 수 없는 선 앞에서 찾은 돌파구가 노동조합이었던 거겠죠.”(6권 20쪽)
“하기 싫죠. 그런데 방법이 없어요. 차마 넘기 싫은 선 앞에 서기 전에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사람끼리 상처를 주고받게 돼요. 제때 호루라기를 불어줄 심판이 필요해요. 더 많은 아군이 아니라…”(6권 22-23쪽)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 노동운동 역사에 끊이지 않고 등장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덕에 조금은 개선된 노동현장에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작품에선 파업기간이 길어지자 노조 내부의 갈등이 커져 투쟁의 동력을 읽고 파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막 농성장에 홀로 남은 노동조합 지도부 이수인 과장.
“천막은 위화감을 잃고 풍경이 되었다. 독을 품지 않은 경고색은 단지 무늬에 불과하다. 이미 끝났는데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다. 이래서…다들 죽는거구나…”(6권 151-153쪽)
이런 상황에 몰려 죽음이라는 마지막 투쟁을 선택한 노동운동가들이 많습니다. 청계천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 외치며 자신을 불태웠던 전태일 열사부터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전전자서비스 지회 염호석 열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고 싶었던 선배 노동자들.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보다 개선된 노동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노동자의 편이 아닙니다. 한국을 대표한다고 하는 최고 기업이 무노조경영을 원칙으로 삼고 있고 한 계열사의 노조를 인정하기까지 두 명의 목숨과 5년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세상의 걸림돌같은 사람들이 ‘송곳’처럼 세상에 작은 구멍을 내고 튀어나와 아주 조금씩이지만 노동환경을 바꿔온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동운동가들의 출현과 희생에 더해 진정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최규석 작가가 주인공 이수인 과장의 입을 빌려 말한 것처럼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졌을 때 ‘제때 호루라기를 불어줄 심판’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지금까지는 언론도, 정부도, 사법기관도, 사회구성원들도, 심지어 같은 노동자들까지도 노동자보다는 자본의 편에 서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공정한 심판관이 세워진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목숨을 건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이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본에 치중되어 있었던 주요 언론들의 보도행태도 견제할 수 있는 심판관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전체 사회구성원들이 전 생애 동안에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교육 시스템도 시급히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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