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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초원위의양 2016. 3. 20. 08:25

두 도시 이야기

작가
찰스 디킨스
출판
더클래식
발매
2015.07.01.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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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에는 좀처럼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고 훌륭하다고 평하는 작품들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왠지 재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읽고나서도 아 이래서 고전이라고들 하는구나 정도의 감상만 남을 것 같아서 잘 읽지 않게된다. 찰스 디킨스 역시 내게는 사람들이 말하는 훌륭한 여러 고전문학 작가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매우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쓴 작가 정도가 찰스 디킨스에 대한 내 지식의 전부였다. 하지만 두 도시 이야기를 읽고 나서 찰스 디킨스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두 도시 이야기에는 프랑스 혁명기에 파리와 런던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이 그려져 있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평범한 것 같아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이들의 얽히고 설킨 인생사 곳곳에 놀라움이 가득하다. 프랑스 왕정 시기에 귀족의 미움을 사 영문도 모른채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던 한 의사, 아비를 잃었음에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자라난 그의 딸, 그녀를 평생 도와주는 영국의 은행 직원인 노신사, 어떤 귀족의 폭압에 비참하게 가족을 잃었던 한 여인과 그의 남편, 그 귀족의 후손이지만 그 폭압이 싫어서 나라를 떠났던 프랑스 귀족, 바스티유에 갇혔던 남자의 딸을 보고 사랑을 느껴 결국 그녀의 남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하는 영국의 한 남자, 그리고 이들 주변에서 각자의 삶을 버텨내던 사람들의 인생 여정이 반전을 거듭하며 이어진다.

 

  이 이야기에서 먼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외모가 매우 닮은 두 남자와 한 여인, 찰스 다네이와 시드니 칼튼, 그리고 루시 마네뜨이다. 찰스 다네이는 프랑스 귀족 에버몽드 후작 가문의 후손이지만 가문의 악행에 신물을 느껴 샤를 에버몽드라는 이름을 버리고 런던으로 건너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해 가는 인물이다. 시드니 칼튼은 영국에서 태어난 영민한 젊은이였다. 하지만 루시 마네뜨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느끼기 전까지는 방탕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결국 시드니 칼튼은 루시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한 채 그녀를 또한 사랑했던 찰스 다네이가 그녀와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만다. 루시 마네뜨는 프랑스 귀족의 악행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던 의사 마네뜨의 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알고보니 찰스 다네이는 마네뜨 박사를 감옥에 가둔 그 귀족 가문의 소생이었다. 

 

  혁명이 일어나서 프랑스 귀족들과 관련자들이 처형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가문에서 일했던 사람을 구명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던 다네이는 분노에 찬 혁명가들에게 잡혀 재판에 넘겨지고 과거 가문의 악행이 공개되면서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사위 가문을 기억하면서도 찰스 다네이를 고통스럽지만 사위로 맞이했던 마네뜨 박사는 딸 루시를 위해 사위를 구하려고 애썼지만 자신이 감옥에서 썼던 글로 인해 다네이 가문의 악행이 공개되면서 다네이를 구할 수 없게 된다. 이때 다네이와 닮은꼴인 시드니 칼튼은 루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찰스 다네이를 구해내고 대신 사형에 처해진다. 이 과정을 디킨스는 매우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어서 인물들 간의 얽힌 과거사를 알게 될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들에게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만큼 한 여인을 위하는 사랑, 자신이 속했던 가문의 악행에 분노하고 모든 특권을 포기할 수 있는 의지,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고 딸을 위해 사랑을 하하는 용서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지 그려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눈에 띠는 부분은 디킨스가 묘사하고 있는 프랑스 혁명의 모습이다. 왕정 하에서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주로 농노 계층은 귀족 등 지주들의 억압과 착취를 견뎌내며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마담 드파르지와 같이 에버몽드 후작 형제들의 무참한 착취와 살인으로 인해 거의 인생 전체를 견딜 수 없는 분노 속에서 보내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결국 이들의 분노는 혁명으로 폭발했고 자신들을 폭압적으로 대했던 계층들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하기에 이른다. 디킨스는 이 억압받던 혁명가들의 모습 속에 광기가 가득차 착취와 폭력, 살인을 서슴치 않았던 구조에서 위치만 서로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동안의 핍박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혁명으로 이룬 새로운 구조에서는 혁명 시에 인민들이 외치던 평등, 박애, 자유의 가치가 구현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하지만 혁명을 이룬 계층은 자신들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혁명기 동안에 디킨스가 묘사한 것과 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거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짚어 볼 때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디킨스가 썼던 것처럼 광기에 찬 학살이 있었을 법 하다. 디킨스는 서로 위치만 바뀐 복수의 모습은 혁명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혁명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 일상적으로 격게되는 일들 속에도 억압받던 계층의 분노가 폭발하는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가해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용산 참사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김석기 전 경찰청장과 그에게 지시를 내린 윗선의 사람들과 그의 지시를 받아 실행한 경찰들, 세월호에 많은 사람들을 구조하지 않은 채 내버려둬 죽게 만든 해경과 행정부, 그리고 그 수반인 대통령,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발포해 무참히 죽인 군인들과 경찰들 그리고 전두환, 남산 자락에서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민주화 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하던 형사들,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가해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피해자들의 마음은 마담 드파르지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인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똑같은 버러지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그 상황에 있지 않은 사람이기에 쉽게 말할 수가 없다.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사와 그것을 어떻게 해소해 가야 할 지, 지독한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가해자들을 대해야 할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가 어느 정도나 될 것인지,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는지, 입으로 외치는 구호와 실제 행동이 일치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등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 시대 내가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혹은 영국에서 태어나서 두 도시가 내 앞에 놓여져 있다고 한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해 가면서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