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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혀준 얇은 만화책 본문
여행을 할때면, 특히나 그곳이 외국의 어떤 곳이라면, 그곳이 막연히 좋아보입니다. 여행지와 내가 사는 곳이 한없이 대비되면서 그곳은 더욱 낭만적으로 보이죠. 건물벽에 있는 낙서, 지나는 사람, 창 밖 풍경, 심지어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마저도 낭만적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아, 이런 곳에서 살고싶다’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낯설음 혹은 익숙하지 않음의 효과이고 뻔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익숙한 곳을 과감하게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저를 사로잡습니다. 더군다나 흉물스러울 수 있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도 멋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낭만의 도시 파리를 가진 프랑스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박윤선이라는 낯선 이름의 작가가 쓴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라는 제목의 얇은 만화책을 동경 가득한 시선으로 펼쳤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놓았을지 기대하면서.
‘와, 잘 그렸네!’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흑백 그림에 잔잔하게 읊조리는 듯한 느낌의 짧막한 글이 삽입된 100페이지 남짓의 책입니다.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의 낭만적인 이야기는 없었고, 작가가 프랑스에서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사건들,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잔잔한 시내가 흐르는 듯 이어져 있습니다. 그림이 예쁜 것도,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작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박윤선 작가는 한국에서 일러스트를 그리며 닥치는 대로 일하던 중 2년 동안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집과 작업실을 주고 작업만 하는)에 선정되어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2년간 만화책 작업을 하는 동안 남자 친구가 생겨 프랑스에 더 있고 싶어졌고, 프랑스 출판사와의 계약과 남자친구와의 빡스(PACS: 두 이성 또는 동성 간의 시민 연대 계약, 배우자 자격)을 통해 프랑스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자신이 다녔던 프랑스어 교습소, 동네 거리와 여행지, 자주 가는 까페 등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저자는 잘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며, 그 세계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교습소에서 만났던 아르메니아인을 통해 아르메니아라는 낯선 나라와 20세기 초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역사를 아주 조금이지만 알게 되었습니다. 제겐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르완다 민족간 학살과 콩고 전쟁도 교습소에서 만난 아프리카 출신 수강생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까페에서 만난 ‘하르키’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알제리. 알제리인들은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때 여러가지 사정으로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알제리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하르키’라고 부릅니다. 반전 여론으로 1962년 알제리는 독립하는데 프랑스는 하르키들을 데려가지 않았고 알제리에 남겨진 약 7만명의 하르키들은 거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프랑스로 이주할 수 있었던 약 6만명의 하르키들도 수용소에 감금당했다고 합니다.
하르키는 우리로 치면 일본군으로 복무하며 독립군을 때려잡던 조선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어느 카페에서 일본군이었던 한국인 노인을 만난다면 하르키 할아버지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다고 한 저자와 같이 반응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한걸음 물러서 객관적으로 하르키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아 아직은 저자처럼 대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프랑스어 수업시간에 작가는 또 시리아인 피부과 의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눈은 이번에도 이 의사의 나라에서 일어났던 내전으로 향합니다. 수니파, 시아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서방 국가들 간의 관계에서 이슬람 국가(IS)의 탄생, 난민 문제, 파리와 벨기에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으로까지 시선이 이어집니다. 끊이지 않는 테러와 전쟁, 잔인한 복수를 보며 떠오른 작가의 생각과 물음들이 제가 생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브뤼셀 테러를 보자 갑자기 체첸과 러시아가 떠올랐다. 나는 사실 그곳 이야기를 잘 몰랐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중략) 체첸이 받는 탄압도, 체첸이 벌인 테러도 끔찍했다. 그 모든 일들이 생각보다 최근에 벌어졌음에 놀랐다. 내가 잊고 살았을 뿐이구나.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면 그 테러들은 정당한가? 그렇다고 민간인을 죽여도 되나? 그럼 군인들끼리 죽이는 건 괜찮은가?(중략) 몇 달간 벌어진 테러들을 보며, 이건 세상이 망할 징조라고, 정말 곧 망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은 늘 그 꼴이었구나. 그러니 당장 끝장나진 않겠구나 싶었다.”(83쪽)
외국에서 살면 으레 그렇듯이 작가도 처음엔 한국을 알리고 인정받으려고 했었으나 점점 한국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권퇴진 시위가 정점에 이르던 2016년 말엔 프랑스 사람들은 “그래도 한국이 낫지 않아요? 우리 프랑스 사람들은 다 무관심해서 투정만 부리지, 진짜 물러나게는 못할걸?”이라며 말을 시키곤 해 저자가 다시 한국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자는 탄핵반대 집회 사진들을 보며 국가와 애국에 대한 생각도 적어내려갑니다.
“그들 입에서 ‘애국’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묘하게 웃겼다. 나는 내가 애국자라 생각하지 않으니, 저리 되진 않겠지? 꼭 그 ‘애국’의 문제만은 아닐 테니, 나중 일을 누가 알까. 그러다 문득 ‘국가’란 내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이상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국가와 관련된 것들이 그렇게 거슬렸나 보다.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피해 다닌 것 같다. 여전히 국가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적어도 애증은 떼고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애꿎게 미워한 다른 관계들도.”(93쪽)
나라를 떠나 있어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볼 수 있는 박윤선 작가가 부럽기도 합니다. 부정한 정권을 바꾸는 저력을 가진 시민과 여전히 탄핵을 부정하며 애국을 외치는 시민,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시민과 사드로는 부족하니 핵을 한반도에 다시 들이자며 핵핵대는 시민 등이 얽혀 공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뉴스들을 접하면 기대와 분노/혐오로 제 마음도 복잡해집니다. 그럴때면 저자처럼 애증을 떼내고 이 사회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에 더해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세계’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또 선진국 혹은 강대국 중심인지도 깨닫습니다. 작가가 책에서 짧게 짧게 소개한 아르메니아, 르완다, 콩고, 알제리 등 오래 전 비극적 역사들과 최근의 시리아 내전, 유럽 등지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들을 자세히 찾아보면서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은 확장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관조하는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이 책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너무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져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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