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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삼촌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

초원위의양 2016. 10. 2. 20:51

9월 30일자 김용민 브리핑에서 녹색당 언론홍보기획단장 김수민 의원이 아주 흥미로운 인물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형이자, 박근혜의 삼촌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입니다. 박상희 선생은 1905년 8월(음력) 칠곡군 약목면에서 출생해 1946년 10월 5일 사망했습니다. 



박상희(위키백과)

 

박상희 선생은 1927년 신간회 결성(좌우익 합작)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당시엔 좌익이나 우익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시기라고 합니다. 다만 좌익쪽이 민족 독립 뿐만 아니라 가난한 백성의 해방도 강조 했기에 아마도 중앙이 아닌 지역활동가이자 빈농 집안이었던 박상희 선생같은 사람에게는 좌익쪽 사회주의 노선이 더 와 닿았을 것 같다고 합니다.

 

신간회가 갈등 끝에 해소된 후 박상희 선생은 구미 소비 조합이라는 생활협동 조합같은 단체에서 이사로 활동했다고도 하네요.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서 지국장이나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박상희 선생이 쓴 기사를 찾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이를 볼 때 지식인이나 이론가 타입은 아니었을 것 같다고 추정됩니다. 예전 드라마 <제 3공화국>에서 김상중씨가 박상희 선생 역을 맡았던 적이 있는데 때문에 고뇌하는 지식인 이미지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호탕하고, 잘 놀고, 잘 마시고, 체구도 꽤 컸고, 동생 박정희와는 다른 이미지였다고 하네요. 박정희는 좀 소심한 측면이 있었으나 박상희는 외향적이며 인간관계가 매우 넓었다고 합니다.

 

박 선생은 일제 말기 여운형 선생이 주도했던 건국동맹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해방 후 여운형 선생이 주도한 건국준비 위원회 인민위원회 지부를 맡아서 활동했습니다. 박상희가 공산당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 합니다. 박상희 선생은 해방 전후 한번도 공산당 활동을 한 적이 없답니다. 좌익이지만 공산주의 계열이 아니 요즘의 사회주의 노선이나 사민주의 정도, 여운형 선생과 같은 노선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로당이었다는 이야기도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남로당은 1946년 11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등 좌익정당들이 통합되어 만들어지는데 박상희 선생은 그 전에 사망하기에 남로당에 들어갈 일이 없었던 것이죠. (황태성 선생이 나중에 박정희까지 설득해 남로당에 들어오게 한다고는 합니다.) 만약 박상희 선생이 살아 있었다면 남로당에 들어갔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근로인민당 여운형 계열에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박상희도 이쪽 계열일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분단 이전 해방공간에선 좌익 우익이 공존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일보 여론조사를 보니 새로운 나라의 이념은 사회주의로 같으면 좋겠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고 할만큼요. 해방공간에서 좌익 우익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이념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세간에는 박상희 선생이 민중봉기를 주도했다가 사망했다는 말이 있는데, 다른 증언들이 있습니다. 1946년 미 군정의 식량정책이 실패하고 홍수까지 겹치면서 민심이 안좋아졌습니다. 그 해 9월에 전국 노동자 총파업이 있었고, 10월 1일엔 대구에서 노동자 한 명이 경찰 발포로 사망하면서 10월 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구 가까이 있는 구미 선산군에서도 곧바로 봉기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박상희가 군중을 이끌고 선산경찰서를 습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유족들 증언에 따르면 구미지역 봉기는 특별한 지도자 없이 시작되었고 박상희 선생은 집에서 막 밥숟가락을 뜨고 있다가 현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상희 선생이 봉기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지도자가 되고 경찰관과 우익인사에 대한 살상을 막는 것이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중재를 하러 나간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대구에서 항쟁은 끝나고 구미쪽도 사그라들었을 때 감금되었던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이 상대편들에게 가혹하게 복수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박상희 선생의 중재 덕분이라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왜 박상희 선생은 총을 맞고 죽었을까요? 박상희는 무사귀가를 보장받았으나 외지에서 온 경찰이 오인사격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박근혜는 왜 이런 삼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공산당 계열도 아니었고, 남로당이 될 일도 없었고, 북한으로 넘어갈 기회도 없었던 사람이고, 봉기때도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말입니다. 

 

좌익 컴플렉스 때문일까요? 김수민 의원이 구미에서 박정희 기념사업을 비판하다 지역 유지들 몇몇에게 비난받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김 의원이 박정희보다는 박상희 기념사업이 더 시급하다 의견을 냈을 때 이에 대해선 별다른 의견이 없었을 정도로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인물이 박상희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박근혜는 왜 침묵할까요? 박상희 선생이 진보주의자였지만 모든 면에서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세 봉건적 사고가 남아 있었고, 첩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소문에는 박근혜가 여성으로써 이런 모습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라고 했다고도 하는데요. 

 

박상희 선생이 꿈꾼 나라는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집안이나 자신의 이웃들이 더이상 지주나 정부에 착취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나라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혁명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농지개혁을 실시하기도 해서 박상희 선생이 꿈꿨던 것이 일부나마 실현되기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김수민 의원은 말합니다.

 

그런데 박선생의 조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쌀값 시세를 한 가마니 17만원에서 21만원으로 올리겠다고도 약속 했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 거짓에 항거하던 백남기 선생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끝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독립운동을 했으며 분노한 농민들과 항쟁을 함께했고 그러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던 박상희 선생. 그 사람의 조카가 지휘하는 정권이 다시 농민들의 피땀과 생명을 빼앗는 시절이 되고 말았다고 김 의원은 말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만 말하기엔 너무나 잔혹한 풍경임을 김의원은 말합니다.

 

출처: 김용민 브리핑 2016년 9월 30일자 본격 정치 논평 중에서

 

박근혜는 정말 왜 자신의 삼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요? 정말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