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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경이가 깃든 일상 음식 퍼레이드 본문
어느 날 커다란 책 배달 박스가 거실에 놓여 있어 뭔가 하고 뜯어보려는데 아내는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지 말라했다. 하루가 더 지나 아내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책 박스를 개봉했었나보다. '오무라이스 잼잼'. 책 제목이 뭐 이런게 다 있나 싶고, 별게 다 책으로 나오는구나 생각했다. 참 책 쓰기 쉽구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문학, 문학, 철학 등 고결한 품격을 유지해 온 나의 책읽기 목록에 포함될 수 없을 것 같은 책이었기에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동안 아내의 손에는 이 책이 들려져 있었다. 화장실에 앉아 다른 책을 보고 있는데 키득키득 아내가 혼자 웃는 소리, '아 배고프다'는 소리, '이거 먹고 싶다'는 외침 등이 들려왔다. 대체 무슨 책이길래 저럴까 궁금해졌다. 결국 화장실로 향하는 내 손에도 이 책이 들려졌다.
적당한 크기의 빨간 크레용으로 쓴 듯한 제목 '오무라이스 잼잼'. 부제는 경이로운 일상음식 이야기. 그리 세련되지 않아 보이는 어른 두명, 아이 두 명의 그림. 콩장, 멸치, 소시지 부침이 반찬칸에 빼곡하게 차 있고, 밥 칸의 완두콩 밥 위엔 계란 후라이 하나가 올려져 있는 도시락 통 일러스트. 그 도시락 통 옆에 놓인 손잡이 달린 포크 숟가락 하나. 나머지는 흰 여백. 제목과는 달리 표지의 일러스트는 매우 친근했다. 학교 급식 같은 게 없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아마도 저런 모양의 도시락 통은 무척이나 친근할 것이고, 이와 관련된 추억거리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때 엄마가 싸 주던 반찬이야기,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 도시락 까먹던 이야기, 겨울철 교실 가운데 있던 난로 위에 양은 도시락 올려놨다가 따뜻하게 먹던 이야기 등등. 초등학교(나 땐 국민학교)에서부터 중학교를 거치며 매일 하나씩,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는 하루 2개(점심, 저녁: 그 땐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이란 게 있어서 도시락을 2개씩 싸가지고 다녔다)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던 내게도 책 표지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엄마가 싸주던 도시락을 다시 먹고 싶어졌다. 허허허.
책을 넘기다 보니 부제로 적힌 '경이로운 일상음식 이야기'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말 누구나 한 번쯤은 먹어 봤을 혹은 접해 봤을 다양한 음식들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 설탕에 재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국물까지 싹 들이키던 토마토, 이국적이나 이국적이지 않게 된 샌드위치, 진짜 카스테라와 실수로 만들어진 포테이토 칩. 한국 사람이라면 그리 충격적이지 않게 받아들이며, 오히려 맛나게 먹는 뼈다귀 해장국. 콜라에서부터 바나나맛 우유에 맛동산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정말 일상적으로 접해왔던 그리고 여전히 맛있게 먹고 있는 음식들과 그것들에 대한 역사, 그리고 추억이 이 책에는 가득하게 채워져 있다. 거기에 작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자녀인 두 남매들이 실제 겪었던 일상적 삶의 에피소드(육아를 했던 부모들이라면 공감할 이야기들이 참 많다)들이 일상적 음식 이야기들과 적절하게 버무려져 있어 우리네 비빔밥이 주는 것처럼 읽는 맛도 훌륭하다. 아내가 왜 이 책을 붙들고 키득키득 웃으며 침을 삼켰는지를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화장실(음식과 군침에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ㅎㅎ)에서 이 책을 붙들고 꿀꺽 침을 삼키며 키득키득 웃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음식은 하나같이 소중하고, 인류가 이뤄낸 문화는 더 없이 아름답다." (p. 409)
그렇다. 작가가 부제에도 사용한 '경이로운'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그것을 느낄 수 있는 자에게만 그렇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음식뿐만 아니라 '일상'이라는 것은 '경이로움'과는 거리가 참 멀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나 매일같이 같은 길을 걸어서 혹은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매일 똑 같은 식판에 순환되는 회사 구내 식당 메뉴(군대의 짬밥과도 같은) 혹은 회사 근처 식당을 찾아 먹게 되는 메뉴들에 혀의 감각을 잃은 회사원들에게 '경이로운 일상음식'이란 단어는 외계어와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적 혀를 가지게 된 이들에게도 이 책의 작가가 발견했던 일상 음식의 경이로움을 맛보았던 때가 분명이 있다. 그게 어느 날 부모님이 차려주던 정갈한 밥상이었을 수도 있고, 아내가 정성들여 차려 내 준 아침 밥상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책의 작가처럼 간식으로 먹었던 여러 가지 과자와 음료들이었을 수도 있다.
아직까지 이와 같은 경이로움을 느껴보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며 잠시 동안 이렇게 생각해 보라. 새까만 콩장의 콩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겨우내 단단하게 얼었던 땅이 봄이 되어 녹아가자 농촌의 농부가 겨우내 말려두었던 씨앗 삼은 콩을 땅을 얕게 파서 심는다. 봄비가 내려 땅을 적시고 땅속 씨앗은 떡잎을 내 놓는다. 얌체같은 새들이 곡식 묻어 놓은 자리를 귀신 같이 알아채고 파 먹은 빈 자리에 다시 땅을 파 씨 콩을 심는다. 이 녀석들도 조금 늦었지만 이내 떡잎을 내 놓는다. 심은 콩 옆에 자꾸만 자라나는 잡초들을 농부는 연일 땀흘려 뽑아놓아 콩이 흡수할 영양분을 빼앗기기 않도록 해 준다. 여름이 지나고 뜨거운 더위가 가실 즈음 무럭무럭 자라나 콩 줄기를 베어 놓는 농부의 얼굴엔 고됨이 묻어나지만 입가엔 미소가 있다. 잘 말린 콩 줄기를 타작하면 잘 여문 검은 콩들이 여기저기 신나게 튀어다닌다. 콩이 우리들 밥상에 올려지기까지는 거의 1년에 가까운 농부의 수고와 거기에 드려진 태양 빛, 땅을 적셔준 빗물, 그리고 바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이 콩 하나에 모아져 있는 것이다. 콩 하나에도 세계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콩에 짭짭하게 배어져 있는 간장은 또 어떠한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음식 앞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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