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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인간본성에 관한 최고의 철학개론서 본문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인간 혹은 사람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제일 처음에 나오는 설명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인간을 정의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사실 이렇게 간단하게 기술할 수는 없는 매우 복잡한 생명체다. 더군다나 최근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을 살펴보게 되면 생각은 더욱 복잡해진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인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알겠는데, 최근 정치권에서 속속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간들을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여줘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고민이 내 손에 이 책이 쥐어지게 만들었다. 저자 레슬리 스티븐슨이 머리말에서 쓰고 있듯이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영향력 있는 사상을 어떤 역사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아울러 과학이나 종교에 근거한 인간의 본성에 관한 개념을 보다 깊고 보다 철학적인 시각에서 평가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인간을 어떠한 관점으로 보는지에 따라 존재의 목적, 삶의 방식, 더 나아가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정치 경제적 체제까지도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저자는 인류의 사회와 제도 속에 체화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대표적 이론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하고 일반에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 인간에 대한 각기 다른 입장, 믿음 혹은 세계관이 매우 다양하게 주장/제시 되어 왔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집단도 매우 다양함을 언급한다. 이어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대표적 사례들을 기반으로 독자들 개인이 어떠한 주장에 어떠한 부분에서 동의하며 어떠한 부분에선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 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저자도 언급한 것과 같이 인간에 대한 이해는 개인의 삶의 방식(인생관)과 정치/경제 체제에 특히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처방안을 제시하는 출발점이 이러한 지점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에는 유교, 우파니샤드 힌두교, 성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마르크스, 프로이트, 사르트르, 다윈주의 총 10가지의 인간에 대한 대표적인 관점들이 개략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각 장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먼저 각각의 관점들이 인간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해당 관점에 기반하여 어떠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는지를 소개한다. 이후 역사적으로 각 관점이 어떻게 발전되었고, 어떤 반론과 비판 그리고 다른 해석에 직면하였는지에 대해서 부연하고 각 관점들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읽을 거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각 장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서로 독립적이기도 하고 서로 얽혀 있기도 하고 서로 상호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개별적 내용들을 숙지하고 각 관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전 혹은 적대시 되어 왔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하는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유교를 대표하는 인물은 공자인데, 그는 천명과 운명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덕을 추구하며 도를 따를 것을 제안하였다. 공자는 인간들이 덕의 원천인 하늘의 뜻에 따르거나 거스르거나 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했다. 공자에 의하면 과거에 대한 무지와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사회적 알력이 있는 상태로 있기에 인간들이 처참한 상황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이익에의 집착, 효의 부재, 언행불일치,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무지, 너그러움의 결여를 들었다. 특히 타인을 향한 진정한 존경심이 없어졌음을 언급한 부분은 너무나 마음에 와 닿는다. 현재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공자가 말했던 처참한 인간들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자기수양이라는 노력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켜 갈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유교 사상을 소개한 후 저자는 유교가 가진 보수적 특성, 불의한 통치자에 의한 근본 체계 몰락 등 연약한 지점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첫 장을 마무리 한다.
저자는 2장에서 힌두교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우파니샤드의 두 가지 상반되는 해석을 소개하면서 힌두교에서 바라보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관점을 설명한다. 대표적 경전으로 알려진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 나타나 있는 '브라흐만'이 어떠한 개념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소개해 준다. 힌두교에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의 동적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 환생을 인정한다. 또한 인간들이 실재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무지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고 본다. 즉,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여타 종교의 진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로 인한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아는 일반적인 방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마치 아이처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처럼이라는 의미는 단순하고도 자발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일한 문헌을 놓고 샹카라와 라마누자는 상반된 의견을 내 놓은 점도 저자는 소개하고 있는데, 이렇듯 상반되는 관점이 어떻게 하나의 종교 아래에서 공존하고 있는지 신비스러울 뿐이다.
성경에선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저자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였다가 수십여 년을 무신론자로 있고, 그 후 퀘이커 교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한 후 성경에서 말하는 신과 인간의 개념을 소개한다. 저자 나름대로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 생각된다. 유대-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기초를 둔 히브리의 개념과 신약성서 이후의 기독교는 차이가 있으므로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죄의 상태에 있게 된다. 이대로 이어지면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갑작스럽게 혹은 예언대로 예수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의 신과 인간의 개념 혹은 관계가 크게 달라지게 된다. 기독교도들은 삼위일체, 성육신, 신이면서 인간, 영생, 죄와 자유의지, 예수의 대속, 사후세계 등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이지만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이 각 인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지는 상황은 더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것인가?
저자는 비종교적 접근으로써 플라톤의 철학을 가장 먼저 소개한다. 플라톤 철학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형상' 이론인데, 이는 의미나 개념, 궁극적 실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는 복합적인 것이다. 플라톤은 이 형상이론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대한 개념을 세워나갔다. 그는 우리가 이성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무엇이 선한 것이고 선하게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관점을 가졌다. 플라톤은 영혼이 육체와 떨어져서도 존재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실체라고 생각했다. 영혼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고, 소멸이 불가능하며, 우리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을 욕구, 이성, 격정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설명하고자 했다. 현대적 의미에서 이러한 구분을 살펴보면 모호하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성 안에 서로 상충되는 요소를 구분해 놓았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플라톤은 이성, 격정, 욕구라는 세 가지 요소의 우세 여부에 따라 사람들도 세 가지 부류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세 가지를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았고 이성이 격정과 욕구를 다스리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는 상호 의존적인 관점을 유지하여 현대의 관점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치체제에 있어서는 민주제보다는 독재주의, 심지어는 전체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플라톤이 상상했던 이상적 지도자가 실재할 수 있다면야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에 그러한 엘리트는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종류의 체제로 인정하기는 했다.
다음으로 플라톤의 제자로서 스승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기초하여 소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내는 불변의 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동의 동자'라고 했다. 이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달리 숭배/복종의 대상이 아니라 과학적 이론의 개념이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 단어가 경우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동물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고, 다른 점은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영혼 덕분이라고 보았다. 또 인간 사회 생활에서의 특징적인 것은 정의와 불의에 대한 앎이라 생각했다. 그는 인간이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갈 때에라야 인간 본성의 완전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사람들이 타고난 능력이 다르다 보았기에 사회계급, 노예제, 제국주의 등을 긍정한 점은 현대적 의미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인간의 이상에 대해서는 '인간의 완성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향유함으로써가 아니라 행동, 즉 우리의 능력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하고, 이는 인간의 특징인 이성적 능력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행동은 반드시 훌륭하게 수행됨으로써 최상의, 가장 완벽한 종류의 탁월함 혹은 덕을 표현하고, 나아가 그야말로 평생에 걸쳐 지속되어야 한다' 고 기술하였다. 공동체에 대해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가 없이 사회나 국가가 제대로 살아남고 번영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한국 사회가 숙고해 보아야 할 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칸트는 과학적 지식을 사용하여 도덕과 종교의 주장을 화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는 인식 능력 측면에서 동식물과 다르다는 관점을 가졌다. 인간은 지각, 판단, 이론화하고 어떤 행위를 통해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라고 보았다. 칸트에게 있어 인간의 차별성을 언어로서 표현되는 욕망이나 의도에 두었다. 인간은 자유롭고 이성적인, 그리고 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를 결정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적 욕망을 넘어서는 도덕적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각 행위에 있어 원인과 결과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동물과 천사의 중간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도덕적 책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가진 근본적 본성 사이에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완전한 도덕적 성취를 이뤄낼 수는 없는 한계를 가진 것이 인간이라 보았다. 칸트는 인간의 근본적인 선악의 문제도 다루기는 했으나 유교 등 앞선 철학사상들에서도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던 것처럼 의문을 남겼을 뿐이다. 칸트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개선하기 위해서 보상, 처벌, 위협 등은 표면적 노력이 될 뿐이며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올바른 행동을 하려는 의지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한다고 보고 그러한 제제는 법률적 영역에서만 고려되어야 하고 윤리의 영역에서는 고려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으로 집약해 고찰했다. 칸트는 인간이 자신의 행복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지고의 선인 덕과 행복과 적절히 조합되어야 한다는 어찌보면 이상적이면서도 타협적인 인간관을 보여주었다. 칸트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확고한 의견을 폈고, 정부의 권력에 의한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적이고 윤리적인 변모를 위한 윤리적 공동체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사회변화의 원동력이 정신적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마르크스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합이라고 했다. 서로 구별되는 인간의 생물학적 사실을 제외하고는 고정된 개인적 본성은 없다고 본 것이다. 한 사람의 행위가 무엇이 되었든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이고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생각할 때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회에 살고 있는지가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인간이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존재이며,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이 생존의 수단을 직접 생산한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우리의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를 의식적으로 계획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간과 사회를 진단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말은 소외, 자본주의, 그리고 착취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고 불행과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저하를 느끼게 되는 것을 노동의 소외라고 보았다.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인간들의 소외를 심화시키게 될 것이므로 최종적인 사회체제라 보지 않았고 결국에는 혁명을 통해 이상적인 공산주의 체제가 도래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진단은 대체로 정확했다 생각되지만 그 이후에 이루어진 점진적 구조 변화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는) 마르크스의 예측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가 그렸던 이상적 사회상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앞선 여러 가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들을 고려하여 볼 때 인간이란 존재가 이상향을 완성시키기에는 매우 불완전한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에 대해 정신의 영역에까지 모든 사건에는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게 마련이라는 결정론을 적용하였다. 일면 마르크스와 비슷한 면이 있는데, 다른 점은 마르크스는 인간 행동의 원인이 경제적인 것이라 보았고 프로이트는 개인적/심리적인 것 그리고 생물학적 충동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는 이에 더해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고, 정신을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조화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동에 있어 본능 혹은 충동을 매우 중요한 지점에 놓았다. 또한 인간 개인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 있어 어린 시절, 특히 출생 후 5년 동안의 시기가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정신적 건강은 정신의 다양한 부분간의, 혹은 개인과 사회 전체의 조화로운 관계에 의거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능적 충동과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충돌을 일으키게 되면 대체로 '억압'이 일어난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신경증적 질환의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취한 접근 방식은 정신분석이라는 도구였다. 환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말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후반부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 혹은 주장들은 거의 종교내지는 집단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진실된 것인지, 그리고 정말로 치료 효과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 과학자, 철학자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접근 방식에 있어 저자의 비판적 논의는 많은 도움이 된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관심을 가지고 삶의 의미나 목적, 그리고 자유에 강조점을 두었던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의식 혹은 인간적인 실재와 무생물적이고 무의식적인 실재를 구분하고 인간은 통합적 실재라고 정의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되길 열망하는 것이기에 모순적이다. 사르트르가 바라본 인간은 이 세계에 팽개쳐진 혹은 버려진 존재이므로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인간의 자유를 매우 강조하였다. 때문에 거의 모든 것들을 인간이 선택한 결과라고 보았지만 이는 선택이 아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많은 관심사들을 간과한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고통스러운 불안을 느끼며, 그것을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그는 인간들이 가능하면 선택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태에 도달해 불안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들은 진정으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요즘의 한국 상황을 보고 있자니 사르트르의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욕망이 어떤 생물학적 충동이나 본능에 근거하기보다는 근본적인 가치 선택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후반기로 가면서 그는 사회적 상황이 개인에게 가하는 위력을 깨달으며 사회적 조건이 자유를 규제한다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회에 관한 일련의 윤리사상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인류는 스스로를 진화론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인류의 혹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합의된 하나의 이론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 관점에서 진화론은 대체로 보편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인간이 원시 생물체로부터 진화를 거듭해 지금의 인류가 되었다는 주장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찰스 다윈은 형질, 형질의 변이, 형질의 유전, 환경의 영향(자연선택과 경쟁) 등을 이용하여 진화의 인과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하지만 다윈의 주장을 기반으로 인간을 해석하는 이들은 여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이론가와 모델들(뒤르켐, 스키너, 촘스키, 틴버겐, 윌슨 등)을 소개하고 있을 뿐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할 정도로 눈부신 과학의 발전 하에서도 여전히 인간과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에 대한 통일된 이론을 정립하기에는 여전히 인간의 지식은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도 역시 아무런 모순 없이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믿음(피타고라스의 정리, 다윈의 자연선택 등)을 단지 생존 메커니즘으로 여길 수는 없다라는 하나마나한 결론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주장들을 살펴본 후 저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유한한 인간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최종적인 완벽한 진실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만 위와 같이 다양한 의견들이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긍정적 기여를 한다고 말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저자 나름의 통합된 생각을 제안하고 있다. 저자는 현명하게도 논쟁의 답을 찾기가 불가능한 우주론적 형이상학(신의 존재 등)은 제외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론에서부터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인간은 동물적 신체를 지니고 있고 동시에 자신의 믿음과 행동에 대해 언어로서 이유를 제시하는 존재이다. 이는 아마도 인간의 두뇌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물리적 세계에 속하는 두뇌에서의 전기적, 화학적 작용이 인간의 이성적 사고 혹은 자유의지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것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인간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 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닌 경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진화론으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고, 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사회적 영향 하에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인 생명 유지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권리, 정의/불의, 목적의식, 소속감 등의 사회심리학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답이 없다. 인간의 권리가 침해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숙명, 하나님의 뜻, 경제적 희소성 등의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인간의 개인적 혹은 사회구조적 잘못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듯 하다.
저자는 결론부에서 개인과 사회의 악을 극복하고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진보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특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저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경제적 희소성을 경감하고, 경쟁적 성향을 유용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리자고 제안한다.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며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향해 합당한 동정과 존중을 표시하고, 공공연하고 제도적 악에 대해서는 조직적 반대 운동을 벌이자는 의견을 낸다. 이와 함께 선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유지하며 이상을 표현하면서 적극적 행동에 나서자고 주장한다. 이상향의 체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인생 전체를 통한 배움 혹은 교육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저자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제안이 특별히 독창적이거나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획기적 방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이해에 대해 우리 스스로 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이상향에 대한 행동적 추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제안과 주장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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