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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살인을 저지른 자는 어떻게 속죄해야 할까? 본문
최근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책임이 있는 업체 임원들에 대해 선고된 판결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기사에서 '이번 판결이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는 커녕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처사이고, 이대로라면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또 나올 수밖에 없다'는 피해자 가족들의 호소가 눈에 들어왔다. 살인죄 등으로 고소당한 피고인들에게 내려진 형량은 무죄에서부터 징역 5~7년에 그쳤다.
기사에 따르면 정부와 시민단체에 신고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 건수는 총 5341건이고, 이 중 1112명이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참사의 책임이 징역 7년이라니. 피해자 가족들이 원통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사에선 국민 80% 이상이 징역 20년 이상, 50%이상이 무기징역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설문조사 결과(전국 성인 남녀 1000명 대상 조사)도 소개했다. 아마도 설문대상이 피해자 가족들이었다면 더욱 가혹한 형벌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법원이 제조사 책임자들 모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면 피해자들의 억울함은 풀렸을까? 아니 조금이라도 그 원통함이 해소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으리라. 가해자들이 아무리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가족을 잃어버린 피해자들이 입은 깊은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하는 소설이 몇 년 전에 출간되었다는 걸 알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다.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린 한 평범한 가장이 겪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회에서 합의된 법과 형벌의 모순, 죄값을 치르는 것과 용서, 범죄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겪게 되는 일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카하라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어린 딸이 살해되는 아픔을 겪는다. 나카하라는 그의 아내 사요코와 함께 딸을 살해한 범인에게 사형선고를 받아내지만 딸을 잃은 고통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 잃어버린 딸이 떠오르는 괴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하게 된다. 그리고 11년 후 나카하라는 헤어졌던 아내마저도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들의 딸을 잃은 사요코의 부모, 즉 나카하라의 장인장모도 나카하라와 사요코가 그랬던 것처럼 살인범이 사형을 받게 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사요코의 부모가 나카하라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과정에서 나카하라는 자신과 헤어진 후 아내 사요코가 살인 피해자 가족모임에서 사형을 받아내는 걸 돕는 활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형폐지론에 반대하는 책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나카하라는 아내 사요코가 남긴 원고를 읽으며 당시 딸을 잃었던 사건으로 생긴 상처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나카하라는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사요코의 원고와 기사를 추적하게 되는데, 이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통해 사요코의 살인 사건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아내의 살인 사건은 더 오래 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의 주인공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중학생 시절 치기어린 사랑으로 낳게 된 아이를 두려움 속에서 살해했던 사건을 숨긴채 20여 년을 살아왔다. 당시 아이를 낳았던 사오리라는 여성은 그 때의 죄책감으로 인해 엉망인 삶을 살아오다 우연히 나카하라의 아내 사요코를 만난다. 사요코와 상담을 하는 도중 사오리는 당시의 일을 고백하고 만다. 사요코는 사오리에게 자수를 권하지만 사오리는 당시 아이를 임신하게 한 남학생 후미야까지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을 걱정하며 망설인다.
사요코는 소아과 의사가 되어 있는 후미야를 찾아가 역시 자수를 권한다. 그 때 과거의 죄값을 20년 동안 치르면서 성실히 살아왔던 후미야의 삶을 망치게 될 것을 두려워한 그의 장인이 사요코를 살해하게 된 것이었다. 나카하라는 이 과정에서 사요코와 자신이 딸의 억울한 죽음의 죄값을 위해 간절히 원했던 가해자의 사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요약된 줄거리이긴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사건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도록 구성했다. 한 번 책을 펼치면 쉽게 내려놓기 힘들 정도로 이야기에 흡입력이 있었다. 단순히 긴박감 넘치는 추리 소설로서도 충분한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결론을 내리기 무척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을 통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재판과 처벌로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의 원한을 풀 수 있는가?', '살인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살인자가 죽음으로 속죄할 수 있는 걸까?', '사형은 최소한 재범은 막을 수 있으니 필요한 것일까?', '사형이 집행되어도 피해자 가족에겐 달라질 것이 없으니 사형은 무력한 것일까?'
'가해자가 진정으로 반성하고 죄값을 치르며 살아왔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했다면 법적인 처벌은 없어도 될까? 아니면 자수를 해야 하는걸까?', '교도소에서 갱생을 가장한 이들이 석방되어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갱생은 없다는 전제에서 형벌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살인자가 교도소에서 반성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과 삶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을 구하며 살아간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속죄일까?'
어느 물음 하나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만약 내가 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라면 나 역시 상처가 치유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가해자를 죽이도 싶을 것 같다. 소설 속의 사요코가 '사형은 아픔을 씻기 위한 최소한의 통과점'이라고 했던 것처럼. 또 내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가족이라면 이토록 가벼운 처벌을 내리게 만든 검찰과 재판관들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고 항의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과 함께 최근에 크게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가 맡았던 재심 사건들이 떠오른다. 잘못된 판결로 수십 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사람들. 또 독재정권 당시 권력의 입맛대로 서슴없이 저질러졌던 사법살인의 역사도 생각이 난다. 사형이든 징역이든 지금 우리가 합의한 사법시스템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너무나 많아 보인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지도, 가해자들이 진정한 속죄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판결로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기까지 한다.
게다가 재판관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돈과 권력에 휘둘리며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진 요즘과 같은 상황에선 사법체계가 필요한 것인가라는 극단적 의문도 품게 된다. 또한 사형이 그 자체로 모순되는 것처럼 징역이라는 처벌제도에도 맹점이 존재한다. 감옥에 갇혀 있지만 아무런 반성도 없이 단지 형량을 채웠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부여하는것 같은 처벌제도는 소설의 제목처럼 정말 '공허한 십자가'일 뿐이다.
“인간이 완벽한 심판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이야기의 마지막에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의 이 한 마디에 사법/형벌 제도의 한계 혹은 모순이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속죄하게 해야 하며 처벌을 내려야 할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다만 소설 속의 이야기에서 희미한 실마리 정도만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각각의 사건에는 각각에 맞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는.
지난 해 말부터 지금까지 대통령과 비선실세를 중심으로 저질러져 왔던 수 많은 죄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권력을 이용한 인사청탁, 사적이익 추구, 뇌물 등 그 범죄의 숫자를 세기도 힘들지경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고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 것을 원할 것이다. 무고하게 생명을 잃은 300여명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선 책임있는 자들이 밝혀지고 그들이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겠다.
희생자 가족들과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진실'이고, 책임 있는 자들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깊은 반성과 사죄가 아닐까 생각된다. 참사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내가 사건의 결말이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참사의 책임자들이 '공허한 십자가'를 지게 만들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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