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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호기심과 재미로 산 일생, 노벨상은 덤이에요 본문
1918년부터 1988년까지 70년 생애를 화려하게 살다간 독보적인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2월 15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파인만이 남긴 과학적 성과와 업적들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골치아픈 물리학보다는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사람과 그가 살았던 인생의 자취를 돌아보는 것이 더 흥미롭습니다. 유별나면서도 한편으론 평범하기도 했던 파인만의 인생을 추억하기 위해 이 책 <리처드 파인만>을 선택했습니다.
영국 출신 다큐멘터리 제작자 크리스토퍼 사이크스는 파인만의 인생 이야기를 다룬 <발견의 즐거움>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1981년에 제작했던 이 다큐멘터리와 BBC TV에서 방영했던 파인만에 관한 다른 세 개의 영상들을 기반으로 쓰여졌습니다. 파인만, 그의 가족, 친구, 동료들과 나눈 대화들을 파인만의 개성이 잘 드러나도록 정리했습니다.
책에는 모두 열 개의 주제로 파인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들 속에서 파인만이라는 사람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과학자로서 리처드 파인만의 삶은 어느덧 중년에 이른 엔지니어인 제가 읽으면서 물리학 혹은 자연과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흥미로웠습니다.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이라면, 과학자를 꿈꾸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라면 꼭 일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아들을 과학의 길로 인도하다
파인만이 과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하면서 과학의 핵심적인 사항을 배웠다고 회상했습니다. 먼저 가설을 세우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한다는 과학의 핵심을 배웠습니다. 또한 질문하고 깊이 탐구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요. 학교에 대한 파인만의 회상에서 우리 나라 교육이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시험에 통과시키려고 가짜 원칙을 만들었지요. 몇 가지 규칙을 정해서는 아무 생각 없이도 답을 내놓게끔 만든 겁니다. (중략) 학생들이 뭐하는 건지도 모르는 채 답은 내놓을 수 있도록 하는 과정들이죠.”(33쪽)
파인만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과학자가 되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강요나 압박을 한 것이 아니라 과학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습니다. 어린 파인만에게 과학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을 뿐입니다. 결국 파인만은 MIT, 프린스턴 대학원을 거쳐 물리학의 길에 들어서고 당시 물리학계의 큰 도전과제를 풀어가게 됩니다.
과학자와 윤리
1939년 21세의 파인만은 핵무기 개발을 목표로 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에 초청받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과학자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파인만은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의 실수는 “처음 시작했던 이유를 잊었던”것이라 말합니다. 과거 핵무기 개발뿐만 아니라 최근 논란이 되었던 폭스바겐의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배출가스 실험 등을 생각해도 과학자들의 연구윤리 문제는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주제입니다.과학자들은 처음 시작했던 이유는 묻어두고 관성으로 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윤리 문제라면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원래 이유, 즉 독일의 위협을 막겠다는 이유에서 저는 이 시스템을 개발하려고 했어요. (중략) 전부 힘을 합쳐 무척 열심히 참여한 프로젝트였는데, 다른 여느 프로젝트처럼 추진하기로 한 이상 성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어요. 그런데 제가 비윤리적이었던 건 처음 시작했던 이유를 그만 잊었던 거에요. 독일이 패망해서 이유가 바뀌었는데도 그 일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전 그냥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시겠어요?”(73쪽)
“거기서 교훈을 하나 얻었습니다. 어떤 걸 하는 이유를 계속 되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상황이 바뀔 수 있으니까요. 미국의 베트남 전쟁도 윤리적 실수의 마찬가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 이유가 옳았던 그르던 전쟁이 진행되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해요. 원래 목적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저의 윤리적 약점이었습니다.”(73-74쪽)
다채로운 인생의 최대 동력은 ‘재미’
파인만은 양자전기역학이라는 듣기만해도 어질어질한 분야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이나서 감사하며 노벨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절하면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아 마지못해 수상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매년 노벨상 발표 때만 되면 수상자도 없으면서 호들갑을 떠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대비되었습니다. 파인만은 “발견의 기쁨, 발견의 흥분 그리고 다른 사람이 제 연구를 사용한다”는 상을 이미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보다 멋진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노벨상을 주겠다는 노벨위원회에게 누구맘대로 수상자를 선정하느냐며 투덜거리는 괴짜 과학자 파인만. 그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마음껏 즐기는 편이었습니다. 물리학은 물론이고 봉고 연주도 했고, 친구인 화가에게 그림도 배웠습니다. 온갖 기계장치, 다른 과학 분야(생물학 등), 그냥 놀기 등 파인만이 즐기는 분야는 진정 다채롭다 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동기는 ‘재미’였습니다.
“나는 희한한 것-남들이 희한하다고 여기는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재미있는 게 아주 많았어요. 솔직히 말해 저도 제 자신을 모르며, 어떤 게 저한테 왜 즐거운지 모릅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즐거우면 즐기면 되지 남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죠. 하고 싶은 걸 할뿐, 개의치 않아요. 신경 쓰지 않죠! 그냥 재미로 합니다. 재미는 정의내릴 수가 없죠. 사람마다 재미있는 게 다르니까요.”(113-114쪽)
정말 매력적인 말입니다. 저 역시 학생 시절보다 나이가 들어가는 요즘 관심가는 분야가 많아지고 단순히 재미와 호기심으로 배우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제게 파인만의 ‘재미’론은 이상적입니다. 세상만사에 대한 호기심을 타고난 것 같았던, 그래서 모든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늘 궁금해하고 뭐든 시도해봤던 파인만을 인생의 롤 모델 중의 한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미국 우주 프로그램의 오류를 만천하에 드러내다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이후 파인만의 일생에 두 번째의 커다란 공적 과제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1986년 미국의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었다가 채 2분도 되지 않아 폭발한 챌리저호 사고 조사위원회에 참여한 것입니다. 정치적 사안에 관여하기 싫어했던 파인만이었지만 지혜로운 조언자였던 아내, 그리고 과학자 동료들의 제안에 설득당해 챌린저호 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똑똑하고 성실하고 갈 데까지 가는 근성있고 용감한 파인만은 동료들과 함께 철저한 조사하여 챌린저호 사고가 일어나게 된 기술적인 원인을 밝혀냈습니다. 이에 더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불행한 사고일 뿐’이라는 식의 관료주의적 은폐 공작을 막아냈다고 동료 과학자 앨 힙스는 말합니다. 참여한 사람들, 관료시스템, 정치와 연구비 지원 등 진정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알았음에도 파인만은 진실을 공개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란 신념을 밀어부쳤습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들, 국가 연구 프로젝트 예산을 담당하는 관료들,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정치인들, 더 나아가 국민들 모두가 파인만의 이와 같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여러 가지 위험 징후들을 발견 혹은 예상하고 아우성치는 현장의 엔지니어들의 목소리는 조직의 의사를 결정하는 위쪽 사람들과 예산을 틀어쥔 정부 사람들에게는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는 과거 챌린저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각국의 국가 연구 프로젝트들에도 분명 이와 같은 지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순수 과학자인 파인만은 미국이란 나라의 중요한 국가사업인 우주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시스템적 결함을 드러냈습니다. 이 사례가 우리 나라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문제들을 예방하는 데 통찰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개발 프로젝트든지 기술적 약점과 불완전성이 있다면 충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고, 쫓기지 않는 개발 일정과 예산을 수립할 수 있는 시스템을 조성해야 하며, 이해관계자 및 시민사회 전체에 관련 정보가 투명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파인만에겐 자신의 병과 죽음조차 탐구의 영역
파인만은 죽음을 다루는 것조차 괴짜스러웠습니다. 파인만은 희귀한 암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자신의 병에 대해서도 특유의 호기심을 발동시켰습니다. 그의 동생 조안은 파인만이 암에 대해 공부하고,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최대한 이해하길 원했다고 회상합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순간에도 지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타고난 과학자입니다.
그는 과학을 탐구하던 모습으로 치열한 생의 욕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차례의 수술 후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현실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연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때와 그만두어야 할 때를 알았던 것처럼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이상의 연명치료가 의미 없음을 파인만과 그의 가족들은 인정했고 스스로 자신의 죽을 때를 결정했습니다.
파인만은 보통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전혀 아닌데도 그가 남긴 삶의 자취, 자연과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태도가 보통 사람인 제게도 강한 울림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우주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불가사의에 대해 과학이 모든 답을 줄 거라고 기대한다면, 그건 환상이며 이런 문제들에 대한 신비주의적 해답을 바라는 거라고 저는 봅니다…우리가 하는 일은 탐구하는 겁니다…저는 세계에 관해 더 많이 알아보려고 할 뿐입니다…자연의 특성을 더 많이 찾아낸다고 해도 그 특정한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과학에 대한 저의 관심은 그저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아내고, 더 많이 알아낼수록 더 좋다는 거에요. 저는 뭔가를 알아내길 좋아합니다.”(315-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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