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잭나이프로 그를 찌른 순간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 본문

맛있는 책읽기

잭나이프로 그를 찌른 순간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

초원위의양 2016. 3. 20. 08:31

잭 나이프

작가
엠마뉘엘 베르네임
출판
작가정신
발매
2014.11.25.
평점

리뷰보기


  엠마뉘엘 베르네임이라는 낯선 이름의 작가 소개를 읽고서 선택한 책 '잭 나이프'. 그녀의 짧고 간결한 문체 만큼이나 이야기의 길이도 짧고 간결하다. 그녀의 글은 도마 위에 토막토막 잘린 요리 재료들 같은 느낌이다. 이제 곧 하나의 멋진 요리가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잘 다듬어진 요리 재료들. 하지만 그녀의 요리에 많은 가짓수의 재료가 사용되는 건 아니다. 이야기의 길이가 짧은 만큼 등장인물도 소수, 그들에 관한 묘사와 설명도 단촐하다. 여러 인물에 주의를 분산시키는 대신 주인공인 엘리자베스에 대한 묘사에 집중적인 공을 들인 것 같다. 필요할 때는 세밀하게 묘사하지만 과감히 생략하기도 한다. 

 

  늘 잭나이프를 핸드백에 넣어 다니던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지하철 역에서 낡은 가죽 점퍼를 입은 한 남자의 등을 잭나이프로 찌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황스런 감정들이 가라 앉고 난 후 그녀는 그 남자를 찾아 나선다. 여기 저기 찾아다니다 그가 영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영국으로 건너가 그를 마침내 만난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프랑스어로 말하면 그녀와 맞이한다. 그리곤 프랑스로 건너와서 그녀의 거처에 함께 살기로 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칼로 찔러 상처를 입힌 그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엘리자베스는 그 남자에 대한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 간다. 그의 품, 숨소리, 코를 고는 소리, 그의 신체 구석구석에 익숙해져 간다. 그런데 그는 왜 그녀를 기다린 듯이 만나고 그녀와 함께 지내며 그녀에게 봉사하는 것일까. 작품 해설에선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여자를 사랑하는 마조히즘으로 표현을 했지만 그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나로선 별로 공감이 되질 않는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그것도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 역에서 칼로 찌른 상황이나 자신을 칼로 찌른 여인을 만나고 함께하는 상황이나 이해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다만 인상적인 것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이 칼로 찔렀던 남자에게 익숙해져 가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연인관계에 있거나 부부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엘리자베스가 표현하고 있는 익숙해짐에 상당히 공감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무척이나 깔끔하고 정리정돈에 철저한 남자. 자신과는 어떤 취향이나 기호가 크게 일치하지도 않는 남자. 하지만 그녀는 그의 모든 것에 길이 들어 버렸다. 반면 남자는 그녀에게 다른 어떤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옷차림이나 하는 일 등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단지 지하철에서 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그 여자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지만 그 남자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녀에겐 그가 필요했다. 그녀는 그의 커다란 몸이 발산하는 공기를 마시고, 그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그의 살에 묻혀서 잠들었다. 도처에 세실이 있었다. 소파 침대에 놓인 쿠션들에도, 하얀 세면대에도, 달콤한 과일에도, 신선한 와인에도 그가 있었다,"이렇듯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매우 공감이 되는 표현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상대방은 함께했던 모든 공간에 스며들게 마련이다. 만약 사랑했던 그 사람이 사라지게 되면 내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 버리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녀는 그가 떠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너무 불안하다. 그가 떠나는 날이 언제가 될 것인지 노심초사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드디어 그가 떠날 것이라는 신호가 나타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깔끔했던 그가 아침에 토스트를 오래 둬 탄내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이것이 그가 떠나는 신호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탄내는 엘리자베스에게 그가 원하는 여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계기이다. 그녀는 그를 다시 칼로 찌르려는 것일까?

 

  번역서를 읽으면서 항상 아쉬운 점은 번역된 글이 원래 언어의 느낌을 얼마나 살려주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문채나 표현 방식이 매우 간결한 이 작가의 경우 원문의 느낌을 얼마나 살릴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때문에 외국어로 쓰인 글 원문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이 더욱 간절해진다.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글에선 이와 같은 소망이 더욱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