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을 4년 정도 구독하다가 지난 해 1월 구독을 해지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새로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함으로 변해갔고, 더 나아가 지루함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고자 구독해지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다시 매달 우리 집 우편함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구독을 해지한 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다루는 심도 있는 기사들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많은 신문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돈을 내고 구독하고픈 마음이 드는 신문은 없다.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기사를 쏟아내는 조중동은 차치하고라도 진보신문이라 불리우는 한겨레나 경향신문 마저도 굳이 돈을 내면서까지 기사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여느 기사들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언론에 종사하는 상당히 많은 기자들이 기자로서의 자존심이나 기자 정신 같은 것들은 개나 줘버린 듯 하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고사하고 권력의 똥구녕을 핥아주느라 여념이 없는 듯 보인다. 이런 언론 환경에 피로를 느낀 탓일까 나와는 솔직히 직접적 연관이 없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보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같은 매체에 눈이 가게 되는 것 같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는 생각해 볼 꺼리들을 생각보다 많이 제시해준다. 비록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직접 일어나는 일들이 아닌 경우도 많지만 그것이 단지 어떤 사건이 일어난 혹은 일어나고 있는 국가에 국한된 것만이 아닌 경우가 많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나, 거대 국제 금융 자본에 맞서기 위한 저항들이나, 부패한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언론의 역할을 강조하는 부분이나 많은 부분들이 우리 사회에 바로 적용하여 뒤돌아보게 한다. 교육문제에 관해서는 유럽 지역에서 시도되는 실험들이 소개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제안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았다. 세계적 지성으로 불리는 이들의 강연이 잘 정리되어서 소개되기도 하는데 그에 대한 반론도 연속하여 실리기도 하고, 쌍방향으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장이 마련되기도 한다. 다른 권력기관이나 기업들에 매이지 않기 위해 신문을 운영하는 이들이 보내는 편지나 기고글도 인상적이다. 어찌보면 구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난 그러한 요청이 솔직하고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재정적 독립을 요청하고 부탁하는 모습이 기업들에게서 돈을 받고 기업들이 뿌리는 기사를 받아적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또 떠나보내는 날이 다시 찾아오게 될까?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작년처럼 익숙해진 내 모습에 질려서 다시 이 신문을 떠나보내게 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또 어떻게 변해가게 될런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오늘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이 내 책상 한 켠에 놓여 있다는 것이 만족스럽다. 그곳에 실린 깊이 있는 기사들을 읽고 있자면 우리 사회에서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고 그것을 위해 내가 속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내가 다시 작별을 고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도 소개되고 지속적으로 출판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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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이라는 이름의 신화

 

by 질 아르디나, 지리학자

 

  금융인들에 의해 촉발된 위기에 대한 대처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위기에 대한 올바른 대처 방법은 투기 억제, 금융시장 규제강화, 불법 금융행위 엄단 등이어야 하는데 유럽연합의 관심은 오직 노동시장의 경쟁력 강화에만 쏠려 있다. 유럽 국가들이 외치고 있는 경쟁력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비 관리, 벤치마킹, 관광 마케팅, 재원확보(자본 유치) 등의 기준이 일반화되면서 국가경쟁력이라는 개념은 세계화 속에서 각국의 역량을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잡리잡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경쟁력을 측정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현재의 국가 경쟁력이라는 것은 영토라는 정치적 영역을 미시경제 개념(상품, 기업의 경쟁력)으로 다루기 때문에 근복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국가는 근본적으로 기업과 다르다. 국가는이윤추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국가의 운영은 시장의 순간적인 성과보다는 긴 역사의 흐름에 의존해 이뤄져야 한다. 

 

  또한 현재의 국가경쟁력 지수라는 것도 기준에 따라 달라지고 마치 주가지수와 같이 과거의 지표를 바탕으로 하므로 미래를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한 싸움에서 승리하자는 말은 인건비를 절약하는 기업주들의 소원을 드러주자는 말이다. 경쟁력 강화라는 구호는 자본소득을 확대하는 데 좋은 구실이 된다. 경쟁력 강화로 얻는 이익은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게 아니라 특정 영역에만 집중된다.

 

  경쟁력 담론의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담론이 기업들과 세계시장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들을 규제할 수단을 찾기보다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바쁘다.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구호는 사실상 민족국가의 주권과 권위가 약화된 현실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정치적 차원에서 국가 혹은 국민을 보호할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경쟁력 담론의 궁극적인 목표다. 

 

 

  필자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이 경쟁력이라는 말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 대중들은 피해를 입어왔다. 이것은 비단 신흥국 들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국가라는 물리적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자본 및 정치 권력과 민중 권력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 나라 역시 경쟁력, 특히나 국가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홍보 문구가 만들어지고 있고 만들어져 왔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대중들은 얼마나 소외되었고 피해를 입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이런 허상과 같은 경쟁력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어린 아이들의 학습 능력, 중산층의 구매력, 각 나라의 스포츠 활동 등이 경쟁력이라는 허구적 추구로 인해 왜곡되고 더러워지는 것을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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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9월호에는 미국에 비만 인구가 많아지게 된 이유는 풀어 쓴 기사가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필자는 미국의 비만인구 증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원인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 소비조장 및 기술 발전 숭배로 인해 미국의 라이프 스타일이 육체활동을 줄이는 쪽으로 변화했다. 


2. 도시화는 자동차 이용을 부추기는 면이 있다. 미국인은 주당 10시간 이상을 자동차 안에서 보낸다. 미국인은 주당 40시간씩 스크린(텔레비전, 컴퓨터, 비디오 게임 등)앞에서 보낸다. 게다가 텔레비전은 광고를 통해 과식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3. 식품 산업은 시장 확대를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먹도록 유도한다. 농산문 가공 산업은 끊임 없이 신상품을 내놔 소비자들의 욕구를 자극했다. 가공식품 특히 고칼로리 가공식품가격이 중요한 영양소가 함유된 신선한 농산물보다 가격이 낮아졌다. 


4. 미국의 임금정책이 빈곤층을 비만으로 내몰고 있다. 임금 수준의 차이는 곧 비만 수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5. 제품에서 상품가격이 차지하는 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포장 용량이 커지게 되고 대용량을 구매하는 것이 유리해졌다. 눈앞에 놓인 음식의 양이 많을수록 더 많이 먹게 된다는 실험결과가 있다. 이러한 인간 심리를 이용해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은 수퍼사이즈 전략을 세웠다. 또한 광고는 어린이들의 식욕을 계속해서 자극한다. 이제는 어린이들의 식품 소비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6. 정부는 이러한 식품업계에 대해 어떠한 규제도 가하지 않았다. 그 사이 정크푸드 시장은 거대 공룡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비만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규제를 가하려 하고 있다. 설탕이 든 수퍼사이즈 음료의 판매를 제한하는 류의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럴 법한 이유들이라 생각한다. 미국이야 대표적인 비만 국가라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비만은 신흥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멕시코, 인도, 중국 등도 경제발전으로 인해 도시화, 기계화, 식품의 산업화, 대형 유통기업 등장이 진행되었다. 이들도 역시 대량 소비에 맛들이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도 패스트푸드 체인점은 공격적으로 매장을 확대하고 있으며 현지에 적응한 메뉴들을 출시하여 각 지역의 소비를 늘려가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식품소비의 양극화로 인해 비만과 영향결핍이 공존하는 비극적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자체가 전 지구적인 불균형상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구의 특정 지역은 먹을 것이 남아돌 정도여서 과식을 조장하고 어떤 지역은 먹을 양식이 부족해서 기근에 시달리는 이 불편한 현실. 어떠한 조정자가 나타나서 이리저리 적절한 양의 양식을 나누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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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5월호]


  몰랐다. 이라크 전쟁에서 희생된 것이 이라크의 민간인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평화라는 기치 아래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에 의해 시작된 이라크 전쟁에서 희생당한 또 다른 부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이란 제국은 진정으로 악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테러와의 전쟁은 과연 누굴 위한 것이었나? 미국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차별적 테러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이 죽고 부상을 당하기도 하지만 사실 지키고 싶었던 것은 미국 고위층들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나 싶다. 테러의 목표물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미리 선전포고를 하고 사전에 테러의 싹을 잘라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원유라는 달콤한 유혹도 큰 몫을 했겠지만 말이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는 놀라운 사실 중의 하나는 이라크에서 전쟁을 치른 이들의 상당수가 미국 군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용병이라니. 역사책 같은 데서 용병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현 세기의 전쟁에서도 용병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라크에 주둔 했던 미군 중의 약 절반정도가 제3국 출신의 용병들이었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미국놈들은 목숨을 건 전쟁을 하면서도 싼 값에 사람을 사서 써먹었던 것이다. 이 용병들은 인간적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고, 너무나도 불평등한 계약 조건으로 미군에 노예처럼 사용되었다. 이렇게도 사악한 국가가 세상에 또 있을까? 미국이란 나라 정말 악하다. 도대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외국의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계약을 하고 타국에 와서 타국을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일까? 어째서 국제사회는 이런 미국에 딴지를 걸거나 하지 않는 걸까?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서인가? 정말 그런것인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미국에서 어쩜 이리도 잔인하고 인권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는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노예 해방을 위해 전쟁가지도 벌였던 나라에서 여전히 조금의 돈으로 사람을 사서 노예처럼 부리는 이 모순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부상을 당하면 강제 소환되고, 약속했던 급여도 받지 못하고, 이라크에서는 부당한 고된 노역에 동원되고, 비인간적 처우를 받았던 용병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동일한 인간을 이렇게 일회용품 쓰고 버리듯 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이와 같은 미국의 군대, 그리고 그렇게 되어 가도록 놔두었던 부시와 오바마는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건가? 기사를 읽으면서 소름이 돋고 진저리가 처진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이중성과 악함을 깊이 느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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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산층은 일정 수준의 사유 재산을 가지고는 있지만 자본가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계층을 말한다. 마르크스 주의에서는 중산계층도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에 상층 프롤레타리아라 이해한다. 중산층은 자본가와 하부 계층의 중간에서 선택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세계 역사를 볼 때 중산층은 항상 보수주의자인 것도 아니었고 급진적 프롤레타리아인 것도 아니었음을 르디플로 한국판 2012년 5월호 기고글에서 역사학자 도미니크 팽솔은 말하고 있다. 다수의 정치 권력들은 사회의 다수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 중간 계층의 마음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왔다. 중간 계층이 어떤 상황에서는 하위 노동자 계층에 동조 혹은 그들과 연합하여 혁명을 이루기도 한 반면,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들에게 약간의 이익을 제공하는 정치 권력에 기대 하부 계층을 외면하기도 하였다. 중산층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일까? 


  아랍에서의 중산층은 재작년 시위에 집중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영업자, 변호사 기술자 의사 같은 자유직업을 가진 현대적 노동자, 고등교육 종사자, 기자, 공무원, 중소기업인 등이 속해 있는 그룹이라 할 수 있는데, 아랍에선 이들이 사회 빈곤계층과 연대하여 혁명과도 같은 물결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들이 항상 동일한 입장을 고수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두 축인 빈곤층과 부우층 사이에서 분열되는 경향이 있다. 모로코와 튀니지, 이집트에서처럼 분열되기도 할 것이다. 


  중국의 중간계층에 대한 고민은 각 국가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부 여론이 시각으로는 중국의 중간 계층이 중국의 민주화를 담당할 역량이 있는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로도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중국이 지도층은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을 둘 다 손에 넣고 싶어 한다. 그리고 아직은 민주화는 시기 상조라 여긴다. 급격한 혁명적 변화로 인한 혼란 보다는 어쩌면 지금의 집단 독재 체제가 대다수의 중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중간 계층도 비슷한 생각일 수 있다. 그들보다는 중간 계층 아래의 하층 계급의 민주적 의식 성장이 더 앞서야 할 것이라 생각이 된다. 


  한국에서의 중산층은 어떤 역할들을 해 왔을까? 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까지는 중간 계층이 민주화에 상당한 기여를 해 왔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이후부터는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한나라당이 다수 정당이 되는 모습을 기초로 판단해 볼 때 한국의 중간계층은 상당히 보수화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 총선 결과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보수적 성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중간 계층도 상당히 넓은 범위로 세세하게 분화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 하다. 중산층의 스펙트럼이 점점 더 넓어지고 분화되어 가기 때문에 이들이 사회경제적 영향은 상황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어떠한 정치 세력이 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가에 따라 권력의 이동이 일어날 것이다.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중간 계층이 과거와 같이 다함께 마음을 모으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판단된다.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이럴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이들은 어떠한 움직임을 보일 것일지가 매우 흥미롭다. 과연 어떠한 세력에게 그들의 삶을 내어 맡길 것인지가 궁금하다. 절대 이명박과 같은 인물만은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제2의 이명박이 출현할 가능성이 크게 낮지 않아보인다는 것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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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핵 에너지 사용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혹자는 핵 발전소 없이는 암흑 세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혹자는 핵 발전소 없이도 가능한 대안이 있음을 주장한다. 필자는 후자의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는 입장에 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역시나 원자력이라는 듣기 거북하지 않은 왠지 과학적으로 여겨지는 단어로 포장된 핵 발전소를 더 늘려야 한단다. 거기다가 우리가 가진 핵 발전소 기술을 이용해 세계로 골치덩어리 핵 발전소를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바보 멍텅구리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우리 나라의 전기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은데, 핵 발전소가 없으면 그 가격이 대폭 상승할 것이라 겁을 주면서 핵 발전소 홍보에 바쁘다. 사람들은 청정 에너지라고 분류해 버린 이상한 에너지 분류 체계를 통해 공중파를 통해 아름답게만 꾸며진 광고를 보며 지낸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잠재적 위험과 비경제적 측면을 가진 핵 발전소를 정말 청청한 에너지로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이렇게 한 나라의 에너지 정책이 핵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정책 입안자와 에너지 부문 이해당사자들 간의 보이지 않는 협력 관계가 지속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이들 핵 에너지 사용을 신봉하는 이들의 말처럼 우리 미래는 핵 에너지 없이는 그려볼 수 없는 것일까?

  대답을 먼저 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에너지 분야에 있어 최근들어 가장 많이 언급 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독일일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3월호의 첫 면에도 이와 관련된 대안적 사례가 소개되었다. 얼마나 반가운 기고문인지 모르겠다. 기고문에서 가징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핵 발전소 문제를 에너지 분야 혹은 과학기술 분야에 있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 즉 윤리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 그러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아무런 의식 없이 펑펑 써댔던 전기는 바로 우리 미래 세대들에게 엄청난 잠재적 위험을 유산으로 남겨 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바라보면 핵 발전소 문제는 진정 윤리의 문제이다. 그것도 시급히 현재의 궤도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그런 심각한 문제이다. 아무리 안정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지금껏 전 세계적으로 경험했던 핵 발전소 사고가 미래에도 없을 것이란 보장이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수명이 다한 핵 발전소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실제로는 핵 발전소 이외의 에너지원에 대한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핵 발전소를 폐기하는 청청하면서도 안전한 방법의 대안이 없는 것이다. 이대로 핵 발전소 정책을 지속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어서 무지하고 무식한 돈만 알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국민 세금을 축내고 있는 핵 사랑 대통령과 그의 수하들, 그리고 전력 사업과 관련되어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물론 독일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이러한 정책적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핵 에너지의 대안을 세워가는 주체는 정책 입안자도 아니고 과학 기술인도 아니다. 바로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서 지금 당장의 불편함을 조금씩 감수할 수 있어야 하며, 미래 세대를 생각하며 자원 사용, 환경 보존 등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진정 전체 시민들의 의식이 대안 에너지 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대안 에너지 시스템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윤리의 문제로 격상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식 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 보자. 

  어떠한 시스템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자연에너지를 활용하는 풍력 발전, 태양광 발전, 수력 및 소수력 발전, 조력 및 파력 발전, 가스 열병합 발전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소규모 분산용 독립 전원 공급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시스템은 수소를 매개체로 하는 연료전지 시스템을 들 수 있다. 독일의 경우는 핵 발전소들을 가까운 미래에 전부 폐쇄하겠다는 공격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목표가 완전히 허황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독일이 실제로 에너지 수급 비율을 상당 부분 재생가능 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취하고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핵 에너지 없이 에너지 안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조금씩 증명해 가고 있다. 이들의 도전이 어떠한 결말을 맺을지 예상할 수는 없겠지만 기대하고는 싶다. 재생 가능 에너지 기술을 통해 핵 발전소를 줄여가는 모습을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접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러한 기대와 함께 우리 나라에서도 정신병적인 모습을 보이는 무지한 대통령이 퇴직하고 나면 핵에너지를 확장하려는 미친 짓을 멈추고 에너지 시스템의 균형추를 재생 가능 에너지 쪽으로 옮기는 작업들이 진행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에너지 문제를 양심의 문제로 격상시키자. 시민들 역시 거짓 광고에 현혹되지 말자. 이제 그만 속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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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더 나아가서는 지구가 속한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일까? 물리학자들에게 이 물음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은 빅뱅 이론이다. 이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는 있지만 사실인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주장을 실험으로서 증명하거나 재현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뛰어난 과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도 잘 모르는 것을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2월호에서는 이와같은 과학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빅뱅 모델이 여러 가지 이론적 틀에서 발전해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완벽한 이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빅뱅 모델에서는 여전히 우주를 채우고 있는 근본 요소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블랙홀은 소립자 물리학에서 발견된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우주의 기본 구성요소를 밝혀야 하는 것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입자를 발견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이다. 이를 위해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우주의 생성을 나름대로 모델화해 나가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세우고 있는 이러한 가설들은 잘 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들의 출발점이 된다고도 할 수 있는 빅뱅 모델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 모델의 뒤를 맹목적 믿음으로 쫓고 있는 이하의 가정들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의 탄생 측면이 아니라 생명의 탄생 관점에서 보면 빅뱅 모델이 여전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과학자들이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우주의 탄생만큼 논쟁적일 수 있지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것 같은 문제도 또 없을 것 같다. 어찌 보면 과학 이론이라는 것이 눈부신 기술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겠지만, 어떤 부분에선 그들만의 리그로 남아있게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경우엔 우주 탄생의 문제와 같이 어떤 다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처음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도 재정립해 나가며 기존의 틀에 저항하며 그 틀을 깨기위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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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언론 매체에 등장해 경제 전망을 이야기하거나 경제 정책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경제학자들이 참 많다. 사람들은 그들의 글 또는 인터뷰 등을 들으면서 나름의 전망을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인 학자들의 식견에 거의 동의하며 그들의 의견에 수긍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들에게 주어진 권위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출신 혹은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아 이 사람이 이래서 그 때 그런 주장을 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많이 있다. 주로 대기업들의 자문역을 하면서 거액의 알바비를 챙기는 이들이 주로 그러할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3월호의 첫 기고문에서 이와 같은 경제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기고문에서는 경제학자들과 금융사 간의 유착 관계와 그로 인한 연구자들의 중립성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자신이 잠시라도 관계했던 기관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거나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미국 경제학회에서는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때 이해관계를 명시하도록 하기로 했다. 올바른 조처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학 교수들이 자신에게 보수를 지급한 기관들을 공개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하게 하는 것은 조금이나마 학자-기관의 이해 관계를 재고하게 하는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는 있어보인다. 어느 경제학자가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그를 지원해주는 경제적 조력자가 있기 마련일 것이다. 이런 직접적 이해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학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경우는 어떨까? 이 역시 문제가 될 여지가 많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 진행된 비상식적 토목 사업들의 사례만 봐도 이러한 부작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친정부적 성향을 띤 학자들은 자신들의 학자적 양심을 내팽겨치면서까지 자신들에게 주어질 정치경제적 이익에 복역하고 만다. 돈과 중립성을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언론들 또한 유독 그런 이해 관계를 가진 이들과만 인터뷰를 하곤 한다. 돈을 쥔 기업 혹은 정부 - 연구자 - 언론이라는 삼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효과는 매우 커진다. 이러한 연구자들에게 자신들의 이해관계자를 공개하게 하는 것은 최소한의 조치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외에 어떤 조치들이 더 취해져야 할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독립적 연구재단을 꾸려보는 것이다. 대기업 혹은 정부에서 돈을 대지 않을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 이것이 한 방법이긴 하지만 한두푼의 돈이 아닐진대 연구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현실적일까? 이또한 회의적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바랄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은 학자들에게 있을 수 있다. 결국 돈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용기와 양심을 가진 학자들을 키워내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세상의 많은 변화들은 이렇듯 근본적인 변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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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나 국가라고 하는 집단 혹은 경계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다른 의미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1월호를 통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월간지에 실린 글에서 피에르 부르디외는 국가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면서 "적절하고 합법적인 정치의 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한 그룹, 만인, 전체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허용하는 입장에서 점진적으로 축적된 자원)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쓰면서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고 공공의 선에 대해 말하는 이들은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전유할 수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보편적인 것에 대한 독점이 없이는 보편적인 것을 대변하는 특권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접할 수 있는 한국의 국회의 모습이 딱 이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편적인 것을 대변해야 하는 이들(국회의원, 대통령과 그 관계인들, 행정관료들 등)은 공공의 이익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향유하고 있다. 이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포장된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강의에서 나오는 부정적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 하나는 보편적인 것이 형성되면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은 소외되고 박탈된다는 것이다. 한 부분으로의 집중은 통합과 보편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폭력과 박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도 행해지는 다양한 정치, 경제적 활동들도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다수결이라는 합의체계가 소수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무시하게 되면 이러한 폭력과 박탈을 가장 잘 나타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합의와 동의를 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무시되는 집단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과정은 지난할지라도 계속된 설득과정으로 나아가야 할 텐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설득과 합의의 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력과 위압, 강행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는 장이 바로 국회가 아닐까? 이러한 폭력적 모습들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경험하고 있지만, 그러한 일상의 대의적 표출이 국회라는 합법적 보편적 권력투쟁의 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모순적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을까? 피에르 부르디외도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많이 남겨주었다. 그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접근 조건을 보편화하는 프로젝트"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독점자들의 특권을 박탈하는 것보다는 다른 부분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도 명백하다고 볼 수 있는 해결책을 제안한 것은 아니다. 단지 국가라는 보편적인 것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그 과정속에서 나타나는 부작용 혹은 배제의 현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부르디외를 잘 모르고 있던 나에게는 이러한 관점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어가면서 그가 제시한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접근 조건을 보편화하는 프로젝트"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를 고민해 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보편화에 따른 배제와 비정상적 독점에 대한 해법이 부르디외의 고민을 이어가다 보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사회의 정치권력, 경제권력 등에 대해 어떠한 방법을 서서라도 독점권을 박탈해야 한다라는 집착과도 같은 인식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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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이란 말 만큼 흔하게 듣는 단어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매체들을 접하면서 여론이라는 말을 거의 빼놓지 않고 만나게 된다. 과연 여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민주화된 사회의 경우에 여론은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고 생각되는 요즘까지도 여론이란 의견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숨겨진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피에르 부르디외의 글에서 발췌 정리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1월호에서 언급하고 있다. 여론을 만들어내는 집단이 우리 사회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언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도 매체들이 대표적인 여론 형성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와 같은 전통적은 언론 매체 이외에도 SNS에 기반한 여러 도구들도 여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매체들을 통하 형성되었다고 하는 여론은 진정 그 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공통적 다수의 의견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적하고 있다. 
 
  여론이라 여겨지는 의견들의 근거가 되는 것 중의 하나에 여론 조사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종종 이러이러한 여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도되는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고 하면 이상하리만치 그 결과가 정말 이 사회가 가진 공통적 의견이구나라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곳에 알려지지 않은 혹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 못한 불편한 진실이 숨겨진 경우가 많이 있다. 이른바 여론의 조작이랄까? 한 사회의 지배집단은 이러한 여론의 조작 혹은 대표되지 않는 여론의 형성을 너무나도 쉽게 이뤄나가고 있다. 일반 대중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채 '아니 어떻게 이런 결과가 여론일 수 있는거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떠한 반론도 하지 못한채 지배집단의 조작이 속수 무책인 경우가 많다. 공적인 연구 기관조차도 여론 조작 혹은 여론 호도에 암묵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여론 조사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은 사회공동체를 대표하지 못하는 표본 추출 및 조사결과 오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에 사용되는 질문에 있는 경우가 많다. 부르디외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떤 특정 조사는 사실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주제인데 이미 자신들이 유도하고자 하는 답을 조사지 결과에 슬쩍 끼어넣는 것이다. 이렇게 의도된 질문과 답에의해 만들어진 결과는 공적인 의견인 것으로 둔갑하여 다양하게 사용된다. 여론 조사라는 것의 신뢰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점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론이라는 공통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따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여론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하는지를 반드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제한된 언론매체들이 여론 형성 혹은 조장을 주도하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에 기반에 소셜네트워크를 이용해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자 하는 여러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트위터를 이용한 뉴스 배포, 나꼼수와 같은 팟캐스트, 최근 인상 깊게 보게 된 뉴스타파와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지속된다면 기존 지배 집단들이 호도해 왔던 거짓 여론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진정한 공적 의견을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 시민들도 지속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참여하는 자세가 몸에 배일 수 있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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