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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헤밍웨이씨, 노인과바다는 낚시 잡지에나 내세요 본문
호메로스, 플라톤, 단테,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허먼 멜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프루스트, 카뮈, 헤밍웨이… 세계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을 쓴 작가들입니다. 이 작가들의 작품이 훌륭한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읽으려고 하면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라고 물으면 아주 흔하게 듣는 대답은 ‘고전’입니다. 이때 아마도 위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들은 거의 빠지지 않고 거론될 겁니다.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은 각 작품들의 훌륭함, 작가와 작품이 세계 문학사에 남긴 의미,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 작가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 등을 말하며 추천합니다. 죽기 전엔 이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감상할 수 있어야 교양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고전을 읽으면 좋겠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도처에 널린 고전이 좋다는 말들을 듣고 독서 목록에 추천되는 작가와 작품들을 넣어두지만 쉽사리 이들 작품을 읽지는 못합니다. 읽어보라고 가장 많은 추천을 받지만 가장 읽히지 않는 작품들을 ‘고전’이라고도 하는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도 흔히 듣습니다. 답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정말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고전 읽기입니다.
고전은 부담스럽다? 유쾌하고 가볍게 대해보자
고전 혹은 걸작을 앞에 두면 일단 작품과 작가의 명성에 지레 겁을 먹어 부담감이 상당합니다. 물론 작품이 어렵기도 하겠지만 수많은 평가와 해석이 붙은 걸작에 대한 부담스러움은 가벼운 마음으로 고전 문학작품들을 읽어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담감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책이 한권 출현했습니다. 한 이탈리아 일간지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리카르도 보치가 쓴 <망작들>입니다.
책을 얼핏 보면 너무 성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책을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간단하고 짧습니다. 과거부터 얻은 명성으로 거장이 된 작가들이 지금, 21세기의 한 출판편집자에게 자신들의 걸작 원고를 제출하게 된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까요? 황당무계한 설정이긴 합니다만 저자의 관점에서 고전 작품들을 소개받으니 다가가기 어렵고 부담스럽기만 했던 작가와 그 작품들이 좀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은 현대의 한 출판 편집자가 역사속 문학의 거장들이 보낸 원고에 대해 아주 무성의해 보일 정도로 짧게 ‘당신의 작품을 출간할 수 없는 이유’를 담은 회신을 한다는 설정으로 쓴 것입니다.
기원전 호메로스부터 성경의 저자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작품들에 대한 저자의 답변을 읽다보면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나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근거없이 원고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의 합리적 이유를 대면서 거절합니다. 게다가 그 이유들이 그럴법 하다는 것이 <망작들>의 매력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다른 출판사를 알아보세요
이 편집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에겐 ‘사무실 책상에서 원고를 읽다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고 하고, 알렉상드르 뒤마에겐 ‘작품에서 활약하는 총사는 네 명인데 왜 헷갈리게 제목이 <삼총사>’냐고 묻습니다. <노인과 바다>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겐 낚시나 사냥에 대한 잡지를 내는 곳에 투고하라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이 편집자의 편지를 받았다면 부들부들 떨었을 것만 같습니다.
“작가님의 <대화편>에는 몸을 쓰는 액션 장면이 없어요. 사람들이 만만 하고 또 말만 하고 아무 짓도 안해요. 출판할 만한 책이 아닙니다. 작가님, 아이디어(idea)를 짜내보세요. 이데아(idea)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분이니까요.”(46쪽)
편집자의 대답은 거침이 없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선 제목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구글에서 ‘변신’이라고 검색하면 비슷한 책이 많아 검색 결과에서 상단을 차지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조언을 합니다. 21세기 출판마케팅에 적합하지 않은 제목이라는 것이죠. 찰스 디킨스에겐 <위대한 유산>의 분량이 너무 많다고 하고,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대해선 이젠 모험물에서 벗어나라고 충고를 합니다.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에게는 독자들이 ‘브리짓 존스’스러운 작품을 원하기에 요즘 문학 흐름을 반영하지 못해 자기네 출판사에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합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는 러시아의 전쟁보다는 좀 더 잘 알려진 미국의 남북전쟁 같이 할리우드 영화계에 매력적인 소재로 작품을 쓰면 좋겠다는 조언을 보냅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 호메로스에겐 서점에 가서 서사시로 된 작품이 있는지 보라고 합니다. 게다가 오디세이아는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간단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썼다고 지적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뮈엘 베케트에게 전하는 말을 읽으면 웃음이 나옵니다.
“엄청난 작품입니다. 실존이라는 주제를 아주 재치 넘치는 방식으로 다루셨어요. 그런데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작가님이 연극과 비평 양쪽에서 실패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요. 마지막에 고도가 모습을 꼭 드러내야 합니다!”(127쪽)
편집자는 급기야 <성경>의 저자인 하느님에게까지 한 마디 합니다. 성경을 읽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지적합니다. 우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세부적인 묘사와 서술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기는데 솔직히 제가 하느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해 무척 공감했습니다.
“제발 좀 상세한 묘사를 집어넣으세요. 우주의 탄생에 대해 쓰고 싶으시다고요? 몇 년만이라도 사람들이 기억해줄 작품을 남기고 싶으신 거죠? 이건 아니에요.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마침표. 이렇게 말을 아끼는 이유가 뭐죠? 이 세상의(아니면 저세상의) 누구와 경쟁하려고 이러시나요? 혹시 사뮈엘 베케트인가요? 성숙한 자세로 글을 쓰세요. 자세하게 쓰고, 곁가지 이야기도 좀 하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세요. 주여!”(132쪽)
고전, 독자, 편집자 모두를 풍자하다
편집자는 위 저자들의 작품들 이외에도 총 50권의 책들에 대해 가감없이 솔직한 의견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선 가상의 편집자 의견이 너무 성의없어 보이고 무례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각 작품들을 읽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지점들을 툭 던지듯 풀어놓고 있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다가가기엔 한없이 부담스러운 걸작들을 이렇게 평하는 것을 보니 마음속의 부담이 한결 해소되었습니다. 거장들의 작품들에 이전보다는 좀 더 가볍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 리카르도 보치는 가상의 편집자를 통해 역사 속 걸작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솔직한 평가를 합니다. 작품과 작가들이 가진 과거의 명성, 평가, 해설에 전혀 기대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선 이 명성에 기대 고전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 한 번쯤은 평론가들이나 해설가들의 의견 없이 오로지 스스로 작품을 읽고 감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고전을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출판사의 편집자들을 풍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책 속의 편집자가 ‘망작’이라고 평가한 작품들은 사실 전 세계에 셀 수 없는 독자를 거느린 명작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집자는 길게는 수 세기, 짧게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원래의 책 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등으로 끊임 없이 재해석되며 재생산되는 말 그대로 걸작들을 출판할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 셈이니까요.
<망작들>은 정말 어이 없게도 짧고 ‘이런 걸 책이라고 내도 되는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책이지만 세계문학사 속의 거장과 그들의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을 적절히 자극해줍니다. 이 책은 고전 읽기에 도전하고 싶은 혹은 도전하고 있는 독자들, 원고를 들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작가들, 작가들의 원고를 받아들고 고민하는 출판 편집자들 모두가 재미있게 읽으며 긴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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