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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
겨드랑이 털을 기르면 여자답지 못한 걸까? <여자 다운게 어딨어> 본문
지상파 아침 방송에서 20대 여성이 인터뷰를 하다가 두 팔을 들어 풍성한 겨드랑이 털을 보여준다면 시청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풍성한 겨드랑이 털 뿐만 아니라 그 여성의 다리에도 털이 길게 자라 있다면 어떨까요? 이런 여성을 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여성스럽지 못하다’며 미간을 찌푸릴 것입니다. 겨드랑이와 다리에 난 털을 깔끔하게 면도하는 것이 ‘여성답다’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2012년에 영국의 한 아침방송 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방송에 출연한 주인공 에머 오툴은 이를 계기로 온갖 미디어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여성 체모 세계 대표’에 등극했다고 스스로를 칭했습니다. 이 여성은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이라는 틀에 따라 여성성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과 그것을 타파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1년 반 동안 제모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습적인 사회적 여성성에 반기를
‘여성 체모 세계 대표’ 에머 오툴이 면도를 하지 않은 행동은 사회가 규정하는 ‘여자다움’과 그녀가 그것에 저항하려 했던 실험들 중 하나였습니다. 에머 오툴은 관습적 여성성 타파를 위한 다양한 실험들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경험과 생각을 <여자 다운게 어딨어>라는 책에 꾹꾹 눌러 담아냈습니다.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여자다움’이라는 압박이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를 어떻게 견고하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의사가 “공주님입니다!”라고 외친 순간부터 우리의 몸은 우리를 정의하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부호화되고 의상이 입혀진 신체는 우리를 남성과 여성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서 사회 내에 인위적인 구분을 만들며 어떤 젠더의 사람들이 정체성을 당당하게 수행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그러니 우리가 수행하는 여자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그로부터 이득을 보는지. 그리고 새로운 각본을 써보자.”(26-27쪽)
가정과 학교에서의 교육, 각종 미디어, 어렸을 때 놀이 등을 통해 배운 여성이라는 사회적 기준은 여성의 선택을 큰 폭으로 제한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여성들은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노동시장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로 선택한 것일까요? 여성들은 정치권에 들어가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까요? 여성들은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역설합니다.
면도를 그만두기로 선택했던 저자도 계절이 바뀌면서 탱크톱이나 치마를 입고 외출을 하면서 느끼는 사람들의 조롱섞인 시선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문제에 대해 “아침 출근 때마다 정상적이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과 자리를 비울 때마다 동료들이 당신의 체모에 대해 뭐라고 수근거릴지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선택지가 이 둘뿐이라면 그것을 진짜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생물학적 성도 스펙트럼
저자는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자기 정체성이 정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별을 연극에서 주어지는 하나의 역할로 보고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저자는 몸에 난 털을 없애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남장도 해보고 삭발도 해 봅니다. 이렇게 달라진 ‘분장’에 따라 자신을 유형화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에머 오툴은 생물학적 성별의 차이도 하나의 역할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또한, 우연히 참가하게 된 단체 누드 촬영에서 남녀 사이의 신체 차이가 그리 확연하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자는 생물학적 성별을 근거로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들이 불공평할 수 있고, 개인의 신체적, 지적 능력과 연관성도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생물학적 성도 사회적 젠더와 마찬가지로 ‘스펙트럼’이라는 말이 인상에 남습니다.
인터넷 서비스 가입, 병원 입원 등을 위해 개인정보를 적는 란을 보면 성별은 남자와 여자뿐입니다. 생물학적 성별은 당연히 남녀 둘 뿐이라 인식해왔던 제게 ‘간성’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저자가 다시금 알려주었습니다. 생물학적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강제하게 된 이유가 성별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저자는 알려줍니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가 다양한 남성적, 여성적 특징을 지니는데다 간성까지 존재하니 성을 스펙트럼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성을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이 불평등한 우리 사회 내에서 신체의 차이가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간성을 인정하고, 생물학적 성이 이분법이 아닌 스펙트럼임을 인정하고, 젠더가 생물학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런 합리화는 힘을 잃는다. 이는 곧 남녀 사이의 사회적 불평등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한다.”(158쪽)
갈등 없는 변화는 없다
에머 오툴은 이분법적 성역할에서 해방된 세상을 위해 위와 같은 신체적 행동에 더해 ‘말에서 성별을 없애려는 실험’도 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남성 관련 어휘는 칭찬, 긍정의 의미로, 여성 관련 어휘는 모욕,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며 젠더 이분법을 공고히 해왔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성차별적 편견이 녹아 있는 어휘나 표현들의 대안을 찾아보는 시도를 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저자가 제안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 대명사 사용, 성별이나 장애에 대한 편견이 섞이지 않은 새로운 욕 발명, 경멸적인 표현들을 칭찬으로 바꾸기 등을 해보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언어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점을 기억하고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들에서 성별에 따른 편견을 없애가는 노력을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학습한 성차별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에머 오툴은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요즘 대한민국의 젊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분노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도 다르게 행동하는 여성으로 생활하면서 주변 세계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적 세상은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머 오툴은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거나 화나게 만들지 않고서 성역할을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변화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며, 그것이 올바른 변화일 경우 기존 체제의 저항이 더욱 강렬했던 것을 저도 조직 생활을 통해서 경험한 바 있습니다. 에머 오툴은 대표 ‘프로불편러’라 할 수 있겠습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메시지를 부드럽게 전달해야 한다고, 보다 상냥하게 굴어서 남자들도 이 운동에 합류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건 헛소리다. (중략)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빠와 남동생에게 제 몫의 집안일을 하라고 부탁해왔다. 크리스마스나 가족모임이 있어 집에 올때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여자가 남자의 시중을 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성차별적인지 일깨우려 애썼다. 결국은 어느 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집에 가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제야 문제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정말 놀랍고 감사하게도, 그들은 변하려 노력하고 있다.”(351-2쪽)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에어 오툴이 독자에게 제안하는 노력들 중 남성으로서 제가 해볼 만한 시도들을 찾아봤습니다. 문학, 영화, 텔레비전, 공연 등에 내재된 성차별적 요소들을 찾아보고 문제를 제기하기,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성차별적, 인종주의적, 계급주의적, 장애인 차별적인 언어습관을 발견하고 고치기, ‘남자다움’이라는 관습적 사회적 역할에 도전하는 실험들(치마 입어보기 등)을 고안해 실천해 보기. 그리고 <여자 다운게 어딨어>와 같은 책을 계속 읽으며 페미니즘 배우기.
여성이라면 저자가 했던 체모 기르기, 남장해보기, 삭발 등 여성의 신체에 씌워진 사회적 금기에 도전해보는 시도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미디어에서 규정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순응하지 않는 자기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실험들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로 인해 불편해 하는 주위 세계에 아랑곳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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