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레니 에이브러햄슨
출연
브리 라슨, 제이콥 트렘블레이, 조안 알렌
개봉
2015 아일랜드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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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그마한 침실겸 거실 하나. 욕조가 놓인 욕실 하나. 유일한 생활 공간인 거실엔 번호키 달린 출입문 하나가 있고, 천장엔 열리지 않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곳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엄마 '조이'와 여섯 살짜리 아들 '잭'. 아빠는 없다. 그런데 이 둘은 바깥에 나갈 수가 없다.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다. 7년 전 조이는 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이 작은 방에 갇혔다. 조금 지나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이 방에서 잭을 낳았다. 납치범은 정해진 때에 음식 같은 필요한 것들만을 가져다 주며 철저하게 이 둘을 가뒀다. 잭은 태어 난 후 한 번도 바깥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다. 잭은 이 방에서 여섯 살 생일을 맞이했다.

 

  이 좁은 공간에서의 7년이란 세월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금새 미쳐버릴 것 같은데, 오랜 감금 생활에도 조이는 아직 미치지는 않았다. 보호해야 할 작은 생명과 함께하고 있어서였을까. 가능하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도 하며 지내는 것 같다. 작은 공간에 갇혀 살아가지 않는 이들에게도 일상은 무료함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인데 방 하나에서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더 무료할까. 시간에 대한 감각조차 무디어 질 것만 같다. 엄마인 조이는 세상과 단절된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깥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여섯 살이 된 잭에게 세상은 상상속 우주와도 같다. 어쩌면 잭은 태어나기는 했지만 엄마의 확장된 자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이가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이 삶을 버텨왔지만 더 이상 견딜 수는 없었다. 이전에 조이가 탈출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납치범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올 때 변기 뚜껑으로 그를 내려치고 탈출해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더 심한 폭행만 당했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이 점점 지쳐가는 자신과 점점 성장해가는 잭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조이는 어떻게든 잭을 이해시키면서 바깥 세상으로의 탈출을 계획한다. 납치범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날 심하게 아팠던 잭이 죽었다고 한 후 납치범이 잭을 묻으러 갈 때 잭이 탈출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계획이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도구가 텔레비전 밖에 없었던 잭에게 바깥 세상의 것들을 이해시킨다는 게 어렵기는 했지만 이 계획은 나름대로 잘 실행되었다.

 

  카페트에 말려 있는 잭을 둘러메고 그 방을 나선 납치범이 잭을 자신의 차 짐칸에 태우고 가는 동안 잭은 처음 세상을 마주한다. 잭의 시선을 따라가는 카메라워크가 잭의 낯설음과 두려움을 잘 표현해준다. 카페트에 둘둘 말려 있던 잭이 카페트를 풀고 나오는 모습이 마치 엄마의 자궁을 나와 세상의 빛을 마주하는 갓난아이 같다. 여섯 살 잭의 모습이 아직 양수조차 씻기지 않은 쪼글쪼글한 갓난아기의 모습과 겹쳐진다. 한 동안 얼떨떨하던 잭은 납치범의 트럭에서 뛰어내려 지나는 행인에게 도움을 청하고 드디어 엄마의 자궁과도 같았던 작은 방에서 탈출하게 된다. 경찰은 낯설고 두려운 것들 투성이인 세상에 나온 꼬마 잭과 성공적으로 소통해 조이와 잭이 갇혀 있던 곳을 찾아내고 조이까지 세상으로 구출해낸다.

 

  긴 감금 생활에서 해방되었으니 이 둘은 자신들을 기다리던 가족들을 다시 만나 괴로운 시절은 잊고 행복하게 살았더라 하고 영화가 끝나지는 않는다. 갇혀 있는 시간도 힘겨웠지만 오랜 단절의 시간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야 하는 조이와 잭에게 또 다른 시련이다. 오랜 감금과 신체적, 성적 폭력으로 인한 조이와 잭의 정신적 충격, 조이 부모님들이 겪게되는 생활과 심리적 변화, 납치 감금 사건에 대한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 등이 복잡하게 얽혀 조이와 잭은 감금에서 해방되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감금생활에서의 갑작스런 탈출, 새로 만난 가족과의 새로운 갈등, 언론 인터뷰 후 가지게 된 잭에 대한 혼란스런 생각들로 인해 조이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다행히 자살 미수로 끝나기는 했지만 조이는 당분간 가족들과 떨어져 치료를 받게 된다.


  반면 어린 잭은 다행히 조이만큼의 고통스러운 정신적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고, 두렵다. 하지만 갓난아이가 가장 안전하게 느꼈을 엄마의 자궁 밖 세상에 자연스럽게 적응해가는 것처럼 잭도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처음 만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라는 존재도 가지게 된다. 시간이 조금 지나 엄마인 조이도 안정을 되찾아 다시 잭에게로 돌아온다. 힘겨운 고통의 터널을 다시 한번 통과해 낸 후 이제서야 조이와 잭은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잭은 엄마와 자기만의 안락한 공간이었던 그 방에 다시 한번 가보자고 한다. 조이와 잭은 자신들이 갇혀 있었던 그 작은 방을 조심스레 찾아간다. 때때로 그 방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던 잭은 그 방이 무엇인가 달라진 것을 느끼며 그곳 물건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자신들의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조이와 잭이 감금되어 있던 방에서의 삶과 그곳을 나와 새로운 환경에서 맞이하게 된 삶을 나란히 보여준다. 조이가 방을 탈출한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받은 "잭을 그 방안에서 데리고 있었던 것이 최선이었을까요?"라는 물음을 관객들에게도 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선 결과적으로 조이와 잭이 방을 탈출하고 나름 성공적으로 세상에 적응하기는 했지만 그렇지 못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방송의 사회자가 질문했던 것처럼 잭을 자신과 함께 가두지 않고 납치범에게 부탁해서 더 나은 곳으로 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겠지만 엄마로서 혹은 부모로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연히 자신 곁에 두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만약 내가 동일한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이 물음에 대해 ㅈㄴ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내가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이 진정 아이를 위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이 머리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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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전쟁: 굿킬

감독
앤드류 니콜
출연
에단 호크, 재뉴어리 존스, 조 크라비츠
개봉
2014 미국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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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없는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했고, 테러리스트 집단의 뿌리를 뽑겠다는 일념으로 아프카니스탄 전쟁도 일으켰다. 두 전쟁 모두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목표로 했던 테러와의 전쟁에서 역시 미국은 승리했다고 할 수도 없다. 전장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미국 국민들인 군인들의 피해를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미국은 먼 이국의 전장에서 치루면서 발생하는 물적 인적 피해에 비해 얻는 소득이 적은 것이라 판단한 듯 하다. 결국 자신들의 군대를 점차 철수시키고 다른 전략을 취하게 된다. 그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드론이라 불리는 무인항공기의 전장 투입이었다. 미국 본토에서 드론을 원격조종해 공격할 수 있으니 인명피해도 없을 것이고 공격의 효율성도 뛰어난 전략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드론을 이용한 전쟁의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드론의 조종실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근처 기지에 있고, 작은 컨테이너 박스안에 꾸며져 있다. 드론을 조종하는 이들은 다름아닌 미국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이다. 이들은 마치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처럼 화면 앞에서 조이스틱을 움직여가며 드론을 조종한다. 요주의 테러리스트를 감시하면서 기회가 왔을 때 드론에서 미사일을 발사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미공군 베테랑 조정사였던 토마스 이건 소령도 이 컨테이너 박스 조종실 조이스틱 앞에 앉아 있다. 그곳이 위험한 전쟁터일지라도 진짜 비행기를 타고 다시 날고 싶은 토마스 이건은 오늘도 화려한 라스베이거스 거리를 지나 화면을 바라보며 조이스틱 앞에 앉는다. 드론의 카메라를 통해 공격 대상을 감시하며 적절한 공격 타이밍을 기다린다. 마치 무료한 게임을 하는 느낌이기는 해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제거하고 있으니 나름의 보람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론 조종사들은 근무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겪게된다. 드론 조종사들은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것이라 여기며 자신들의 살상을 정당화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런 느낌 없이 자행되는 살인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토마스 이건 소령은 후자쪽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군대에서의 명령이고 자신들엑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명목에 일정 부분 동의하기도 하며 말없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하지만 아무리 잠재적 테러리스트라고는 해도 무덤덤하게 미사일을 날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이건 소령은 술에 의지하면서 그리고 다시 하늘을 날 때를 희망하면서 무덤덤한 폭격을 계속해 간다. 하지만 어느 날 문제가 생긴다.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에게 날린 미사일에 어린 애들이 지나가다 함께 희생되고 만다. 민간인들의 희생에 대해서도 어떤 조종사들은 의도하지 않은 사고라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이건 소령은 너무나 괴롭다. 이건 소령의 반응이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일 것이리라.

 

  괴로운 심정으로 일을 계속해 나가는 가운데 CIA가 드론 공격에 개입하게 되면서 이건 소령과 그의 팀원들에게 더 큰 심리적 어려움이 닥친다. CIA는 위험인물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민간인들의 희생도 불사한다.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군인들은 괴로워하면서도 살상을 멈추지 못한다.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미국의 어딘가가 공격 당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예상을 토대로 전쟁범죄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을 하게 된다. 이건 소령은 심히 괴로워한다. 공격을 할 때마다 고민을 하게 되다가 결국엔 의도적으로 CIA의 공격 명령에 불응하게 되고 드론 조종석에서도 쫓겨나고 만다. 잠재적 위험 인물 제거라는 명목으로 자행되고 있는 인본주의 국가 미국의 비인간적 만행을 드론 조종사들의 고뇌를 통해 보여준다. 테러리스트들을 향한 테러라고 할 수 있겠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희생도 불사하며 자신들의 잠재적 안위를 지키려는 미국의 모순된 모습에 두려움이 생긴다.

 

  미국을 영원한 우방국가라 여기며 숭상하는 한국인들이 참 많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볼 때에도 미국은 대한민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만을 위한 입장을 취해왔다. 인권을 존중하는 것 같은 미국이라는 사회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상황과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백인, 자국민 등)만을 인간으로 여기는 것 같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테러를 감행할 수 있는 일부 집단을 제외하고는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드론 공격으로 자행하고 있는 전쟁 살인 행위들이 테러리스트들이 감행하는 테러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전쟁 상황에서 이것저것 가릴 수 없다는 변명은 치졸하고 비겁한 것이다. 전쟁 중에도 기본적인 인권, 민간인에 대한 보호는 확보되어야만 한다. 분노로 찬 복수로서의 전쟁이 아닌 테러 집단에 응당한 대가를 치를 수 있게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물론 어렵고 그 과정에서 자국 군인들의 피해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다른 나라에 살고 있을 뿐인 사람들의 목숨과 손쉽게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드론 공격을 성공시키고 토마스 이건 소령은 꼭 한마디를 내뱉는다. "굿 킬" 극악한 범죄자들이나 무차별적 테러를 자행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도 역시 죽여야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마도 테러로 내가 다치거나 혹은 가족들이 죽음을 당했다면 나 역시 분노에 찬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들은 죽여버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을 없애고 나 역시 이건 소령처럼 굿 킬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소령의 굿 킬 이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허탈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굿 킬을 감행해도 희생된 이들을 잃은 상실감은 채울 수 없을 것이다. 당한 것을 어떻게 되갚을 것이며, 아주 쉽게 만들어지는 피해와 복수의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들을 다뤘던 여러 종류의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테러-복수의 고리 이전에도 인간사회 전 역사에서 계속해서 일어났던 고민들이다. 악순환의 고리는 어느 한 편의 결단에서만 끝날 수 있었다. 누가 힘겨운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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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에 신이 산다

감독
자코 반 도마엘
출연
브누와 뽀엘부르드, 욜랜드 모로, 까뜨린느 드뇌브, 프랑수아 다미앙, 필리 그로인
개봉
2015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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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계신걸까 항상 의심을 품고 있는 모순에 빠진 기독교인인 내게 이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하나님 혹은 신에 대한 아주 신선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영화엔 하나님 가족이 등장한다. 가족은 총 네 명인데 지금은 하나님인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딸만 있다. 아들인 J.C는 자신을 희생해서 지금은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엔 실질적으로 없는 상태다. 하나님인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고약한 성격을 가졌다. 너무너무 심심해 하다가 자신의 컴퓨터로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곤 세상이 작동하는 여러가지 규칙들을 자기 마음대로 정해서 창조 세계를 다스린다. 그런데 그 다스림은 정말 제멋대로여서 자신의 피조물들이 사고를 당하고, 자연재해를 경험하고, 불운이 겹치게 되는 규칙들도 만드는 망나니 하나님이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신성 모독이라고 외치며 제작자를 고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겐 이 제멋대로인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완전히 허황된 상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만약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극적인 일들도 결국엔 하나님이 허용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 법칙도 하나님이 만들었을 것이므로 그로인해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도 결국 하나님이 허용한 것이 아닐까? 암튼 믿은 좋은 그리고 감히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상상하기도 죄악시하는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불편한 영화일 수 있겠다. 난 이런 상상은 맘껏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상상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 세계와 피조물들에게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영화가 그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엄청나게 반가웠다.

 

  반면 아버지 하나님의 아내인 엄마는 아버지의 행패에 주눅이 들어서 엄청 위축되어 살아간다. 아버지가 큰 소리를 치면 말대꾸 한마디 하지 못하고 기가 죽고 만다. 하지만 귀여운 딸아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행동에 무척이나 불만이 많다. 거실에 작은 동상으로 세워져 있는 오빠 J.C.와 은밀하게 소통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무자비한 처사들에 반기를 들 기회를 엿본다. 아빠에게 반항을 해 보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완력에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술취해 쓰러져 있을 때 아버지의 서재에 침투해 아버지의 피조세계를 망쳐버리는 방법을 선택한다. 딸 에아는 아버지 서재 열쇠를 몰래 빼내 아버지 컴퓨터를 조작해 피조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죽는 날짜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쫘악 뿌려버린다. 그리고는 오빠 J.C.가 알려준 비밀통로를 통해 피조세계로 도망친다.

 

  자신들의 죽는 날을 알게 된 피조세계의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운명을 날과 시간이 점점 다가옴에 따라 그 남은 시간에 따라 사람들은 엄청나게 다른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곧 죽을 것이기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지금 있는 모든 것들을 때려치우고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을 시작하기도 한다. 장애인 아들을 둔 어머니는 자신의 수명이 더 짧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들이 자는 사이 아들을 숨막혀 죽이려고도 한다. 수명이 아주 많이 남은 것을 확인한 한 젊은이는 자신이 진짜 죽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자기의 운명을 확인하는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한편 죽음의 날을 알게 된 것으로 인해 세계에서 모든 전쟁과 분쟁이 멈추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암튼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다양한 규칙들이 이제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이 얼마나 기발한 상상인지. 사람들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상황들을 내게도 대입해 보면서 내 인생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만약 내가 죽을 날을 알게 된다면 나는 주어진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피조 세계에 내려온 하나님의 딸 에아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피조 세계 사람들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 준 사실을 확인하고 오빠가 세상에 내려와서 제자로 삼았던 12제자에 6명의 사도를 더해 18사도를 완성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에아는 아버지 서재에서 가져온 인명 목록의 사람들을 찾아가면서 그들에게 삶의 의미와 그들의 존재 가치에 대해 확인시켜 주며 한 명 한 명 사도를 삼아간다. 18사도가 완성되자 드디어 야구선수의 숫자가 완성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야구광인 아버지 하나님의 아내인 엄마가 활력을 되찾고, 아버지의 컴퓨터에 접속하여 온통 아버지 하나님 중심이던 피조세계를 엄마가 가진 여성성으로 채워나간다. 엄마 하나님의 활동 재개로 피조세계는 다시 설정이 되고 새로운 세상에서 피조물들이 다시 생을 이어가게 된다.

 

  그렇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특히 인간을 고통속에 빠뜨리는 일들이 끊임 없다. 전쟁, 기아, 가난, 살인, 자연재해로 인한 사고 등 비극적인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의 책임이 반드시 사람들에게만 있다고도 보여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세계를 움직여 가는 절대자의 존재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현대 세계이지만 여전히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엄청나게 많다. 특히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들은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것처럼 왜곡된 남성성이 가득한 절대자의 고약한 장난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세상에 과격한 남성성을 잠재워 줄 여성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의 권익이 상당히 향상되었다고 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과격한 남성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고들을 막기 위해 여성성이 더욱 회복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영화의 상상력은 정말 발칙할 정도이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셔서 자신의 피조물이 자신을 이런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보신다면 어떤 심정이실까? 괴씸해서 혼내주고 싶으실까 아니면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보여주기 위해 살짜쿵 자신의 흔적들을 보여주실까? 이 영화는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이미지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언진 삶, 특히나 아직 살지 않은 미래를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해 준다. 내 주위 나와 같은 피조물들의 삶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며, 그들이 겪고 있는 아픔들에 보다 공감하며 동참할 줄 알며, 함께 같이 미래의 날들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동행할 수 있는 그런 피조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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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나라

감독
김진열
개봉
201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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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봤다. “나쁜나라”. 세월호 참사 후 유가족들의 생활과 우리 나라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다음 주면 벌써 만 2년이다. 세월호라는 비극을 눈 앞에서 본 지 2년이 흘러갔다. 유쾌하고 즐겁게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일반 승객들의 목숨을 너무나도 허무하게 앗아갔던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잊혀가는 것 같다. 참사 이후 두 번째 4월이 찾아오자 그 때의 망연자실했던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길가에 노랗게 피어나는 개나리를 보자 자연스럽게 노란 리본이 떠올랐다. 많은 수의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4월은 이제 마냥 꽃구경을 하며 보낼 수 만은 없는 달이 되어 버렸다.

 

  신규 업데이트 영화 목록을 살펴보는데 나쁜나라라는 제목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내용을 보니 세월호 참사 후의 기록을 남긴 것이었다. 도저히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의적인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수 백 명의 목숨을 그냥 바다에 묻어버린 참사였다. 참사 이후에도 유가족들에게 행해진 정부의 무관심과 일부 몰지각한 국민들의 비난으로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입은 유가족들의 모습을 언론을 통해서 익히 보아 왔기에 그 사실을 다시 대면한다는 것이 괴롭기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몇 번을 망설이다가 다시 그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여다 보기로 했다.

 

  다큐멘터리의 시선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참사 이후 삶을 따라다닌다.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마음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당사자가 아닌 내가 제대로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고통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정상적인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어째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된 구조는 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참사와 관련된 사람들의 악행은 없었는지 등 2년이 지난 지금에도 밝혀진 바가 없기에 유가족들의 고통은 더욱 깊을 것이다. 영상에도 참사의 원인과 책임 주체 등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순수한 유가족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국민들의 대표라고 하는 새누리당과 민주당 외 국회의원들은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기댈 곳 없는 유가족들은 나라의 지도자라고 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라도 자신들의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박근혜에게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그 유가족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회 시정 연설을 하기 위해 국회로 들어서는 길목에 유가족들이 나와서 간절히 외치는데도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진대, 박근혜는 공감을 모르는 것 같다.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아니면 박근혜에게는 유가족들이 사람이 아닌 것이리라. 저런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가진 대한민국 시민들은 정말 불쌍한 집단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사악한 국민의 대표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대통령이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국가의 권력자들이 상황에 따라 왜 서슴없이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에게 이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들의 고통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것이다. 귀찮게 자신들에게 소리쳐대는 그런 존재들일 뿐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유가족들을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소속된 국민들일진대 어째서 이리도 잔혹하게 이들을 짓밟는단 말인가. 세월호 참사와 그에 대한 국가와 권력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도대체 저 무리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흔히 입에 담을 수 있는 욕지거리로만은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지독히도 사악한 무리들이며, 국민들을 향한 진실된 마음이라고는 털끗하나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고,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도 시원치 않을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 이들에 동조하거나, 이들의 입장에서 사실을 왜곡하려는 언론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가족들을 비난하는 노인네들, 혹은 시켜서 하는 것일 뿐이라 합리화하는 경찰 등 행정부 직원들 모두 거대한 죄악에 동조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 아무런 감정없이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도 똑같이 말했다. 나는 시킨 일을 했을 뿐이라고. 시킨 일을 했다고 해서 자신이 한 일들에 책임이 없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을 철저하게 무시한 일당들이,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해 일한 사람들이 반드시 이 생애 동안에 그에 대한 대가를 꼭 치르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참사의 정확한 원인이 반드시 밝혀지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여전히 고통 속에 있을 유가족들에게 조금의 위안이라도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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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

감독
토마스 맥카시
출연
마크 러팔로, 마이클 키튼, 레이첼 맥아담스, 리브 슈라이버
개봉
2015 미국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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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고 굳이 알지 않아도 혹은 알지 못해도 되는 시시콜콜한 일들이 있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만 하는 혹은 알았으면 하는 사건들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 알려진 사건들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있어야 사회 구조 속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익적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언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레기로 대표되는 한국의 비참한 언론 환경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영화가 소개되었다. 미국의 보스톤 글로브(Boston Globe)지의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Spotlight) 팀의 스토리가 영화로 제작되어 한국에도 상영되고 있다.

 

  과거에 조용히 묻힌 보스턴 지역 가톨릭 신부들의 아동성추행 사건을 자세히 파헤쳐 진실을 알리는 프로젝트가 스포트라이트 팀에 주어진다.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하다 보니 가톨릭 교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사건 은폐와 축소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 보도팀은 새로 부임한 편집국장의 관심과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기자정신을 기반으로 서서히 진실에 다가간다. 사회구성원들 전체의 묵인과 무관심 속에서도 진실을 말하고 더 많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교회권력과 그것을 유지하고 싶은 다수의 사람들의 묵인이라는 높은 장벽에 막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에게는 실패의 낙담 만이 남아 있었다. 피해자들이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성적인 문제이기에 진실에 다가가기가 더욱 어려웠다.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려는 교회와 자신들이 겪은 수치스러운 일들을 밝히기 꺼려하는 피해자의 입장에 더해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팀원들이 마주한 더욱 큰 장벽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 구성원들의 반발이었다. 자신과 친밀한 가족과 친구들이 사건의 은폐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도 했고, 자신들이 어쩌면 완벽하다고 믿고 싶어하는 공동체인 교회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도 했다. 스스로의 추잡한 모습을 거울에 비쳐보고 싶지 않은 이 공동체적인 묵인 내지는 외면 혹은 자기합리화가 스포트라이트 팀이 마주한 가장 높고 두터운 장벽이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교회 조직의 전방위적 압박, 기존에 실패를 맛본 피해자들의 냉소 섞인 시선,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 팀은 결국 추악한 사건을 치열하게 추적해 진실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기까지는 앞서 언급한 장벽들 말고도 몇 개의 고비를 더 넘어서야만 했다. 급작스럽게 발생한 9.11 테러라는 외부의 사건은 애써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잠시 중단되도록 했고, 진실에 다가서던 자신이 과거에 이 사건을 덮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 괴로워하는 순간도 찾아와 내부적인 갈등도 겪게 된다. 결정적으로 사건의 범인들인 신부들의 변호인으로 일했던 친구의 증언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이 보도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변호사 친구는 말한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추잡한 성추행범들인 신부들을 변호하는 것이 자신의 업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너는 그 때 무엇을 했냐"고. 성추행을 행한 신부들 명부를 들고 친구를 찾아갔던 팀장은 친구의 힘겨운 확인과 함께 이 괴로운 물음을 안고 돌아온다.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이 때론 더 많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예상치 못한 상처를 입히게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어떤 사건의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같은 일을 겪는 피해자들이 더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가해자들이 옳지 않은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고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밝혀낸 진실 그 자체와 함께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진실해야 한다. 과정에서 진정성을 잃게 된다면 밝혀진 진실의 정당성이 훼손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진실을 추구하는 동기와 목적, 과정, 그리고 그 결과가 모두 진실해야 밝혀진 사실이 사회 구성원 전체에 변화할 수 있는 파급력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낙하산 인사로 한국의 언론을 치열하게 손에 거머쥐었던 이명박씨 시절부터 한국의 언론은 다시 망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언론인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기에 기레기라 불리는 그들의 실제 현실을 잘 알지는 못한다. 종종 쓰레기로 비유되고 조중동 혹은 종편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비정상적 언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권력의 콩고물을 핥아 먹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력하는 이들일 수도 있고, 영화에서 변호사가 성 범죄를 저지른 신부들을 변호하는 것이 자기 일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쓰레기 짓이 자기 일이려니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니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해 언론인들이 다시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언론인들이여.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미약하나마 스포트라이트 팀과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는 몇몇 언론인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점이다. 스포트라이트 팀처럼 뉴스타파는 탐사보도를 중심으로 하는 언론인들이 모여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있고, 국민TV와 같이 대안적인 언론매체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기존 진보 언론이라 불리던 한겨레도 있고(물론 최근엔 그 역할이 어떤 것인지 모호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오마이뉴스나 경향신문 등이 권력의 개가 되어 버린 한국의 언론 지형을 깨뜨려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언론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나는 재정적으로나마 이들의 노력에 힘을 보태고, 이들이 알려주는 소식들을 관심있게 읽으며 널리 알리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아쉽다. 열정을 가지고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이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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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

감독
다미엔 차젤레
출연
마일즈 텔러, J.K. 시몬스
개봉
2014 미국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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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럼. 기타나 피아노 같이 집에서 흔하게 가져볼 수는 없는 악기다. 게다가 때려서 박자를 맞추는 악기라 혼자서 드럼을 연주하기도 힘들 것 같다. 설사 드럼을 배우고 있다고 해도 기타나 피아노를 반주 삼아 노래를 한 곡조 하는 것처럼 드럼을 치면서 노래를 하기도 힘들 것이다. 드럼은 함께 연주할 밴드가 있어야 실력 발휘를 해 볼 수 있을만한 악기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드럼 하나만을 가지고도 독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치열하게, 아니 지독하게 연주한다고 하면 영화속 드러머 앤드류 네이먼을 조금이나마 표현할 수 있을까. 그의 드럼 연주를 뭐라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드럼이라는 악기로 음악 영화를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주인공 앤드류가 드럼을 연주하는 모습은 더욱 놀랍다. 아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손에 피가 흐르는데도 미친듯이 드럼을 두둘겨대는 그의 모습이 나오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이 됐다. 스틱의 움직임이 최고조에 이르다가 조용해지더니 서서히 절정을 향해 움직여 갈 때는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보고 있는 것도 잊은 채 가슴이 뭉클 하는 바람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옆 사람이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금새 피와 땀이 튀는 앤드류의 연주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최고가 만들어져 가는 모습에 전율이 느껴졌다.

 

  미국 최고의 음악 학교의 밴드 지휘를 맡고 있는 플렛처 교수. 최고의 지휘자이기는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완전한 폭군. 밴드의 드럼 연주자를 찾던 플렛처 교수는 앤드류를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킨다. 앤드류의 꿈은 최고 드러머가 되는 것. 최고가 되기 위해 셰필드 음악학교에 왔고 또 최고가 되기 위해 폭군 교사 플렛처의 밴드에 몸을 담는다. 플렛처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이 한계를 뛰어 넘어 과거 전설과도 같은 명연주자가 되기를 꿈꾸며 다그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앤드류는 말 그대로 피나는 연습 끝에 드디어 플렛처 교수가 인정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유명 재즈 경연대회에 메인 연주자로 참석하게 된다. 

 

  모든 게 잘 풀려간다면 영화가 아니겠지. 경연대회에 가는 도중 앤드류는 불운이 겹치다 급기야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충돌로 부서진 차 안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앤드류는 사고로 여기 저기 피가 흐르는데도 밴드에서 연주하기 위해 연주회 장을 찾아간다. 큰 교통 사고를 당하고 정상적인 연주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결국 경연대회를 망치고 그 자리에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플렛처 교수를 잡아 넘어뜨리며 난동을 피우고 만다. 결국 앤드류는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플렛처의 폭력적인 교육 방법에 불만을 가졌던 학교에서도 앤드류를 설득해 프렛처 교수를 내쫓는다.

 

  앤드류는 드럼을 접고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런데 우연히 지나치다 재즈클럽 앞에서 발견한 플렛처 교수의 이름. 앤드류는 플렛처 교수가 출연하는 클럽에서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온화한 모습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플렛처 교수는 앤드류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밴드에서 드럼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다. 고민 하던 앤드류는 다시 스틱을 잡고 플렛처 교수가 말해 준 곡들을 다시 연습한다. 카네기 홀에서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의 오프닝 무대. 앤드류는 한껏 긴장하며 자리에 앉아 지휘자인 플렛처의 손끝을 쳐다보고 있는데 플렛처는 자신이 말했던 곡이 아닌 앤드류가 모르는 곡을 연주하자고 한다. 당황한 앤드류는 완전히 연주를 망치고 만다. 플렛처 교수는 자신을 학교에서 쫓아낸 사람이 앤드류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복수로 앤드류를 완전히 망신시킬 생각으로 그를 초대해 연주자의 자리에 앉도록 한 것이었다.

 

  앤드류는 첫 곡을 완전히 망친 후 좌절해 무대를 나와 버린다. 무대를 뛰처 나온 아들을 꼭 안아주는 아버지. 그냥 돌아갈 줄 알았던 앤드류가 방향을 바꿔 무대로 다시 올라간다. 그러더니 스틱을 다시 잡고 플렛처를 노려본다. 어이없는 플렛처는 다시 한번 앤드류를 망신 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앤드류가 갑자기 연주를 먼저 시작하더니 밴드를 이끌며 자신의 곡을 만들어 간다. 플렛처는 어쩔 수 없이 당황하며 지휘하는 척 하게 된다. 앤드류는 플렛처의 악다구니 박친 제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피나게 연습했던 곡을 계속해서 연주하며 곡을 이어 나간다. 결국 플렛처도 앤드류의 굴하지 않는 열정에 감동해 함께 곡을 화려하고 정열적으로 마무리 한다.

 

 

  제자 중의 누구라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픈 욕심에 강압적인 교수법을 옳다 여기는 플렛처의 방법이 결국 성공을 한 것인가. 플렛처는 이만 하면 됐다는 말이 발전을 저해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한계치로 점점 더 몰아쳐야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기면 더욱 강해지는 드래곤 볼의 사이어인처럼. 하지만 앤드류가 말했듯이 그 강압적인 방식에도 가르침을 받는 학생의 개성에 따라 조절될 필요가 있다. 잠재력을 가진 사람도 너무 큰 폭압에는 주눅이 들어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가가 되는 데 있어 끊임 없는 연습, 자신을 한계 상황까지 몰아 부치는 연습은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한다. 신들린 듯한 드럼 연주로 감동을 주고, 한편으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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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감독
빌 어거스트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멜라니 로랑, 잭 휴스턴
개봉
2013 독일, 스위스, 포르투갈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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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삶은 내 삶에 비해 좀 더 멋져 보인다. 특히 무엇인가에 집중해 정열을 불사르는 인생을 만나게 될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당시대에 족적을 남기고 있는 인물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커다란 자취를 남긴 인생을 마주하게 되면 내가 살아온 인생은 너무 평범해 보이고 가치가 없어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가 그랬다. 비 오는 어느 날 수업을 위해 학교로 가던 중 다리 위 난간에 올라선 젊은 여인을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레고리우스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아니 경험하려고 하지 않았던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다리 아래로 뛰어 내릴 것만 같던 그녀를 데리고 수업에 들어가지만 그 여인은 입고 있던 빨간 코트를 벗어 둔채 홀연히 그레고리우스의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레고리우스는 무엇에 끌렸던 것일까? 교실에 학생들을 남겨군 채 그는 홀연히 사라져간 의문의 여인을 따라 나선다. 여인은 금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레고리우스는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발견한다. 책의 저자는 아마데우 프라두. 책을 읽어가다 그 문장들에 깊이 공감하게 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리스본행 기차 티켓을 가지고 무작정 리스본행 기차에 오른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오던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아마데우 프라두의 글귀와 그의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에 끌려 모험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에 도착해 자신에게 깊은 감명을 준 책의 주인공들을 무턱대고 찾아나선다. 결국 저자인 아마데우 프라두의 집, 그의 여동생,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과 그들의 불꽃같은 열정이 깃든 인생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게 된다. 혁명의 역사를 간직한 나라들에는 아마데우 프라두와 그 동료들과 같은 역사를 간직한 사람들이 반드시 있겠구나 싶다. 나 역시 영화에서 간간히 소개되는 아마데우 프라두의 문장들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레고리우스가 느꼈을 법한 초라함도 공감할 수 있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의 삶을 추적하던 그레고리우스는 지금은 백발 노인이 된 아마데우 프라두와 가장 가까웠던 두 친구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게 듣게되고 그들의 삶에 있었던 비극적 이야기도 마주하게 된다. 동경하게 되는 삶이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비극적 운명을 과연 평범한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혁명의 시기에 혁명가들이 있지만 그들을 막아서는 세력도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는 리스본의 학살자라 불렸던 비밀경찰도 있었다. 이 학살자의 생명을 구해줬던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 그로 인해 그가 겪게 된 비틀어진 혁명전사로서의 길. 동료들의 실망과 돌아서는 절친. 절친이 사랑하던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 아마데우 프라두. 그 여인을 동료로서 지키기 위해 학살자로부터 받은 잔인한 고문을 견뎌야 했던 또 한 사람의 동료. 그 가운데 아마데우 프라두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 가운데 고민한 흔적들을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찾아가보고자 한다. 그 당시 역사를 살았던 인물들은 자신들을 객관화해 볼 수 없었으므로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지만 그레고리우스의 객관화된 시각은 노년이 된 그 주인공들에게 약간의 이해를 제공해 준다.

 

  영화를 통해 전해지는 아마데우 프라두와 그 동료들의 삶이 노인이 다 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인생 최초로 모험적인 일탈을 감행할 만큼 매력이 넘치는 인생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 혁명의 역사와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일정부분 가두어 놓고 살아가던 역사 속 인물들에게 해방감 같은 것을 선물해 준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려고 한다. 그 때 리스본에서 만나게 된 안경사이자 아마데우 푸라두와 동시대를 살았던 혁명가를 삼촌으로 둔 여인의 매력적인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듯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레고리우스와 같이 가슴이 벅차 오를 만큼 매력을 느끼는 인물 혹은 역사를 나도 만나게 될까? 만약 내가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된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사실 지금 내 자리를 잘 유지하는 것만큼 안정적인 삶도 없을 것이다. 변화는 가슴을 뛰게도 하지만 그만큼 불편함, 두려움, 예기치 못한 상실 등을 내게 선물할 것이다. 그것을 감내할 만큼의 매력을, 가슴 박차 오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레고리우스와 같이 모험을 감행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론 아직 실제로 경험해 보지 못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가슴 벅차 오름을 지긋이 누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막연한 두려움을 걷어치우고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뎌보는 작은 모험을 시작해야겠다. 영화에서처럼 거창한 것이 아닐지라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작은 일탈들을 감행하며 지내봐야겠다.

 

 

  무턱대고 휴가를 내고 쉬어보기. 아무일 없는데도 정시에 퇴근하기. 어린 아이와 진지하게 대화하기. 여름 휴가에 일주일 휴가를 더 내서 해외 여행을 떠나기. 모르고 여행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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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감독
마가레테 폰 트로타
출연
바바라 수코바, 엑셀 밀버그, 자넷 맥티어
개봉
2012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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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능력을 잃는다면 유대인 학살과 같은 끔찍한 악행이 아주 평범하고 흔하게 행해질 수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906년부터 1975년까지 살았던 현대 정치철학자이다. 1951년 파시즘과 스탈린식 사회주의 체제를 전체주의로 정의하고 이는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광기와 공포로 지배하는 정치형태라 주장한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8년에는 ‘인간의 조건’이란 책을 통해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생존과 욕망 충족, 일의 재미와 명예 추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를 바라보는 행동에 대해 기술하였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공적인 삶이 정치의 주제가 되도록 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 공공성을 새롭게 발견할 것을 역설했다. <네이버캐스트, 인물세계사 ‘한나 아렌트’ 중에서>

 

  정치철학자였던 한나 아렌트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녀의 인생이 그만큼 극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 영화에 블록버스터처럼 화려한 액션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뜨거운 사랑이야기가 있어서 주목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그녀의 특별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영화는 그녀의 인생 중에서도 특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취재하고 그녀가 작성했던 보고서와 그것이 촉발했던 사회적 논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 납치되어 재판장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이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담담히 말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학살을 자행하게 된 자신의 행동과 책임을 연결짓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에게서 한나 아렌트는 ‘악이 뿔 달린 악마처럼 괴이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취재를 마친 그녀는 뉴욕커에 보고서를 싣게 되는데 그녀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극히 평범한 사람이며, 그는 판단할 수 있는 생각이 없어져 버린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과 학살 시 유대인 지도자들의 행동에 대한 아쉬움을 언급한다. 이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가까운 지인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유대인들에게서 반민족적이며 나치 전범을 옹호하는 것이냐는 수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들의 감정적 비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며 반대자들 혹은 감정적 비난자들에게 자신의 논리를 용감하게 주장했다. 그녀가 공식적인 강의에서 그녀를 비난하는 동료교수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모습이 매우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녀가 주장했던 바는 나치에 협력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생각과 책임 없이 한 맹목적 행동이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가였다. 그녀는 잔혹한 결과를 가져온 잘못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처벌 혹은 용서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었고, 그 이해의 결과는 그가 사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라는 점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일제시대 일제에 붙어서 조선인들 착취를 도왔던 친일파들, 한국 전쟁 당시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에 따르다가 양쪽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았던 사람들과 그들을 학살했던 사람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게 했던 경찰들의 행동,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시절 그의 명령에 따라 가차없이 살인을 저질렀던 이들, 이명박이와 박근혜 정권 하에서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와 책임을 생각하지 않고 철저히 관료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이들, 용산참사와 쌍용차 점거를 폭력으로 제압하던 경찰들, 밀양 송전선 시위에서 주민들을 무참히 끌어내던 경찰들, 세월호 침몰과 그 책임자들, 민주적 시위에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여전히 자행하고 있는 경찰들과 법 집행자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메르스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지 않는 일부 공무원들 등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차례대로 떠올랐다. 

 

  이들을 나치전범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한나 아렌트가 역설했던 명령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와 책임을 생각하지 않고 혹은 외면하고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지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하고 처벌이 필요하다면 그들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에 상응하는 처벌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너무나도 평범하게 자행되는 악행들을 대한민국에서 언제까지 지켜봐야만 하는 것일까? 한편으로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든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들의 행동은 비난받아야 하고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이 정의라 생각한다.

 

  명령이기 때문에, 따르지 않으면 피해가 따를 것 같기 때문에, 내가 이런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나 싶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멈출 때 평범한 우리는 언제든지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결코 멈춰서는 안된다. 물론 그 생각의 방향이 기본적으로 옳은 방향을 향하도록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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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그레고르 쉬니츠러
출연
파울라 칼렌버그, 프랜즈 딘다
개봉
2006 독일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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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는 2006년에 개봉된 영화인듯 한데 한국에선 2011년 일본 원전사고 후에 개봉이 된 것 같다. 아마도 독일 개봉 당시 한국에서 개봉되었으면 더 관심을 받지 못했을 소재라 생각이 된다. 그나마 일본 원전 사고가 나서 핵 발전소 혹은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커진 상태에 있으니 국내에 소개된 영화라 생각된다. 줄거리를 대강 살펴봤을 때는 원전 사고로 인한 비참함 속에서 꽃 핀 그저 그런 로맨스를 다룬 것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줄거리를 보며 들었던 첫 인상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핵 발전소 혹은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얼마나 참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를 크게 과장되지 않게 그렸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술이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핵 발전소 혹은 원자력 발전소만큼 위험성이 큰 기술이 또 있을까 싶다. 발생 가능 빈도는 적지만 사고가 났을 경우 인류에게 그리고 지구에 치명적인 위험성을 갖는 기술은 사용을 축소시켜 가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 생각된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영상이 많이 보아 왔던 재난 영화들처럼 비참하거나 참혹하지는 않았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 풍경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귀엽고 생기가 넘쳤다. 이 아름다운 곳에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황망해하며 사고가 난 곳으로부터 허둥지둥 피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과정이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이성은 찾아볼 수 없고 위험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존에의 욕구 혹은 열망만이 남아 있었다. 인간이 극단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당연히 그러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리라. 나 역시 그러하겠지. 하지만 그 위험이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 실체를 알리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에게서 나타나는 그런 모습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주인공 한나의 남동생 울리의 모습을 보며 이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는 방사능 오염을 피하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지만 화면의 초점은 한나와 그녀를 눈여겨 보았던 엘마, 그리고 울리에게 맞춰진다. 두 남매가 탈출해 나가는 장면들이 어찌나 불안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엄마는 출장가셔서 집에 없고 고교생 한나는 어린 초등학생 동생을 데리고 피신을 해야 한다. 결국 이 둘이 선택한 것은 자전거.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미 떠난 황량해진 마을을 한나와 울리도 자전거를 타고 떠나간다. 현실에서 이런 모습의 아이들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영화적 요소로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아이의 순수함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피난 열차로 향하던 이 남매에게 더 충격적인 상황이 닥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내리막을 내려가던 울리는 차로와 만나는 곳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고 만다. 죽은 동생을 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누나 한나. 너무나 끔찍한 상황이어서 나 역시 저런 상황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한나는 죽은 울리를 뒤로 하고 지나가던 가족들에 이끌려 탈출 열차가 출발하는 곳까지 도착하기는 하지만 그곳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모두가 탈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한나는 탈출 무리에 끼지 못하고 역사 밖으로 나와 방사능 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바닥에 쓰러진다.

 

  한나가 처한 상황이라면 나도 체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나가 눈을 떠 보니 방사능에 오염된 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원이다. 이후부터는 외적으로 무척이나 참혹했던 피난 상황과는 다르게 비참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준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이 엄청난 재난 속에서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다면 견딜만 하다는 것이리라. 한나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엘마는 결국 격리되어 치료받고 있는 한나를 찾아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방사능에 오염되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한나를 향한 엘마의 지독한 사랑이 비현실적으로 보일런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러 류의 사랑이 있다면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행복할 것 같다. 우리에게 단 하나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 어떠한 인생이든지간에 살아갈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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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파리

감독
우디 앨런
출연
케시 베이츠, 애드리언 브로디, 칼라 브루니, 마리옹 꼬띠아르 , 레이첼 맥아담스, 마이클 ...
개봉
2011 미국,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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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들의 도시. 낭만이 충만한 도시. 파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미술과 음악을 어줍잖게 좋아하는 나에게도 파리는 왠지 모르게 낭만이 깃들고 사랑이 싹틀 것만 같은 곳이다. 아주 잠깐 동안의 파리 여행에서 돌아온 지 두 달여가 지나서 이 영화를 찾아봤다. 단순히 파리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로 인해서. 그 짧았던 며칠 사이에 파리의 매력에 반해 버렸기 때문이리라.

 

  영화에서도 파리에 홀딱 반해버린 꽤나 잘 나가고 있는 헐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길이 등장한다. 그는 시나리오 쪽에선 그래도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굳이 소설을 쓰겠다며 다짐하며 실제로 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다. 여자친구 이네즈의 부모님이 사업차 온 파리 여행에 그녀와 길도 동행했다. 길은 파리에 흠뻑 취해 있다. 곧 결혼하기로 약속한 이네즈는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는 듯 한데도 파리에 와서 살자고 어리광을 피우는 것을 보면 왠간히도 좋았나보다. 낭만적인 파리에서 사랑을 더 돈독히 키워나갈 것 같은 이 연인은 영화 초반 계속 투닥거리다가 싸우고 만다. 

 

  그래도 파리에 취한 길은 파리의 밤거리를 느껴본다며 거리로 나선다. 밤거리를 걷다 자정이 되는 종소리가 나는데 그의 옆을 지나가던 옛 자동차 문이 열리더니 거나하게 취해 보이는 이들이 길에데 동승하라고 한다. 이상한 느낌에 이끌려 들어간 차 안에는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위대한 소설가들이 타 있는게 아닌가! 이럴수가!! 그 아름답고 화려했다던 1920년대의 인물들이라니! 그는 꿈꾸는 어리중절 했지만 위대한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에 깊이 취해버렸다. 그곳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캇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 등 당대 최고라 불렸던 작가들과 이야기하며 가슴벅찬 하룻 밤을 보낸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헤밍웨이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어봐줄 것을 부탁해 보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대신 소설을 봐줄 사람을 소개해 준다고 한다. 뛸듯이 기쁜 길은 자신의 원고를 가져오겠다고 하며 꿈만 같던 그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다. 

 

  현실 세계로 돌아온 길은 자신의 원고를 가지고 약혼녀 이네즈와 다시 과거로 가서 헤밍웨이를 만나고자 했으나 약혼녀와 함께가는 것에는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다행일지도 모른다. 길은 그곳에서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아나를 만나 반하기 때문이다. 길은 1920년대 파리에서 지금은 전설과도 같이 위대해진 예술가들과 만나며 매일밤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지금과는 달리 황금시대를 살았던 그들을 만난 길은 감탄이 끊이지 않는다. 그곳의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소설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도 받고, 길에겐 더할 나위 없는 한 때인듯 하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동경은 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1920년대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아나는 그보다 더 오랜 과거를 황금시대라 동경하며 우연히 가게된 더 과거에 남아 있고 싶어 한다. 길은 설득해보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으로 생각되는 과거의 매력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꿈 같은 과거 황금시대들로의 여행은 끝이 나고 현실로 돌아온 길은 자신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약혼녀와 헤어지고 파리에서 만난 한 여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듯 하다.

 

  영화 내내 아름다운 파리의 거리, 나도 잠시 걸었던 거리와 명소들이 보일 때마다 나 역시 여행하는 동안을 동경하며 바라보았다.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이기는 하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게는 아주 가까운 과거의 황금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이것 말고도 가끔씩은 '아 내가 좀더 젊었을 때는 그랬었는데'하는 회한에 찬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그 땐 공 좀 찼었는데', '내가 그 땐 여자들이 좀 따랐었는데'하는 나만의 황금시대가 있다. 그 때가 지금보다 더 나아보이고 아름다워보이기도 하기에 그 때를 그리워하곤 한다. 

 

  다른 사람들도 종종 혹은 가끔씩은 화려했던 혹은 화려했다고 생각되는 과거를 떠올리며 그리워하며 동경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인생 혹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있어 황금시대라고 여기는 시기가 있을 것 같다. 지금보다 뭔가 더 생기있고, 활력이 넘치던 시기.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았던 시기. 그렇게 생각되기에 사람들은 과거를 동경하고 심하게는 현재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까지도 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보고 싶다. 아직까지 나의 황금시대는 오지 않았다라고. 물론 이것이 자기 위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나의 모습에 대한 기대를 품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과거의 찬란했던 모습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지만 앞으로 되어질 나의 모습이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무엇인가 가슴 설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삶이 또 다른 의미가 되어 나에게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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