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

작가
애슈턴 애플화이트
출판
시공사
발매
2016.12.15.
평점

리뷰보기


“동안이시네요.”


이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는 없었습니다. 저 역시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고 흐믓합니다. 우리는 왜 '젊다 혹은 젊어 보인다'는 말에 이렇게 반응할까요?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라는 책에서 애슈턴 애플화이트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이 태도에 차별이 스며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애플화이트는 인간 사회에 인종차별, 성차별과 같이 연령차별(나이에 따른 차별)도 만연하다는 걸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이에 따른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나자고 촉구합니다. 저자 자신도 “나이 드는 것을 생각하면 '막연한 불안'과 '속이 매스꺼워 죽을 것 같은 두려움' 사이의 무언가가 나를 잠식해온다”(8쪽)라며 연령차별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하며 논의를 시작합니다.


아직은 젊은 저도 나이드는 것을 생각하면 구부정해진 허리, 깊게 패인 주름살, 얼굴에 핀 검버섯 등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하철역 계단에서 힘겨워하는 노인들을 보면 타임머신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나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처럼 노년의 삶에 대해선 긍정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 역시 편견이라는 것을 저자는 알려줍니다.


“나의 미래가 지금의 나보다 못하다는 편견. 나이 든 내가 젊은 시절의 나보다 못하다는 편견. 이 편견이 '나이 부정'의 핵심이다.”(16쪽)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의 나와 만년의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 관점의 기저에 나이에 따른 차별이 놓여 있습니다. 60세부터 100세 이상의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을 그냥 '노인'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저자가 지적할 때 당연하게 불렀던 '노인'이란 말엔 엄청난 편견이 반영되어 있음에 놀랐습니다. 10세부터 50세를 같은 범주에 놓지는 않으니까요.


“우리 주변의 연령차별을 인식하고 나이 듦에 대해 좀 더 미묘하고도 정확한 시각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행동에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애플화이트는 말합니다. 나이가 매우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연령차별이 존재합니다. 의식하기 힘들게 우리 문화에 스며있는 편견 중의 하나인 연령차별에서 벗어나 볼까요?


우리 안에 뿌리내린 부정적 편견


'청년'을 생각하면 미래, 열정, 도전 등 긍정적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애플화이트가 활동하고 있는 미국에도 태평양 너머 한국 사회에도 젊음은 숭배됩니다. 반면 '노년'을 떠올리면 어떤가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신체의 변화를 수치스러워하게 만드는 문화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저자는 연령차별이란 개념을 만든 로버트 버틀러 박사를 인용하면서 이런 문화는 나이 든 사람들을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고 이들의 인권이나 안녕도 개의치 않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나이 드는 것이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로 논의됩니다. 얼마 있지 않아 병들고 노쇠한 노인들이 세상을 뒤덮어 나머지 세대는 이 노인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통을 겪을 것이란 관점이 지배적입니다. 연금도 건강보험 기금도 곧 바닥날 것이고 부족한 재원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통해 채워질 것이란 예상이 전 인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나이 듦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세대간의 반목을 조장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인 노년을 '추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또한 '나이에 걸맞지 않다'는 편견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성적인 활동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저자가 '성욕이 없는 노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라고 말하는데 제게도 깊이 박혀 있는 편견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노인들의 성생활을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저를 보며 나이에 따른 편견이 제게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노년의 재발견


과연 노년은 정말 이런걸까요?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각자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다른 속도로 나이가 듭니다. 우리 모두를 '노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습니다. 노년은 혹은 나이 든 우리를 하나의 정형화된 이미지 안에 구겨넣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궤적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사랑하고 놓아주면서 그 길을 항해해왔다. 자녀든, 집이든, 꿈이든, 살아오면서 쌓은 다양한 경험과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의 총합이 지금의 우리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금 이 모습으로 빚었다. 이것이 바로 풍요롭고 깊이 있고 너무나도 소중한 'agefulness'다.”(83쪽)


나이가 든다고 자연스럽게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들은 지혜를 얻는데 훌륭한 자양분이 됩니다. 은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나이 든 사람들이 일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축적된 경험들은 세대 간 협력을 이끌어내며 혁신적인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은퇴한 사람들을 자원으로 바라보고 의미 있는 일을 찾을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꼭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경제적 성과를 창출해야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가정에서의 돌봄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 등을 통해 사회 공동체에도 분명히 기여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자원을 축내는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사람들은 좀 더 행복해집니다. 이 행복감이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순간을 산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인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노인들도 순간을 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면 행복해진다.”(329쪽)


연령차별이 없는 사회를 향해


저자가 연령차별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으로 제안하는 것은 '인정'입니다. 저도 세상에 태어나면서 시작된 나이 먹는다는 변화 과정을 받아들이고 '나이 듦=살아가는 것'이란 사실을 떠올리면서 편견을 깨는 과정을 시작합니다. 이 편견은 꼭 젊은 사람들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애플화이트는 어느 연령대에든지 늙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로도 연령차별적 태도를 가진 것이라 말합니다.


노인장, 시니어, 어르신이란 표현을 버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 칭하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늙은이/젊은이의 구분은 없다. 우리는 다만 어떤 사람보다는 나이가 많고 어떤 사람보다는 나이가 적을 뿐이다.”(22쪽)라는 점을 마음에 새깁니다. “'young'이 매력적이라거나 시대를 앞서 간다거나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듯, 'old'는 추하다거나 시대에 뒤처진다거나 현명하다는 뜻이 아니다.”(66쪽)라는 것도.


저자는 모든 연령에 친화적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이와 같은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실천 방법들도 말합니다. 특히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에겐 독서, 악기연주, 댄스, 그림그리기 등 뇌에 자극을 주는 활동을 지속하고 사회적 관계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성욕이 여전하다는 것도 인정하고 신체 변화에 따라 성생활도 변화되어야 함을 언급합니다. 의존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상호의존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진리"라는 점을 잊지 않기를 강조합니다.


"노인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존재다.”(319쪽)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마지막까지 예측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인생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326쪽)


책의 마지막 장(9장)엔 다양한 정책적 제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경제에 나이 든 사람들이 이바지할 기회를 늘리는 프로그램 마련, 지속적 직무 및 평생 교육시스템, 돌봄 노동에 대한 경제적 지원, 장기 요양 서비스 제공을 위한 공공/민관 협력 파트너십 개발 등 다양한 접근 방식들은 고령화 사회를 준비하는 데 시도해 볼 만한 일들이라 생각합니다.


참고: 애슈턴 애플화이트(Ashton Applewhite)의 TED 강연(Let's end egeism)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https://www.ted.com/talks/ashton_applewhite_let_s_end_ageis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작가
이반 일리치
출판
느린걸음
발매
2014.09.17.
평점

리뷰보기


인생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발견해가는 혹은 인정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제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하고 있는 일, 가족 돌봄, 사회에의 기여 혹은 봉사 등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지만 계좌의 잔고와 소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시대흐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자급자족'이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된지 오래인 요즘 상품이든 서비스든 소비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산업화 이전엔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현대 산업사회를 지나오면서 소비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40년 전 이반 일리치는 '현대화된 가난'이라는 표현으로 자유와 생산의 기쁨은 사라지고 모두가 획일화된 경험을 하며, 상품이 넘쳐나지만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 시대를 정의했습니다. 세계적 사상가 반열에 오른 이반 일리치는 1978년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라는 짧막한 에세이에서 성장으로 인한 풍요속의 빈곤과 그 안에서 무력해진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 어디서든,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공인된 전문가의 허가 없이 집을 짓거나 아픈 사람을 치료했다가는 법을 우습게 아는 겁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10-11쪽)


매일 거대한 경제구조에 발맞추기 위해 행진하는 다수의 무리에 합류하며, 자신의 능력을 낙관하는 믿음과 타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틀에서 빼낸 듯한 미디어가 무한 침범하는 일상에서 청중이자 고객, 소비자로 전락한 인간. 이반 일리치가 봤던 시대의 모습이 40년 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아니 더 심화되었기에 이 책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자율성을 잃은 채 무력하게 시장에 의존하는 우리들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상품 중심의 시장 중심 사회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상품에 덜 의존하는 새로운 사회구조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모험을 선택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일상을 보면 인간들은 시장 중심 구조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시장과 일체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상품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힘도 없게 되는 무기력이다. 땀을 흘려야 기쁨을 얻는 인간의 조건이 소수 부자만 누리는 사치스러운 특권이 된다.(중략) 새로운 상품이 생겨나 전통적인 자급 기술이 쓸모없어질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직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 버렸다.”(33-34쪽)


이 역시 지금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인간이 스스로 움직여 필요를 만족시키는 시대를 열기 위해선 대중이 자신과 이웃의 만족을 위해서, 권력이 생산하는 상품의 최대 생산량을 파악하고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절제가 시장 의존 사회를 벗어나는데 기반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후기 산업사회의 거짓 풍요와 자유의 소멸을 막기 위해선 한 사회가 생산할 부와 일자리에 한계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부와 일자리가 공평하게 배분되고 함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풍요의 한계를 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량 생산품은 한계를 모르고 넘쳐나고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가난하게 만드는 부'의 생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자리는 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대규모의 추가 정부 예산을 급히 투입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풀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능사일까요? 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자,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한 것은 지금의 무한 상품 소비 시대를 먼저 돌아보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동 시장에 연연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을 탐구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문가가 대중을 불구로 만들다


일리치는 20세기 중반을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라고 정의했습니다. 스스로를 각종 구속에 가두며 살아온 시민들의 안일함을 먹고 교육자, 의사, 사회사업가, 과학자 등 전문가들이 시대를 지배해왔다는 것인데 상당히 수긍이 됩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딱 이렇지 않은가요? 수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있는, 전문가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자율성을 잃은 소비자들인 것이죠.


“갈수록 광고 문구가 필요를 만들고, 소비자는 전문의, 미용사, 산부인과 의사 등 수십 명의 치료 전문가가 내리는 지시를 따라 구매를 하게 된다. 광고가 되었든 전문가의 처방이 되었든, 모임에서 토론을 하든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하는 사회는 개인이 만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행동하거나 결정할 수 없는 문화에서 나온다. 이런 문화에서 소비자는 스스로 배우기보다 만들어진 필요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데려다 필요를 배우는 데 유능한 학생으로 만드는 사회에서는 스스로 경험한 만족에 기반해 자신의 욕구를 만드는 능력은 보기 드물어진다.”(72쪽)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우리는 단순한 소비자로 태어난 것이라는 세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생산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과거 마을 공동체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활동들을 통해 사회 전체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해왔던 경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과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렸기에 인간의 자율적 행동이 마비되었다(일리치는 이를 '반생산성'이라 표현)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자율성 상실을 경제성장의 부작용, 자원 부족, 공해 등의 문제 때문이라 혼동하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인간의 자율적 필요를 상품이 대신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일치리는 노동에 관해서도 “노동은 더이상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창조가 아니라, 주로 사회적 관계인 직업을 의미한다. 무직은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 노동의 가치나 만족을 느끼지는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언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속한 문화에서 얻을 수 있는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필요를 만들지 못할 때 더 이상 인간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중략) 지금은 남자건 여자건 모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도구를 작동하여 생산한 표준화되고 쪼개진 상품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지금까지 인간과 문화의 진화를 촉진시킨 도구를 직접 사용해 얻는 만족감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욕구와 소비는 수십 배가 증가했지만, 도구를 다루며 얻는 만족감은 드물다. (중략)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기와 만들어진 물건이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며 균형을 이루는 동안에만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쉽게 잊힌다.”(89-90쪽)


그래도 작은 희망의 빛줄기가 보인다


그래도 최근엔 우리 사회에 작은 희망이 보입니다. 전통적 일자리가 늘어나기엔 근본적 한계가 있는 시대에 들어섰기에 실업 문제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기존의 상품의존 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움직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에도 몇몇 곳에 누구나 도구를 사용해 물건을 만들 수 있는 팹 랩(Fab Lab)들이 도입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정부 일자리 예산을 이런 곳에 확대해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팹 랩은 일반인 아무나 이용할 수도 있고,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며, 창업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실들이 확대되어 대중화된다면 일리치가 말했던 상실한 자율성을 회복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만들어 얻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노동의 기쁨과 가치를 되찾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준화된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 사회에서 이렇게 한 걸음씩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진정한 우정

작가
장 자끄 상뻬
출판
열린책들
발매
2017.06.30.
평점

리뷰보기


아이들이 낙서한 것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와..'하고 작은 탄성이 나오곤 합니다. 조금 서툰것 같아 보이는 그림들에 우리들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것처럼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꼬마 니꼴라로 유명해진 삽화가 장 자끄 상뻬의 <진정한 우정>을 휴가를 보내는 중간 중간 펼쳐봅니다.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라 불리게 된 후 '우정'이라는 말은 매우 낯설어졌습니다. 어린 딸들이 즐겨보는 어린이 만화영화 같은데서나 가끔씩 접하게 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년의 마르크 르카르팡티에(프랑스의 잡지 텔레라마의 전 편집장 겸 대표)와 장 자끄 상뻬 두 사람이 '진정한 우정'에 대해서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 책은 마르크 르카르팡티에(L로 표기)와 장 자끄 상뻬(S로 표기)의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르카르팡티에는 상뻬에게 우정의 의미는 무엇인지, 우정관계에 있다는 증거와 사례, 우정을 나눴던 상뻬의 경험 등에 대해 집요하게 묻습니다. 상뻬는 자신이 생각하는 '우정'에 대해 조곤조곤 대답합니다.


“(우정은) 갑자기 생겨나 당신 안에 척 하니 자리를 잡으면, 그다음엔 알아서 그 감정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거죠. 같이 살자니 거기에 의무도 있고, 나름대로 의식도 있고, 규칙 같은 것도 있을 테죠.”(7쪽)


우정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면서 '우정'이라는 낯설어진 가치를 찬찬히 곱씹어봅니다. 이와 함께 중간중간 삽입된 상뻬의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아주 쏠쏠합니다. 단순히 삽화가라는 말로 장 자끄 상뻬를 표현하기엔 부족합니다. “사회학 논문 1천 편보다 현대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평을 들을 정도인 상뻬의 그림에 빠져들기에 충분한 책입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절대 풀리지 않을 엄청난 문제는 고독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혼자라고 느끼게 마련입니다.”(43쪽)라고 말하는 상뻬인데 그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왜 우정관계가 필요한 걸까요? 저는 상뻬의 이 말에 대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한거죠.


“우리는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행운이죠.”(61쪽)

“우리가 걸음을 걷는 것만 해도 수많은 모순된 힘들이 서로 보완하고 조직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겁니다.”(68쪽)


상뻬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 그리고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함께 걸을 수 있는 관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의 인생이 그렇게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어떠한가요?


“직업이 뭡니까? 라거나 어제저녁은 누구와 먹었어? 라거나 바캉스는 어디로 갈거야? 따위의 질문은 할 필요도 없는 거죠. 오늘날의 인간관계는 그저 불안감을 누그러뜨릴 요량으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63쪽)

“학교에서부터 경쟁은 시작됩니다. 1등, 2등, 3등…사람들은 경쟁에 혈안입니다. 정치가들은 여론조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백분율에 열광하고요…점수를 내지 않는 테니스 경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71쪽)

“우리는 누구나 친구보다는 볼일 있을 때 어울리는 사람들을 더 많이 가진 것 아닐까요?”(85쪽)


매 순간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면서 '아, 나만 이런 것은 아니구나' 혹은 '나는 그래도 좀 낫네'라는 상대적 안도감을 느끼기 위한 인간관계 정도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상대가 되어버린 물결 속에서 빠져나와 친구와 '점수를 내지 않는 테니스 경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상뻬가 생각하는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우정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우정의 의미와 그것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우정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합니다. 우정에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약속된 규칙 같은 게 있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이 따라야 할 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정은 사소한 기적과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고 우연과 필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때론 의례적이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관계가 우정이기도 합니다. 친구라면 서로의 도움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정관계에 있는 두 사람에게는 서로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한편, 조심성있게 그리고 현명하게 적당한 거리를 둘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되도록 상대와 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조심조심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을 하면 오해를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퉁명스럽게 행동해서 공든 탑을 무너뜨리죠. 그러니 어느 정도는 점잔 빼는 태도를 간직하는 편이 더 좋겠지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50쪽)


상뻬는 우정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지금까지 겪어온 인간관계에서 제게 부족했던 것이 이 부분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친구가 되는 것에는 상뻬가 말한 것처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연히 만나게 되어 친구관계를 시작하게는 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데에는 생각보다 세심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상뻬의 말처럼 “거저 주어지는 건 없습니다.”


“사랑의 말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랑의 행위만 있을 뿐이죠”(79쪽)

“오직 노력만이, 설사 아주 미미하고, 상대방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더라도, 부단히 기울이는 노력만이 우정을 지속시킨다고요. 거저 주어지는 건 없어요.”(100쪽)


책을 덮고 찬찬히 제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간 나를 지나쳐간 혹은 내가 지나쳐간 친구라 불렀던 녀석들을 떠올려 봅니다. 내 삶에 매몰되어 돌아보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연락이라도 해봐야겠습니다. 희미하게 자국으로만 남아 있는 '우정의 행위'를 되살려보면서요.


“우정이란, 매우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인간이 받아들여 볼 만한, 자신을 던져 볼 만한 도전입니다.”(105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누가 미래의 자동차를 지배할 것인가

작가
페르디난트 두덴회퍼
출판
미래의창
발매
2017.03.03.
평점

리뷰보기


이른 아침 울리는 알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뜹니다. 주말에 다녀온 여행의 여독이 남아 있는지 몸이 찌뿌듯합니다. 그렇다고 월요일 아침부터 지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스마트폰 어플로 자동차를 미리 현관 앞으로 이동시켜 놓습니다. 집을 나와 스스로 이동해 온 자동차에 오릅니다. 모빌리티 서비스 업체에 가입해서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고 있는 자동차인데 아직도 운전대가 사라진 자동차에 오르는 게 어색합니다.


10여년 전만 해도 자동차를 이용하려면 자동차를 사느라 목돈이 들어가고 유지하는데에도 세금, 보험료, 수리비 등 지출되는 항목들이 많았는데 이제 간단히 이용료만 지불하면 됩니다. 게다가 이 업체에선 배출가스가 없는 전기자동차만 제공합니다. 자율주행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어 스마트폰에 원하는 목적지를 입력하기만 하면 자동차 스스로 길을 찾아 갑니다.


간혹 운전대가 있는 클래식카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동료들이 있는데 그걸 보면 운전을 즐기던 시절이 조금 그립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휴식을 취할 수도, 취미 생활을 할 수도, 급한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어 이 서비스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에서 또 하나의 생활 공간으로 변한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살아서 이런 시대를 맞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독일 출신의 자동차 전문가 중의 하나로 꼽히는 페르디난트 두덴회퍼가 <누가 미래의 자동차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예측한 기술 발전 요소를 바탕으로 미래의 자동차 이용 모습을 상상해 봤습니다. 저자는 1)전기자동차와 같은 새로운 동력 기술, 2)인공지능이 적용된 자율주행 기술, 3)소유에서 공동이용으로의 인식 변화로 자동차 산업이 또 한 번의 근본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자동차 강국인 독일의 자동차 전문가가 자국의 자동차 제조사 및 부품 업체들에게 전하는 제언입니다. 애플, 알리바바, 바이두, 구글, 테슬라, 우버와 같은 예상치 못한 경쟁자들이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에 전통적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던 기업들이 사업 모델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며, 어떤 미래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지 저자는 조언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이 국민 경제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나라 자동차 산업 관련 기업들 혹은 종사자들도 두덴회퍼의 분석과 예측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기술/문화 트렌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도 언급한 것처럼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자동차는 이동 수단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넘어서 새로운 생활 공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자동차 제조사는 개인들의 이동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사업 모델을 변화시켜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고급형보다는 보급형 혹은 대중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용자들의 '감성'입니다.


“그래도 불변의 진리가 있다. 느낌을 주지 못하는 자동차는 구매자를 찾기가 극히 힘들다는 것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은 친환경 기술 수요가 아무리 높아지고 있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미쓰비시 i-MiEV 같은 최초의 대량생산용 전기자동차들은 이 사실을 뼈아프게 체험해야만 했고 무엇보다 이 점 때문에 시장에서 고배를 맛봤다. 반대로 테슬라 설립자인 일론 머스크는 처음부터 감성에 집중해 자동차를 내놨다.”(30쪽)


감성 측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자동차와 인간이 상호작용을 하는 기계적/소프트웨어적 인터페이스 디자인, 외부 디자인 뿐만이 아닌 자동차 실내의 완전히 새로운 공간 디자인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제품과 서비스에 어떻게 실현해 고객들을 만족시키느냐가 해당 기업들의 역량일 것입니다.


저자는 내연기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친환경차로의 급격한 전환을 꾀하고 있는 중국, 최근의 디젤 게이트, 심각해지는 대도시들의 대기오염과 그에 따른 배기가스 규제 등을 고려하면 이것이 과장된 예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초의 자동차가 발명되었을 때부터 심장의 역할을 해왔던 엔진을 무엇이 대체하게 될까요? 배터리? 연료전지? 이럴 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날아가보고 싶어집니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배터리를 이용하는 전기자동차가 우위를 점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두덴회퍼는 테슬라의 모델 S(배터리 전기자동차)와 도요타의 미라이(수소연료전지 자동차)를 비교하며 테슬라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테슬라처럼 주행거리, 배터리 충전시간, 인프라 제공 등을 통해 고객들이 열광하게 할 수 있다면 예상보다 빠르게 새로운 심장이 자동차들에 이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배터리 기술에서의 어려운 도전 과제들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아 저자의 예상이 상당히 낙관적이런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자동차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스스로 운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고, 이와 함께 자동차의 소유 개념은 이용 개념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저자는 예상합니다. 부분적 자율주행 기술이 전 세계 자동차 제조사들 뿐만 아니라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업체들에서도 이미 개발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자율주행으로의 변화는 명백해 보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전통적 자동차 제조사와 새로운 도전자들과의 경쟁입니다.


“디지털 제품과 인공지능이 핵심 역량인 이들 소프트웨어 그룹과 거대 인터넷 기업들은 지금까지 자동차 개발이나 차체 조립, 차체의 기계적 구성요소에는 경험이 전무하다. 이들은 비록 이쪽 분야에선 새내기지만, 업계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기존 업체들로부터 고객을 가로채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진지하게 상대해야만 한다. 과거 모터보트 제작사들이 범선 제작사들의 고객을 빼앗아간 것과 마찬가지다. 산업화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숱하게 많이 벌어졌다.”(129쪽)


자율주행 기술은 사람들에게 '안전', '시간', '미학'을 선물할 것이라는 저자의 언급을 전통적 자동차 산업 종사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율주행 기술에 인터넷의 연결성의 조합으로 자동차 이용 형태가 변화할 것입니다. 최근에는 공유경제가 또 다른 착취 구조가 된 듯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버 등을 넘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유경제가 자동차 산업에 찾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상당히 낙관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산업 및 기술 분야에서의 논의는 법률적 그리고 윤리적인 부분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기술의 적용보다 선행되어야 함을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의 기술 개발자들, 정책입안자들,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사안들입니다.


“자율주행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것들이 포함돼 있으며,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율주행은 일련의 법적, 윤리적 문제들로 우리와 충돌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누가 배상 책임을 질 것인가? 어떤 정보보호법과 인격권이 지켜져야 하는가? 예기치 못한 교통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규칙과 원칙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 틀을 아직까지는 직접 형성할 수 있는 한, 어서 서둘러 행동에 나서야만 한다. 기술 발전이 일단 그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게 되면, 뒤늦은 논의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184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식물처럼 살기

작가
최문형
출판
사람의무늬
발매
2017.06.23.
평점

리뷰보기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호모 사피엔스의 일종인 동물입니다. 다만 다른 동물들보다 지능이 높고 언어와 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지금은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죠.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동물적 인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자 최문형님은 책 <식물처럼 살기>에서 인간의 '동물화'에 따른 부작용을 지적하는데, 지금껏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이어서 잔잔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근대, 현대에 이르러 인간들은 자신들의 부도덕, 탐욕, 폭력과 공격성 등을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 동물세계의 원리로 합리화해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지구도 엉망이 되었다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했습니다.


“동물과 닮았다는 인간이 주인이 된 지구는 전쟁, 살육, 테러, 총기난사, 난민, 영토분쟁, 종교분쟁, 각종 바이러스의 창궐, 토양과 해양의 오염, 미세먼지, 온난화 등등으로 아주 만신창이가 되었다. 동종끼리의 전쟁 타종의 착취로도 성이 안 찼는지 인류는 생명의 터전인 지구조차도 마구 다루었다.”(17쪽)


인간은 식물들에게 배워야 한다


저자는 동물적 인간들이 둔 자충수를 무르기 위해선 기존의 동물적 인간 개념에서 벗어나 지구를 온통 뒤덮고 있었으나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온 존재인 식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존의 동물적 인간 사회 개념을 벗어나보자는 의견은 신선하다 생각했지만 식물들의 지혜를 배우자는 것에 대해선 의문이 생겼습니다. 지능을 가진 동물들처럼 어느 정도 소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식물들에게서 지혜를 배운다니요. 식물인간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숨만 쉬고 살아가는 식물들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소개하는 여러 가지 식물 이야기들을 읽어가면서 생각외로 인간이 식물들과 항상 함께 있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신성시되었던 나무들, 인간에게 행복과 기쁨뿐 아니라 유용함도 제공했던 꽃들, 무엇보다 인류의 문명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곡물과 채소,과일 등을 보면 식물과 인간의 관계는 동물들보다 더 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식물들을 그 동안 얼마나 하찮게 여겨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보면 식물은 인간과 지구상 모든 생물에게 산소와 수분,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특히 인간에겐 '공기와 물, 꽃과 열매, 건강한 흙, 약재' 등 수 없는 유익을 제공합니다. 저자가 대표적으로 예로 든 각종 치료제, 고추, 커피, 카카오, 코코넛 등이 없었다면 인간들이 누리는 행복은 심각하게 쪼그라들었을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말합니다.


“(식물은) 무기력해 보이지만 엄청난 초능력자다. 식물에게는 모든 것이 풍부하다. 자기가 충분히 쓰고 누리고도 나누어줄 여유가 있다. 우리도 그렇게 넉넉하게 살 수 없을까? (중략) 양로원에서 미용봉사를 하는 분, 김치와 밑반찬으로 고아원을 방문하는 분, 소외된 이들에게 지식나눔과 의료봉사를 하는 분들…(중략) 이런 작은 연민과 나눔이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중략)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주진 못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눈다면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누군가의 '보리수', '사과나무', '말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식물처럼, 나무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53-54쪽)


식물 세계의 공생과 생존경쟁


한편 식물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동물들이 필요합니다. 물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계를 둘러보면 식물과 동물의 공생 관계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저자는 식물들의 수분을 예로 들어 그 신비로움을 설명해 줍니다. 게다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통념도 깨뜨려 줍니다. 현대의 인간들이 곱씹어 생각해 보고 실제 삶에 적용해야만 하는 중요한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오랜 진화의 역사를 보면 생명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는지를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호의와 친절에 보답할 줄 아는 착한 개체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 꼭 대가나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움은 다른 도움을 부른다. 한 번 도와주면 언젠가 누군가에게서든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이기적인 집단이 더 번성할 것 같지만, 진화는 오히려 이타적 집단의 손을 들어주었다.”(74쪽)


모순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책에 따르면 식물들의 세계에도 생존 경쟁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식물들의 치열한 생존전략에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동할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가진 식물들은 수십억 년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어떤 식물들은 특수한 화학물질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물들은 18%정도까지는 피해를 참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독성물질을 사용하는데, 이는 동물들과의 공생을 위한 배려라고 합니다.


또 어떤 식물은 애벌레의 공격을 받으면 애벌레 위에 기생하는 말벌을 지원군으로 부르기도 하고, 자신들의 생장을 돕고 공격자들을 막기 위해 미리 주둔군을 두기도 한다고 합니다. 알면 알수록 신비한 식물들의 세계입니다. 저자는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것을 성공이라 여기며 추구해왔던 인간들에게 신비함과 지혜로 가득찬 '식물병법'을 제안합니다.


식물의 방어와 공격은 결코 자신의 성장과 실현을 방해하지 않으며 동시에 적을 말살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적들이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존재임을 안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공존한다. 그들의 삶의 기술은 그대로 하나의 예술이다. 인간도 그렇지 않은가? 힘들고 아픈 시간들도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적들의 핍박이 나를 얼마나 성숙하게 키워 주었는지 알게 된다.”(99쪽)


현대 인류에게 시급히 필요한 식물의 속성들


저자가 소개하는 식물들의 삶 중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상생과 공존이었습니다. 식물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면서도 이것을 다른 생명체와 나눕니다. 참나무 뿌리 주변 개미, 지렁이, 굼벵이 등, 나무 둥치의 이끼와 버섯, 나무 가지의 새 둥지, 땅을 건강하게 하는 것, 균류와의 상생 등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무한할 정도입니다. 무한한 다양성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를 유지하는 세계가 각종 차별이 만연한 인간 사회에도 깃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함께 식물의 우수한 적응력과 수용성 또한 급변하는 환경에 놓인 현대의 인간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식물은 강풍, 추위, 강한 빛, 홍수, 가뭄 등에도 스스로를 '무한변화'시키면서 환경에 적응한다고 합니다. 변화를 조절하는 능력인 '항상성'은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대 인류가 참고할 만한 속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자의 조언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들은 식물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들의 포용력과 넉넉함을. 그들의 뛰어난 생산능력과 생존기교를. 그들의 고독과 재활능력을. 그리고 그들의 기민성과 생활력을. '식물처럼 살기'는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우리도 결국 식물에게로 돌아가니까. 문명의 끝에서 결국 식물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식물처럼 살지 않으면 인간 또한 공룡처럼 멸종할 위기에 처할 것이다. 식물을 배우자. 급변하는 세상에서 비록 천천히 움직여도 식물처럼 적응하고 변화하여 항상성을 유지하자.”(155쪽)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저스티스맨

작가
도선우
출판
나무옆의자
발매
2017.06.07.
평점

리뷰보기


어떤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혹은 인생을 망칠 정도의 해를 입힌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할까? 그 사회의 법에 따라 정당하게 재판을 하고 형량을 선고하고 그 결과에 따르게 하면 되는걸까? 사람의 생명 혹은 인생을 법정에서의 형량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일까? 인터넷에 항상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쉼없이 손바닥에 올라오는 강력 범죄 뉴스와 그에 대한 처벌 소식을 듣다보면 이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나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적 처벌과 형벌제도, 특히 사형제도의 모순, 진정한 속죄와 용서 등을 고민했었다. 최근 출판된 소설이고 세계일보사가 주관하는 문학상(13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저스티스맨, 도선우 지음>을 읽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겹쳐진다.


두 소설이 정확히 같은 내용이나 주제를 다룬것은 아니지만 <저스티스맨>을 통해서도 <공허한 십자가>에서와 같이 범죄, 처벌, 속죄 등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에 더해 <저스티스맨>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종종 일어나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감정적 댓글 싸움, 가상공간에서 주어지는 익명성의 두 얼굴, 언론과 휘발성을 갖는 인터넷 여론, 사법 및 경찰 제도의 허점, 정의에 대한 생각들을 뽑아낼 수 있다.


일곱 건의 살인이 일어나는 동안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 인터넷에 급속히 퍼지는 연쇄살인 사건 현장 사진.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닉네임 저스티스맨이 운영하는 포털 사이트 까페에 사건의 동기와 사건들의 연관성을 추측한 글들이 올라오자 누리꾼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대중들이 저스티스맨의 가설에 열광하면서 까페에는 수십만 명이 몰려들며 사회적 이슈가 된다.


별다른 꿈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육군부사관학교에 지원한 '그'. 부사관으로 중사까지 근무하다 전역해 별다른 기반 없이 시작할 수 있는 보험설계사가 된다. '그'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만 그저 그런 일상에 찌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어느 날 회식 때 과하게 취한 나머지 인사불성이 되어 길거리 화단에서 토하고 변도 보고 쓰러져 잠들고 만다. 어찌보면 이 또한 여느 일상의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틑날 회사에 출근한 '그'는 '오물충의 만행'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발견한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자 그의 신분이 인터넷 상에 공개되기 시작한다. 결국 오물충이 '그'라는 것이 알려지고, '그'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 가족들의 비난에 표현할 수 없는 모욕감을 안고 '그'는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연쇄살인의 피해자들이 이 '오물충'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까페 운영자 저스티스맨의 주장이었다. 저스티스맨은 일곱 건의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소상한 근거들을 제시하며 누리꾼들을 설득해 간다. 오물충 사진을 처음으로 인터넷에 올린 고등학생, 오물충의 정체를 밝힌 오물충의 동창생, 이 사건을 기사로 써 전국민에게 오물충을 알린 인터넷 언론사 사회부 기자가 차례대로 피살되었다고 저스티스맨은 썼다.


이 세명의 피살자들은 죽을 만한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 일상에 찌들어 살다 술로 스트레스를 풀어보려다 한 두 번쯤 '그'와 같은 실수는 할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이 실수로 인해 '그'처럼 인생 전체가 망가지게 되었다면 그 가해자들의 책임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 사진 한 장을 인터넷에 올리고 흥미거리로 쓴 기사가 어떤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채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누리꾼들은 주로 “단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한 실수 혹은 고의를 저질러도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빳빳이 들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니”(38쪽) 라며 사회의 현실을 씁쓸해 했다. 그런데 네 번째 피살자에 대한 글에서부터는 누리꾼들의 반응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성년 성매매 동영상에 나온 한 여고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네 번째 피살자는 수리하던 휴대폰에서 우연히 이 동영상을 보고 성인사이트 운영자인 친구에게 보낸 전자회사 서비스센터 직원이었다. 이 동영상을 친구인 네번째 피살자로부터 건네받아 이를 인터넷에 처음으로 게시한 성인사이트 운영자가 다섯 번째 피살자.살인 사건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오물충의 복수란 개인적 관점에서 허술한 법망의 대리 집행자 탄생이라는 사회적 관점으로 변화된다.”


저스티스맨의 까페에 달렸다는 댓글들을 읽어가는데 마치 엊그제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실감난다. 이제 연쇄살인범은 마땅히 죽어야 할 놈들을 처단하는 킬러라고까지 불리며 누리꾼의 지지를 얻어간다. 하지만 여섯 번째 피살자인 청소년 성매매 영상을 찍었던 중년의 국어교사에게 중학생 딸이 있었다는 저스티스맨의 글은 누리꾼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고 그에 따라 반응도 엇갈렸다.


“어떤 누리꾼은 자신한테도 중학생 딸이 있으면서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과 청소년 성매매를 일삼는 파렴치한의 죽음을 막무가내로 통쾌해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신분과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아내의 심경과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딸의 형편 때문에 못내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중략)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죽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과 그 어떤 이유로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었다.”(118쪽)


어찌보면 해묵은 논쟁이지만 여전히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해법은 없는 문제가 아닌가. 소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어지는 누리꾼들의 댓글 싸움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익명성이 허용된 가상 공간에서 현실의 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우리 사회 누리꾼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생생하다.


살인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섯 번째 피살자가 살해되었던 장소인 한 펜션과 관련되어 있는 세 명의 사람이 더 살해된다. 그 펜션 주인을 농락했던 여행자 까페 운영자, 사회적 이슈가 된 저스티스맨의 까페를 비판했던 기초단체장을 살해했던 건달, 이 기초단체장과 연결되어 있던 국회의원까지. 소위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살해된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살인사건까지 일어나는데…


각 살인 사건에서 피살당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분명히 '나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잘못을 목숨으로 바꾸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사법제도의 허점을 노리거나 사법기관에 힘을 행사해 처벌을 빠져 나가는 이들, 혹은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인가를 묻게 되는 잔혹한 범죄자 등을 보게 될 때면 감정적으론 킬러의 출현을 바라게도 된다. 무엇이 정의이고 속죄인지 참 어려운 문제다.


이에 더해 소설에서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물결치는대로 휩쓸려 다니는 누리꾼들의 모습을 통해 자그마한 스마트폰 안에 세상이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나의 모습 또한 돌아보게 된다.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붕어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꼭두각시처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뜨는 기사만 수동적으로 클릭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기사만 취향대로 골라서 읽다 보니 그것이 오로지 그들이 아는 세상의 전부가 되었을 따름이었다. 타자의 숨겨진 사생활이나 파헤쳐 먹고사는 자들이 키보드를 두들겨 올리는 활자가 곧 이 세계의 실체라고 믿고 사는 붕어 인간들.”(241쪽)
 

저자는 각 살인 사건이 인물, 장소, 사건 등의 단서들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구성했다. 책을 들고는 마치 물 흐르듯 잘 짜인 각본으로 만들어진 추리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내리달아 읽었다. 스토리 자체도 재미 있고 그 안에서 제기하는 사회적 물음들도 의미가 있는 매력 있는 소설을 만나 기쁘다. 도선우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노동 없는 미래

작가
팀 던럽
출판
비즈니스맵
발매
2016.12.23.
평점

리뷰보기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


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개역개정)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말을 했던 사도바울이 <노동없는 미래>를 읽는다면 어떤 말을 하게 될까 궁금해집니다. 이 표현을 공산주의의 원칙으로 삼아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노동에 높은 가치를 뒀던 레닌이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궁금합니다.

 

매일 노동과 돈을 맞바꾸며 살고 있는 제게 '노동없는 미래'는 항상 꿈꾸지만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해 로봇에게 일자리를 내어주고 원하지 않게 이상향에 도달하게 되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몰린 노동없는 미래는 '실직'이라는 두렵고도 슬픈 미래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요? 팀 던럽은 인공지능, 로봇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기술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변화는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중심이 된 급료를 받는 일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것인가라는 물음 대신 일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일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고 유용한 부의 재분배 방식이 아니다. 이제 일은 최저 생활 임금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몸부림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처절해져 가고 있을 뿐이다."(16쪽)


일을 바라보는 위와 같은 관점은 제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가 굳이 일하지 않아도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자는 일의 과거와 현재, 기술과 일자리의 관계, 기본소득 제도 등을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불안감의 뿌리는 일자리에 대한 관점의 차이


고대에 '노동'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활동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었는데 반해 '일'은 자유인이 온전한 시민권과 인간적 성취를 추구하는 활동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엔 이 경계가 희미해졌을 뿐만 아니라 일 혹은 노동이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애덤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를 거치면서 노동은 개인적 생존 차원을 넘어선 유익하고 '생산적'인 일로 격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일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자긍심을 앗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은 상품이 되었고, 일자리는 귀해졌습니다. 때문에 고용인과 고용주의 불평등한 관계는 심화되었습니다. 여기에 막스 베버의 '개신교적 노동 윤리'가 등장해 자본주의와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천직 혹은 소명이란 개념이 등장합니다. 천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일을 기계들이 대신하는 것에 큰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라면 아마 기꺼이 로봇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라고 말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듯한 상상입니다. 기계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가진 불안감의 뿌리는 일에 대한 관점에 있습니다.


"우리 삶을 일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 일을 앗아가는 모든 기술을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이는 현재 우리의 경제적 행복이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가진 일자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47쪽) 


기술과 일자리, 그리고 기본소득


저자는 묻습니다. "과연 로봇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인가? 그리고 과연 내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자동화를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일의 미래와 관련되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고용의 미래'라는 보고서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를 살펴봅니다. 그러면서 '자동화와 노동이 상호 보완 작용을 하면서 생산성과 수입을 증대시키고 노동 수요를 늘린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양쪽의 입장엔 각각의 전제와 가정이 있기 때문에 전망도 엇갈릴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팀 던럽은 "인간이 미래에 관해 얘기하면, 신들이 웃는다"라는 중국 속담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증거들을 면밀히 살펴 가장 그럴듯한 미래를 추측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보고서들에는 많은 변수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할 여지가 항상 있다는 것이죠. 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로봇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인가 하는 의문 속에 갇혀 있지 말고, 일의 미래에 대해 더 나은 사고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무도 우리가 겪을 커다란 변화를 부정하지 않으며, 그래서 의문은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로 맞춰지게 된다. 우리는 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걸까?"(130쪽)


저자는 자동화 시대의 일자리를 이야기하다 갑자기 기본소득을 말합니다. 뜸금없는 것 같지만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보면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사람들이 낭비하고 나태해지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우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로 인한 일자리 감소 및 실업에 대처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입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미래로 돌아가는', '탈 노동'이라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할 것인지, 복지와 다양한 노동 보호 정책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제거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유급 고용 중심 체제를 벗어나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뒷받침되는 세상을 꿈꿔볼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의 재능을 소득을 올리거나 이익을 내는 데 쏟지 않고 개인적 만족을 위해 쓸 수 있는 세상, 또 급여나 각종 수당을 못 받게 되거나 일자리 자체를 잃게 될까 두려워 늘 시간 맞춰 출퇴근하고 온종일 뼈 빠지게 일하는 게 아니라 가족 및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세상 말이다."(222쪽)


말미에 인용된 제임스 퍼거슨의 주장이 신선합니다.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면 하루를 배부르게 해줄 것이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 먹고 살수 있게 해줄 것이다'라는 격언은 저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개념입니다. 하지만 제임스 퍼거슨의 주장처럼 지구촌 전체에서 나오는 수확물의 일정 몫을 사람들이 나누어 받게 된다면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울 필요 없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일자리 상실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저자가 제안하듯 '탈 노동'의 미래에 대해 상상해 보고 논의해보면 어떨까요? 새로운 정부에서도 일자리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일'에 대한 개념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조금 더 나아가 '일의 대안'을 찾아보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3색볼펜 읽기 공부법

작가
사이토 다카시
출판
중앙북스
발매
2016.02.11.
평점

리뷰보기


“내가 사랑하는 책들이 있다. 그 생김새와 냄새는 물론이고, 그것이 전해준 약속까지 모두 다 사랑한다. 때로 그 책들은 너무나 흉측하게 변해 있기도 하고, 역겹고 실망스러운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그래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참 신기한 것은 흰색 바탕 위에 검은 글씨가 빼곡히 박혀 있는 그 평범한 물건들에서 매번 하나의 신세계가 솟아나온다는 사실이다.”


“책은 결코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책은 인생이다. 진지하고 난폭하지 않은 삶, 경박하지 않고 견고한 삶, 자긍심은 있되 자만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긍지와 소심함과 침묵과 후퇴로 어우러진 그런 삶이다. 그리고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초연히 사유의 편에 선다.”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 중에서 -


이토록 책을 사랑했던 한 독서가 샤를 단치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에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책 자체를 소중히 다뤄 밑줄을 긋거나 책장을 접지도 않을 것이지만, 누군가는 똑같이 소중한 마음으로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밑줄도 치고 빈 공간에 메모도 하면서 책을 읽을 것입니다.


책 자체를 다루는 방식 만큼이나 책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접근방식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오랜 독서가라면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틀이 잡혀있을 것 같고, 반면 이제 막 책을 읽기 시작한 이들은 어떻게 책을 읽으면 좋을지 몰라 막막할 것도 같습니다. 이런 초보 독서가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습니다. 제목도 표지도 매력적이지 않지만 한 권의 책을 나름 재미있게 읽고 나의 것으로 소화시키는데 효과가 있을 것 같은 <3색볼펜 읽기공부법>입니다.

 

저자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의 대가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것과 상통하는 생각을 전합니다. 저자는 독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에 다가가는 좋은 훈련”(81쪽), “독서는 정보 습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상과 철학을 폭넓게 수용하는 행위”, “독서는 여전히 유효한 공부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86-87쪽) 


그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저자가 추천하는 방법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3색 볼펜'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책을 읽을 때 자유롭게 밑줄을 그으며 읽기를 권합니다. 책이 지저분해지기에 밑줄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시험삼아 책에 밑줄을 죽죽 그어보니 나름의 쾌감이 있습니다. 어떤 책을 '나만의 책'으로 삼는다 생각하니 크게 망설이지 않고 줄을 그을 수 있었습니다.


“책에 줄을 긋다보면 자연히 문장을 읽는 데 열중하게 된다. 즉, 문장에 자신을 더욱 강하게 관여시키는 것이다. 손을 움직여 줄을 긋는 육체적 행위는 문장과 자신의 관계를 강화시킨다.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강한 유대감이 책과 자신 사이에 생겨난다.”(28쪽)


“3색볼펜 읽기는 독서의 '신체감각'을 기술화하는 방법이다. 책을 읽을 때 우리의 감각은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다. 줄이라는 각인을 통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신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224쪽)


저자가 3색볼펜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결국 저자가 제안하는 책읽기 방법은 객관과 주관을 분리해가면서 책을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즉, 객관적으로 중요하다 생각하는 곳에는 파란색과 빨간색 밑줄을, 주관적으로 중요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초록색 밑줄을 그으며 읽는 겁니다.


“3색 볼펜 읽기의 최대 목적은 주관과 객관을 전환하는 기술을 익히는 데 있다.”(59쪽)


특히 객관적인 영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자의 독특한 표현이 힘있게 담긴 부분엔 빨간색으로 표시합니다. 문장에 맛이 있는곳 혹은 자신의 취향이 투영된 관심거리에는 초록색 밑줄을 사용합니다. 저자는 여러가지 책을 읽을 때 신체와 관련있는 표현 중 재미 있는 곳에 초록색 밑줄을 그어두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관심있어 하던 정보를 꾸준히 모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안하는 것과 같이 책을 읽는 훈련을 하게 되면 저자가 말했듯이 “객관적인 요약 능력을 키울 수 있고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곳을 구별해냄으로써 주관적인 생각을 단련”(88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책을 읽는 초보 독서가들에게 유익한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가면서는 모든 독서가들에게 통찰을 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줄을 긋는 것은 타인의 강제가 아닌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달려있다. 스스로 책을 더욱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방식이 곧 책을 더욱 자유롭게 읽는 방식이지 않을까?”(132쪽)


“3색의 색 구별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훈련으로써 중요하다. (중략) 줄을 그으며 읽어나가는 동안 사고를 깊게 하거나 능동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143쪽)


이렇게 책을 읽고 이해하게 되면 종종 무엇인가를 쓰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저 역시 처음엔 그냥 흥미있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한 번 읽었던 책이 그냥 머릿속을 흘러가버리는 것 같아 짧게 메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읽기와 쓰기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자도 효과적인 읽기 방법을 이야기하다 글쓰기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는데 그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읽기와 쓰기는 별개의 행동이지만 서로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만약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기라는 행위의 축적을 기반으로 쓰기라는 스킬이 생겨난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중략) 쓰기라는 작업은 방대한 읽기 위에 성립되는 빙산의 일각과 같다. 수면 아래에 보다 방대한 독서량이 존재할수록 쓰기는 당연히 쉬워진다.”(166-167쪽)


“비평을 잘하는 요령도 이와 같다. 오히려 줄거리에서 약간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데 주목해보라. 결론이 해당하는 내용만 가지고 풀어나가다보면 결국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글을 쓸때는 반드시 자신만의 엣지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논쟁이나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는 지루한 문장, 즉 죽은 글이 될 수 있다.”(172쪽)


'죽은 글'. 무엇인가를 쓰는 사람들이라면 가지고 있을 고민이 고밀도로 표현된 말인 듯 합니다. 이 책을 읽은 후 어느 새 저도 책과 함께 3색볼펜을 들고 책읽기를 연습해 봅니다. '나만의 책'을 갖기 위해서, 그리고 '쓰기'라는 빙산의 일각을 물 위로 올려놓기 위해서. 어찌보면 촌스러워보이는 <3색볼펜 읽기공부법>.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닐지라도 어떤이에게는 도움이 되는 책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작가
황석영, 이재의|전용호
출판
창비
발매
2017.05.15.
평점

리뷰보기



지난 5월 18일 37주년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자들은 광주 민중항쟁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9년만에 공식적으로 제창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촛불 정부 탄생으로 이루어진 올바른 역사인식 회복의 서곡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이명박 정부때부터 왜곡되고 폄훼되었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위상 바로세우기와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부상자들에 대한 진정한 위로와 상처 치유가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잔혹한 국가폭력을 행사했던 전두환, 노태우 정부가 물러난 후 90년대 민주정부 하에서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 지속되었습니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민중항쟁의 진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졌고, 여러 가지 한계는 있었으나 폭력을 행사한 주범들을 사법적으로 단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 진실이 남아 있으며, 당시 시민들이 입은 깊은 상처는 3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세대들까지 아우르는 온 국민에게 5.18 광주 민중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자신을 희생하며 호소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 기반이 되었던 책, 1980년 오월의 광주를 기록했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개정판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온갖 어려움 끝에 1985년 출간되었으나 정부에 의해 금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지의 표지 상태로 시중에 배포되고 입소문으로만 몰래 판매되었는데도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책입니다.


광주 민주항쟁의 고전, 촛불 시민에게 다시 오다

이 책이 32년만에 개정증보판으로 2017년의 촛불시민에게 찾아왔습니다. 주저자 중 한 명인 이재의 님이 책의 말미에 개정판을 내며 쓴 짧은 글에 이 책이 역사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난관을 뚫고 초판이 세상에 나왔는지를 알게 되니 더 숙연해집니다. '항쟁의 진상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민주 시민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재의 님이 밝히는 이번 개정판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넘어넘어> 초판이 피해자인 광주시민의 증언과 기록만을 토대로 집필된 데 반해, 개정판은 그 이후 밝혀진 '계엄군의 군사작전' 내용과 5.18 재판 결과를 반영하여 '역사적/법률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5.18을 현장에서 목격한 내외신 기자들의 객관적인 증언도 실었다. <넘어넘어> 초판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인식과 정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개정판에서는 초판과 달리 증언자들의 실명을 밝혔다. 다만 계엄군 관계자 가운데 하급 지휘관(대위, 중대장 이하)이나, 사병들의 경우 익명으로 처리하였다. 법률적으로 처벌받지 않았어도 현장에서 진압작전을 지휘한 책임이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대대장들의 이름은 실명으로 밝혔다."(584쪽)

지난 두 번의 정부가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지독히도 훼손하고 싶어했던 5.18의 민주적 가치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이 책이 다시 읽혀야 합니다. 또한, 저자 황석영 님이 쓴 것처럼 옛 권위주의 체제의 기득권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던 '타협적 민주화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도 1980년 광주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촛불 혁명을 이뤄가고 있는 우리는 진실한 5.18의 기록을 고통스럽지만 다시 한번 마주하며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 책을 '지금까지 나온 광주항쟁에 관한 여러 기록 가운데 가장 세밀하고 고전적인 저술'이라 평가합니다. 그는 '광주의 비극이 서울과 워싱턴 두 나라 정치권력의 합동작품이었다'는 점을 고통스럽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이 한국의 군사독재자들을 수십 년간 지원한 결과로 광주항쟁이 일어났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민주의 가치를 피로서 지켜온 대한민국 국민에 경의를 표합니다.

왜 광주였는가?

1980년 광주의 비극에 도화선이 된 사건은 이전 해 유신독재에 항거해 일어났던 '부마항쟁'과 이후 이어진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이었습니다. 책의 시작 부분엔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 이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부상 배경과 과정, 그리고 5월 민중항쟁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사건들이 압축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당시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에 비해 이 열기를 담아낼 만큼 준비되지 못했던 민주운동 진영과 조직적이고 공격적으로 권력 찬탈을 준비 했던 신군부의 모습이 대조되어 안타까웠습니다.

게다가 당시 운동권 인사들은 미국의 입장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비관적 전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자주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학생 시위를 필두로 저항의 물결이 일어나자 군부는 미국의 동의 하에 군대를 동원해 민주화 시위 진압 작업을 착실하게 진행했습니다. 5월 13-14일 전국의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입니다. 당시 군부는 '북한의 적극적인 대남활동 및 비정규전 위협이 예상된다'는 이유를 대며 소요 진압을 위해 군대 동원을 준비합니다.

치열해지던 학생시위 속에 서울에선 총학생회 대표들이 격론 끝에 시국 추이를 관망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시위를 중단하기로 합니다. 일명 '서울역 회군'을 결정합니다. 이와는 달리 광주에선 5월 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횃불시위'로 민주화대성회가 개최됩니다. 결국 군부는 17일과 18일에 걸쳐 국무위원을 겁박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결의하게 하고 국회까지도 점거함으로써 쿠데타를 완성해갑니다.

광주/전남 지역의 반응을 주시하던 신군부는 군대를 배치해 학생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이 연행됨에 따라 총학생회 지도부는 힘을 잃게 되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저항의 불길은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5월 18일 시위 학생들이 공수부대와 대치하다 공수대원들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폭력을 가한 것이 항쟁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출처: 5.18 기념재단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대학생에 이어 고등학생들까지도 희생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광주 시민들은 더욱 비장해졌습니다. 책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함 앞에 전부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위기감이 '잠재되어 있던 민중의 원초적 생존 본능의 뇌관을 건드렸다.'라고 당시 시민들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민들의 저항이 점점 더 거세지자 군인들의 폭력도 더욱 강력해졌고 결국 고교생 한 명이 총에 맞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이같은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이 때에도 언론은 민중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평소처럼 연속극이나 오락 프로그램만 방영되고 있었다. 나라의 한편에서는 '집단적인 인간사냥'이 벌어지는데, 텔레비전에서는 다리를 흔들어대며 춤을 추는 출연자의 모습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배신감과 타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다음날 시위대가 문화방송국을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120쪽)

20일부터는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격해지시 시작하자 정부는 공수부대의 투입을 늘려갑니다.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라 매도하는 진압군을 향해 더욱 분노합니다. 금남로에는 '어린 꼬마 손을 잡은 할머니부터, 학생, 회사원, 주부 등 모든 계층, 전시민' 수천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날 저녁 시간엔 대규모 차량시위가 조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저자들은 이 때를 '민중 스스로 역사의 전면에 자신의 온 생애를 던졌던 항쟁의 정점'이라고 평가합니다.

출처: 5.18 기념재단


극단적으로 대치되던 전투는 결국 시민을 향한 군인들의 발포로까지 치닫게 되면서 잔인한 학살로 이어지게 됩니다. 당시 헬기에서도 총을 쐈다고 하니 군인들은 시민들을 적 혹은 폭도로 여긴것이 틀림 없어 보입니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시위대도 예비군 무기고 또는 광주 주변 지역의 경찰서 등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진압군에 맞서게 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됩니다. 군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국민들을 향해 총을 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흑백 이념으로 세뇌된 병사들은 광주시민의 저항을 '용공부낮들의 준동'으로 인식하고 그들을 '섬멸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광주시민은 '국민'의 구성원이 아니라 '적'이 됐고, 병사들은 양심의 거리낌 없이 그들을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249쪽)

잠시 동안의 해방 공간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계엄군은 잠시 물러나고 시민들은 약 6일 동안의 해방기간을 맞이합니다. 저자들은 이 기간을 "'특정 집단이나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민중의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돼 억압체제를 무너뜨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도청 앞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분수대 위로 올라가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정한 형식이나 제약도 없이,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순전히 자연발생적으로 궐기대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나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개인적인 체험을 말했지만 시민들은 이를 통해 서로를 공감하고 일체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출처: 5.18 기념재단


해방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은 계엄군과 여러차례 협상을 하게 되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또한 신군부 입장에선 광주에서의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까지 확대될 경우 안정적으로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에 쉽게 협상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계엄군은 25일 광주를 '소탕'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27일 공수부대에 의한 잔혹한 도청진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광주 민중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선 현재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남겨진 과제를 말해줍니다. 당시 희생되어 암매장된 70여명의 사람들이 37년이 지난 현재에도 행방불명자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사체를 직접 묻었던 군인들의 자기고백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책에 따르면, 1988년 광주 국회청문회를 통해 광주 학살의 진상이 국민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항쟁의 진실은 규명되지 못하고 학살 책임자들의 반성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같은 해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는 전두환,노태우 등 고위지휘관 9명을 5.18책임자로 고소, 1994년 시민사회단체가 5.18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 포함 35명을 고발하였으나 각각 무혐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어 공소권 없음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출처: 5.18 기념재단


이후 각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1997년 12.12쿠데타와 5.18학살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대법원은 12.12쿠데타를 군사반란으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신군부의 진압을 내란으로 판정'했습니다. 하지만 학살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장지휘관들은 전혀 처벌되지 않았고, 책임자들이 법정에서 남발한 위증들에 대해서도 추궁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은 철저하지 못한 책임자 처벌은 역사적 진실 왜곡과 항쟁 과정에 대한 거짓 주장들이 난무하게 했습니다. 행방불명자 확인, 발포책임자, 현장지휘관에 대한 처벌, 희생자들에 대한 온전한 명예회복과 상처 치유, 5.18의 진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주장을 펼치는 이들에 대한 처벌 등 대한민국에 남겨진 과제들이 새 정부에서는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작가
기시미 이치로
출판
인플루엔셜
발매
2017.03.15.
평점

리뷰보기


제목에 '혹' 하게 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의 책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가 그랬습니다. 제목에 더해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풀어야 할 본질적인 숙제'라는 부제에도 눈길이 갔습니다.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일 것만 같았던 제 부모님에게서 소위 말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게 되는 최근 몇 년 동안 종종 생각하게 되는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20대 때 뇌경색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병했고, 50대 때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꽤 오랜 기간 동안 돌봤다고 합니다. 본인도 예상치 못한 심근경색으로 투병을 하며 꼼짝하지 못하는 기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과 생각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부모님과의 인생을 통해 가졌던 “움직일 수도 없고 의식마저 잃었을 때, 과연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나의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기시미 이치로는 이 물음에 진부한 대답을 합니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노화'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보자는 겁니다. 저자는 인간 혹은 인생의 가치 평가 기준을 생산성에서 '존재'로 옮겨보자고 제안합니다.


"생산성으로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뭔가를 달성하는 것, 생산적인 것만을 유일한 가치로 믿으며 살아온 사람은 나이가 들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사실을 비참하게 여깁니다.(중략)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주목하라는 뜻입니다.”(50쪽)


이런 생각은 기시미 이치로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로부터도 들을 수 있는 제안입니다. 하지만 진부해보이는 대답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그것이 진리 혹은 사실이라서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표지나 책 날개에 있는 문구를 보고 기대했던 독자들은 저자의 대답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제안은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때 고려할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하지만 막상 가족이 혹은 자신이 크게 아파 몸져 눕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 단지 숨이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적응해 가는 데에는 저자가 아픈 부모님과 오랜 시간 지내온 것처럼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동안에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사자가 자신의 인생에 가치를 느끼도록 돕는 것 뿐입니다.


책의 중반부에서부터는 저자가 치매에 걸렸던 아버지의 인생을 차츰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실제로 치매를 앓는 부모님을 모셨던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는 절절하게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지금, 여기' 현재만을 살았다는 표현, 부모님의 기억이 사라졌을 때 부모님과 함께 살아온 세월 속 자신 또한 지워진 것 같은 기분 등이 마음에 깊이 남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이 취했던 태을 기반으로 모범 답안과도 같은 조언들을 써 내려갑니다. 어떤 문제에는 모범 답안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치매에 걸린 부모를 둔 자녀들에게 더욱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노인이 된 부모를 둔 대부분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만 보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라.”
“과거를 잊어버렸다면 그 시점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과거와 현재의 구별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어도 굳이 일깨워 줄 필요는 없다.”
“예전에는 뭐든 할 수 있었던 이상적인 부모님의 이미지를 머리에서 지운다.”


“자식 눈에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모님의 현재가 불행한 것은 아니다.”
“부모님은 오늘 할 수 있었던 일을 내일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것에 주목하자.”
“때론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된다. 그렇게 믿고 싶다.”


“부모님을 간병할 때 진지하되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부모, 자식이라는 역할의 가면을 벗고 한 인간으로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부모님을 좀 더 잘 간병하고 싶겠지만,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할 수 있는 일뿐이다.”
“간병에는 왜(why)가 없다. 어떻게(how) 밖에 없다.”


저자는 말합니다. “스스로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을 가치 있다고 여긴다.”(224쪽)고. 이것은 병을 앓고 있는 노부모에게도 그들을 돌보는 자식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좀더 확장하면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해도 될 듯 합니다. 읽으면서 '진부한데?' 혹은 '뭘 이런걸 책으로까지 썼어?'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시미 이치로가 인생에 대해 언급한 부분들은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만합니다.


“인생을 출발점과 목적지가 있는 길에 비유했을 때, 효율적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과연 효율적으로 살고 효율적으로 죽을 필요가 있는 걸까요? 길 위에서 지정거리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시간을 잊고 놀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꽤나 먼 곳까지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238쪽)


주변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느라 애쓰며 허덕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버스를 놓친 저자가 자신의 아들과 다음 버스를 기다릴 때 깨달았던 '어린 아들의 시간이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흐른다는 사실'이 인상적입니다.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애써 돌진하기보다는 기시미 이치로가 말했듯 순간순간의 움직임이 완전한 형태를 이루는 '춤'을 추는 것 같은 인생을 걸어볼까 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