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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20세기의 베토벤 쇼스타코비치가 묻다 ‘예술은 누구 것이지?’ 본문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좌파척결’이라는 국정철학을 실행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각에 반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압박하고 심지어 퇴출시키기까지 했던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민주 국가라는 곳에서도 이런 일이 자행될 수 있었는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공산당이 통치하던 구 소련에서는 어땠을까요? 블랙리스트 시대를 끝내기 위해 정치권력과 예술, 그리고 예술인들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안성맞춤인 소설이 한 권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줄리언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입니다.
저자는 구 소련의 폭압적 독재하에서 활동했던 천재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자서전이나 평전이 아닌 소설로 재해석했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지만 줄리언 반스는 쇼스타코비치를 공포의 시대에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 타협하기도 하고 저항을 하기도 했던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서로 극단이라고도 할 수 있을 한국의 보수정권도 스탈린 치하의 공산당도 왜 예술가들에게 유독 집착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줄리언 반스가 ‘인간 영혼의 기술자들’이라고 표현한 예술가들의 꿈 혹은 환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영혼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류까지는 아니라도 온 나라의 미래가 다시 만들어지고 있던 시절에는, 모든 예술이 마침내 하나의 영광스러운 공동 프로젝트로 합쳐질 것처럼 보였다. 음악과 문학과 연극과 영화와 건축과 발레와 사진은 사회를 반영하거나 비판하거나 풍자할 뿐 아니라 사회를 만드는, 역동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룰 것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정치적 지시도 없이 오직 그들의 자유의지로 동료 인간들의 정신이 개발되고 꽃피우도록 도울 것이다.”(63쪽)
권력의 요구에 순응? 타협? 저항?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며 소련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던 쇼스타코비치. 그의 작품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당의 기관지와도 같은 매체로부터 갑작스런 비난을 받게 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비난에 대항하고자 권력층에 있던 후원자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권력자들은 그의 작품들을 모두 금지해버리는 등 압박을 가해 쇼스타코비치를 무릎 꿇게 만듭니다.
하지만 얼마 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5번을 통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당당히 일어섭니다. 줄리언 반스의 관점에 따르면 권력층은 쇼스타코비치가 이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대중적으로 성공한 그의 음악을 이전처럼 뜸금없는 비난으로 더럽힐 수는 없었습니다.
“그 표현은 또한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이들이 그의 교향곡에서 자기네가 듣고 싶은 것을 듣게 해주었다. 그들은 종결부의 끽끽거리는 아이러니를, 승리의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승리 그 자체만을, 소비에트 음악, 소비에트 음악학, 스탈린 체제의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을 향한 충성스러운 지지만을 들었다.”(87-88쪽)
체제의 인정을 받은 쇼스타코비치는 뉴욕에서 열리는 문화 과학 세계 평화 회의에 소련 대표로 참석을 하게도 되지만 이는 예술가로서의 인생에선 굴욕이었다고 반스는 상상합니다. 이 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에 대한 경멸감을 느꼈으며 완벽한 덫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권력층은 그와 그의 작품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한국의 보수정권 당시 이와 같은 평을 받는 예술가가 있었다면 쇼스타코비치와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는 가망 없는 실패자가 아니며, 적절히 지도를 받기만 한다면 명쾌하고 사실주의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최고위층의 견해였다. 레닌이 천명했듯이 예술은 인민의 것이었다. 영화는 오페라보다 소비에트 인민에게 훨씬 더 쓸모 있고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이제 적절한 지도를 받았고, 그 결과 1940년 그의 영화음악에 대한 분명한 보상으로 붉은 노동기를 받았다. 그가 옳은 길을 계속 걸어간다면, 이는 틀림없이 앞으로 주어질 수많은 영예의 시작이 될 것이었다.”(112쪽)
예술가의 무기, 아이러니?
저자는 쇼스타코비치가 권력층의 요구에 마음속으론 진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죽음이 눈앞에 있기에 위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러니’로 진실을 위장했다고 쇼스타코비치를 변호하는 느낌입니다. 소련의 독재체제 하에선 받아들일 만한 관점이지만 이것을 한국의 보수정권에 충성했던 예술가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했으니까요.
“아이러니는 파괴자와 사보타주 주동자들의 언어로 통했기에, 그것을 쓰면 위험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는-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중략) 아이러니가 그의 음악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잘못된 귀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중한 것을 숨겨서 통과시킬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음악이 남아 있는 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암호로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127쪽)
진정한 예술가라면 이렇게 좀이 쑤시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충분한 공포 아래에서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어야 했지만 그 안에서도 진심을 어떻게든 말하려던 소련의 예술가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입맛에 들기 위해 충성경쟁을 벌였던 예술가의 가면을 쓴 자들이 대조됩니다. 한국의 보수정권 하에서 “예술이 권력에 혀가 묶이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진실을 말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이 진정한 예술가들일 것입니다.
줄리언 반스가 상상한 쇼스타코비치가 살아서 우리 나라의 블랙리스트 예술인들 소식을 들었다면 아마도 부러움과 존경을 표했을 것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권력층의 집요한 압박에 자신이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입당이라는 선을 넘으며 자아에 “금이가고 쪼개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가 마주한 것은 자살에 필요한 자존감마저 잃게 만드는 정도의 공포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쇼스타코비치가 시대의 소음에 맞설 수 있는 최대의 무기는 아이러니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어서서 권력층에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그들의 용기와 도덕적 고결함을 존경했다. 그리고 가끔은 그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는 이유 중에는 그들이 죽어서 살아 있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점도 있었으므로, 복잡한 문제였다. (중략) 공포 속에 한편으로는 제거되어 버리고 싶은 가슴 두근거리는 욕망이 뒤섞였다. 더하여 덧없는 용기의 허영도 느꼈다.”(161쪽)
자, 예술은 누구의 것이지?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중략)
그는 모든 이를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가장 잘 즐겨듣는 이들을 위해서 작곡을 했다. 들을 수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한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135-136쪽)
어쩌면 이것은 소설 속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통해 줄리언 반스가 독자들에게도 묻고 싶은 물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나라의 두 보수정권 하에서 거의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던 만행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과 더불어 당사자들인 정치권력층, 예술가들, 그리고 예술을 향유하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충분히 묻고 답해야 하는 물음이라 생각합니다.
좌파척결을 외치며 예술가들의 혀를 묶으려 했던 일부 권력자들은 쫓겨났지만 그들을 옹위하던 세력들은 여전히 뻔뻔한 모습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열과 성을 다했던 자칭 예술가들도 의상을 다시 갈아입고 새로운 권력의 눈에 들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을 것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표현을 빗대어 “우주의 기운이(원문은 마법과 종교가) 지배하던 때에는 괴물들에게도 양심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폭군이 사라지고 시민의 지지를 받는 권력의 시대라고 소음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현대 폭군들의 내면으로 뚫고 들어가 겹겹이 파고들어보라. 그러면 결은 바뀌지 않았고, 화강암 위를 화강암이 덮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양심을 찾아낼 동굴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236쪽)라고 했던 저자의 말처럼 촛불의 정부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폭군들이 곳곳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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