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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지방선거 승리가 진보의 승리? 그건 착각입니다 본문
2016년 11월 스마트폰 뉴스 알림으로 온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서 ‘뭐야…트럼프네? 트럼프야..’라고 탄식할 때 영화 <타짜>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서로의 손목을 건 도박판에서 아귀(김윤석)가 들고 있던 사쿠라 화투장만큼이나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 참여해 후보자로 결정될 때까지도 그가 대통령까지 되리라는 예상을 거의 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되었을 즈음 강준만 교수의 <도널드 트럼프: 정치의 죽음>이란 책을 통해 트럼프가 지지를 받게 된 당시 미국의 정치 상황과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충격이 더욱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한당 보수 더민주 진보? 아니올시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크 릴라가 쓴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정체성 정치를 넘어>를 보면 스스로 진보진영에 속한다고 한 저자 역시 트럼프의 승리에 충격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는 책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최고의 정치적 스캔들’이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크게 보수와 진보로 나눠진 미국의 정치 환경에서 진보진영이 왜 실패를 거듭했는지 진단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집단들의 싸움에도 신물이 나는데 무슨 미국 정치얘기까지 알아야 하나 할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6월 한국의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으니 진보가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국에선 진보가 승리했다라는 단순한 도식에 빠지기 쉬운 시기에 마크 릴라의 책은 한국의 진보정치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공화당-보수, 민주당-진보로 구분할 수 있는 미국과는 달리 사실 우리나라에선 자한당-보수, 더민주-진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한당을 보수라 하는 것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을 모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정당 역사와 지형을 고려할 때 더민주는 보수에 가깝고 진보진영이라 할 수 있는 그룹은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녹색당 정도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선거에서 녹생당 후보 몇몇이 약진하며 선전했고 최근 정의당 지지율이 10%를 넘었다는 고무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지만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냉정하게 보면 진보정당들은 전체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 진보진영의 실패를 진단하고 향후 권력 획득을 위한 전략을 제안한 마크 릴라의 책은 우리 나라 진보진영에서도 참고할 만한 점들이 있습니다.
미국 진보진영의 실패 원인
마크 릴라는 20세기 미국 정치사를 ‘연대, 기회, 공적 의무’로 상징되는 1970년대까지의 ‘루스벨트 체제’와 ‘자기신뢰, 최소정부’로 상징되는 1980년대부터의 ‘레이건 체제’로 구분합니다. 저자는 루스벨트 체제 이후 미국 진보주의자들이 ‘민중의 감정을 일으키고 신뢰를 얻는 일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고 진단합니다.
미국 진보진영의 패배 원인으로 저자가 지목한 것은 ‘정체성 정치’입니다. 정체성 정치는 초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등 민중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자기존중과 자기정의를 내세우는 사이비정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고 마크 릴라는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진보주의자들이 진보적 정치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치를 말하는데, 주로는 흑인, 여성,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정치를 뜻함)
“민주주의에서 소수자들을-공허한 인정과 찬양의 몸짓에 머물지 않고-유의미하게 돕는 유일한 길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장기적으로, 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메시지로 그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 진보주의는 정반대의 일을 한다.”(16쪽)
‘유일한’, ‘정부의 모든 층위’와 같은 극단적인 표현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선거 승리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는 것과 민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우리 나라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뿐 아니라 마크 릴라가 말하는 보수진영의 이데올로기(레이건주의)가 오랫동안 미국인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이건 체제속에서 미국 보수진영은 대다수 미국인의 삶과 사고 방식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미국인들의 관심이 사회의 필요보다는 개인의 필요와 욕망, 자유와 권리 추구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수진영은 간파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점을 저자는 언급합니다.
레이건 당시 공화당은 주 선거, 지방선거, 연방의회 선거,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해 당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지역 수준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대신 전국적 미디어에 집중하면서 4년마다 있는 대통령 선거에 집중했습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미국 진보진영의 패배 원인을 찾았습니다. 민주당이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미국 민중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점을 보면 저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기층 민중과의 분리,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의무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 우선시, 사회의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정치적 비전의 부재를 진보진영이 가졌던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반면 대중 선동에 탁월한 트럼프는 인종차별, 여성혐오, 폭력 조장, 언론 및 법 경멸 등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지지자를 확보했습니다. 그만큼 진보진영이 민심을 잃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승리를 위한 진보진영의 전략 제안
보수진영에 내준 권력을 되찾기 위해 마크 릴라는 운동정치보다 제도정치, 목표없는 자기표현보다 민주적 설득, 집단 정체성이나 개인 정체성보다 시민의 지위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도 정치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선거에서의 승리가 필수적이라고도 주장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운동 정치의 그 어떤 성취도 제도 정치를 통해 무효화될 수 있다”(113쪽)는 말에 담겨있습니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들끓는 분노와 파괴 욕구를 감안할 때,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기타 소수자, 여성, 동성애자를 보호하기 위해 최근에 쟁취한 제도들의 존속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선거 승리다. 워크숍과 대학 세미나는 그 제도들의 존속을 보장하지 못한다. 온라인 동원, 플래시몹, 항의 시위, 일탈 행동,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직시하라! 운동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진 참가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시장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주지사들, 주 의원들, 연방의원들이 필요하다.”(114쪽)
극우정당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자한당의 방해로 다양한 운동으로 모이는 변화의 동력이 법제화로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일맥상통하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운동 정치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미국 진보진영에만 해당되는 주장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엔 여전히 다양한 사회운동을 통해 성장한 운동가들이 진보정당들과 연합하여 제도권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전략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 진보정당들은 다수의 지지를 얻는데 계속해서 실패해 왔습니다. 일정 부분은 선거제도의 문제도 있지만 그것으로 지금까지의 패배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진보정당들 사이의 ‘정체성’ 다툼과 그로 인한 분열, 민중들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우선시하는 태도 등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에서 정치를 낚시에 비유한 대목을 읽으며 우리 나라 진보정당들에도 저자가 말한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의 모습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의 낚시 방법은 물가에 서서 물고기를 향하여, 바다가 물고기의 역사적 잘못으로 판정한 바들을, 그리고 바다 생태계를 위하여 물고기가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을 필요성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물고기들이 집단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물가로 올라와서 뜰채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121쪽)
우리 나라 진보정당과 진보주의자들은 초기 운동때의 단결력과 결속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선거때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정파간 갈등을 반복해서는 지금 이상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운동정치의 시대가 끝났다는 마크 릴라의 선언은 어쩌면 우리 나라 진보정당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일지 모릅니다. 시민사회의 운동성과 조직력이 향상된 촛불의 시대엔 진보정당들은 정파의 벽을 넘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시민의 지지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책을 통해 마크 릴라가 소개한 진보진영에 대한 문제 진단과 대응책을 우리 나라의 진보 정치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돌아볼 만한 시사점들은 충분합니다. 진보적 철학을 가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진보의 승리라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크 릴라가 한 것처럼 실패의 원인을 성찰하고 우리나라 진보의 미래 전략을 세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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