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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으로 일하는 회사인간이 될까 아니면...

초원위의양 2020. 5. 30. 22:30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것”

“창의적 사고와 끝없는 도전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함으로써 인류사회의 꿈을 실현한다.”

사람들이 한국 대표 기업이라고들 하는 두 회사의 경영철학이다. 왜 회사의 꿈이 인류사회에까지 뻗어나가게 된 걸까? 과거엔 회사라고 하면 이익을 얻기 위해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조직을 의미했다. 그러나 요즘 회사들은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넘어서 고용창출, 사회적 약자 돌봄, 기부 등 광범위한 사회적 책임도 요구받는다. 자연스럽게 회사들이 그리는 꿈에도 이런 사회적 요구가 반영되는 것 같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과 세상에 헌신하는 원대한 꿈을 제시하면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회사의 실체보다 브랜드가 더 가치있는 시대이니 대외적으로 훌륭한 회사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해당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류사회에 공헌’하고 ‘인류사회의 꿈을 실현’하는 그림은 훌륭한 이미지 메이킹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이미지 메이킹은 대외고객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회사의 직원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많은 고용주들은 모든, 아니 단 몇 %의 직원이라도 받는 월급 이상으로 회사에 헌신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받는 월급은 투자대비 효용이 그리 높지 않다. 또 돈은 받을수록 한계효용이 줄어들기 때문에 왠만한 수준의 인센티브로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직원들 스스로도 깜짝 놀랄만한 수준의 파격적인 돈이 아닌 이상 금전적 대가만으로는 직원들의 헌신을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회사들은 당근과 함께 채찍도 적절히 이용한다. 회사가 제시하는 환상에 기꺼이 투신하는 사람들은 승진도 시키고 금전적 보상도 해준다. 한편, 경쟁에서 뒤쳐지면 버려질 수도 있다는 공포를 지속적으로 주입하고 실제로 경쟁에서 뒤처진다고 판단하는 직원들에게는 벌을 내리기도 한다.

헌신적인 직원 만들기

그러나 당근과 채찍만으로 직원들의 헌신을 이끌어내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회사가 투자대비 효용을 높이기 위해서는 직원들에게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돈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한다. 직원들이 이른바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월급을 올려주지 않아도, 경쟁에서 뒤쳐지면 그에 응당한 대가가 따른다 겁을 주지 않아도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왠만큼 규모가 있는 회사들은 직원들의 자발적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조직의 원대한 비전과 미션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부서를 운영한다. 회사들은 참으로 다양하지만 직원들에게 일하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이미지 만들기 방법은 대체로 유사해 보인다.(외주를 주기 때문일까..) 경영철학과 비전을 선포하고 그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조직 구성원들이 취해야 할 행동양식을 핵심가치라는 이름으로 표현한다.

다만, 이 원대한 꿈을 만드는데 직원들을 반드시 참여시켜야 한다. 조직에 스며 있는 긍정적인 행동 양식이 무엇인지 묻는 설문조사를 하고, 각 조직 단위로 모이게 해서 이 꿈이 ‘우리’들이 만든 그림이라는 의식을 고취시킨다. 이런 모임에 참석해 의견을 나누고 조직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를 열띠게 토론하다 보면 때로는 ‘아, 내가 진짜 이 조직의 일원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조직구성원으로서 자부심도 생긴다.

이런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도록 만드는 것이 조직문화 혹은 인재관리 부서원들의 핵심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만들어진 경영철학과 비전, 핵심가치를 정말 멋지게 정리해서 구성원들에게 배포한다. 그리고 이것을 모든 직원들이 체화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집중적인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각 부서의 팀장들에게는 주기적으로 회사의 비전과 미션을 직원들에게 강조하며 의미를 부여하라는 임무가 맡겨진다.

회사의 비전에 부합하도록 하위 조직들의 비전과 미션도 차례차례 만들어진다. 내가 속한 팀에서도 팀원들이 함께 모여 회사가 그린 멋진 그림을 실현하기 위한 팀 비전과 미션을 만들었다. 멋진 문구와 표현들을 사용해서 꾸몄다. 비전과 미션을 만들때는 내가 지금 있는 자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정말 ‘인류사회의 꿈’을 실현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헌신적인 직원은 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다시 일상의 업무로 돌아오면 ‘우리’가 만들었던 비전과 미션은 기억 속 저편으로 사라지곤 한다.  멋진 비전과 미션을 제시하며 직원들을 독려해야 하는 헌신적인 팀장 혹은 관리자들 정도나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회사로부터 선택받은 이들 관리자들은 회사의 비전을 정말 자기 것으로 삼고 있을지도 모른다.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조직을 위해 온갖 정성을 바치는 이들이니까. 

일반 직원 입장에선 조직의 원대한 꿈과 비전을 생각하며 일하기는 쉽지 않다. 조직이 매우 세분화되어 있어 내가 하고 있는 일과 회사의 비전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직과 나를 동일시 하지 않는 나같은 부류의 직원들에게는 더욱 더 그러하다. 회사가 그린 멋진 그림이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그게 나의 꿈과 비전은 아니니까. 회사 일에 나의 삶을 갈아넣으면서까지 인류사회의 꿈(사실 이게 무엇인지도 모르겠다.)을 실현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회사에서 태만하거나 게으름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일하면서 이따금씩 받는 월급 이외에도 재미나 보람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야근까지도 불사하려는 ‘헌신적’인 마음이 솟아오르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솟아오르는 ‘헌신적 열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한다. 이와 같은 헌신이 자칫 반복되다가는 과거 나의 선배들처럼 회사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이른바 ‘회사 인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jtbc 루왁인간 중

  
‘회사 인간’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회사 인간으로 회사의 인정을 받으며 자부심을 가지고 회사의 비전에 공헌하는 길을 선택하는 이들을 나쁘게 보지도 않는다. 다만 회사를 떠나게 되는 상황이 반드시 오게 될 텐데 그때 겪게 될 정체성의 위기 혹은 자아 상실이라는 존재론적 위기를 겪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회사가 원하는 만큼의 ‘헌신적’인 직원은 되지 않기로 했다.

헌신에 맞설 두 가지 무기

그런데 회사에 ‘헌신’하지 않으면서도 직접적인 해고의 위협 없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면서, 더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회사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어쩌면 회사의 요구대로 개인의 삶을 희생하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편이 속편할 수도 있다. 평균적인, 때로는 그 이상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헌신’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으려면 회사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주어진 일을 처리함에 있어 유능함의 수준을 상위권 정도로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끊임없이 학습해 본인의 역량을 확장하며 성장해야 하고, 정해진 노동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헌신’적인 직원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모든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나의 강점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지점을 선택하고 집중해 공략해야 한다.

일의 효율을 높이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네트워킹 능력이다. 네트워킹은 단순히 주변 인맥을 관리하고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의 물건, 장비, 심지어는 데이터까지 내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목표는 하루 8시간이라는 노동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일을 잘하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직접 해서는 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회사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내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사 입장에서도 지시한 그 일의 진행이 중요하지 그걸 누가 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주변을 돌아보면 활용가능한 인적, 물적, 유형, 무형의 자원이 생각보다 많다. 때로는 누군가가 이미 했던 결과만 관점을 달리해 잘 활용해도 상사의 지시를 온전히 수행하게 되기도 한다.

네트워킹 능력에 더 해  자신을 상징할 수 있는 대표 성과를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더욱 좋다. 직원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고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러 오는 수준이면 된다. 상사가 ‘어 그 문제는 OO한테 물어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상징성을 갖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런 게 현실에서 가능하냐고? 모두가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때때로 운이 따라줘야 하긴 하지만)

어쩌면 내가 해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하게 될 회사생활은 외줄타기와 비슷하다. 자칫 균형을 잃으면 저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균형을 잡는데 중요한 것은 주도권이란 생각이 든다. 균형은 내가 스스로를 움직여가며 조정해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 회사를 짧게 짧게 옮겨 다닐 생각은 없다. 그런 면에선 또 장거리 레이스와 같다. 장거리 레이스에서 페이스 조절에 필요한 저 두 가지는 내게 꼭 필요한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