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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여성의 성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자! <이브 프로젝트> 본문
보지: ‘음부’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
음부: <의학> 남녀의 바깥 생식 기관. 주로 여성의 것을 가리킨다. -표준국어대사전-
글의 첫머리에 소리내서 읽기 쉽지 않은 단어 ‘보지’를 보시고 당황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브 스트룀키스트라는 스웨덴 출신 작가가 낸 <이브 프로젝트: 페미니스트를 위한 여성 성기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어째서 여성 성기의 일부를 지칭하는 단어가 국어사전에서조차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라는 정의를 갖게 된 것일까요?
“우리 문화의 이상한 점은 여성의 샅에서 성기가 외부로 드러나는 부분을 언급하거나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보지(외음부)’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하기를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36쪽)
“우리 문화에서 여성성기의 외형은 대체로 표현할 때 지워집니다. 완곡어법과 은유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 성기의 외부를 지칭합니다.(중략) 여성성기의 외부를 지칭하는 단어, 보지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보지를 지칭하고 싶을 때도 사람들은 생각없이 ‘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39-40쪽)
여성 성기, 특히 외부로 드러나는 부분을 말하는 보지를 말하는 것이 꺼려지는 건 우리 나라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성평등 선진국이라 불리는 스웨덴 출신인 작가도 몇 번을 반복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요. 작가의 이름만큼이나 낯선, 그래서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들에 대해서 알려주는 이 책. 그동안 저를 가두고 있던 편견에 균열을 내서 금기를 깨볼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책입니다.
여성 성기에 대한 편견이 생긴 이유
저자는 스웨덴 사회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성별만이 존재하고, 두 성별이 성기삽입을 표현하는 칼과 칼집처럼 해부학적으로 상호보완적이어야만 한다’고 믿는 것 같다고 비판합니다. 우리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현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여성 성기에 대한 편견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저자는 여기에 기여한 대표적 인물들 일곱을 소개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성기를 거쳐 대물림된다고 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5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노예로 데려온 여성 사르키 바트만을 커다란 엉덩이와 소음순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나체로 전시했던 주르주 퀴비에 남작은 2위. 자위가 자궁암, 뇌전증, 정신착란과 같은 정신적 육체적 이상의 원인이라고 위생지침서에 기술해 여성 자위를 막으려 했던 존 하비 켈로그(씨리얼 만든 그 켈로그입니다)박사는 7위. 나머지 순위와 인물들은 책에서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들이 한 일들은 정말 참담합니다.
여성 성기에 대해 기행적 관심을 보였던 이 남자들로 인해 만들어진 편견은 현대사회에도 여전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고대 신화와 2-3만년전 구석기 및 신석기 시대 유물들, 중세 성당이나 도시 입구에 있었던 다리벌린 여성 나체 동상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여성 성기를 부정 혹은 금기시하는 문화는 오랜 인류 역사에 비한다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려줍니다.
“자신의 보지를 드러낸 여성 조각상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크로네시아의 ‘딜루카이(Dilukais)’는 나무 조각상으로, 다리를 벌리고 양손은 넓적다리에 올려둔 채 거대한 삼각형의 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조각상들은 나쁜 기운을 쫓고자 건물 현관 위에 걸려 있었습니다.”(51쪽)
저자의 소개를 통해 여성 성기에 얽힌 역사를 읽고 이해하게 되면서 처음엔 소리내서 발음하기 어려웠던 보지라는 표현이 이제는 조금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그만큼 여성 성기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던 편견도 수정이 된 것 같습니다. 편견이 반영되어 있는 표준국어대사전 내용도 수정되어야 하겠습니다.
여성 오르가슴에 대한 왜곡과 진실
책의 전반부에서 강한 충격을 받아서인지 후반부에서 다룬 여성의 오르가슴과 생리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도 비교적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저자는 인류가 가진 편견을 정확하게 짚어주며 그것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합니다.
계몽주의 말기부터 시작된 여성 성기가 열등하다는 개념은 18-19세기로 이어지며 심화되다가 “성인에게 자위나 음핵자극은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것이며, 여자는 오로지 남자와 교합하여 질에 삽입하는 것으로만 흥분하고 만족해야 하며, 또한 이것만이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하고 건강한 성생활이라고 단언”했던 프로이트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습니다.
다행히도 1960년대 말부터 과거의 주장들에 반하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음핵이 여성의 섹슈얼리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했던 마스터스와 존슨, G-spot이라는 질 입구 안쪽 부위를 자극하면 오르가슴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발표했던 베벌리 휘플, 모든 종류의 오르가슴은 음핵복합체에서 온다는 결론을 내린 호주 로열멜버른 병원의 헬렌 오코넬 등이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결과들에도 불구하고 오르가슴으로 상징되는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 저자는 개탄합니다. 한 번 고착된 편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책과 같은 신선한 충격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현대의 성기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19세기와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성 정체성은 해부학에 매달려 있고, 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두 성기는 서로 대칭하며 상호 보완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중략)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성의 오르가슴과 섹슈얼리티에 관련한 모든 논의는 언제나 육체와 남성의 오르가슴과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빗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먼저 남성의 섹슈얼리티의 하위에 있다고 여겨졌고, 그 다음에는 그와 반대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평등한 개체로서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겁니다.”(83-84쪽)
금기를 깨고 대화를 시작해야
저자는 금기시되는 또 하나의 주제, 생리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월경을 신성하게 여겨 숭배하기까지 했다는데 가부장적 종교가 등장하면서 월경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군요. 저자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생리대 광고가 상쾌, 순수, 청결 등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이 생리가 더러운 것이라는 관념을 강화시킨다는 것도요.
“월경이 신비로운 현상이나 존재론적이고 창조성과 근접한 경험으로 다뤄지지 않고, 우리 문화에서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것은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중이 공개적으로 월경에 대한 경험을 서로 교환하고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죠.”(134쪽)
한국사회에서 성, 특히 여성의 성에 대해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을 가지고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금기시되는 주제들 만큼이나 이 책 자체를 부정하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자연스럽게 주입받아왔던 여성 섹슈얼리티를 왜곡한 관념들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저자의 글과 그림을 통해 여성을 억압해 온 역사에 대해서도 다시금 환기할 수 있었습니다. 남성들이 기존의 왜곡된 틀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이 억압의 역사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해방은 남성해방이기도 합니다. 스트룀키스트가 제기한 문제를 가지고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 남성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편견을 해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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