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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다윈도 인정했던 '경쟁하지 말고 서로 도우라'는 자연법칙 본문
'혹독하고 무자비한 생존경쟁', 동물세계에서나 인간사회에서나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져버린 개념인 듯 합니다.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을 종교처럼 받들고 있던 세계에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아나키즘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표트르 A. 크로포트킨(Kropotkin)입니다.
크로포트킨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책에서 생존경쟁이라는 자연법칙에 반하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며 동물과 인간의 삶을 유지시켜왔던 다른 측면의 자연법칙을 소개합니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며 저자는 우리가 다윈의 생존경쟁 가설을 어떤식으로 오해했는지 알려줍니다. 이전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다윈의 생각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라는 책에서 '생존 수단 확보를 위한 개체들 간의 투쟁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투쟁이 어떻게 협동으로 대체되는지, 이로 인해 생존을 위한 최적 조건을 어떻게 발전시키는지'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이 때 “적자는 신체적인 힘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교활한 종이 아니라 강한 개체들과 약한 개체들이 모두 함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연합해서 서로 돕는 법을 익히는 종이라는 것을 암시했다."는군요.
하지만 "다윈의 추종자들은 동물세계를 반쯤 굶어 서로 피를 탐하는 개체들 간의 끝없는 투쟁의 세계로 여기게 되었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라야 하는 생물학적 원리로까지 삼았다”(24쪽)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크로포트킨은 자연이 도살장인 것만도 아니고 조화와 평화가 깃들어 있는 곳만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상호부조'라는 다른 한쪽의 자연법칙을 내세웁니다.
“다양한 부류의 동물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많은 전투와 몰살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종에 속하는 동물 혹은 적어도 같은 집단에 속하는 동물 사이에서는 상호지원과 상호부조, 공동 방어도 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한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호투쟁이 자연법칙이라면 사회성 역시 자연법칙이다.”(26쪽)
저 역시 이제껏 자연계는 당연히 생존을 위한 무한 투쟁을 통해 유지되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식하지도 못한채 다윈주의자들의 생각을 당연시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개미나 벌과 같은 아주 작은 동물들에서부터 독수리같은 맹금류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다양한 포유류에서부터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홉스 식의 투쟁'을 따르고 있지 않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다윈주의자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동물계에서고 인간 세계에서고 간에 경쟁이 철칙은 아니다. 동물들 사이의 경쟁은 예외적인 시기로만 국한되며, 자연선택은 그것이 작동하기에 더 좋은 장을 찾아다닌다.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경쟁이 배제됨으로써 더 나은 조건이 만들어진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해 삶의 더없는 충만함과 강렬함을 맛보기 위한 엄청난 생존경쟁 속에서 자연선택은 가급적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는다.”(97쪽)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늘 해당 종에게 해로우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것이야말로 항상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으나 항상 존재하는 자연의 성향이다. 이것이 바로 덤불과 숲, 강, 바다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슬로건이다. “그러므로 연합해서 상호부조를 실천하라! 그것이야말로 각자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최대의 안전을 제공해주고, 신체적이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삶과 진보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98쪽)
저자는 동물사회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상호부조라는 한 축의 원리가 이어져왔다는 증거도 제시합니다. 미개인으로 분류되는 부시먼과 호텐토트 족, 에스키모인들의 서로 돕는 관습과 커바일 족으로 대표되는 야만족의 마을 공동체 운영 사례 등을 통해 그간 우리가 얼마나 편향된 시각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봐 왔는지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갖게 된 이유도 알려줍니다.
"언론사나 법정, 관공서뿐만 아니라 시인과 작가들까지도 미래 역사가의 연구자료가 될 막대한 기록을 똑같은 편향적 관점을 갖고서 쓰고 있다. 그들은 모든 전쟁과 전투, 사소한 충돌, 다툼과 폭력행위, 온갖 종류의 개인적 고통을 더없이 세밀하게 서술해서 후손에게 전해준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상호지원과 헌신의 자취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곧 우리의 사회적 본능과 관례는 거의 무시하고 넘어가 버린다.”(140-141쪽)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저자가 주장한 상호부조의 원리로 세상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중세시대에도 인류는 길드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조직을 운영했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말 등장하기 시작한 강력한 국가 조직과 함께 “일인의 권력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연합주의 원리는 시들어버렸고, 대중의 창조적인 능력도 소멸되었다.”(238쪽)라고 크로포트킨은 안타까워합니다. 더욱이 민중의 실수를 언급한 부분에선 저자의 안타까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민중은 정부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으로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민중은 새로운 쟁점을 제기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국가가 개입해 들어와 그들이 마지막으로 누리고 있던 자유를 분쇄해버렸다.”(240쪽)
저자가 활동했던 19세기 말의 상황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이 여전히 이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크로포트킨의 말처럼 연합 혹은 연대의 정신이 오랜 인류의 역사를 거치며 본능처럼 우리 안에 상속되어 왔더라면 어땠을까 상상도 해봅니다. 저자가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 국가가 지배하던 때에도 상호부조는 이어져왔다는 주장을 하는데 크로포트킨이 묘사한 당시의 세태를 보면 현대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국가가 모든 사회 기능을 흡수하면서 필연적으로 방종하고 편협한 개인주의가 판을 쳤다.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의 가짓수가 불어난 것만큼 서로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났다. 모든 사람이 길드나 우애 단체에 속해 있던 중세에는 길드 내의 두 '형제'가 병든 형제를 번갈아가며 보살펴 줘야 했다. 한데 이제는 이웃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빈민 병원의 주소를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245쪽)
“오늘날 점잖은 시민들은 가난한 사람이 곁에서 굶어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저 약간의 세금만 내면 된다. 그 결과,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궁핍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법과 학문과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대세가 되었다. 그런 이론이야말로 이 시대의 종교며, 그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삶은 위험한 유토피아주의자가 되어 버린다.”(245-246쪽)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들은 상호부조의 원리가 살아 있는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공유지를 몰수하려는 지배계급에 투쟁해 왔다는 점을 크로포트킨은 강조합니다. 물론 그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해 상호부조의 정신이 후손들인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한 듯 합니다. 하지만 더이상 나뉠 수 없을 정도로 원자화된 개인으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정신이 있다면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부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 심리에는 근본이 되는 것이 있다.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미쳐 돌아가는 상태가 아니라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에 응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법이다.(중략)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적인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런 감정은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의 수십만 년에 걸친 집단생활에 의해서, 수천 년에 걸친 인간 사회생활에 의해서 배양된 것이기 때문이다.”(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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