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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평범한 진리를 의심하게 된 어느 날 철학이 말을 걸어왔다. 본문
내가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모조리 진리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주인공인 필리베르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낄 것이다. 이 책에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는데 익숙하게 믿어왔던 진리들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된 필리베르의 하루가 매우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필리베르는 그 날 아침 과거의 사건들와 지금의 사물들에서부터 존재에 대해서까지 근원적인 의심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의심은 자연스럽게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의심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실험해 보기로 결심하고는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역사 시간이 시작되고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 필리베르의 실험이 시작된다. 자기가 호명되었을 때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왜 그런지 묻는 역사 선생님에게 자신은 필리베르가 아니라 르네 데카르트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존재, 역사의 진실 문제를 언급하며 선생님을 당황케 한다. 머리를 쥐어 박힐만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현명한 역사 선생님은 필리베르의 철학적 물음을 이해하고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이런 선생님들이 대한민국의 학교에도 많이 있었다면 이 나라가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진리에 대해 습관적으로 믿어버리는 태도에 필리베르는 도전한 것이었고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진짜 진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필리베르의 예상과는 달리 교장선생님은 철학을 가르치는 칼벨 선생님과 필리베르가 철학적 물음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칼벨 선생님은 필리베르와 같은 학생들이 간혹 출현할 때마다 기뻐했다고 한다. 새로운 철학자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칼벨 선생님은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철학작 물음을 가지고 상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필리베르의 생각을 강압적으로 멈추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열어주었다. 칼벨 선생님은 필리베르가 가고 싶다고 한 바닷가로 운전해가서 바다를 보며 철학 이야기를 해 준다. 철학적 물음은 우리의 삶을 생동감있게 해 준다. 칼벨 선생님과 필리베르의 대화를 통해 저자는 철학이 무엇인지,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철학의 한계와 모든 사람에게 억지로 철학적 물음을 가지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도 확실히 해 준다.
"철학은 자기를 위해 하는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거지. 철학은 토론하는 거야! 너는 나를 위해, 또 앙투안(필리베르의 친구)을 위해, 나는 너를 위해 철학을 하지. 누가 정말로 우리 말을 듣고 있는지는 잘 몰라. 그러니까 절대로 낙담하면 안 된다. 우리가 말하는 대상이 다음 사람, 앞으로 나타날 사람, 아직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어"
선생님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통해 철학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발전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장면에서는 마치 칼벨 선생님이 내 앞에서 내게 말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난 필리베르와는 다르게 진리에 대한 의심이 들었을 때에 내가 믿고 있었던 진리의 권위 혹은 습관에 눌려서 그것을 부정한다는 상상을 스스로 접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이유 이외에도 사람들이 철학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는 것들이 많이 있다. 칼벨 선생님은 그중에서도 텔레비전을 꼽는다. 바보 상자라 불리던 텔레비전은 점점 더 스마트해지고 있다. 이 책이 쓰여졌던 20여년 전에 비하면 그 영향력은 보다 광범위해지기까지 한 듯하다.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다른 것을 보여줄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선택했다고 믿게 돼. 축구선수나 영화배우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줄까? 다음 날 아침 일찍 일하러 가야 하니까 못하는 일을 그들이 대신 해주기 때문이야. 우리를 꿈꾸게 해 주기 때문에 많은 돈을 주는 거지. 그 사람들의 자리에 우리를 대입하고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상상해. 그 사람들은 우리의 거울이야. 정말 마음에 드는 삶을 창조할 수 없으니까 남들이 대신 정하게 내버려 두는 거야. 이미 정해진 일처럼. 그리고 그 동안에 시간은 흐르지.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마음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거야. 우리가 죽은 뒤에도 시간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흐르지.”
현대인들에게도 이 말은 계속해서 진실이 될 것 같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사람들의 주의를 점점 더 딴데로 돌리고 있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우리는 철학에서 멀어져만 간다. 철학이 없어져 버린 이 땅에 다시 철학을 회복해야 한다. 필리베르와 같은 어린 학생들을 윽박지르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것에서 회복이 시작되어야 한다.
"철학이 요구하는 것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찾아서 정말 그렇게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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