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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참 얄궂다 본문
7월 9일 tvN에서 방영한 <유 퀴즈 온 더 블럭> 25화에서 진행자들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주제로 시민들을 만났습니다. 진행자들은 직장인들이 많이 다니는 지역에서 만나는 시민들에게 ‘150~250만원 받는 백수와 400~500만원 버는 직장인 중 어떤 삶을 선택하겠는가’ 물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백수를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아 흥미로웠습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출근해 5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은행에서 청소를 하시는 노년의 세 여성은 ‘250만원 백수와 500만원 직장인 중 선택한다면?’이란 물음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직장인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일할 때 행복하다고 했고, 심지어 한 분은 300만원을 받아도 직장을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이분들에게 일은 돈 이외에도 다른 의미를 가져다 주는 원천인 것 같습니다.
반면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젊은 시민은 절약해 여행하며 재충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150만원 백수를 선택했습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는 한 시민은 생계 유지를 위해 수입이 더 높은 직장인을 선택했지만 만약 혼자라면 돈을 적게 받더라도 백수로 살아보고 싶다고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일터에서 시달리는 평균적인 직장인들은 이분들처럼 대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제 통장에 누군가가 매월 생활비를 넉넉하게 넣어준다면 저 역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만두고 재미있는 일들을 찾을 것 같습니다. 월급 받는 일을 하면서 돈벌이 이상의 의미를 추구한다거나 행복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랭 드 보통이 쓴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 현대인들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알랭 드 보통은 책의 첫 부분에서 배를 관찰하는 사람들을 보며 일이 주는 물질적 혜택보다 그 일 자체가 주는 재미를 더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도 실험하고 그 결과를 보면서 호기심이 충족되고 재미를 느꼈던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일이 살아가는 데 의미를 주는 원천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일터는 우리가 일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놔두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 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39쪽)
물류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저자가 관찰하면서 얻은 통찰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제 마음에도 와 닿습니다. 일의 전 과정에 참여해 볼 수 있다면 딱 주어진 일만 로봇처럼 하게 되는 경우보다 일의 재미를 느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또한 일터에서 무한 경쟁, 한계 없는 빠른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일하면서 예기치 않는 경이로움을 발견할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저자가 책에 쓴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 우리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행복해 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일의 보상으로 따라오는 돈 이외에 일에서 의미를 찾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말 처럼 저 역시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을 통해 주어지는 물질적 보상 이외에 다른 의미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때문에 극도로 분업화되어 무한한 생산성 혹은 효율을 추구하는 현대의 일터에서 우리는 무의미 속을 부유하며 행복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예외적 축복
현대의 일터가 우리에게서 일의 의미를 앗아가는 것에 더해 우리가 행복을 느끼며 일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은 구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처음이다”고 했는데 로또 1등에 당첨되어도 회사를 계속 다니겠다고 말하던 제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하고 있는 일 혹은 직업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이상적 믿음과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일터의 현실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매일 확인하면서 사람들은 계속 불행하다 생각합니다. 알랭 드 보통이 제안하는 것처럼 이같은 일과 행복에 대한 신화적 믿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에서 행복을 느끼는 건 소수에게 허락된 일종의 축복과도 같다 생각합니다.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 가지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142쪽)
나에게 일이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정을 다해 일하는 성공한 창업자들의 이야기,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생각되는 것이라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일을 소명으로 여기며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서두에 언급한 <유 키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청소하는 분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 등을 접하면 내가 너무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 한켠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야기들은 알랭 드 보통도 말했듯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닙니다. 소수에게 허락되는 예외입니다. 0.1%, 아니 0.01%의 성공이 누구나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법칙인 것처럼 사회에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성공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더 큰 실망을 느끼고 자책하게 됩니다.
사회 전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고려했을 때 내가 일하는 조건(급여, 복지 등 노동환경)이 상대적으로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에서 돈벌이 이외의 의미가 저절로 찾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은 주어진 지침에 영혼없이 따라야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생각할 겨를 없이 단지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상속받을 재산이 넘쳐나는 경우가 아니고선 먹고 살기 위해 노동과 돈을 바꿔야만 하기도 하고, 건강을 잃거나 노년에 이르러선 일할 수 있는 것 자체를 소중히 여기기도 할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에 형벌받은 시시포스가 된 것 같아 괴로워 하기도 할 것이고, 일해서 이뤄낸 결과물을 보고 때론 행복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일이라는 얄궂은 존재로 인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제 운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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