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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와 글쓰기, 그리고 인생

초원위의양 2016. 3. 19. 21:37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문학사상
발매
2009.01.05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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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수년 동안 마라톤을 지속하고 계신 회사 선배님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나도 그냥 달리고 싶어졌다. 그 분이 지금껏 달리면서 가슴과 등에 달고 있었던 번호들을 모아 놓은 사진을 볼 때 왠지 모를 설렘과 감동이 느껴졌다. 8월초부터 무작정 달려보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뜨겁고 습한 날씨에 달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찾아보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씨의 이 책을 만났다. 하루키 씨의 달리기와 글쓰기, 그리고 그의 지나온 인생에 관해 쓴 글이었다. 하루키씨는 장거리 달리기는 실제 대회같은 데에서 달릴 때뿐만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시기에도 강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준비할 때에든 실제로 달릴 때에든 중요한 것은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달리기가 장편소설을 쓸 때와 비슷하다고 말하는데 그럴 법하다. 일단 리듬을 타게 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가지만 그 때까지는 계속해서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반 법칙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키씨가 쓴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달리기는 그에게 수십 년간 함께 해 온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다. 자신의 성향이 달리기라는 운동과 잘 맞았던 것 같고, 올림픽같은 프로 달리기 경기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과의 경쟁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는 달리기에 매력을 느꼈다. 일반적인 러너들은 자신이 정한 목표를 가지고 레이스에 임한다고 한다.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이 정한 목표를 달성했거나 혹은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해도 다음 번 레이스로 이어지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면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고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하루키는 쓰고 있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하면서 자신의 글쓰는 직업과 비교하며 깨닫게 되는 것들을 이야기 한다. 하루키에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신이 지녔던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가는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하다보면 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사실 달리다 보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달리다보니 하루키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냥 단지 달려가면서 달리려고 할 뿐이다. 하루키는 이것을 "공백을 얻기 위해" 달린다고 표현했다. 공백의 상태에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나그네와 같은 하늘의 구름과도 같다. "구름은 사라지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글을 접할 때면 하루키는 달리기를 통해 인생의 주요한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의 인생에서 달리기는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인 것이다.

 

  하루키씨는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쓰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과거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자기의 성격을 말해 준다. 대체로 하루키씨는 "전력을 다해 매달리고, 그래도 잘 되지 않으면 단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중간하게 하다가 실패한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이다."라는 자세로 인생을 대했다. 젊은 시절 가게도 그랬고, 계시와도 같이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에도 그랬다. 하루키씨는 성실과 꾸준함, 그리고 무엇인가에 대한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러한 성향들은 나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인생을 대하는, 그리고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들을 대하는 하루키씨의 태도는 참 마음에 든다.

 

  하루키씨는 왜 달리는 소설가가 되었을까?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전업 소설가가 되고 보니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신경을 집중하게 되면서 건강이 안좋아지게 됨을 느꼈다. 단지 글을 쓰기 위한 체력을 지키고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키씨는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키씨는 "달리기는 동료나 상대가 필요없고, 특별한 도구나 장비도 필요 없고, 특별한 장소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며 달리기의 장점을 말한다. 하루키의 약간은 개인적이면서도 소박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인데, 이 구절들은 왠지 모르게 나를 미소짓게 만든다. 나도 그와 비슷한 성격과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하루키씨는 공부에 대해서도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자신이 흥미를 지닌 분야의 일을 자신에게 맞는 페이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추구해나가면 지식이나 기술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녀를 둔 부모들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무엇인가 통찰을 주는 말이라 생각한다. 가르침과 배움이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와의 깊은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체질, 글쓰기 재능 등 삶의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생은 참 불공평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하루키씨는 "무엇이 공평한가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하루키는 인생이 기본적으로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곳에 있는 어떤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루키씨는 이 글에서 종종 달리기와 글쓰기를 비교하며 쓰고 있는데 두 가지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이 있어 하루키씨의 느낌과 생각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글은 그의 지난 세월의 자취, 조금 구체적으로는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심정들을 기록한 것이기에 하루키라는 인생을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만나게 된다.

 

  하루키는 좀 괴짜같은 인물인 것 같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1983년엔 아테네에서부터 마라톤까지, 전통적인 마라톤 코스와는 반대 방향으로 홀로 달려보기도 했다. 처음엔 잡지사에서 그 코스 일부를 달리는 컨셉을 가져왔었지만 러너 하루키는 그 전체 코스를 달려볼 것을 역제안한 것이다. 관중도 없고, 다른 참가자도 없는 레이스. 진정으로 상대는 오직 자신뿐인 레이스를 달린 것이다. 4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달렸던 뜨거운 그리스에서의 단독 레이스는 그 당시 사진 몇 장과 함께 10페이지 남짓한 짧은 글로만 남아 있다. 젊은 시절의 호기로 넘겨 볼 수도 있겠지만 이 황당한 레이스를 읽으면서 무모한 하루키씨가 왜 이렇게 멋있어 보이는걸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도전을 해 보고 그 때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하루키는 달리기에 관해서는 남다른 꾸준함을 발휘해 왔다. 바쁜 일이 있을 때에도 반드시 시간을 내서 달려왔다. 하루키는 매일 달리는 것은 마치 생명선과도 같다고 표현했다. 그는 말한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 없이 단련하는 것." 삶을 살다 보면 하루키의 달리기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것이 하나쯤은 있을 지 모른다. 그것을 대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그만둘 이유는 정말 얼마나 많은가! 

 

  하루키의 글쓰기는 어떤가? 하루키는 책의 중간 즈음에 소설가로서 중요한 자질을 말하는데 그것은 소설가로서의 재능, 집중력, 지속력을 꼽는다. 그런데 이것들은 비단 글쓰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하루키는 이러한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을 연습하는 데 달리기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얼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이 모든 질문들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꼭 배우고 익혀야하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하루키처럼 달리고 싶다.

 

  하루키는 마라톤 풀코스의 배 이상을 달려야 하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에 참가한 적이 있다. 이 길고도 험한 레이스를 통해 하루키는 자신에게서 무엇인가가 빠져 나간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하루키는 자신이 러너스 블루라고 부른 묘한 심리상태를 경험한다. 하루키는 마치 초기에 억지가 심한 열정을 쏟다가 식어버린 연애를 대하는 것처럼 달리는 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고 한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러너스 블루와 같은 것을 종종 맞이하게 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도 열정을 쏟아 붓던 취미 생활이 어느 순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이 데면데면해지고 흥이 나질 않는 순간이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은 하루키가 표현했듯 '블루'했다. 하지만 하루키는 이 알수 없는 러너스 블루의 찾아옴과 사라짐을 경험하면서 신비로움을 느꼈다. 하루키는 또 다시 달린다는 것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쓴다.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미터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하루키는 우리의 인생이 생각했던 것 만큼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때문에 첫 계획의 실패에 대비해 두 번째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살다보면 첫째 계획의 예상치 못한 결과에 황망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생에 있어서나 달리기에 있어서나, 하루키씨에게는 글쓰기에 있어서나 플랜 B를 준비하는 것은 현명한 자세이다. 하루키의 마라톤 이야기를 읽다보면 달리기에서와 같이 인생에서도 그 당시엔 알 수 없는 이유로 페이스가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당시에 알 수 없다기보다는 알고는 있지만 인정하기 힘든 혹은 싫은 이유인 경우가 많긴 하다. 세월이 지남으로 인해 찾아오는 체력의 저하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 상태의 자신에게서 또 다시 새로운 출발 혹은 도전을 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살아가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하루키씨가 살아온 인생,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가 책의 마지막에 썼듯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일 것이다. 이 한 마디가 내게는 그 어떤 야심찬 선언들보다 더 깊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올겨울 세계의 어딘가에서 또 한 번 마라톤 풀코스 레이스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는 또 어딘가에서 트라이애슬론 레이스에 도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계절이 순환하고 해가 바뀌어간다. 나는 또 한 살을 먹고 아마도 또 하나의 소설을 써가게 될 것이다.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그렇다, 아마도 이쪽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