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자발적 자기착취의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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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자기착취의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초원위의양 2016. 3. 20. 01:04


피로사회

작가
한병철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2.03.05


  현재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3차 산업 혁명의 시대, 정보과학기술 혁명의 시대, 유비쿼터스 시대 등 사람들은 다양하게 현 시대를 특징짓는 말들을 만들어 냈다. 이 책의 저자는 21세기를 대표하는 질병측면에서 '신경증적' 시대라고 규정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의 질병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질병들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현 시대에는 지난 세기에 비해 무엇인가에 대한 뚜렷한 경계선이 희미해졌고, 적대적 이질성이 '차이'라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나는 저자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아주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화라는 열차가 우리를 과거 신념, 가치 등에 있어 분명한 구별 혹은 대결이 있었던 색깔이 뚜렷했던 시대로부터 경계가 모호하고 무한히 상대적인 파스텔적 시대로 옮겨다 놓았다. 

  저자는 이러한 시대에서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으로 인해 초래되는 폭력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이전에는 다름 혹은 이질적임에서 폭력이 기원했다면 현 시대에는 같은 것, 그것이 과잉되는 것이 폭력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서로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적대성 보다는 무엇인 다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모호함, 그리고 그 모호함이 도처에 있음으로써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폭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지금의 시대에는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최근 몇 년간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낡은 정권에서 행하고 있는 비정상적 정책들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응이 이러한 것이 아닐까? 정권을 잡은 자들이 근본적으로 국민과는 다른 존재들이고 그들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속이며 착취하려 하는데 국민들은 그것에 대한 다름을 인지하지 못하고 저항을 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 아닐까. 저자는 과거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면역 저항 체계를 설명하면서 면역 저항 체계는 "치명적일 수 있는 훨씬 더 큰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현재 우리가 박근혜 정권을 그냥 저대로 놔두는 것은 예방주사와 같은 약간의 고통 혹은 불편함이 싫어서 앞으로 닥칠 치명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이 정권을 그대로 놔둔다면 아마도 대한민국은 머지 않아 지독한 고통 속에 신음하다 사망에 이를 것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과거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변화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된다. 성과 사회에서는 '할 수 있음'이라는 것이 가장 큰 동력이다. 과거 규율 사회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았다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성과 사회에서는 자기 주도성이라는 개인적 동인과 사회적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 그리고 사회시스템적 성과를 행한 압박으로 인해 우울이 만연하게 된다. 이러한 요인들이 현대 사회의 인간을 병들게 하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라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에서 자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기업노동자 그리고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공무원 노동자들의 모습이 정확히 표현된 문장이란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성과 사회에서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멀티태스킹이라는 것이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동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습성으로 오히려 퇴보라는 저자의 지적이 눈에 띤다.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인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 이와 같은 후퇴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생존에 급급해 동물같은 행동들을 하는 것을 흔하게 목도하다보니 저자의 이러한 생각들에 크게 동감하게 된다. 우리는 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창조적 과정에 매우 중요한 '깊은 심심함'을 잃어버리고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다시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인간의 습성 중의 하나가 이 깊은 심심함 속에 있을 수 있는 능력, 사색에 깊이 빠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사물의 향기도 볼 수 있다고 말한 폴 세잔처럼 우리도 사색하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속한 이 세계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차리고 잘못된 방향이라면 그 궤도를 수정할 수 있도록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도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관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현대 사회는 과잉활동으로 넘쳐나는데, 이는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가 만들어지는 사회임을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이 사회은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사회이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구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색적 삶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사색적 삶에 전제가 되는 것은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에 대한 교육이다. 깊은 사색, 즉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상당 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빠져 있는 정신의 부재 상태는 사색 없이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것에 기인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잠시 멈출 줄 아는 삶, 멈춰서서 생각할 줄 아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졌지만 결국 어리석은 기계일 뿐이다. 현재의 상태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분노'는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에 따르면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독재자의 딸과 그 당시 독재세력들이 여전히 이 나라의 지도력으로 두고 있는 이 상황,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국민들이 분노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지상과제이다. 언론을 동원해 국민들이 분노가 아닌 짜증과 신경질이 나도록 교묘하게 선동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당한 정권과 그 비호 세력들이 일으키는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해 무어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존재 전체에 다한 전면적 부정, 즉 분노이다.

  성과 사회의 이면에는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가 놓여 있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저자는 성과 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이다라고 기술한다. 저자는 피로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트케의 피로에 대한 시론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피로는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는 언어마저도 파괴하는 폭력이다. 저자는 계속 한트케를 인용하면서 이 파괴적 피로는 지양하고 한트케가 '근본적인 피로'라고 명명한 피로는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 피로는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이 피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는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한 영감을 준다. 또 이 피로를 통해 우리는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되찾는다. 이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모습은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만이 아니라 그 한쪽에 놀이하는 손을 맞대는 모습이다.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피로가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와 그것으로 드러난 권력과 자본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 한국을 힘겹게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필요한 모습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트케의 표현대로 너한테 지치는 피로가 아니라 너를 향해 지치는 그것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