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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저항의 태도를 배우다 본문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일상적인 먹을 것과 탈 것에서부터 학업, 결혼, 직장과 같은 중요한 진로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에서 선택을 합니다. 내 생각대로,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선택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부모나 가까운 주위 사람들의 기대, 당연히 해야만 할 것 같은 사회적 압박 등에 떠밀려 원치 않는 길에 들어서기도 합니다.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습니다. 특히 상사의 지시를 따라야하는 직장 혹은 조직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나를 고용한 사람이나 조직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처음 몇 번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거부가 계속되면 결국 고용된 곳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직에 속해 있는 많은 이들은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상례라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불쑥 불쑥 나타나곤 합니다. 이와 같은 저항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실제 인물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이기는 하지만 왠지 실제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이 사람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그는 바로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허먼 멜빌이 쓴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입니다. 필경사는 복사기가 없던 시절 문서를 베껴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용주의 지시를 거부하는 이상한 직원
소설 속 화자는 부자들을 상대로 그리 까다롭지 않은 일을 하며 사는 평범한 변호사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용했던 필사원들 중 가장 ‘이상했던’ 사람을 소개하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변호사는 이미 세 명의 필사원을 두고 있었는데 법원의 서기직을 맡게 되면서 업무가 늘어나 또 한 명의 필사원을 고용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모습을 한 바틀비였습니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27쪽)
이렇게 일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변호사는 필사한 문서를 검증하는 업무를 처음으로 바틀비에게 지시합니다. 하지만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매우 상냥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고용주인 변호사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요. 변호사는 바틀비의 태도에 놀라 당황하다 다시 한번 지시하지만 이 필사원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똑같은 대답만 내뱉고는 하던 일만 계속합니다. 제가 소설 속 변호사였다면 당장 그를 붙들고 이유를 확인한 후 타당하지 않다면 아마도 그를 해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틀비의 태도에 “최소한의 불안, 분노, 성급함, 무례함”이 없었기에 변호사는 잠시 물러나 어떻게 할 지 생각합니다. 그러다 바쁜 일을 처리하느라 이 문제는 잠시 접어둡니다. 며칠 뒤 바틀비가 필사한 문서들을 검증하기 위해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다시금 요청합니다. 그러나 바틀비의 대답은 이전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이유는 말하지 않은채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바틀비의 행동은 변호사뿐만 아니라 동료 필사원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죠.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그 저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성격이 비인간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의 소극성이 전혀 무해하다면, 전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경우 자신의 판단력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명되는 것을 상상력으로 관대하게 추론하고자 애쓸 것이다.”(38쪽)
변호사는 자신이 고용한 바틀비의 태도에 전에 없이 당혹스러웠지만 바틀비의 “안정성, 어떤 유흥도 즐기지 않는 점, 부단한 근면, 놀라운 침묵,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는 몸가짐”에 마음을 풀고 맙니다. 심지어 무단으로 자신의 사무실에 기거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바틀비의 “온순한 뻔뻔함”에 두손을 듭니다. 변호사는 바틀비라는 기행적 인물에게 인간으로서의 유대감과 연민을 느끼며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변호사의 관심에도 바틀비는 역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변호사의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변호사와 다른 동료들은 바틀비의 이상한 행동을 보며 불만스러워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바틀비의 말투를 닮아갑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택한다’라는 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놀랍니다.
거부의 태도는 어떠하면 좋을까?
일반적인 직장에서 바틀비와 같은 기행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소설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실제라면 당장 쫓겨날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항 혹은 거부하는 태도에 대해선 배워볼 만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고용주와 동료들도 영향을 받았던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택한다’라는 말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선택의 자기 주도권을 표현한다고 해야할까요.
저항할 것인지 순응할 것인지도 결국엔 자신의 선택입니다. ‘권력자의 외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말을 기업이나 행정기관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지시에 맞섰을 때 입게될 피해가 두려울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자의 요구 수용으로 얻게될 이익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항하기로 ‘택했다’면 바틀비의 ‘온순한 뻔뻔함’, ‘단호하되 성급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은’ 태도를 배워봄직 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바틀비의 고용주였던 변호사가 피고용인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무실을 떠나라는 고용주의 통첩에도 바틀비는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변호사는 응당 취해야 할 조치를 한 것임에도 자신의 처사를 꺼림직해 할 정도로 바틀비의 태도는 자신의 선택에 초첨이 맞춰져 있습니다.
“내 처사는 변함없이 분별 있는 듯했지만, 이론적으로만 그런 것 같았다. 실제로 그 결과가 어떨지, 그것이 문제였다. 바틀비가 떠나리라고 가정한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가정은 결국 순전히 나 혼자 정한 것이며, 바틀비 자신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핵심은, 그가 나를 떠나리라는 가정을 내가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하는 편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정보다는 선택과 관계있는 사람이었다.”(63쪽)
이 책을 옮긴 공진호님은 바틀비가 하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게 아니다…어떤 행위를 부정한다기보다, 그 행위가 기정사실화된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즉 ‘하지 않음’의 가능성과 이에 대한 선택, 이 두 가지를 긍정하는 것이다.” 조직 안에 있으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에 바틀비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돕니다.
필경사 바틀비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저처럼 바틀비의 입장에서 기존의 상식에 따르지 않겠다 거절하는 말씨와 태도를 보며 통찰을 얻을 수도 있겠고, 이유를 알 수 없이 지시를 거부하는 부하직원을 둔 변호사 입장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혼자 읽기보다는 독서 모임 등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다양한 관점으로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기에 매우 적합한 소설입니다. 다음 번엔 변호사 입장에서 읽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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