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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정부, 국회, 기업가, 노동자 모두가 이 바보의 죽음을 돌아보라 본문
1970년 11월 13일. 대한민국은 이 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날은 청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짧은 22년의 생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기일이 돌아와서 지난 달 전태일 열사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최저임금, 탄력근로제, 주당 노동시간, 청년 일자리, 광주형 일자리 등 노동관련 이슈들을 접하면서도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노동 운동사에 상징적 인물이 된 전태일 열사의 사상과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의 삶을 열정적으로 전해준 <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을 통해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죽어가면서도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당연한 권리를 찾아주고 싶었던 청년 전태일의 마지막 부탁은 그의 죽음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1970년 vs 2018년
지금 우리 나라 어느 노동현장도 전태일 열사가 일하던 1960년대 평화시장의 상황만큼 열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밀폐된 닭장’ 같은 작업장에서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을 일하는 십대 여공들. 한 달 휴일은 기껏해야 이틀. 그렇게 일해봐야 일터로 오는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턱없이 낮은 임금. 일하는 기간이 늘어갈수록 얻게 되는 것은 직업병으로 인해 병들어가는 몸.
‘괜찮은 일자리가 없네’, ‘청년 실업률이 높네’, ‘비정규직이 늘어가네’ 하는 등의 이슈들을 보며 노동자들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딱 전태일 열사의 세대인 부모님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로 살아오신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 세대가 겪은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요즘 세대가 물러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전 세대들 말처럼 물론 절대적인 노동환경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끊이지 않고 늘어만 가는 외주화와 효율추구로 인한 노동자들의 죽음 소식, 커져만 가는 정규/비정규직 임금격차, 법으로 강제하려고 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장시간 노동 문제 등을 생각하면 여전히 우리 사회 노동환경은 생각보다 많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전태일 열사가 법을 준수하라며 외쳤던 당시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4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법정 1일 노동시간은 8시간입니다. 물론 주5일 근무, 최근의 주당노동시간 제한 등 노동시간 줄이기에 진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법의 실효성, 연간 노동시간 등을 고려하면 1일 8시간 노동은 일부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꿈과 같은 일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노동 문제가 단칼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노동자, 기업, 정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랜 시간 논의를 지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과거 독재 및 권위주의 정부들, 그리고 기업들은 그렇다쳐도 촛불 시민의 지원으로 권력을 위임 받은 현재 정부에서조차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이달 초 현 정부의 지지부진한 개혁과 후퇴하는 노동제도 등을 규탄하는 민중대회가 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민심의 실망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태일 열사도 이와 흡사한 실망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각성하게 된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사람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는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한마디도 못하고 살아왔던 자신과 당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보회 회원들 몇몇과 함께 전태일 열사는 당시 노동현장 실태 조사를 벌입니다. 설문 응답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근로기준법 준수여부를 감독하는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노동현장을 감독해야 하는 공무원의 반응은 냉랭했고 그를 내쫓다시피 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전태일 열사는 노동청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평화시장 노동조건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노동자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정부기관이 오히려 기업주의 편에 서 있는 답답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기업들을 관리해야 할 정부기관은 오히려 기업과 결탁하여 기업의 편에 서 있는 절망적 현실에 전태일 열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투쟁밖에 없었습니다. 2018년의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촛불을 들었던 노동자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면 촛불 정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언론들이 툭하면 왜곡하는 고임금 노동자들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로만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경험했던 좌절을 2018년의 노동자들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광주형 일자리’와 전태일이 꿈꿨던 모범업체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전태일 열사였지만 노동현장을 경험하면서 투쟁과 더불어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이름하여 모범업체.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직원들을 인간답게 대우하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구상하며 사업계획서를 썼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노트 30페이지에 걸쳐 필요한 설비, 가격, 인원, 인건비, 생산제품 종류와 판매 방법 등을 상세하게 담은 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사업계획은 당시로선 혁명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전태일 열사 본인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목적과 취지는 훌륭하지만 이를 위해 자본을 대줄 만한 투자자를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업계획서에 담긴 정신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목적>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226쪽)
전태일 열사가 쓴 모범업체 사업계획서에 있는 업체 설립 목적을 읽으면서 최근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이슈가 떠올랐습니다. ‘광주형 일자리’는 새로운 노동시장 혹은 기업에 대한 구상입니다. 노동자, 기업, 정부(지방자치 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 노동자는 일할 만하고 기업가는 투자할 만한 기업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노동자의 임금 부문의 양보 등 다양한 사회적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사IN 2018년 12월 11자 기사(우리시대의 질문 ‘광주형 일자리’)에서도 지적했듯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정권 변화에 따른 일자리의 지속성, 경영 책임, 생산 제품의 종류, 연봉 문제, 하청 구조 개혁의 비현실성, 헌법상 보장된 노동권 제한 등 문제가 될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기존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을 설득할 만한 당위성이 있느냐에서도 부족해 보입니다.
정부입장에선 신속하게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다고 성과를 알리고 싶을 것입니다. 기존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 임금수준 등 앞으로 일어나게 될 갈등에 불안하기에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정부, 모델 기업에 투자할 기업, 기존 산업에 속한 노동자들, 그리고 새로운 노동구조에 뒤따를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전태일 열사의 모범업체 설립 목적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전태일 사상을 되새길 때
<전태일 평전>에는 그의 불우했던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죽음까지가 영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사, 배움에의 열망, 노동현장에서의 경험 등을 접하고나니 전태일 열사의 인간적인 모습이 깊게 다가옵니다. 험난한 노동환경에서 당연하게 강렬한 노동투사가 될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해 준 평전을 통해 그가 왜 그렇게 투쟁할 수 밖에 없었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태일 열사가 가장 밑바닥의 삶을 체험하면서 얻은 인간과 인간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 “나의 또 다른 나”라는 타인에 대한 인식,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노예의식에서 벗어나 주체적 인간으로서 바로 서는 각성, 다른 이들까지도 주체성을 가지도록 함께 이끄는 연대행동의 사상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마주했던 진정한 적은 기업주도 아니었고 정부 기관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나와 있듯이 전태일 열사가 싸워야 했던 대상은 “억압하는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와 힘”이었습니다. 자신이 본 인간과 사회의 모순, 그것을 가져오게 한 억압적 구조와 그 파괴적 영향을 전태일 열사는 폭로하고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 시대 노동절 행사 때도 떠들어대던 “이 나라 경제성장은 묵묵히 땀흘려 일하는 산업 전사들의 헌신의 덕분”이라는 말. 너무나도 익숙해서 진리같이 여겨지는 이 말. 우리 사회는 어쩌면 경제성장 우선이라는 미신을 붙들고 여전히 다른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부, 국회, 노동자, 기업가 등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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