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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여자가 무슨~'이라는 말은 이제 그만 본문
지난 10월 노벨위원회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발표했을 때 온 세계가 놀라워했습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에 55년만에 여성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물리학상은 1901년부터 2018년까지 112번 수여되었는데 그 중에 여성은 몇 명이었을까요? 네, 2018년을 포함해 단 세 명이었습니다. 이는 물리학상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닙니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688명 중 여성은 단 21명 뿐입니다.
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의 10%정도라고는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성별비율은 과학분야 종사자의 성비에 훨씬 못미칩니다. 왜 그럴까요?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노벨상을 탈 만큼 뛰어나지 않아서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코펜하게 대학 Liselotte Jauffred 교수와 동료들은 성별에 따라 노출되는 환경이 노벨상수상자 성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했습니다.(Gender bias in Nobel Prizes)
Liselotte Jauffred 교수팀은 여성연구자들이 그들의 경력상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까지 많은 편견과 장애를 뚫어야 한다는 점이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의 사례로 결혼이나 육아는 남성연구자들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여성연구자들에게는 경력상의 장애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노벨상 수상자의 성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저자들인 케르스틴 뤼커와 우테 댄셸도 지적했듯이 세계사 속에서 여성들은 비범한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일부 사람들이 성평등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에 이르기까지도 성별이라는 거대한 벽이 여성들을 막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왔습니다. ‘여자가 왜 이렇게 힘이 세?’, ‘여자가 무슨 과학자가 되려고 해?’, ‘여자가 무슨 의사가 되겠다고’, ‘여자는 간호사나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하는거지’…마치 선천적으로 여성에게만 마땅한 일이 있는 것 같은 편견은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증명한 여성들이 여기 있습니다.
페넬로프 바지외라는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했던 대표적인 여자들 30명에 대한 이야기를 <르몽드> 공식 블로그에 연재했습니다.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린 이 연재물을 모아 저자는 <걸크러시 1, 2>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냈던 여자들의 삶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산부인과 의사부터 아파치 부족의 전사, 최초의 여성용 수영복을 고안한 수영선수, 무민 시리즈의 창조자, 무용가이자 레지스탕스 활동가, 등대지기, 황제에 이르기까지…세상의 편견을 깨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당당히 걸어나간, 시대도 문화도 다양한 여성 15인의 호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걸크러시 1 소개글)
“래퍼, 우주비행사, 탐사보도의 창시자, 동물의 대변인, 육상 선수, 화산학자, 싱어송라이터, 페미니스트 활동가, 과학수사의 선구자, 록 스타까지…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당시 사회의 규범에 맞서 싸우고 스스로 인생의 새로운 막을 훌륭하게 열어젖힌 여성 15인의 호쾌하고 감동적인 삶의 초상!”(걸크러시 2 소개글)
이들 중 ‘무서움’이 전공인 배우 마거릿 해밀턴(1902~1985)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 배우라고 하면 예쁜 외모가 주된 경쟁력이었으나 마거릿은 자신의 장점인 무서운 외모를 내세워 배역을 따냈습니다. 마거릿은 1938년 오즈의 마법사에서 불의의 화재 사고에도 불구하고 마녀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하지만 마녀가 너무 심하게 무서워서 마거릿의 촬영분 절반 정도는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마거릿은 무섭게 하는 걸로는 최고라는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코를 고치라는 충고에 “왜? 내 코가 얼마나 훌륭한데! 미쳤나봐 그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존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책에는 해당 인물에 대한 주된 사건 혹은 에피소드가 너무 짧게 압축되어 있어 감질맛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소개한 인물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게도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등대지기로 소개된 조르지나 안출라타(1908~2001)에게도 눈길이 갔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을 갖는 것이 꿈이었던 조르지나는 미국 롱아일랜드 해안 절벽에 집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해안은 해를 거듭할수록 계속 침식되어 그녀의 집까지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조르지나는 포기하지 않고 갈대와 모래주머니를 이용해 배수 시스템을 만들어 해안절벽의 침식을 막아냈습니다.
그 때 롱아일랜드에 있던 등대 하나도 동일한 위험에 처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등대를 지키고 싶어했으나 관할단체에선 예산 등의 이유로 등대 폐쇄를 결정합니다. 그 때 조르지나가 나서 자신의 집에 적용했던 배수시스템을 등대에도 만듭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요. 마을의 상징을 지켜내고자 했던 조르지나와 그 동료들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 또한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이 책에는 대여섯 페이지로 아주 간략하게 소개된 인물의 더 깊은 삶을 찾아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엘리자베스 코크런(핑키,1864~1922)입니다. 핑키는 홀어머니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직업전선에 나섰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15세에 초등학교 교원 양성학교에 입학하지만 학비가 없어 퇴학당하고 맙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핑키는 ‘여자들은 이럴 때 쓸모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고 분노에 차 해당 기사를 쓴 논설위원에게 편지를 씁니다.
“기사: 여자의 자리는 집이다. 여자가 바느질이나 아이 돌보기를 등한시하면 사회는 무너진다. 직업이 있는 여자란 괴상망측하다.”
“핑키가 논설위원에게 : 당신이 모르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전하자면, 그 세상에서는 여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답니다.”(68쪽)
이를 계기로 핑키는 기자가 되고(필명을 넬리 블라이로 함) 여성 노동자들의 빈곤, 이혼을 원하는 여성이 거쳐야 하는 지난한 투쟁, 공장의 근로조건 등을 기사로 썼습니다. 넬리의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해당 기업들은 신문에서 광고를 빼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결국 넬리는 해당 신문사를 나와 당시 조지프 퓰리처가 이끌던 ‘뉴욕 월드’에 지원합니다. 넬리는 정신병원을 취재하라는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23세에 ‘뉴욕 월드’ 기자가 됩니다.
“넬리 표 기사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우선 사회의 치부를 들추는 취재 대상 선택. 예를 들자면 로비, 빈곤층 의료 실태, 수감자 확대…하지만 더 중요한 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당시 수감자, 극빈자, 파업 노동자 등의 편에 서서 사건을 전하는 기자는 넬리가 유일했다.”(71쪽)
넬리는 세계일주를 하며 기사와 책을 쓰기도 하고, 결혼한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아 큰 성공을 거둬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던 건강보험, 높은 급여, 도서관 등을 제공하는 근로환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참을 수 없는 기자 근성으로 오스트리아로 떠나 종군기자로 전쟁의 참상을 보도했습니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사회 부정부패, 노동자의 삶, 고아들의 인권, 각종 부조리’ 등을 지적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녀가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은 탐사보도의 창시자인 넬리에게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자”라는 이름을 부여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뉴욕 기자협회는 그녀를 기려 ‘넬리 블라이’상을 만들고 훌륭한 성과를 내는 젊은 기자에게 매년 상을 수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위에 아직도 ‘여자가 무슨~’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그들 눈 앞에 이 책 두 권을 들이밀면 되겠습니다. 저자는 단 30명의 인물만 짧은 이야기로 압축해서 소개했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찾아갔던 여자들에 대한 입문서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각 주인공들, 그리고 그들 곁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삶을 더 깊이 있게 찾아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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