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어 왔던 양극화 문제는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격차는 더욱 커져가고 있다.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체제 하에 돌아가고 있는 전 세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양극화 해소의 주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나라나 문화를 거의 가리지않고 질좋은 교육을 공평하게 받게하자는 것이다. 일면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제안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기고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역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1월호에 실려 있는 글이다. 존 마시라는 이름의 작가 인데 이가 논의하는 관점이 올바른 방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존 마시는 이 글에서 우수한 교육으로는 빈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교육을 개선해 모든 청년세대들이 학자금 부담 없이( 이 전제 자체가 말이 안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대학을 졸업해 고등교육을 마친다고 해도 결국 그들이 일하게 되는 현장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학생들의 격차가 벌어지게 되는 이유는 평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해 있는 사회 경제적 환경 때문이다. 즉, 학교 교육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격차를 줄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 구조의 큰 틀을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다. 평등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도 나타나는 현상일 뿐 문제의 근원은 아닌 것이다. 현상 이면에 숨겨진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다. 빈곤층 자녀들이 학교 공부를 더 잘하게 하려면 먼저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존 마시는 주장하고 있다. 광장히 설득력있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빈곤층 아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나 교육 받는 데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 어느 정도의 격차해소를 위한 첫걸음은 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문제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질 좋은 교육을 모두가 우수하게 끝내고 사회로 나왔다고 치자. 자,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으 어디일까? 사회가 그들을 모두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수준 높은 급여를 제공하는 일자리를 제공할수 있을까?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 중 누군가, 아니 대다수는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국 제자리로 되돌아 오게 될 것이다. 평등한 교육과정을 잘 마쳤다고 해도 사회적 격차는 결국 해소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몇몇은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성공하여 빈곤층에서 벗어나 상위층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될 수 있을까?
양극화 해소의 출발점은 존 마시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 현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우가 낮은 일자리의 급여 수준을 일정 수준 확보해 주어야 제한된 일자리를 위한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도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며 여가를 즐길 수도 있는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청년실업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들도 결국 제한된 자리에 대한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처우 낮은, 노동에 대한 가치가 제대로 매겨지지 않은 일용직 혹은 비정규직에 속해 살아가게 될텐데,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공동체 차원이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며 아르바이트 전선에 있어야 하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대규모 건설사들이 앉아서 불로소득을 올릴 때 일용직으로 일하는 건설현장 노동자들, 힘겹게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해가는 자영업자들...우리가 돌아보고 보듬어줘야 할 이들이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교육이라는 맹목적 믿음에서 벗어나 실제 사람들이 있는 노동현장으로 눈을 돌리고 그곳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