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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절대적 혹은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는가? 본문
“(중략) 자신의 가치 체계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것처럼 다른 가치 체계 그러니까 엄마나 나나 다른 모든 사람의 가치 체계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요. 그렇지 않으면 편협한 거에요. 우린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건 절대로 옳지 않아요.(중략)”(17쪽)
그리스도인인 저자는 이 글을 쓸 당시 미국 기독교 공동체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었던 ‘관용’이라는 문제를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신념, 관습 등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리고 특히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나 사물을 참아 주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었던 관용의 의미가 이제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음을 문제삼고 있다. 저자가 위협적인 문제로 언급하는 새로운 관용(tolerance)이란 모든 개인의 신념, 가치, 생활 방식, 진리 주장에 대한 견해가 동등하다는 것이다. 또한 진리에는 계급이 없고, 당신의 신념과 나의 신념은 동등하며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용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얼마나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는지를 쓰고 있다.새로운 관용으로 인해 나타나는 가정에서의 불화와 분리 혹은 변화 그리고 교육, 정부, 사회에 이르는 공적인 분야에서 나타나는 기독교 역차별 혹은 비관용, 궁극적으로는 교회 공동체의 변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주에서 관용의 영향을 언급하며 그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새로운 관용이 그 신조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편협한 고집쟁이, 광신자, 극단론자, 선동자 등으로 낙인찍음으로써 그 세를 확장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큰 거부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새로운 관용의 출현에 대해 현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체계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언급하고 있다.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는 문화의 산물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가치체계 말이다. 나는 이러한 가치체계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100%는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 공감하고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신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관용도 이와 같은 모순을 안고 있다. 즉, 새로운 관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불관용을 보여준다. 특히나 기독교의 경우엔 새로운 관용 정신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더욱 가차 없는 불관용을 경험하게 된다.
저자는 이 새로운 관용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진리가 죽음을 맞았고, 용기, 정직, 성실, 경의, 존중, 공손함, 겸손, 관대함, 동정 등의 미덕이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관용의 정신과 배치되는 정의도 사라졌고, 확신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이 전부 사실은 아닐지라도 큰 틀에서 일리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모든 원인이 새로운 관용에 있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 모든 이들이 새로운 관용정신을 떠 받들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객관적 진리를 믿고 따르는 소신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저자처럼 새로운 관용에 맞서 싸워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인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일면 저돌적 혹은 공격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책에서 제안하는 대안들도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관용에서 말하는 것처럼 편협한 판단 가운데 나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생긴다. 기독교에는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믿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사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모두 일률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텍스트로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해석이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같은 텍스트를 보면서도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저자도 물론 이러한 부분에 대해 10장에서 논하고 있다. 저자는 본문의 의미가 절대 변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그 의미가 각 사람에게 주는 의의는 달라질 수 있고 유연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전해주는 절대적 의미를 정말 올바른 하나님의 계시로서 100% 확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새로운 관용이 교회공동체의 해체를 위해 접근하는 틈새이기도 하다. 사실 이 문제는 어느 위대한 목사나 설교가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독특한 개인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에서 함께 그 의미를 찾아갈 때 허락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관용이라는 정신에 맞서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룬 하나님 중심의 공동체로서의 대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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