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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회식에서 팀장이 건네는 술잔을 거부했던 신입사원

초원위의양 2019. 8. 4. 20:38

내가 입사했을 때 우리 부서 직원은 모두가 남성이었다.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를 매우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기계/제조업 분야에 속해 있는 회사여서 전체 여성 직원 비율이 낮기도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부서장이 여성 직원을 일부러 안받았다는. 아무튼 그 때 우리 팀은 남성들끼리 모여서 으쌰으쌰하는 분위기였는데, 군대와 공대를 거쳐 살아온 내겐 그곳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군대 같았던 회사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무엇이라 정의하기 힘들다는 신세대인 ‘X세대’들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기 시작한 지 몇 해 정도 지난 때여서 기존의 군대식 회사 문화가 어느 정도 변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X세대 남성들은 회사 문화를 바꾸기보다는 회사 문화에 편안하게 물들어 갔다. 공식적인 회의 중 불과 3~4년 선배들로부터도 ‘까라면 까는거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회사에서 회식을 하게 되면 어떤 분위기일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회식 장소는 대체로 고깃집. 붉게 타오르는 숯불 위에서 맛있게 구워지는 고기를 집어 먹으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술이다. 왁자하게 술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해 서로에게 서운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갈등을 풀기도 하고(물론 다시 싸우기도 했다), 그간 얄미웠던 다른 팀 사람들을 함께 욕하며 하나됨을 확인하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 동기들이 열 명 넘게 한번에 팀에 배치되었기에 당시 팀장도 팀원들도 기뻐했다. 후배직원들이 계속해서 들어오면 그만큼 팀은 커지고 팀원들에겐 자신들을 뒷받침해줄 자원이 든든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팀장은 나와 동기들이 팀에 배치되자마자 신입사원 환영회식을 열었다. 입이 고급이어서 맛있는 고깃집에만 간다는 팀장은 신입사원들에게 소고기를 먹여야 한다며 우리를 소고기집으로 데려갔다.

맛있었던 소고기

우리는 팀장을 중심에 두고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팀장이 자주가는 단골집이어서 그런지 고깃집 사장님은 우리쪽 테이블에 와서 특별히 맛있는 고기를 내왔다며 팀장에게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타닥타닥 불꽃을 날리는 숯불에 살짝 살짝 구워 육즙이 빠져나가기 전에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좀 (많이)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고기맛이 생각날 정도로 맛있기는 했다.

팀장은 우리 회사의 위상, 그 안에서 우리 팀의 역할, 신입사원들에게 거는 기대 등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고 받기 시작했다. 팀장은 자신의 소주잔을 옆에 앉은 동기에게 건네며 술을 따라준다. 그러면 잔을 받은 사람은 그 잔을 비운 후 다시 팀장에게 그 잔을 건네고 술을 따라 드린다. 이걸 함께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반복한다. 팀장은 엄청난 술고래였다.

사람들에게 돌아가던 잔이 드디어 내게도 왔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술을 마셔서 알딸딸해지는 상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몸이 술을 잘 받아내지 못하기도 했다. 예의 상 윗사람들이 따라주는 술을 한 두 잔 받을 수도 있겠지만 술자리에서 뭔가 강압적으로 술을 권하는 분위기가 싫어 학교생활 내내 아예 술을 마시지 않으며 지냈다.

대학 입학 때 흔하게 하던 신입생 환영식에서도, 학과 모임 때 선배들이 술을 따라줘도, 대학원 때 실험실 회식 모임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았었다. 하지만 회사는 학교와는 또 다른 진짜 사회가 아닌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만난 부서의 팀장이 술을 권하고 있었다. 난 팀장님이 권하는 술을 받아 마시는 대신 당돌하게도 “전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며 소주병이 아닌 사이다병을 내밀었다.

팀장은 내게도 술잔을 건넸다

아하하. 팀장님을 포함해 회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팀장님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교회를 다녀서 그러냐고 물었다. 자기도 유학시절 교회를 다녔는데 지금은 이렇게 술을 잘 마신다고 했다. 난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그래서 술을 안먹는 것은 아니었다. 차마 ‘강압적으로 술을 권하는 게 싫어서 안 마십니다’라고 대답하지는 못하고 몸이 술을 잘 받지 않아 못마신다고 했다.

이런 사소한 이유로 쉽게 물러설 팀장님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없다. 마시면서 익숙해지는 것”이라면서 다시 술을 권했다. 아...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팀장님이 수차례 권하는 술을 끝내 마시지 않았고 소주병 대신 사이다병을 재차 팀장님에게 내밀었다. 표정이 어두워진 팀장님도 사이다를 따라 주시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참으로 어색해졌다. 

옆 선배들도 그러는거 아니라 했지만 난 끝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도중에 태도를 바꿔 술을 마셔버리면 더 안될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싫은 건 그냥 안해버리는 성격이 융통성 제로인 모습으로 발현되었던 것 같다. 난 사회생활 하기엔 참 쉽지 않은 성격과 태도를 가진 신입사원이었다. 간을 배 밖에 빼놓고 다니는 신입사원. 팀장님은 운나쁘게 ‘또라이’하나를 만났던 것이다.

팀장님도 분위기를 더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게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고 옆 사람에게 술잔을 넘겼다. 하지만 그 시간 이후론 회식 시간 내내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잘 쳐다보지도 않았다. 술잔이 몇 번을 돌아갔던 것 같다. 그 때마다 팀장이 내미는 술잔은 나를 점프해 지나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는 말이 꼭 맞는 상황이었다.

이후 꽤나 술이 취한 팀장님은 내게 왜 술을 마시지 않느냐고 다시 한번 이유를 물었다. 이제와서 술잔을 받을 수는 없었기에 난 똑같은 대답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때 팀장은 신사적이어서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는 신입사원에게 막말이나 욕을 해대지는 않았다. 마지막엔 자기 팀원으로 들어왔으니 반갑다며 고기 한 점을 상추에 싸 내 입에 넣어주기까지 했으니 나름 좋은 사람이었다. 

팀장님은 이런 나를 보면서 시대가 참 좋아져서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 말도 맞다. 내가 시절을 잘 만나서 팀장이 권하는 술을 거부해도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 그 후로 나는 계속 비주류로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비주류일 뿐만 아니라 요즘 말로 ‘아싸’라고 할 수 있는 비주류가 되기도 했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자발적 아싸라고 해두자.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해서 비주류가 된 것은 아니다. 담당하는 일의 성과만을 가지고 회사생활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도 결국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다. 회식 혹은 술자리에선 알게 모르게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회식 자리에서 술잔만 오고가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잘 풀리지 않던 일들이 한 두 차례의 회식자리에서 풀리기도 하고, 협조가 되지 않는 부서와는 억지로라도 술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환영회식에서 팀장의 술잔을 거부한 사건으로 인해 이후에 내게 술을 억지로 권하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조금은 편하게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없어졌다. 이후 회사 생활에선 술자리 이외에 관계를 부드럽게 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들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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