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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겠다는 환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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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겠다는 환상

초원위의양 2020. 2. 4. 21:07

“우리는 대부분 해야 하기 때문에-생계를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집세와 융자금을 내기 위해, 그리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일을 한다. 어떤 이들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안 하면 출세하지 못한 것 같이 느껴져서, 또는 일을 안하면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일을 한다. 다른 이들은 성취하고 싶어서, 잘 하고 싶어서, 유능감을 느끼고 싶어서, 어떤 것을 숙달하고 싶어서 일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에 기여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에 일을 한다.”

<나의 일을 의미있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책의 저자 브라이언 딕이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쓴 글이다. 언뜻 보면 다양한 이유를 열거한 것 같지만 저자는 일하는 이유에 서로 다른 가치를 매겼다. 생계를 위한 일은 ‘직업’, 자신의 성장을 위한 일은 ‘진로’, 일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경우를 ‘소명’이라 이름붙이고 당연히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는 일을 최고 수준의 의미 있는 일로 보았다.

인터넷 검색창에 ‘일의 의미’라고 입력하고 검색하면 이와 유사한 동기 부여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 중 하나는 ‘세 벽돌공 이야기’가 있다. 벽돌공 세 명에게 행인이 무슨일을 하느냐 묻는다. 벽돌을 쌓는다, 돈을 벌고 있다,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다고 각각 대답하는 세 벽돌공. 세 번째 벽돌공의 대답이 무척 멋져 보인다.
 

   
10여 년 전 내가 처음 일자리를 찾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책들을 종종 접했었다. ‘나와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세상에 무엇인가 기여하고 타인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소명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여기서 벗어나면 가치 혹은 의미가 퇴색되는 것처럼 보였다.

소명을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그려보았지만 그런 숭고한 뜻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는 못했다. 일하는 모습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과 현실의 간극이 크다는 것을 깊이 깨닫기만 했을뿐. 결국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자리를 구했다. 다만 매우 운이 좋게 노동자로서는 상당히 좋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왔다. 게다가 하는 일도 뭔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씩은...

부자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높은 급여는 아니지만 대출금을 갚아가면서 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정도의 수입은 된다. 일을 하면서는 학교에서 공부했던 전공 지식을 조금씩이나마 활용할 수 있고, 경험이 쌓여 가면서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환경을 덜 오염시키는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는 업무를 하고 있으니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뭔가 기여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이렇게 보면 나의 일은 상당히 의미 있어 보인다. 이런 이상적인 일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당연히 이런 일터에서라면 완전히 소명의식에 불타서 돈을 내면서라고 출근해야 할것만 같다. 하지만 실제 나의 일상에선 소명의식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매일 아침 무거운 걸음으로 일터로 향하고, 일터에 가서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한다. 월급이 나오는 날에만 반짝 기분이 좋아진다.

의미 있는 일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큰 간극을 경험하면서 일에 대한 실망이 커지는 듯하다. 특히 대부분의 일상적인 업무들은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사소해 보인다.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대학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녔나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릴때 가지고 있던 의미 있는 일에 대한 이상이 상당히 지워졌음에도 더 가치있고 의미있어 보이는 일을 찾으려고 한다.

회사에 와서 연구원이라는 직무를 수행하면서 때로는 내가 손을 보태 만드는 제품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 내가 조금은 무엇인가에 기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땐 아주 잠시나마 하고 있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업무들에 금방 묻혀 사라져 버린다. 일은 그냥 일일 뿐이다. 소명은 무슨...

하루 절반 이상을 일터로 오가며 일을 하면서 보내기 때문에 하는 일에서도 뭔가 의미를 찾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불쑥불쑥 올라온다. 동기 부여 전문가들이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뭔가 더 수준 높은 가치를 찾으려는 욕구가 여전하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던 종교의 영향도 크다. 일터에서도 신에게 제례를 하듯 노동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청교도적 노동관에 영향을 받는 부분도 있다.
 

   
이제는 이렇게 이상화된 일의 의미 찾기를 그만두려고 한다. 지금 내가 일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는 생계유지다. 내 몸과 시간을 일터에 저당잡히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보상을 받고 있다. 물론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입장에 따라 서로 요구하는 수준이 다를 것이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계약 관계이다. 계약으로 제공하는 노동에 대해 굳이 더 이상의 의미를 찾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는 생계 유지를 위한 단순한 ‘직업’으로서의 노동을 가장 낮은 수준의 의미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혹자는 직장에서 일을 통해 자아를 혹은 꿈을 실현한다고도 하는데 이는 매우 희소한 사례라 생각한다. 이런 특수한 사례들이 마치 일반적인 것처럼 여기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는 생각들이 열등하게 취급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나?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전문적인 자격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네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대체로 생계 유지를 위해 돈과 노동을 교환하는 것 아닌가. 이제 조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현실에 가까운 노동이야기를 하고 또 듣고 싶다. 그러나 내가 하는 노동 혹은 노동현장 이야기는 역시 내가 속한 현장의 범주에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일터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꽤나 상위 그룹에 속해 있는 직장에 다니는 나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는 노동자들도 많을 것이리라. 누군가는 좋은 직장을 갖고도 만족이나 감사하지 못하며 배가 불러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다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저렇게 나약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경쟁에서 뒤쳐지고 자아실현도 하지 못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경험하는 객관적으로 괜찮은 직장에서도 일상적인 업무에선 돈과의 교환가치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일의 의미’에 대한 이상을 지우고 큰 의미 없이 해내야만 하는 자잘자잘한 노동행위들로 채워지는 하루들를 끈기있게 지켜볼 생각이다. ‘무의미’라는 게 ‘의미’가 될지도 모르는 하루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