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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여행기에 담긴 소로우의 철학적 사색에 빠져들다 본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널리 읽히는 책들이 있다. 월든도 그러한 책들 중 하나가 아닐까. 이 책 ‘소로우의 강’은 월든의 작가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첫 저작이다. 소로와 형이 함께 한 1주일 간의 여행기이자 동시에 그의 깊은 철학적 사색을 담고 있는 책이다. 소로는 짧은 생애를 살아가면서 당시 미국사회에뿐만 아니라 150년도 더 흐른 전세계 후세들에게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저작들을 남겼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소로를 읽게 하는지 궁금해 하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소로는 1830년대 초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초월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초월주의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타락해 있다는 청교도 교회의 캘빈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본성에 주목했던 유니테리언파에 기반하고 있다. 초월주의에서는 진리가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얻어진다고 믿었고, 개인의 정신과 영혼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다. 또한 객관적 사실을 개인적 진리에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자립을 경제적 미덕이라 여기고 존재의 온전한 철학적, 정신적 기초로 여기는 특징을 보였다.
위와 같은 초월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소로는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소로는 인간이 교육, 자기 탐색, 영적 자각을 통해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고, 일상의 일과 학식을 결합시켰다. 특히 획득이 아닌 욕망의 축소로 부유해지는 단순성의 가치를 주창했다. 때문에 기술 발전, 경제성장, 영토확장 등의 외부적 요소의 개선으로 인간이 내적 평안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소로는 이상주의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성실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시간에 대해서는 실제 달력상의 시간보다는 계절의 순환과 같은 상징적 시간을 중시하였다.
소로는 콩코드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올라가며 주변 경관을 묘사하기도 하고,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로 인해 떠오르는 시와 글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강물의 흐름, 그 흐름을 타고 떠내려 오는 통나무들과 나무 줄기들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소로는 인간의 삶을 “바다까지 줄곧 내달리는” 강물과도 같다고 표현하였다. 상류의 거센 물살이 굽이치는 것처럼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하류의 느릿느릿 여유로운 흐름처럼 노년을 보내다 광활한 바다로 내던져지듯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는 흔해빠진 물고기들을 살펴보면서도 오랜 시간 물 속에 손을 담그고 지켜보고 있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소로의 태도가 잘 표현된 모습이다.
소로의 신약성경에 대한 언급이 매우 인상적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라”, “너희가 온전해지려거든 가서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러면 너희가 하늘의 보배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 가라고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무슨 일이든 너희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와 같은 말씀들에 대해 소로는 세상 어느 설교단에서든지 이런 글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읽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현재의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생각이다.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행한다면 세상은 절대 이런 모습이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독서에 대해서도 조언을 한다. “우리는 책을 골라 읽을 필요가 있으니, 책은 평생 사귀어야 하는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진실한 책만 읽어라. 그것들이 동이 났을 때는 되풀이해서 읽거나, 아니면 스스로 더 많이 쓰려고 해보라. 우리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보다는 자신의 온전한 생각을 시나 찬송으로 바쳐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삶의 길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루가 온종일 대낮일 필요는 없으나, 하루가 저절로 싹틔울 수 없는 시간이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있어야 한다. 학자들은 학식 한 더미면 장자 상속권을 팔아넘기려 할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책부터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읽을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될지 모른다.” 소로는 굽실거리는 재미를 주는 책이 아니라, 그 속에 든 생각 하나하나가 보기 드물게 담이 큰 책, 게으름뱅이는 읽을 수 없고, 마음 약한 이는 즐기기 어려운책, 심지어 현존 제도에서는 읽는 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책을 좋은 책이라 부른다. 글 읽기를 강물을 따라 여행하는 것에 비유한 것은 정말 마음에 와 닿는다. “글이 지닌 흐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숨쉴 때처럼 페이지마다 솟아오르고 드르릉 돌아가는 맷돌처럼 옳으니 그르니 따지는 생각들을 싹 씻어버리라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그는 가장 매력적인 글은 지혜가 가득 담긴 글이 아니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진솔한 글이라 했다.
근검하게 지내며 노동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소로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구를 남겼다. “대단히 능률적인 노동자는 하루를 일에 치여 보내는 법이 없다. 오히려 어슬렁어슬렁 일하는 그는 안락하고 한가하다. 지극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그는 열매를 맺힐 시간의 알맹이만 성실하게 이용한다. 암탉이 왜 하루종일 알을 품어야 하는가? 암탉은 하루 한 번 이상은 알을 품지 않는다. 암탉은 또 다시 알을 낳기 위해 모이를 쪼아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손톱 깎는 일과 같은 하찮은 일일지라도 그에게 시간을 넉넉히 갖게 해 주자. 새싹은 짧은 봄날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않고 천천히 돋아난다.” “그러니 자신의 욕구를 돋우는 데 한 시절을 보내라. 꿋꿋이 서 있으면 서두리지 않아도 자라난다.” “어떤 시간은 일을 하기에는 도무지 알맞지 않고, 숨을 들이쉴 작정이나 하기에 알맞은 것 같다. 그럴 때는 피가 끓어 당장 달려들려고 조바심을 낼 일이 아니라, 반쯤은 벌써 이루어졌다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나 문을 닫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서 이리저리 거닐어야 한다. 씨앗이 자체에 들어 있는 배젖으로 싹을 틔워 땅 밑으로 내려 보내고 나서야 햇빛을 향해 자라나듯, 우리의 결심도 그렇게 하고 나서야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해진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이 빠지게 바라 마지않는 성공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했을까? 소로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신중하지 못하거나 슬기롭게 처신하지 못해서이다."라고 쓰고 있다. "영웅은 서두르는 법과 아울러 기다리는 법도 알고 있다. 좋은 것들은 모두 슬기롭게 기다리는 이의 몫이다. 우리는 언덕 너머 서쪽으로 서둘러 가기보다는 여기 이 자리에 남아 있음으로써 더 빨리 새벽을 맞이할 수 있다." "이제껏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저녁까지 기다려보라. 그러면 한낮에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또 다른 무언가가 가장 밝게 빛날 것이고, 자신이 낮 동안에 애쓴 참뜻을 알게 될 것이다. 농부가 밭고랑 끝에 이르러 뒤를 돌아볼 때와 같이, 자신이 지나온 길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될 터이다." 마음에 와 닿는 표현들이다. 살아가다 보면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소로의 이러한 충고가 도움이 될 듯 하다. 소로는 노력하면 개인의 평균적 능력치에 따라서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생각으로 시스템적 혹은 구조적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현재에는 그대로 적용해 보기는 어려운 입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의 노력과 구조적 변화가 동시에 있어야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소로는 상상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예찬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육신은 따뜻하게 하면서도 상상력은 마비상태로 놔두고, 육신은 기름지게 하면서도 상상력은 야위고 오그라든 상태로 놔둔다. 하지만 상상력이 모자란다면 다른 재간이 아무리 많더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상상력은 정신이 살아 숨쉬는 “정신의 공기”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상상력이 아닐까! 어찌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훌륭한 자유가 마음껏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유라 생각한다. 소로와 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축복이리라. 소로에게 또 하나의 축복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자연이었다. "공기가 깨끗한 곳에서 보면 농부가 쟁기질하고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지만, 농부 자신은 그런 아름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 강기슭 땅을 1에이커도 갖지 않았기에 강기슭 전체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이 세상의 값어치를 제대로 아는 이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가난한 부자! 그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 그가 사들인 것이다. 내게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나는 메리맥 강기슭을 소유한 최대 지주이다." 소로는 이렇듯 주어진 인간의 조건과 자연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과학도에 대한 소로의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넓은 범위에서 과학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기에 더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다. "자신의 연구에서 어떤 공감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응용에서만 무언가를 배울 뿐 자신의 행위에서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과학도는 진정한 과학도가 아니다. 그저 우연의 일치를 발견하거나 부분적이고 무관계한 법칙을 발견하기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기하학 연구를 별의 운행 체계보다 작은 규모의 체계에 응용한다면 정신을 하찮은 데 게으르게 낭비하는 꼴이다. 수학은 물리학과 융합되어야 할 뿐 아니라 윤리학과도 융합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융합된’ 수학이다." 과학에 윤리학이 융합되어야 한다는 소로의 이 생각은 한국의 과학계에서 종종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학자 및 연구자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과학하는 사람들 역시 도덕적 관념은 기본일진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너무나 안탂까운 것이 현실이다. 거짓, 기만, 횡령 등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씁쓸한 현실이다. 또한 소로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내가 단언하건대, 우리나라의-어쩌면 이 시대의-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은 순수과학이 아닌 응용을 위해 힘을 쏟거나, 그렇지 않으면 특정 분야에서 충실하지만 완전히 종속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중심이 되는 사실에 짜임새 있게 꾸준히 접근하지 못한다. 일단 어떤 발견이 이루어지고 나면 모든 관찰자의 주의가 그리로 몰리고, 잇따라 비슷한 발견들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노를 뉘어놓고 쉬고 있는 것 같다." 어찌보면 과학계는 지난 150여년 동안 기술발전은 있었을 지 모르겠지만 소로가 말했던 이 분위기는 여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시작으로 소로의 글들을 찾아서 읽어 보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소로의 표현(비록 번역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과 그 안에 녹아진 그의 생각들이 삶에 대한 많은 통찰로 이어져 인생에 살을 찌워주는 느낌이다.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진부한 표현 그대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 특히나 대한민국은 끊임 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때문에 사람들을 점점 더 불행해져만 간다. 소로의 삶에 대한 관점과 생각들이 이와 같은 출혈적 경쟁으로부터 빠져나와 주어진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통찰을 제공해 준다.
소로는 1830년대 초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초월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초월주의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타락해 있다는 청교도 교회의 캘빈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본성에 주목했던 유니테리언파에 기반하고 있다. 초월주의에서는 진리가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얻어진다고 믿었고, 개인의 정신과 영혼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다. 또한 객관적 사실을 개인적 진리에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자립을 경제적 미덕이라 여기고 존재의 온전한 철학적, 정신적 기초로 여기는 특징을 보였다.
위와 같은 초월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소로는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소로는 인간이 교육, 자기 탐색, 영적 자각을 통해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고, 일상의 일과 학식을 결합시켰다. 특히 획득이 아닌 욕망의 축소로 부유해지는 단순성의 가치를 주창했다. 때문에 기술 발전, 경제성장, 영토확장 등의 외부적 요소의 개선으로 인간이 내적 평안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소로는 이상주의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성실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시간에 대해서는 실제 달력상의 시간보다는 계절의 순환과 같은 상징적 시간을 중시하였다.
소로는 콩코드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올라가며 주변 경관을 묘사하기도 하고,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로 인해 떠오르는 시와 글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강물의 흐름, 그 흐름을 타고 떠내려 오는 통나무들과 나무 줄기들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소로는 인간의 삶을 “바다까지 줄곧 내달리는” 강물과도 같다고 표현하였다. 상류의 거센 물살이 굽이치는 것처럼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하류의 느릿느릿 여유로운 흐름처럼 노년을 보내다 광활한 바다로 내던져지듯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는 흔해빠진 물고기들을 살펴보면서도 오랜 시간 물 속에 손을 담그고 지켜보고 있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소로의 태도가 잘 표현된 모습이다.
소로의 신약성경에 대한 언급이 매우 인상적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라”, “너희가 온전해지려거든 가서 가진 것들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러면 너희가 하늘의 보배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 가라고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무슨 일이든 너희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와 같은 말씀들에 대해 소로는 세상 어느 설교단에서든지 이런 글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읽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현재의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생각이다.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행한다면 세상은 절대 이런 모습이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독서에 대해서도 조언을 한다. “우리는 책을 골라 읽을 필요가 있으니, 책은 평생 사귀어야 하는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진실한 책만 읽어라. 그것들이 동이 났을 때는 되풀이해서 읽거나, 아니면 스스로 더 많이 쓰려고 해보라. 우리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보다는 자신의 온전한 생각을 시나 찬송으로 바쳐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삶의 길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루가 온종일 대낮일 필요는 없으나, 하루가 저절로 싹틔울 수 없는 시간이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있어야 한다. 학자들은 학식 한 더미면 장자 상속권을 팔아넘기려 할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책부터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읽을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될지 모른다.” 소로는 굽실거리는 재미를 주는 책이 아니라, 그 속에 든 생각 하나하나가 보기 드물게 담이 큰 책, 게으름뱅이는 읽을 수 없고, 마음 약한 이는 즐기기 어려운책, 심지어 현존 제도에서는 읽는 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책을 좋은 책이라 부른다. 글 읽기를 강물을 따라 여행하는 것에 비유한 것은 정말 마음에 와 닿는다. “글이 지닌 흐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숨쉴 때처럼 페이지마다 솟아오르고 드르릉 돌아가는 맷돌처럼 옳으니 그르니 따지는 생각들을 싹 씻어버리라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그는 가장 매력적인 글은 지혜가 가득 담긴 글이 아니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진솔한 글이라 했다.
근검하게 지내며 노동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소로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구를 남겼다. “대단히 능률적인 노동자는 하루를 일에 치여 보내는 법이 없다. 오히려 어슬렁어슬렁 일하는 그는 안락하고 한가하다. 지극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그는 열매를 맺힐 시간의 알맹이만 성실하게 이용한다. 암탉이 왜 하루종일 알을 품어야 하는가? 암탉은 하루 한 번 이상은 알을 품지 않는다. 암탉은 또 다시 알을 낳기 위해 모이를 쪼아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손톱 깎는 일과 같은 하찮은 일일지라도 그에게 시간을 넉넉히 갖게 해 주자. 새싹은 짧은 봄날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않고 천천히 돋아난다.” “그러니 자신의 욕구를 돋우는 데 한 시절을 보내라. 꿋꿋이 서 있으면 서두리지 않아도 자라난다.” “어떤 시간은 일을 하기에는 도무지 알맞지 않고, 숨을 들이쉴 작정이나 하기에 알맞은 것 같다. 그럴 때는 피가 끓어 당장 달려들려고 조바심을 낼 일이 아니라, 반쯤은 벌써 이루어졌다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나 문을 닫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서 이리저리 거닐어야 한다. 씨앗이 자체에 들어 있는 배젖으로 싹을 틔워 땅 밑으로 내려 보내고 나서야 햇빛을 향해 자라나듯, 우리의 결심도 그렇게 하고 나서야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해진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이 빠지게 바라 마지않는 성공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했을까? 소로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신중하지 못하거나 슬기롭게 처신하지 못해서이다."라고 쓰고 있다. "영웅은 서두르는 법과 아울러 기다리는 법도 알고 있다. 좋은 것들은 모두 슬기롭게 기다리는 이의 몫이다. 우리는 언덕 너머 서쪽으로 서둘러 가기보다는 여기 이 자리에 남아 있음으로써 더 빨리 새벽을 맞이할 수 있다." "이제껏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저녁까지 기다려보라. 그러면 한낮에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또 다른 무언가가 가장 밝게 빛날 것이고, 자신이 낮 동안에 애쓴 참뜻을 알게 될 것이다. 농부가 밭고랑 끝에 이르러 뒤를 돌아볼 때와 같이, 자신이 지나온 길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될 터이다." 마음에 와 닿는 표현들이다. 살아가다 보면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소로의 이러한 충고가 도움이 될 듯 하다. 소로는 노력하면 개인의 평균적 능력치에 따라서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생각으로 시스템적 혹은 구조적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현재에는 그대로 적용해 보기는 어려운 입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의 노력과 구조적 변화가 동시에 있어야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소로는 상상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예찬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육신은 따뜻하게 하면서도 상상력은 마비상태로 놔두고, 육신은 기름지게 하면서도 상상력은 야위고 오그라든 상태로 놔둔다. 하지만 상상력이 모자란다면 다른 재간이 아무리 많더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상상력은 정신이 살아 숨쉬는 “정신의 공기”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상상력이 아닐까! 어찌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훌륭한 자유가 마음껏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유라 생각한다. 소로와 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축복이리라. 소로에게 또 하나의 축복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자연이었다. "공기가 깨끗한 곳에서 보면 농부가 쟁기질하고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지만, 농부 자신은 그런 아름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 강기슭 땅을 1에이커도 갖지 않았기에 강기슭 전체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이 세상의 값어치를 제대로 아는 이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가난한 부자! 그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 그가 사들인 것이다. 내게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나는 메리맥 강기슭을 소유한 최대 지주이다." 소로는 이렇듯 주어진 인간의 조건과 자연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과학도에 대한 소로의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넓은 범위에서 과학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기에 더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다. "자신의 연구에서 어떤 공감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응용에서만 무언가를 배울 뿐 자신의 행위에서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과학도는 진정한 과학도가 아니다. 그저 우연의 일치를 발견하거나 부분적이고 무관계한 법칙을 발견하기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기하학 연구를 별의 운행 체계보다 작은 규모의 체계에 응용한다면 정신을 하찮은 데 게으르게 낭비하는 꼴이다. 수학은 물리학과 융합되어야 할 뿐 아니라 윤리학과도 융합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융합된’ 수학이다." 과학에 윤리학이 융합되어야 한다는 소로의 이 생각은 한국의 과학계에서 종종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학자 및 연구자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과학하는 사람들 역시 도덕적 관념은 기본일진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너무나 안탂까운 것이 현실이다. 거짓, 기만, 횡령 등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씁쓸한 현실이다. 또한 소로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내가 단언하건대, 우리나라의-어쩌면 이 시대의-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은 순수과학이 아닌 응용을 위해 힘을 쏟거나, 그렇지 않으면 특정 분야에서 충실하지만 완전히 종속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중심이 되는 사실에 짜임새 있게 꾸준히 접근하지 못한다. 일단 어떤 발견이 이루어지고 나면 모든 관찰자의 주의가 그리로 몰리고, 잇따라 비슷한 발견들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노를 뉘어놓고 쉬고 있는 것 같다." 어찌보면 과학계는 지난 150여년 동안 기술발전은 있었을 지 모르겠지만 소로가 말했던 이 분위기는 여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시작으로 소로의 글들을 찾아서 읽어 보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소로의 표현(비록 번역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과 그 안에 녹아진 그의 생각들이 삶에 대한 많은 통찰로 이어져 인생에 살을 찌워주는 느낌이다.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진부한 표현 그대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 특히나 대한민국은 끊임 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때문에 사람들을 점점 더 불행해져만 간다. 소로의 삶에 대한 관점과 생각들이 이와 같은 출혈적 경쟁으로부터 빠져나와 주어진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통찰을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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