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크러시 세트

작가
페넬로프 바지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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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노벨위원회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발표했을 때 온 세계가 놀라워했습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에 55년만에 여성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물리학상은 1901년부터 2018년까지 112번 수여되었는데 그 중에 여성은 몇 명이었을까요? 네, 2018년을 포함해 단 세 명이었습니다. 이는 물리학상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닙니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688명 중 여성은 단 21명 뿐입니다.

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의 10%정도라고는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성별비율은 과학분야 종사자의 성비에 훨씬 못미칩니다. 왜 그럴까요?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노벨상을 탈 만큼 뛰어나지 않아서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코펜하게 대학 Liselotte Jauffred 교수와 동료들은 성별에 따라 노출되는 환경이 노벨상수상자 성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했습니다.(Gender bias in Nobel Prizes)

Liselotte Jauffred 교수팀은 여성연구자들이 그들의 경력상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까지 많은 편견과 장애를 뚫어야 한다는 점이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의 사례로 결혼이나 육아는 남성연구자들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여성연구자들에게는 경력상의 장애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노벨상 수상자의 성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저자들인 케르스틴 뤼커와 우테 댄셸도 지적했듯이 세계사 속에서 여성들은 비범한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일부 사람들이 성평등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에 이르기까지도 성별이라는 거대한 벽이 여성들을 막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왔습니다. ‘여자가 왜 이렇게 힘이 세?’, ‘여자가 무슨 과학자가 되려고 해?’, ‘여자가 무슨 의사가 되겠다고’, ‘여자는 간호사나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하는거지’…마치 선천적으로 여성에게만 마땅한 일이 있는 것 같은 편견은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증명한 여성들이 여기 있습니다.
 

  
페넬로프 바지외라는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했던 대표적인 여자들 30명에 대한 이야기를 <르몽드> 공식 블로그에 연재했습니다.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린 이 연재물을 모아 저자는 <걸크러시 1, 2>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냈던 여자들의 삶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산부인과 의사부터 아파치 부족의 전사, 최초의 여성용 수영복을 고안한 수영선수, 무민 시리즈의 창조자, 무용가이자 레지스탕스 활동가, 등대지기, 황제에 이르기까지…세상의 편견을 깨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당당히 걸어나간, 시대도 문화도 다양한 여성 15인의 호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걸크러시 1 소개글)

“래퍼, 우주비행사, 탐사보도의 창시자, 동물의 대변인, 육상 선수, 화산학자, 싱어송라이터, 페미니스트 활동가, 과학수사의 선구자, 록 스타까지…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당시 사회의 규범에 맞서 싸우고 스스로 인생의 새로운 막을 훌륭하게 열어젖힌 여성 15인의 호쾌하고 감동적인 삶의 초상!”(걸크러시 2 소개글)


이들 중 ‘무서움’이 전공인 배우 마거릿 해밀턴(1902~1985)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 배우라고 하면 예쁜 외모가 주된 경쟁력이었으나 마거릿은 자신의 장점인 무서운 외모를 내세워 배역을 따냈습니다. 마거릿은 1938년 오즈의 마법사에서 불의의 화재 사고에도 불구하고 마녀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하지만 마녀가 너무 심하게 무서워서 마거릿의 촬영분 절반 정도는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마거릿은 무섭게 하는 걸로는 최고라는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코를 고치라는 충고에 “왜? 내 코가 얼마나 훌륭한데! 미쳤나봐 그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존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책에는 해당 인물에 대한 주된 사건 혹은 에피소드가 너무 짧게 압축되어 있어 감질맛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소개한 인물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게도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등대지기로 소개된 조르지나 안출라타(1908~2001)에게도 눈길이 갔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을 갖는 것이 꿈이었던 조르지나는 미국 롱아일랜드 해안 절벽에 집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해안은 해를 거듭할수록 계속 침식되어 그녀의 집까지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조르지나는 포기하지 않고 갈대와 모래주머니를 이용해 배수 시스템을 만들어 해안절벽의 침식을 막아냈습니다.

그 때 롱아일랜드에 있던 등대 하나도 동일한 위험에 처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등대를 지키고 싶어했으나 관할단체에선 예산 등의 이유로 등대 폐쇄를 결정합니다. 그 때 조르지나가 나서 자신의 집에 적용했던 배수시스템을 등대에도 만듭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요. 마을의 상징을 지켜내고자 했던 조르지나와 그 동료들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 또한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이 책에는 대여섯 페이지로 아주 간략하게 소개된 인물의 더 깊은 삶을 찾아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엘리자베스 코크런(핑키,1864~1922)입니다. 핑키는 홀어머니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직업전선에 나섰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15세에 초등학교 교원 양성학교에 입학하지만 학비가 없어 퇴학당하고 맙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핑키는 ‘여자들은 이럴 때 쓸모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고 분노에 차 해당 기사를 쓴 논설위원에게 편지를 씁니다.
 

“기사: 여자의 자리는 집이다. 여자가 바느질이나 아이 돌보기를 등한시하면 사회는 무너진다. 직업이 있는 여자란 괴상망측하다.”

“핑키가 논설위원에게 : 당신이 모르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전하자면, 그 세상에서는 여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답니다.”(68쪽)


이를 계기로 핑키는 기자가 되고(필명을 넬리 블라이로 함) 여성 노동자들의 빈곤, 이혼을 원하는 여성이 거쳐야 하는 지난한 투쟁, 공장의 근로조건 등을 기사로 썼습니다. 넬리의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해당 기업들은 신문에서 광고를 빼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결국 넬리는 해당 신문사를 나와 당시 조지프 퓰리처가 이끌던 ‘뉴욕 월드’에 지원합니다. 넬리는 정신병원을 취재하라는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23세에 ‘뉴욕 월드’ 기자가 됩니다.
 

“넬리 표 기사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우선 사회의 치부를 들추는 취재 대상 선택. 예를 들자면 로비, 빈곤층 의료 실태, 수감자 확대…하지만 더 중요한 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당시 수감자, 극빈자, 파업 노동자 등의 편에 서서 사건을 전하는 기자는 넬리가 유일했다.”(71쪽)


넬리는 세계일주를 하며 기사와 책을 쓰기도 하고, 결혼한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아 큰 성공을 거둬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던 건강보험, 높은 급여, 도서관 등을 제공하는 근로환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참을 수 없는 기자 근성으로 오스트리아로 떠나 종군기자로 전쟁의 참상을 보도했습니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사회 부정부패, 노동자의 삶, 고아들의 인권, 각종 부조리’ 등을 지적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녀가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은 탐사보도의 창시자인 넬리에게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자”라는 이름을 부여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뉴욕 기자협회는 그녀를 기려 ‘넬리 블라이’상을 만들고 훌륭한 성과를 내는 젊은 기자에게 매년 상을 수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위에 아직도 ‘여자가 무슨~’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그들 눈 앞에 이 책 두 권을 들이밀면 되겠습니다. 저자는 단 30명의 인물만 짧은 이야기로 압축해서 소개했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찾아갔던 여자들에 대한 입문서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각 주인공들, 그리고 그들 곁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삶을 더 깊이 있게 찾아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전태일평전

작가
조영래
출판
돌베개
발매
200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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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대한민국은 이 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날은 청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짧은 22년의 생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기일이 돌아와서 지난 달 전태일 열사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최저임금, 탄력근로제, 주당 노동시간, 청년 일자리, 광주형 일자리 등 노동관련 이슈들을 접하면서도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노동 운동사에 상징적 인물이 된 전태일 열사의 사상과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의 삶을 열정적으로 전해준 <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을 통해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죽어가면서도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당연한 권리를 찾아주고 싶었던 청년 전태일의 마지막 부탁은 그의 죽음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1970년 vs 2018년

지금 우리 나라 어느 노동현장도 전태일 열사가 일하던 1960년대 평화시장의 상황만큼 열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밀폐된 닭장’ 같은 작업장에서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을 일하는 십대 여공들. 한 달 휴일은 기껏해야 이틀. 그렇게 일해봐야 일터로 오는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턱없이 낮은 임금. 일하는 기간이 늘어갈수록 얻게 되는 것은 직업병으로 인해 병들어가는 몸.

‘괜찮은 일자리가 없네’, ‘청년 실업률이 높네’, ‘비정규직이 늘어가네’ 하는 등의 이슈들을 보며 노동자들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딱 전태일 열사의 세대인 부모님들에게서 종종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로 살아오신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 세대가 겪은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요즘 세대가 물러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전 세대들 말처럼 물론 절대적인 노동환경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끊이지 않고 늘어만 가는 외주화와 효율추구로 인한 노동자들의 죽음 소식, 커져만 가는 정규/비정규직 임금격차, 법으로 강제하려고 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장시간 노동 문제 등을 생각하면 여전히 우리 사회 노동환경은 생각보다 많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전태일 열사가 법을 준수하라며 외쳤던 당시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4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법정 1일 노동시간은 8시간입니다. 물론 주5일 근무, 최근의 주당노동시간 제한 등 노동시간 줄이기에 진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법의 실효성, 연간 노동시간 등을 고려하면 1일 8시간 노동은 일부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꿈과 같은 일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노동 문제가 단칼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노동자, 기업, 정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랜 시간 논의를 지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과거 독재 및 권위주의 정부들, 그리고 기업들은 그렇다쳐도 촛불 시민의 지원으로 권력을 위임 받은 현재 정부에서조차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이달 초 현 정부의 지지부진한 개혁과 후퇴하는 노동제도 등을 규탄하는 민중대회가 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민심의 실망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태일 열사도 이와 흡사한 실망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각성하게 된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사람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는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한마디도 못하고 살아왔던 자신과 당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보회 회원들 몇몇과 함께 전태일 열사는 당시 노동현장 실태 조사를 벌입니다. 설문 응답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근로기준법 준수여부를 감독하는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노동현장을 감독해야 하는 공무원의 반응은 냉랭했고 그를 내쫓다시피 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전태일 열사는 노동청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평화시장 노동조건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노동자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정부기관이 오히려 기업주의 편에 서 있는 답답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기업들을 관리해야 할 정부기관은 오히려 기업과 결탁하여 기업의 편에 서 있는 절망적 현실에 전태일 열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투쟁밖에 없었습니다. 2018년의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촛불을 들었던 노동자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면 촛불 정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언론들이 툭하면 왜곡하는 고임금 노동자들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로만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경험했던 좌절을 2018년의 노동자들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광주형 일자리’와 전태일이 꿈꿨던 모범업체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전태일 열사였지만 노동현장을 경험하면서 투쟁과 더불어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이름하여 모범업체.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직원들을 인간답게 대우하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구상하며 사업계획서를 썼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노트 30페이지에 걸쳐 필요한 설비, 가격, 인원, 인건비, 생산제품 종류와 판매 방법 등을 상세하게 담은 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사업계획은 당시로선 혁명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전태일 열사 본인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목적과 취지는 훌륭하지만 이를 위해 자본을 대줄 만한 투자자를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업계획서에 담긴 정신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목적>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226쪽)


전태일 열사가 쓴 모범업체 사업계획서에 있는 업체 설립 목적을 읽으면서 최근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이슈가 떠올랐습니다. ‘광주형 일자리’는 새로운 노동시장 혹은 기업에 대한 구상입니다. 노동자, 기업, 정부(지방자치 단체)가 함께 힘을 모아 노동자는 일할 만하고 기업가는 투자할 만한 기업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노동자의 임금 부문의 양보 등 다양한 사회적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사IN 2018년 12월 11자 기사(우리시대의 질문 ‘광주형 일자리’)에서도 지적했듯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정권 변화에 따른 일자리의 지속성, 경영 책임, 생산 제품의 종류, 연봉 문제, 하청 구조 개혁의 비현실성, 헌법상 보장된 노동권 제한 등 문제가 될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기존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을 설득할 만한 당위성이 있느냐에서도 부족해 보입니다.

정부입장에선 신속하게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다고 성과를 알리고 싶을 것입니다. 기존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 임금수준 등 앞으로 일어나게 될 갈등에 불안하기에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정부, 모델 기업에 투자할 기업, 기존 산업에 속한 노동자들, 그리고 새로운 노동구조에 뒤따를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전태일 열사의 모범업체 설립 목적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전태일 사상을 되새길 때

<전태일 평전>에는 그의 불우했던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죽음까지가 영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사, 배움에의 열망, 노동현장에서의 경험 등을 접하고나니 전태일 열사의 인간적인 모습이 깊게 다가옵니다. 험난한 노동환경에서 당연하게 강렬한 노동투사가 될 줄로만 알았는데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해 준 평전을 통해 그가 왜 그렇게 투쟁할 수 밖에 없었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태일 열사가 가장 밑바닥의 삶을 체험하면서 얻은 인간과 인간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 “나의 또 다른 나”라는 타인에 대한 인식,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노예의식에서 벗어나 주체적 인간으로서 바로 서는 각성, 다른 이들까지도 주체성을 가지도록 함께 이끄는 연대행동의 사상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마주했던 진정한 적은 기업주도 아니었고 정부 기관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나와 있듯이 전태일 열사가 싸워야 했던 대상은 “억압하는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와 힘”이었습니다. 자신이 본 인간과 사회의 모순, 그것을 가져오게 한 억압적 구조와 그 파괴적 영향을 전태일 열사는 폭로하고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 시대 노동절 행사 때도 떠들어대던 “이 나라 경제성장은 묵묵히 땀흘려 일하는 산업 전사들의 헌신의 덕분”이라는 말. 너무나도 익숙해서 진리같이 여겨지는 이 말. 우리 사회는 어쩌면 경제성장 우선이라는 미신을 붙들고 여전히 다른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부, 국회, 노동자, 기업가 등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헝거

작가
록산 게이
출판
사이행성
발매
2018.03.08.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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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생이 녹아 있는 몸에 대한 고백록, 록산 게이 <헝거>

가슴속에 자신만의 상처와 아픔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나름의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고 해도 과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무던하게 살아온 인생을 돌아봐도 ‘행복한 인생’ 보다는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때문에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 정도야 다들 겪는 거 아닌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엔 보통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는 인생도 있습니다. 아픔이 너무 커서 과연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공감할 수 있을지, 아니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을 할 만큼 아픈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할 때조차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어두웠던 과거지만 힘겹게 힘겹게 <헝거>라는 책을 통해 자신을 내보인 작가 록산 게이의 삶이 그렇습니다.
 

“이 책은 이제까지 작업했던 그 어떤 책보다 쓰기 어려웠다. (중략) 나 자신과 내 몸이 살아온 인생을 직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나 그래도 꾸역꾸역 한 자씩 써 내려간 이유는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작업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내 몸에 대한 고백록을 쓰면서, 내 몸에 대한 이런 진실들을 당신들에게 털어놓으며 나의 진실, 오직 나만 아는 나의 진실을 털어놓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사람들이 그다지 듣고 싶어하지 않는 진실일 수도 있다. 나 또한 듣기 불편할 때도 있었다. (중략) 여기에서 당신에게 나의 강렬한 허기의 진실을 펼쳐 보였다. 마침내 여기에 연약하고 상처받고 지독하게 인간적인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339쪽)


록산 게이는 열두 살 때 또래 남자애들에게 강간을 당한 이후 자신의 몸과 그 몸이 살아내야 했던 삶이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는지, 그 진창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치유하며 살아왔는지를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어린 시절 성폭행을 겪은 저자는 그와 같은 폭력을 피하기 위해 뚱뚱해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역겨워지면 남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는 안전을 위해 거대한 몸을 갖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록산 게이를 사람 자체로 보지 않고 그녀의 몸을 먼저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녀에겐 다시금 파괴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나 인간으로서의 가치, 특히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외모를 기준으로 판단되는 문화 속에선 강간과는 또 다르게 저자를 파괴해갔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그 과거는 여전히 록산 게이의 몸에 새겨져 있어 항상 그녀를 괴롭혔고, 현재의 몸은 항상 비만이라는 무절제와 나약함의 상징으로 비난받았습니다.

대학 2년을 마쳤을 때 록산 게이는 인터넷 채팅에서 알게된 남자를 만나러 샌프란시스코로 떠납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을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폰섹스 회사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몇 달을 내키는대로 살다 또 인터넷에서 만난 여성과 함께 미네소타로 옮겨가 지내기도 합니다. 결국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상의 세계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가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나를 잊는 편이, 내 삶을 추스르려 노력하거나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는 것보다 쉬웠다. 여전히 망가진 상태였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틀어져버렸고 다시는 옳게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을 때의 그 자포자기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나 노력없이 사는 것이 좋았다.”(121쪽)


이처럼 스스로를 ‘실종’시켰던 시절들을 뒤로하고 록산게이는 삶을 추스리기로 합니다. 대학에도 다시 가고 글쓰기도 계속합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는 박사학위를 시작하게 될 정도로 회복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피부색처럼 절대로 숨길 수 없는 뚱뚱한 몸으로 살아야했던 록산 게이는 통제력 없는 자신의 나약함, 자신의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부정적 감정으로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자신의 몸을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시선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거대한 록산 게이의 몸을 보며 그녀가 절제하지 못하고 나약한 의지를 가졌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제 시건 역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이어트 광고, 연예인들의 몸에 대한 언론의 호들갑, 외모지상주의 등은 미국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 정체성의 우선 순위에 놓여 있습니다. 록산 게이의 고백을 읽으며 한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의 사이즈만을 보고 무심코 판단해 버렸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록산 게이는 40대가 되어서야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게 됐던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길거라고 추측해왔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기혐오에 빠져 있기 보다는 “모든 불쾌한 소음을 차단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와 20대 내내 저질렀던 실수를 용서하기로 노력하는 편이, 그 실수를 저지른 나에게 동정심을 갖는 편이 훨씬, 훨씬 더 쉽다”는 것을.

그녀가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문신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에 자신의 선택을 표시함으로써 자기 몸의 주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덜 수치스러워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몸과 화해하며 회복해 갔습니다. 또한 요리를 하면서 자신이 좋은 음식과 보살핌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쁨을 얻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록산 게이는 치유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나의 슬픈 이야기 대부분은 이제 과거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참지 않는 것들이 생겼다. 혼자라는 건 짜증 나는 일이지만 나에게 끔찍한 기분을 안겨주는 사람과 같이 있느니 혼자 있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나의 가치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 사실을 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나의 슬픈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이 싫어도 이 이야기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슬픈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내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될 것이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깨달을수록, 나의 가치를 깨달을수록 그 짐은 가벼워질 것이다.”(280-281쪽)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자가 과거의 상처에서 말끔하게 치유되어 현재는 성공적인 삶의 궤도에 오른 자신의 삶을 스스로 빛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은 여전히 회복해가는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을 어떻게 거쳐오고 있는지를 말하는 책이어서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록산 게이와 유사한 아픔을 겪은 여성들이 많을 것인데, 그들이 저자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깊이 공감하며 함께 치유되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뚱뚱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왜 저 지경이 될 때까지 그냥 둔거지? 의지가 없거나 게으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단지 뚱뚱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것이었습니다. 록산 게이가 말한 것처럼 “뚱뚱한 사람들을 괴롭히면 살을 빼게 될 거라고, 몸 관리를 하게 될 거라고”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몸 너머에는 록산 게이의 삶처럼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아픈 이야기가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외모를 보고 너무나 쉽게 그 사람과 몸을 동일시해 버리는 방식, 그 몸을 바라보는 비난의 시선에서 벗어나 먼저 그 사람의 역사를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록산 게이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살아왔던 경험을 이야기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그 몸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내 몸과 이 몸으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던 경험은 나의 페미니즘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바꾸었다. 내 몸에서 산다는 일은 다른 사람을 향한 공감과 동정의 범위를 넓혀주고 다른 사람들 몸의 진실에 대해 알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다양한 신체의 종류에 대한 (용인을 넘어) 포용과 인정의 중요성을 확실히 가르쳐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몸의 존엄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더 신중한 단어인 사이즈란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사이즈가 좀 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될 수 있고 최소한 지난 20년 동안 그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나의 또 다른 정체성도 마찬가지였다. 이 몸이 불러오는 혼란과 수치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존중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 몸은 회복 탄력성이 크다. 내 몸은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 내 몸은 존재감이라는 힘을 제공하기도 한다. 내 몸은 강력하다.”(332쪽)


수영일기

작가
오영은
출판
들녘
발매
2017.07.14.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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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지난 해 2월 저를 제외한 가족들이 한 달여 정도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퇴근 후 자유시간이 생겼습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불현듯 수영이 떠올랐습니다. 꾸준히 운동을 하며 몸관리를 해왔기에 몸이 건장한 편인데 수영장만 가면 가족들에게 비웃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그 몸으로 수영장 바닥을 딛고 뛰어다니냐, 몸이 아깝다’면서 놀리곤 했습니다.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물에만 들어가면 당연히 헤엄을 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게 물 속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물놀이를 여러번 다녀봤지만 수영장을 가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잠수와 걷기 뿐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수영을 제대로 배워서 여름 휴가 때는 가족들 앞에서 멋지게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다짐했습니다. 지난 해 겨울의 한파도 제 결심을 막지 못했습니다. 직장 근처에 있는 수영장을 물색해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영장에 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어떤 수영복을 사야 할지,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 앞에 달랑 수영복만 입고 있을 수 있을지, 수영장에는 어떻게 들어가는지 등 온갖 걱정거리들이 몰려왔습니다. 결국 주변에 수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수영복, 물안경, 수영모자를 장만했습니다. 수영장에 들어가는 순서도 몇 번을 물어 확인을 하고 머리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 봤습니다.

드디어 첫 수영강습날이 되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수영장이 있는 체육센터에 들어갔습니다. 지인이 알려준대로 번호표 발급기에 회원증 바코드를 찍고 번호표를 받았습니다. 락커룸에 들어가 입고 온 옷을 벗어 사물함에 넣었습니다. 수영복 주머니를 들고 초보티를 내지 않으려고 의연한 척 걸어가는데 알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고수들이 왠지 ‘처음 오셨나봐요?’라고 물어볼 것만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힐긋힐긋 훔쳐보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샤워를 하고 수영복과 수영모자를 착용했습니다. 물안경도 옆 사람들처럼 수영모자 위에 걸쳤습니다. 나름 성공적으로 첫 수영장 입성 의식을 치렀습니다. 샤워실을 나와 탁 트인 수영장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이전 시간 강습을 끝낸 사람들과 먼저 온 사람들이 물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물에 들어가서 물장구라도 쳐볼까 했는데 이용객들이 갑자기 물에서 나와 수영장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아, 준비운동 시간이었습니다. 강사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다같이 하나! 둘! 준비운동을 하는데 어찌나 어색한지 옆사람, 앞사람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 눈을 피했습니다. 아마도 수영장에 처음 온 사람 티가 팍팍 났을 겁니다. 설레면서도 어색하고 민망한 준비운동이 끝나고 각자의 강습반으로 흩어져 생애 첫 수영강사님과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물 속에 들어가 수영을 배울 채비를 마쳤습니다.

아마도 많은 수영인들이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첫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가 수영인으로 첫 발을 뗄 때 이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한 책을 만났습니다. 패션일러스트레이터 오영은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펴낸 <수영일기>입니다. 오영은 작가는 여행 중 수영장 풍경을 그리다가 수영의 매력에 빠져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고 합니다.

뜬금없이 수영을 시작한 것, 수영 강습 첫 날의 설레임과 걱정거리, 초급반부터 상급반까지 배우게 되는 네 가지 영법 이야기, 수영을 하게 되면서 달라지게 되는 일상, 먹을거리 이야기, 수영장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등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제가 경험한 과정과 너무나 비슷해서 책이 놓여있던 매대 앞에서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작가의 그림과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어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사 가지고 와서도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유머가 깃든 귀여운 스타일의 일러스트로 그려낸 수영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림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니 왕초보를 위한 물에 얼굴 담그기, 발차기, 수영장에서 올라오기 등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자유형, 평영, 배영, 접영, 턴과 스타트, 물잡기 등 수영을 본격적으로 연습할 때 필요한 방법들이 수영교본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최근 개인 자유수영 시간엔 실제로 이 책에서 본 그림을 떠올리면서 각 영법을 연습해 보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수영방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또 한가지 100% 공감하게 되는 부분은 ‘수영과 다이어트의 상관관계’입니다.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허벅지도 터질 듯이 아프고 팔 근육도 빵빵해져서 곧 박태환 선수같은 몸매가 될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왠걸요. 퇴근 후 저녁시간 수영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힘들게 운동을 했기 때문에 보상으로 치킨, 떡볶이 등을 스스로에게 선물했습니다. 또 그냥 먹고싶어서 먹는 야식은 내일 수영을 위한 동기부여로 탈바꿈되기도 했습니다.

오영은 작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영을 하고 나오는 길에선 어젯밤 먹은 치킨 칼로리는 불태웠겠지 생각하고, 내일은 오리발을 끼고 수영하는 날이니 밤에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된다고 하고, 수영을 하기 위한 동기부여로 피자, 순대, 떡볶이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모습. 그리고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며 살이 좀 빠졌나 생각하다 “그냥 전보다 더 건강해진 걸로”라는 결론을 내리는 작가의 모습에 아마도 많은 수영인들은 싱긋 웃으며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주는 또 하나의 재미는 작가가 수영을 하면서 그렸던 작품들입니다. 작가는 #수영스타그램이라는 해시태그로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이 작품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테이크아웃 커피컵, 화장실 세면대, 거품이 잔뜩 일어 넘치고 있는 맥주잔 등을 수영장으로 변신시키며 수영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수영일기>는 한 번쯤은 오영은 작가와 같은 상상을 해 보셨을, 수영의 매력에 빠진 분들이라면 매우 공감하면서 읽어볼 수 있는 매력있는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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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2월 물에 뜨지도 못하는 왕초보가 처음 수영을 배우기 시작해서 올 해 10월까지 1년 8개월을 꾸준히 강습을 받으며 연습했습니다. 이젠 저도 초보 수영인들이 모두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상급반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급반이 되면 완전 수영을 잘하게 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수영을 하면 할수록 배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더군요. 오영은 작가께 부탁하고 싶습니다. 상급반 이후의 이야기들로 수영일기 2를 만들어주시면 안될까요?


프랑켄슈타인

작가
메리 셸리
출판
문예출판사
발매
2008.06.02.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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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창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MIT Technology Reviews)를 보다가 2018년 주목할 만한 10대 기술 목록에 인공배아 기술이 올라 있는 것을 봤습니다. 이 기사는 난자와 정자 없이 줄기세포만을 사용해 쥐 배아를 성장시킨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자들의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줄기세포를 이용해 인공배아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 때 실험실에서 성장하게 될 배아, 즉 생명에 대한 윤리 논쟁은 불가피합니다.

생명 창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생명공학뿐만 아니라 로봇 및 인공지능 연구로도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신체를 가지든 가상 공간의 시스템으로 존재하든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창조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사고능력을 갖추게 되는 시점이 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에서도 윤리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연구자 사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은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고 싶은 것일까요?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생명 혹은 사고하는 존재를 창조하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은 수많은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들을 통해 다양한 상상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한 극단에선 인간이 창조한 대상을 통제하지 못하게 될 때 일어날 일들에 극단적인 두려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선 인공지능 로봇과의 행복한 공존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메시지를 던지기에 고전이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미래는 디스토피아로 그려지기도 하고 유토피아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도 현대 생명공학 및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서 제기되는 과학기술의 윤리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소설로 시작해 영화, 만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메리 셸리는 생명을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나 지난 책인데도 최근 현대 과학분야에서 일어나는 윤리 논쟁에 바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고전이라 불리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읽는 것이겠지요. 각고의 연구로 여기저기서 부분 부분을 모아 조립한 거대한 신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조인간을 만든 인물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창조한 메리 셸리는 적정한 선을 넘는 지식과 기술을 추구한 결과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경고합니다.

메리 셸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를 창조하게 될 때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을 상정했습니다. 그녀는 멈출줄 모르는 창조 열망을 가진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피조물을 창조자 자신도 공포를 느낄 정도의 괴물로 그렸습니다. 메리 셸리는 도를 넘는 창조 열망을 괴물같은 존재를 만들 수 있는 위협으로 봤던 것이겠지요. 핵무기와 같은 현대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미친 충격적 경험을 고려한다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현대의 과학기술자들은 작품속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신의 자질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위대해지려고 열망하는 것보다 자신의 고향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배우기 바란다.”(58쪽)


메리 셸리의 이 소설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많은 장르의 작품들이 만들어져왔기 때문에 소설의 줄거리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작품속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통해 메리 셸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늘날 과학기술분야 연구자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진보했을까?

메리 셸리 시대의 인간과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인간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인류는 점점 나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해 오긴 한걸까요? 작가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괴물의 눈을 빌려 인간을 바라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을 창조했을 때 이 피조물이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괴물이라 두려워하거나 무턱대고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들을 만나 고통을 경험하며 괴물이 되어갔습니다.

괴물은 인간들을 피해 달아나다 발견한 오두막에서 한 가족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들을 관찰하며 인간에 대해 배워갑니다. 그는 이 가족을 관찰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고 이 가족의 가난과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가족들을 돕기도 합니다. 인간들로부터 이유없는 핍박을 받았지만 이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소통의 희망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수용될 자신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들을 알아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토록 강하고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이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떤 때는 순전히 악의 근원에서 태어난 자식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귀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소. (중략) 오랫동안 나는 한 인간이 어떻게 동족을 죽일 수 있는지, 심지어 법과 정부 따위가 왜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하지만 악과 살육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품었던 의혹은 사라지고 역겨움과 혐오감이 몰려와 고개를 돌리고 말았소.”(153-154쪽)


메리 셸리가 봤던 인간들의 악과 살육의 역사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왔고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 때문에 괴물이 되기로 선택했던 피조물조차 역겨움과 혐오감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던 역사를 가진 인간들은 메리 셸리의 시대와 비교할 때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 시대에도 많은 프랑켄슈타인들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탐구와 창조 열망에 가득찬 생명공학자들과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창조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싶어하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대표적입니다. 과학기술 분야에 있는 연구자들은 종종 어떤 기술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려고 합니다. 자신은 가치중립적인 기술을 만든 것일 뿐 기술을 활용하는 문제에까지 개입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과학을 응용한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도 사람들입니다.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열망 추구에 대한 책임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특히나 생명을 다루는 연구라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괴물은 자신의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어찌 생명을 가지고 그렇게 놀 수 있는거요?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본분을 다하겠소.”라며 호소합니다.

이런 수준의 생명창조가 가능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의 경우엔 로봇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해야할 의무를 이행하기로 했다면 이 괴물은 분노로 가득차 인간들을 죽이는 대신 프랑켄슈타인의 훌륭한 동반자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현대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연구결과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게 될 상황에까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류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능력들을 썩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거네. (중략) 감정과 이성을 지닌 존재를 창조해낸 일을 생각하면 나 자신을 평범한 과학자로 생각할 순 없었지. 하지만 내가 과학자로서 첫발을 내디딜 때, 힘을 복돋아주었던 그러한 생각 때문에 지금 내가 먼지 구덩이 속에 깊숙이 처박힌 거네. 나의 모든 생각과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고, 전능함을 갈망하던 대천사처럼 나는 영원한 지옥에 갇히게 된거지. (중략) 나는 천국을 밟는 상상에 빠져들었고 내 능력에 기뻐했고 그 연구의 성과를 생각하며 기쁨에 타올랐지. (중략) 한데 지금 나는 얼마나 몰락했는가!”(283-284쪽)


현대의 프랑켄슈타인들도 인류에게 유용함을 제공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썩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상상이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최근 점점 가속되는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속도를 보면 충분히 그럴법 합니다. 많은 연구들에 대해서 창조자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창조물을 만드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합의와 통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쁜 페미니스트

작가
록산 게이
출판
사이행성
발매
2016.03.14.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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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운동, 가정과 노동현장에서의 성차별, 성역할 편견 등 페미니즘 논쟁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말에 점차 피로감을 느끼는 듯 합니다. 이 정도로 이슈가 되고 있으면 우리 사회가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성차별 문제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발전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를 찾는 길은 멀고 더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필요만큼 진보적이지 않다.”(157쪽)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가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에서 한 말은 미국 사회에 대한 것이었지만 우리 사회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여성들의 삶을 숫자나 통계상으로 보면 과거보다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에서 말하는 기저효과가 성평등 영역에도 적용되기에 ‘옛날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는데도 여성들이 만족할 줄 모른다’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페미니즘이 완벽한 이론이나 운동일 수는 없겠지만 오랜 세월 가부장제 아래서 살아온 우리 사회엔 페미니즘이 가진 한계나 결점들이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부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른 지 몇 해가 지난 요즘에도 페미니즘을 여성 우월주의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만날 정도이니 ‘모든 영역에서 성차별을 없애자는 운동’은 여전히 더욱 알려져야 합니다.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칭한 록산 게이는 페미니즘 운동의 결점과 한계,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결점과 한계를 인정합니다. 모든 사건 사고에 일관적이지도 논리정연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그리고 과거보다 꽤 나아졌다고 하는 사회 속에 여전히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혐오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노력하는 한 여성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지나가는 장난이고 농담인데 그냥 웃고 넘겨요. 외모로 칭찬 좀 할 수 있지 뭘 그래요?’와 같은 노랫말, ‘가해자를 염려하고 피해자의 결점을 찾아내는’ 성폭력 사건 기사, ‘여성 대상 폭력이 너무나 쉽게 소재로 사용되는’ TV와 영화 등에 대해 가볍게 넘어가지 않고 잘못된 점들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사회는 급격히 변하지만 여성을 대하는 방식은 여전하고, 우리는 아직도 선조들이 싸웠던 바로 그 문제들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이어지는 성폭력 관련 판결들, 그 사건들을 다루는 기사들, 이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주변 남성 동료들의 반응을 보면 저자가 말한 의식의 진보는 우리 사회에서도 요원해 보입니다. 특히 인터넷 상에선 여성들이 성차별적 사건들에 한 마디 하거나 성평등을 지지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라도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인신공격을 하기 일수입니다.

록산 게이가 소설, 영화/드라마, 법률 등에 스며 있는 여성차별 혹은 혐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사람이야”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동일한 시선을 경험합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으니 이쯤에서 분노를 거두고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좀더 거대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유명인들도 있었습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대체로 여성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130쪽)


저자는 계속해서 인기있는 책,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에 스며 있는 성역할, 페미니즘, 여성 등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점들을 다양한 사례로 이야기해 줍니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처럼 불편한 느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속한 ‘문화적 관습과 세계관’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록산 게이가 말한 ‘자신이 속한 젠더 포지션을 극복하고 저항’하려면 저 역시 좀 더 민감한 젠더 감수성을 가져야 하겠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젠더 감수성이 점차 섬세해져 가고 있는 현상들도 간혹 보입니다. TV프로그램이나 강연에서 예전에는 그냥 웃고 넘어갈 만한 상황이나 발언들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공적인 토론의 자리에 올라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이전보다 섬세한 젠더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젠더에 대한 민감하고 섬세한 감수성은 또 다른 심각한 차별 문제인 인종에까지도 확장될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기를 지니지도 않았는데 죽임을 당하고도 그를 죽인 사람은 정당방위였다며 무죄를 선고받은 트레이번 마틴 사건과 보스턴 마라톤 테러를 자행한 범인 조하르 차르나예프에 대한 대중의 동정을 비교해 보여줍니다. 성에 대한 편견만큼 인종에 대한 편견 역시 강력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미국은 원래 인종차별이 심했던 나라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제주도로 들어온 난민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분열적 대응에서 인종적 편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외국인 노동자나 국제 결혼으로 우리 나라에 온 동남아시아 국가 여성들에 대한 대우와 시선에 편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성차별 문제는 다른 차별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민감한 젠더 감수성 더 나아가 인권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록산 게이는 “나와 다른 문화적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상상해야 할 때는 더욱 철저히 냉정하게 여러 차례 질문해 봐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곱씹으며 기억해야 할 명제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록산 게이가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표현했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부족한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 실수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불완전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보다 민감하고 섬세한 젠더 감수성을 갖춰가는 남성으로 성장해가고 싶습니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솔직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쓴다. 트위터에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과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다 쓴다. 블로그에 내가 요리한 음식을 올린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에 나가고 싶고, 이렇게 하면서 더 좋은 여성이 되고 싶다. 나의 현재와 과거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내가 어디에서 비틀거렸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전부 다 털어놓고 싶다.

 

어떤 페미니즘 이슈를 이야기하건 간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375쪽)


100가지 질문으로 본 북한

작가
쥘리에트 모리요, 도리앙 말로비크
출판
세종서적
발매
2018.06.04.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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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두 나라 정상의 세 번째 만남과 그 결과에 온 나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에서의 해방, 열강들에 의한 분단과 전쟁 이후 지난한 갈등 관계를 수십 년 동안 이어오던 두 나라가 드디어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최근 정상회담 모습을 보면 두 나라가 언제 전쟁을 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지난 4월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올해 1차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위원장의 소탈한 말투에 친근감을 느낄 정도로 남쪽 사람들의 심리적 긴장도 상당히 해소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북쪽 나라를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여전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한’인 것 같습니다. 특히 전쟁과 전후 시기를 거쳐온 세대에겐 북한은 여전히 때려잡아야 할 공산당 혹은 빨갱이들의 나라일 뿐입니다.

전쟁 이후 어려운 시기를 살아온 세대의 자식 세대인 저도 북한을 하나의 독립국가라기보다는 언젠가는 우리가 품어야 하는 우리나라의 일부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 정도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시절 공산당이 싫다던 이승복 어린이 신화를 들었고, 군대에 징병당해서는 철책 근처에 머무르며 대치하고 있는 저 너머 사람들이 우리의 주적이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라긴 했지만 독일처럼 흡수 통일을 하게 되면 독일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겪게 될거란 이야기를 들으며 통일은 섣불리 하는게 아니란 것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기쁘고도 슬픈 행사를 보게 될 때는 그래도 통일은 되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손자까지 세습하며 인민들을 수탈하는 체제를 생각하면 북한의 지배층을 좋게 볼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나라 북한입니다.

막연한 이미지로만 인식해오던 ‘북한’을 이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웃 나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분단된 한 민족이라는 과거의 집착을 내려놓고 이제는 흘러온 시간만큼 달라진 차이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분단 후 대한민국 만큼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변화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인 듯 합니다. <100가지 질문으로 본 북한>이라는 책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해하는 첫 발을 내딛어 봅니다.

이 책은 북한전문가인 쥐리에트 모리요와 도리앙 말로비크가 수 년간 취재하여 내놓은 결과물입니다. 저자들은 이 보고서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과 한국 중심의 편향된 정보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역사, 북한의 정치, 지정학, 북한의 최근 상황, 경제, 사회와 문화, 선전 7가지 분야에 대한 총 100가지 궁금함에 개괄적으로 답하는 형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상세한 정보보다는 전반적인 모습을 그려봄으로써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언론 종사자들은 상사들로부터 더 충격적인 뉴스를 제공하라는 상시적 압박을 받는다. 정보망은 제한되어 있다. 북한을 분석하는 일은 종종 공식적 출현이나 텔레비전 연설, 혹은 북한 언론, 또는 북한을 도망친 탈주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공식 석상에서 한 인물이 사라지면 즉각 처형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 활동가들에 근거한 이 정보들은 대개 한국 정보부에 의해 발표되고, 이어 미디어에 의해 최소한의 거리도 두지 않고 확산되고, 극화된다. 소문은 세계를 돌고, 매번 더 비열한 묘사들이 덧붙여진다.”(295쪽)


저자들은 그 동안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혹은 황당 무계한 정보들이 나돌았던 이유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한 정보들이 이렇게 왜곡되거나 날조되어 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두 국가가 직접 소통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서로에 대한 이와 같은 오해들은 점차 줄어들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와 ‘지정학’ 부분에선 사실 크게 새로울 만한 점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눈길이 가는 부분은 ‘정치’, ‘현실’, ‘경제’를 다룬 2, 4, 5부입니다. 정치 부분에선 최근 김정은 위원장으로 이어진 후계 준비, 김정은 위원장의 등장으로 달라지고 있는 정치 구조,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하는 세력 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권력 승계 작업이 생각했던 것보다 치밀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북한의 지배체제가 쉽사리 붕괴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 체제에 반하는 이들은 숙청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강제노동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다가 특별사면으로 출소해 살아나온 탈북자의 증언은 충격적입니다. 사형을 피해 수용소에 간다고 해도 살아나올 확률이 매우 적으며 이 증언자의 경우 수용소 생활을 마친 후 몸무게는 30kg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니 그곳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할 지 짐작할 만합니다.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과거와 그리 많이 달라지진 않은 듯 합니다.

숙청과 함께 유아기부터 받는 철저한 교육, 개인간 감시 체계는 북한 체제를 유지해 온 주된 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북한에서도 과거 강조되던 이데올로기보다는 개인들의 잘살고 싶은 욕망이 북한사회 변화의 동력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도 이 변화의 조짐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고 개인 통제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 보지 않을 것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 세력이 어떤 방향으로 북한을 이끌어 갈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경제 부문에 있어선 2000년대 초 소규모 사설 시장을 허용하였고, 요식업, 교통 분야에선 자본주의적 모델이 더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외화를 거래해 주던 환전상들이 대출도 해주고 있고, 여전히 금융거래가 불법이기는 하지만 시장경제의 싹을 받아들인 이상 금융 흐름을 통제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북한에도 ‘더 벌기 위해 더 일한다’는 생각이 세를 얻고 있다고 하니 자본의 힘이 북한의 경제와 사회구조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지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날, ‘시장 세대’의 구성원들은 이념에 대한 무관심이 커졌다는 점을 공유하며, 확실한 가치인 돈을 통해 삶을 즐기려 한다. 만약 그들이 정권에 충성을 바친다면 이는 정치적 신념보다는 민족주의에 의한 것이다. 15년 후쯤 그들의 자식들, 즉 최고의 안락함 속에서 자라고, 바깥 세계의 이미지를 접하고, 가족 내에서 이념의 세뇌교육을 받지 않은 그 아이들은 분명 ‘다른 것’을 갈구할 것이다. 더 많은 정상, 여행, 여가, 사업할 자유 등… 어쩌면 그때가 정권의 다음 도전이 될 것이다. 즉 이 신세대의 갈망에 답하고, 그들의 꿈에 맞는 활력 넘치는 세계를 제공하는 것. 물론 권력을 잃지 않고.”(277쪽)


최근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유지되고 두 나라의 교류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양국의 관계가 진전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북한쪽의 반응을 보면 체제 유지를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하던 핵무기의 효력은 다했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내어줄 것은 과감히 내어주고 체제보장과 경제라는 실익을 얻으려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들이 언급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그들의 갈망에 더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주안점을 둬야 하는 영역은 인터넷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구가 많지는 않지만 “과학과 신기술에 매료되는 한국의 ‘괴짜’ 혼은 38선 남북이 똑같다.”는 저자들의 말처럼 북한 인민들에게까지 인터넷 서비스가 보급될 경우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는 예측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김정은 위원장 정권은 이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임신! 간단한 일이 아니었군

작가
마드무아젤 카롤린
출판
북레시피
발매
2018.07.07.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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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 제1야당 원내대표는 얼마 전 ‘출산주도성장’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출산장려금 2천만원,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1억원을 지급하자고 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돈을 주면 아이들이 순풍순풍 태어날까요? 돈으로 아이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이 아이들을 왜 필요하다고 하는 걸까요? 경제 성장을 위해서 아이들이 필요하다는 사람을 제정신으로 봐줘야 할까요?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대책이 나옵니다. 자기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르게 되는 원인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옥같은 사회에서 자기 몸 하나 추스리기도 힘겨운데 결혼은 왠말이며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왠말입니까. 아니, 이렇게 종합적으로까지 고민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일단 이 책이라도 함께 읽어보시죠.

마드무아젤 카롤린이 낸 <임신! 간단한 일이 아니었군>입니다. 생명을 경제성장의 자원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소개합니다. 김 원내대표의 출산주도성장 주장을 듣고 오마이뉴스 계대욱 기자도 만평으로 출산이 성장의 도구냐고 물었습니다. “여성이 애 낳는 기계인가요? 애 낳아 키우고 싶은 사회를 만들어주세요!” 여기에 더해 아이가 나오기 전에 여성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알기를 바랍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9개월의 임신 기간 동안 여성들이 견뎌내야 하는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테스트기에 나타난 두줄로 확인된 임신. 생명탄생의 시작이지만 임신한 여성에겐 날벼락이기도 하면서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일이기도 합니다. 두 줄 생긴 테스트기를 들고 숭고하게 임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에선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온갖 복잡한 생각에 정말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 딱입니다.

아내의 임신을 두 번이나 옆에서 지켜봤는데도 제가 직접 겪는 일이 아니다 보니 작가가 보여주는 장면 하나 하나가 새롭습니다. 두 번이나 이 과정을 거쳤을 아내에게 미안해집니다.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졸음, 구토, 피곤함, 특히 두려움으로 병이 난 줄 알고 병원을 가보기도 합니다. 물론 ‘새 생명이 자라고 있을 뿐 지극히 정상’이라는 당연한 진단만을 받을 뿐이지만요.

남편들은 아내의 속도 모르고 축하파티를 계획하기도 합니다. 임신 1개월을 지내는 아내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헛소리야! 이건 거의 재앙 수준이라고!…잠도 제대로 못자게 될 걸? 토요일 밤이면 TV나 보면서 각자 지내게 될 거고…내 몸무게는 30kg이나 더 늘어날테고 피부도 축 처지겠지. 내 인생이 송두리째 거덜나는 거라고. 난 우울증에 빠질 거고, 당신은 어느 순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겠지. 난 그렇게 시들어가기만 할 뿐. 행복? 개나 물어가라 그래!”(21쪽)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 것은 기본이고 입덧이 시작되면 음식 냄새가 재앙으로 덮칩니다. 3개월 정도가 되면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고 처음 초음파 검사도 합니다. 여전히 먹은 걸 토해내기 일수인데 남편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들으면 울화가 치밉니다. 책에 나온 남편의 모습과 제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집니다. 

“카롤린은 아주 잘 지내. 반짝반짝 빛이 나 보이고 왠지 고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니까. 아이 갖고 완전 피었어. 정말 광장하지 않아? 임신이 여자를 변화시킨다는게…캐롤린 챙기고 신경 써주느라 정신없어서 정말 한시도 짬이 없다니까.”(47쪽)

한 달 두 달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익숙해지려는 때엔 주변 사람들로부터 하지 않아도 될 조언들을 듣게도 됩니다. 아는 친구가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갔다가 유산했다든지 등의 이야기들 말이죠.

5개월쯤 되면 출산 육아와 관련된 것들로 머릿속이 가득차게 됩니다. 게다가 만나는 친구들은 임신한 친구들에게 변비, 정맥류, 튼살 등 듣기 싫은 말들만 골라서 하곤 합니다. 6개월쯤 되어 눈에 띄게 배가 나오면 더 곤란한 일도 겪습니다. 신기하다며 배를 만져보겠다는 주변 사람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일상생활이 크게 불편할 정도로 배가 나옵니다. 운전도, 책상 앞 작업도 힘들어지고 몸에는 튼살과 셀룰라이트가 그득그득 해집니다. 작가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만 10여분이 걸려 시작부터 진을 빼고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임신한 모습을 보며 축하하고 부러워하는 친구에겐 사실 속마음을 말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천만에, 미칠 지경이야. 병든 강아지처럼 시름시름 앓기만 해. 등 아프지, 시도 때도 없이 방귀 나오지, 거기다 다리털도 못 깎는 신세라고. 알기나 해?”(113쪽)

하지만 출산이 가까운 여성에게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모유를 먹일 것인가 분유를 먹일 것인가! 주변 사람들의 말은 마음에 쐐기를 박아버립니다.

“모유 먹일거지? 아기한테 풍만한 젖가슴에서 나오는 영양 만점 모유를 줄래, 아니면 발암성 젖병에서 나오는 쓰레기 같은 산업 폐기물을 먹일래?”(126-127쪽)

마지막 9개월째는 아기가 언제 나올지 모르니 출산준비 가방을 챙겨둡니다. 이 시기는 걱정과 불안이 극에 달합니다. 아기가 나오는 신호는 어떻게 아는지, 진통은 어떨지, 살은 빠질지, 분만은 어떻게 하는건지, 아기를 제대로 안을 수 있을지…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진통이 찾아옵니다.
 

배가 나오고 손과 발이 붓는 자신을 보며 자신은 아름답다는 자기최면을 걸어야 하는 여성들의 마음이 어떨 것인지 저로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두 번을 곁에서 지켜봤는데도 임신부터 출산까지의 과정이 이렇게 힘겨운 것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여성입장에서 이렇게 전체 기간을 정리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생기고 세상에 나오기까지 임신 기간에 아내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다시 한번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주고 싶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아기가 자라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모두가 그 과정을 거친다고 해서 당연한 것도 아닙니다.

온통 혼란스럽고 낯선 감정과 생각, 예쁨과는 멀어져만 가는 신체변화, 주변과 사회의 노골적인 압박까지 견디며 긴 시간을 통과한 아내를 둔 남편들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습니다. 출산과 육아는 둘째치고 임신 기간에만 이렇게 힘이 듭니다. 출산률이 낮다며 걱정할 수는 있지만 대책을 세울 때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 먼저여야 할 것입니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작가
황현산
출판
난다
발매
2018.06.25.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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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선생님,

함께 읽은 책의 감상을 나누며 책을 소개하는 <복팟>이라는 팟캐스트에 참여하고 있는 아내를 통해 선생님이 쓰신 <밤이 선생이다>를 몇 년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과 문제들을 바라보며 써내려간 선생님의 글들에서 약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느꼈습니다. 참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나 즐거워하며 오마이뉴스에 서평을 쓰기도 했습니다.

두어 달 전엔 <말도로르의 노래>라는 책의 번역자에 황현산이라는 반가운 이름이 적혀 있어 내용은 알아보지도 않고 읽기 목록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거실 식탁 위에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이라는 책이 한 권 놓여 있는 것을 봤습니다. 선생님을 알게 해 줬던 제 아내가 구입한 것이더군요. 한 번 뵌적도 없는 분인데 이전 에세이집에서 받았던 좋은 기억이 떠올라 참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문학평론가 황현산 별세’라는 뉴스가 스마트폰 알림으로 날아왔습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글을 통해 좀 더 알아가고 싶었던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안타까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황현산이라는 사람의 시간은 멈추었지만 선생님을 더 알고 싶은 제 마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에 조금이나마 더 다가가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사소한 부탁>을 읽었습니다.

책 제목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두고 선택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겐 선생님이 세상을 뒤로 하시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남기고픈 이야기를 담은 유언처럼 느껴집니다. <밤이 선생이다>에서 선생님께서 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사회문제와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저도 역시 감수성을 잃지 않고 살아야겠다 생각했었습니다.

평소 생각지도 않던 것들에 갑작스럽게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선생님은 ‘문학적 시간’이라고 하셨죠. 또한 이를 나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역사적 시간’, ‘깨우침의 시간’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오랜 물음과 고뇌를 통해 남기신 또 하나의 책 <사소한 부탁>을 들고서 문학적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5년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던 남북관계, 무너져 가던 민주주의, 5.18 민주항쟁의 의미를 지우려는 세력들 등 선생님께서 걱정하시던 문제들이 지난 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기는 하지만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어떤 알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도록 준비된 악덕”을 철저하게 없애기까지는 치열한 싸움이 필요해 보입니다.

선생님께서 악마가 한 짓에 비유하셨던 세월호, 용산 참사, 쌍용차 사건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우리 마음을 무디게 만들고’, ‘용의주도’하고, ‘섬세한’ 악마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매우 ‘친화력’있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섬뜩해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악마적 사건들을 바라보시며 뭐라도 해야 한다고 쓰셨던 글귀를 마음에 새깁니다.
 
“물론 나는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악마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악마만이 저지를 일을 이 땅의 사람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악마의 처사였다면 악마의 연구로 끝날텐데, 그것이 우리의 죄이니 우리는 이제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리본을 달건 촛불을 들건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75쪽)


삶의 기본 터전이 되어야 할 집이 끝없는 탐욕의 먹이가 된 우리 사회. 선생님은 아파트와 그곳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인간이 인간으로서 끌어안아야 할 모든 것을 몰아내고 제 번뇌와 오욕만을 가두어둔 지옥”이라고까지 쓰셨습니다. 심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부동산에 대한 광적인 집착, 그리고 그 안에서 아귀다툼하듯 살아가는 삶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선생님께서는 2002년 월드컵 때 배타적 감정 같은 것 없이 모두가 일상의 근심을 잠시 잊고 해방된 생명력을 느꼈던 때를 회상하셨습니다. 그리곤 그 기억속에서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재확인하며 “옆 사람을 끌어안는 우리에게서 거대한 문화 하나가 솟아나고 있다. 이 문화와 역사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153쪽)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15년 ‘헬조선’에서 일어났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고영주 방송문화진응위원회 이사장의 공산주의자 발언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 모욕, 문화 예술인들에 대한 검열 등을 보시며 토론이 사라진 우리 사회가 지옥이라는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헬조선’이라며 지옥을 자각하고 있기에 우리가 지나온 공통체의 역동적 역사를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예언을 철회하지 않으셨죠.

선생님의 예언이 실현될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헬조선’을 자각하고 있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모욕했던 고영주 이사장에게 최근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 여전히 진정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몽니를 부리는 제1야당 원내대표 등을 보고 있자니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시민들의 촛불로 힘겹게 되돌린 키를 또 다시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저와 같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뿐만 아니라 민주 시민의 권력을 위임받아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 및 국가의 리더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인성’이라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 통찰력 있게 지적하셨듯이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은 구성원들의 인성입니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글에서 저를 비롯한 시민들과 문재인 대통령 이하 시민들의 머슴들이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을 확인하길 바랍니다.


“인성 교육이란 폭넓게 말하면 인문학 교육이고, 인문학이란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려는 생각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르는 공부다. 사람은 산업 역군이기 전에 사람이고 국가의 간성이기 전에 사람이다. 어떤 정책이나 정치적 이념에 맞게 사람을 교양하려는 시도는 벌써 사람을 배반한다. 사람이 국가나 제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제도가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진실이고, 그래서 잊어버리기 쉬운 진실이다.”(113쪽)

황현산 선생님. 선생님을 어느 자리에서건 한 번쯤 만나뵙고 싶었는데 이제 그럴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지만 선생님께서 남기신 책들을 하나 하나 찾아보려고 합니다. 책은 도끼라고 말했던 니체를 인용하시면서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127쪽)고 하셨죠. 선생님께서 남기신 ‘책이라는 이름의 도끼 앞에’ 저를 바쳐볼까 합니다. 도끼에 찍혀 넘어졌다가 새사람이 되어 일어나기 위해서요.

축제와 같이 선생님 책들을 읽고 조금은 더 새로워진 모습으로 또 편지 올리겠습니다


역사 기록에서도 차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작가
케르스틴 뤼커, 우테 댄셸
출판
어크로스
발매
2018.03.21.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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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타자이며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성은 불완전하고 무능력하며 무가치하다고 말했다. 2000년 동안 인류는 파울로스의 말이라고 알려진 그 성경 구절을 되뇌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원죄의 이야기, 뱀의 꾐에 넘어가 인식의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이야기는 더 자주 입에 올렸다. 그런 다음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생각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머리에 뿌리내렸다. 몸으로 밀고 들어와 피와 살이 되었고 우리의 행동방식,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했다.”(502쪽)


최근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의 맥락을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케르스틴 뤼커와 우테 댄셸이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여성은 인류 역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자신을 역사 속 주체로 인식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인류 역사를 고려하면 정말 최근의 일입니다만 그마저도 ‘수천 년 동안’ 뿌리내린 생각에 좀처럼 균열을 내지 못했습니다.


당해봐야 차별인지 알 수 있을텐데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남성들은 성별에 따른 차별을 당해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여성이 ‘해방’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에겐 당연한 일들이기에 제2의 성이 겪은 일들을 차별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책의 저자들은 이 성별에 따른 차별이 ‘태초’부터 시작되었다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다수의 남성들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경험한 역사에선 이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거대한 세계사 속에서 있어왔던 여성 소외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차별 논란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혐오에 혐오로 맞서려는 일부 극단적인 이들이 마치 성평등을 외치는 그룹의 전체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두 저자는 세계사 속 중요한 사건, 인물들에서도 여성은 주변에, 아니 역사의 흐름 밖에 놓여 있게 된 것에 주목하고 세계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저자들은 인류 역사에서 자신을 가둔 틀을 뚫고 나온 여성들이 항상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며 비범한 여성들을 소개합니다. 최초의 제사장이자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수메르의 공주 엔헤두안나, 사랑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시를 썼던 그리스의 여인 사포, 중국 황가의 역사 집필을 마무리했던 반소, 후에 러시아가 되는 키에프 공국을 국가로 성장시킨 여성 올가, 일본 최초의 소설 ‘겐지 이야기’를 쓴 궁정여인 무라사키 시키부, 몽골을 다시 일으킨 만두하이 여왕, 제네바 종교개혁에 큰 역할을 했던 마리 당티에르.

인류 역사에서 비범한 일들을 해냈던 여성들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류였던 남성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했다는 점도 저자들은 강조합니다. 책의 각 장의 시작부에 기록된 연표에서 여성들의 이름을 볼 때 독자들이 느끼는 낯섬의 정도가 그 동안의 세계사 기록에서 여성들의 업적이 얼마나 가려져 있었는지에 대한 지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책에 소개된 세계 역사 속 비범한 여성들과 그들의 업적들을 알아가면서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 얼마나 어이없는 편견인지를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이 책에서 주목해서 본 부분은 여성 차별의 기원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저자들은 3천년 전 아시리아의 법과 함께 등장한 ‘베일’,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의 출현과 종교 내에서의 원죄 낙인에서부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공화국이었던 로마의 법, 중국의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했던 역사를 말해줍니다.

저자들이 지적한 역사 속 여성들의 소외는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노동자의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외쳤던 마르크스도 여성 노동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종교개혁, 계몽사상, 프랑스 혁명은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했지만 자유를 얻은 인간은 남자였습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이 역시 남성에게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무슨 혁명이든 혁명이 끝나고 나면 여성들은 대대로 내려오던 부엌의 자리로 돌아갔다.”(396쪽)는 말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할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 크리스틴 드파상이 눈에 띕니다. 그녀는 여자를 아무 가치도 없는 천박하고 비열한 존재로 묘사한 <장미 이야기>(13세기 궁정풍 운문소설)라는 소설에 분노해 여성이 주도권을 잡은 세상을 그린 <숙녀들의 도시>를 썼다고 합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남성 중심 세계에 ‘여성의 영혼도 남성의 영혼 못지않게 가치가 크다’고 주장하며 여자들도 과학, 예술, 정치 등 모든 일에 똑같이 잘할 수 있음을 외쳤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주장의 폭발력은 실로 엄청났지만, 그래도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다는 생각에 비하면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했다. 크리스틴이 던진 여성에 대한 질문들은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결과를 불러왔다. 여성에 대한 공식적 논쟁 ‘여성 논쟁’의 불을 붙인 것이다.”(279쪽)


이 때에도 어떤 남성들은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변호하는 책들을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이 그렇게 효과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책에 따르면 크리스틴 드피상이 여자가 못할 것은 없다는 주장은 500년이 넘어서야 조금씩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파일럿, 자동차 경주 참여, 과학 및 사회 운동 참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자라서 못할 일은 없다는 점을 증명해 왔습니다. 저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역할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일까?”(499쪽)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도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 증대와 함께 성차별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케케묵은 병역의무 논쟁에서부터 최근에는 불법촬영에 대한 편파수사 논쟁에 이르기까지 언론 상에 오르내리는 주제와 대중의 반응을 지켜보자면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남성으로서의 직접 경험, 다양한 책과 자료들을 통한 간접 경험을 통해 판단할 때 여성이 역사적으로 거의 모든 부문에서 차별당해 왔다는 점은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출발점은 인정입니다.

저자들이 책에서 물었던 것과 비슷한 물음이 생깁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여성이 차별당해 왔다는 것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일까요?’ 차별여부를 문제삼는 소모적 싸움에서 벗어나 이제는 여전히 존재하는 성별에 따른 차별을 어떤 방식으로 바로잡을 것인지,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말, 생각, 행동 양식에 깊게 뿌리내린 성역할에 대한 편견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등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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