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굿모닝팝스
- The imiation game
- 아이폰7
- 애플신제품
- 리더십
- 영어회화
- 아이폰
- 이미테이션 게임
- 르디플로
- 아이스에이지
- 애플워치
- Zootopia
- 이근철의 굿모닝팝스
- 주토피아
- 구스범스
- 독수리 에디
- Goosebumps
- 글쓰기
- 이근철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아이패드
- 인공지능
- 직장인
- 이근철의 굿모닝 팝스
- 지구대충돌
- 서평
- 조이
- 직장생활
- 애플
- 씀
- Today
- Total
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진보의 재구성 본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10월호에 실린 하승수 변호사의 '녹색이 진보통합에게'라는 기고문을 읽으며 나도 그와 비슷한 상상을 해 보게 된다. 하승수 님은 그의 글에서 진보의 재구성이 계속해서 실패해 왔던 이유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패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승수 님은 기존 진보의 재구성 논의가 (1) 성장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즉 탈성장에 대한 핵심적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2) 탈핵에 대한 논의를 중점을 두어 추진하지 못했다 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진보의 재구성 논의에서는 과연 누가 진보를 재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주체가 상실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의견에 매우 동감하고 있다. 기존의 진보 세력들은 이러한 논의 없이 기존의 정당들 혹은 운동 세력들이 하는 방식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하승수 님은 이 시대가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영혼을 갉아먹는 과도한 경쟁에서 벗어나 협동과 공생의 사회로 전환하는 것, 빈곤의 대물림을 끊고 인간다운 삶과 노동을 실현하는 정의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것, 그리고 전쟁과 폭력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이런 전환을 이뤄내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재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가 그의 글의 마지막에서 말한 것 처럼 "모든 것은 결국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기존의 진보 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들고 있지만, 그것을 결과를 놓고 보니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지 실제로 그 운동 세력에 속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승수 님은 이러한 전환을 위해 새로운 운동 세력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녹색당'이라는 것인데 과연 이들은 어떻게 진보를 재구성해 나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녹색당의 운동 혹은 활동을 지켜볼 생각이다.
하승수 님이 제안하는 진보의 재구성에서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기존 진보 운동의 실패 원인 중에서 상실되었던 주체들의 회복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기존에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즉 여서오가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와 소수자, 청소년 등이 참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진보의 재구성 논의는 이 주체들이 어떻게 정치사회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를 실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역이라는 변방도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 논의에서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하승수 님이 언급하는 방향은 전체적으로 올바른 전환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는 이것을 가로막고 있는 두꺼운 벽도 넘어서야 한다. 아마도 기존의 진보 운동이 실패했던 외부적 요인을 지적한다고 하면 이러한 벽들일 것이다. 기존의 시스템에서 이익을 보는 재벌, 고위 관료들, 기득권 정치인들이 바로 넘어서야 할 벽들이다. 이들을 이렇게 문자적으로 나열해 놓기만 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들 단어를 보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과연 기존에 소외되었던 정치 사회적 주체들의 이 거대한 벽들을 넘어설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기대를 해 본다. 아주 작은 주체들이 거대하고 두꺼운 벽을 넘어서는 방법이 있기는 할까라고 생각하다 보니 '개미'가 떠오른다. 우리 어린 딸아이의 손가락 눌림에서조차 숨을 거두는 미미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아무리 높고 거대한 벽이라도 넘어서서 벽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다른 자본: 제약 자본 (0) | 2016.03.19 |
---|---|
실패한 명박표 토목사업, 4대강 사업을 비판한다 (0) | 2016.03.19 |
최저임금은 슬픈 경제학이다 (0) | 2016.03.19 |
105년전 혁명가에게서 배운다 (0) | 2016.03.19 |
세계화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 (0) | 2016.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