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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14년 동안 퇴근하고 뭘 했나? 본문
14년째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퇴근하고 뭘 했지? 입사 초기엔 연애를 했고,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주로 아이들을 돌보며 함께 놀았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행복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뭐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내는 지혜롭게도 육아를 할 때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 전략을 제안했다. 1주일을 월수금, 화목토 등으로 나눠 육아를 맡는 것이었다.
부부가 같이 육아를 하는 것이 유익한 부분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는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 전략으로 육아를 했다. 이렇게 해서 아내도 나도 자신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었다. 나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 약 12시간을 쓰고, 1시간 정도 저녁식사를 하고, 6~7시간 정도 잔다고 하면 약 4~5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생긴다. 일주일에 대략 세 번 정도 이 시간을 쓸 수 있게 된다.
생각없이 인터넷을 하거나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등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내게 활력이 되는 일들을 하나씩 찾아서 하고 있다. 이 때 했던 일들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책 읽기와 서평기사 쓰기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읽기만 했었는데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니 읽었던 내용도 더 오래 기억에 남고 책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에 서평기사를 쓴 지 이제 만 3년이 되었다. 그동안 책을 통해 다양한 저자들과 그들의 삶을 만났고 저자들이 오랜 세월 고민했던 흔적들을 읽을 수 있었다. 회사와 가정 사이를 오가다 보면 세상 보는 시야가 좁아지는데, 책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이어지는 생각의 파편들을 가지고 놀면서 나와 내 주변 세계에만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독서의 유익을 말하는 이야기들은 넘쳐나니 더 말할 필요는 없을 듯.
독서로 뇌를 단련하며 경직된 사고에 갇히지 않으려 했던 것과 함께 몸도 단련했다. 6년전 십수년 동안 달리기를 하신 회사 선배님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그해 뜨거운 여름부터 달리기를 충동적으로 시작했다. 달리면 날숨과 들숨의 리듬에 집중하게 되면서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점차 사라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공백을 얻기 위해” 달린다고 했다.
달리면서 얻게 되는 이 비어 있는 상태는 매력적이다. 번민이 떠나고 생긴 이 여백에는 새로운 생각들이 순간순간 떠오른다. 주변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 읽었던 책, 해야 할 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들이 얼마간 빈 공간을 채웠다가 이내 사라진다. 달리지 않을 때 떠오르는 생각들이 여러가지가 뒤섞인 잡념이라면 달릴 때 만들어진 여백에 들어왔다 나가는 생각들은 한가지 원소로 이뤄진 물질같이 순수하달까?
달리기를 할 때와 비슷하게 수영을 할 때도 잡념이 사라진다. 멀쩡한 허우대와는 달리 수영을 할 줄 몰라 물에만 들어가면 허우적 대던 사람이었는데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해 수영을 배웠다. 물을 엄청나게 튀겨대며 발차기를 열심히 연습하던 초급 강습부터 시작해 1년 10개월을 꾸준히 배웠다. 기본 영법들을 모두 터득하고 이제는 각 영법에 필요한 세세한 자세들을 신경써가며 연습할 정도까지 실력이 늘었다.
물은 중력에 매여 움직이던 몸에 의외의 자유를 선물한다. 물론 수영을 막 시작한 초보 땐 느껴보지 못한 자유다. 항상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 불만스럽기도 한데 물에 나를 온전히 던져가면서 무엇인가에 구속된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때로는 저항을 힘으로만 극복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도 깨닫는다. 인생에서도 수영할 때 물을 타듯 저항에 유연한 대처가 필요할 때가 있다.
책, 달리기, 수영 모두 내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활력을 주었고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 확장시켜 주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라는 월간신문을10여 년 전부터 구독하고 있다. 주로 국제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사들-특히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심도있게 다루는-을 접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프랑스어로 된 기사들을 번역한 글들을 보면 가끔씩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럴 때면 프랑스어를 읽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를 그리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인가! 아니었다. 매달 배달되어 오는 신문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번역된 기사들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그냥 이렇게 한국판에 만족하며 신문을 보게 될 줄 알았다.
예기치 않게 사랑이 찾아오듯 5년 전 여름 휴가 때 캐나다 동부 퀘벡시티로 여행을 갔다가 프랑스어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유럽 분위기가 물씬 나는 퀘벡시티를 거닐며 주위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를 듣고 있으니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프랑스라는 나라의 낭만적 이미지로 인해 뭔가 더 매력있어 보이는 편견도 한 몫을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프랑스어를 배웠느냐고? 그렇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한단 말인가! 물론 열정이 있었다면 프랑스 어학원이라도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지에서의 갑작스런 충동은 나를 어학원까지 이끌지는 못했다. 2년 여 정도 시간이 더 흘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가끔씩 들르던 인터넷 까페에 올려져 있는 프랑스어 기초문법 강좌 홍보가 눈에 들어왔다.
강좌 안내에는 일주일에 한번 2시간 정도를 3개월만 투자하면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문법을 공부하면서 생 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물론 청소년용) 원서를 읽는다고. 와..진짜? 프랑스어가 이렇게 만만한 언어였다니.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일단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정시’ 퇴근 후 강의장소까지 거의 2시간이 걸렸지만 새로운 언어와 그 언어에 깃든 문화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선생님은 첫날부터 빡빡하게 수업을 진행하셨다. 정말 프랑스어를 하나도 못하는 나같은 사람부터 알파벳 정도는 아는 분, 대학 때 교양 강의를 들었던 분 등 수강생 수준이 모두 달랐다. 다행히 기준은 프랑스어 생초보에 맞춰서 수업을 해주셨다. 아, 베, 세, 데... 영어와 알파벳은 거의 같은데 발음은 영 딴판이다. 게다가 이상야릇한 콧소리와 가래 뱉는 것 같은 소리, 또 결코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입모양과 혀모양.
다행히 완전 초보 수준에 맞춰주셔서 그럭저럭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을 들을 땐 정말 문법과 문장구조를 배우고 몇몇 단어만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린왕자>를 어설프게라도 읽을 수 있었다. 신기했다. 또 신기한 점은 우리 나라에서 프랑스어가 매우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 아파트에서부터 빌라 이름, 크고 작은 까페와 식당들 간판에 프랑스어가 엄청 많다. 프랑스어 간판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래서 지금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느냐고? 절대 그럴리 없다. 언어는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프랑스어 기본을 공부하고 난 이후엔 그 자료들을 기초로 스마트폰에 있는 어학어플로 여전히 계속 프랑스어를 연습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도 꿈꾸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원어로 수월하게 읽을 수는 없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건 나를 또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간다.
고용 보장이 안되는 시대. 이젠 퇴직 후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나는 퇴근 시간 후에 이런 일들을 하고 있을까? 뭐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가보다.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 지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퇴근 후 자유시간까지 앞으로 먹고 살 걱정에 쓰고 싶지는 않다. 단지 지금 내게 활력과 재미를 주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넓혀주는 것들을 하며 흥이 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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