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

작가
박건웅
출판
보리
발매
2018.04.09.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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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홍선, 김용원, 송상진, 하재완, 이수병, 도예종, 여정남, 서도원.

한국 현대사에서 결코 잊어선 안되는 이름들입니다. 독재를 영구화하기 위한 유신헌법 제정으로 반대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이 여덟 명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조서를 조작하고 결국엔 사형시켰습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었고 김종필이 국무총리로 있던 1975년 4월 9일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빨갱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여덟 명의 생명을 앗아가기까지 채 1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국가는 구금되어 있는 기간 동안 피해자들을 가혹하게 고문했고, 가족들도 만나지 못하게 했으며, 재판도 형식적으로 했습니다. 박정희의 국가는 이렇듯 공공연하게 살인을 저지른 이후 장례도 제대로 치를 수 없게 했고, 이후 가족들조차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끈질기게 감시하고 괴롭혔습니다.

박건웅 작가는 너무나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던 사형수 유가족들, 선후배 동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들과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사건을 <그해 봄>이라는 만화로 2018년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전합니다. 이야기는 국가에 의해 살해당한 여덟 명의 피해자들의 삶과 당시 그들이 겪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가족과 동료들의 고통스러운 진술이 더 깊이 가슴에 와 박힙니다.

그래도 살아가야 했던 유가족들

고통스럽게 죽어간 피해자들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던 유가족들의 한이 독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글로 표현된 가족들의 고통스러운 회상을 한 번에 읽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한 줄 읽고 멈추고 또 한 줄 읽고 멈추고를 반복하다 이내 책을 덮고 먹먹해진 가슴이 풀어지길 기다려야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넋을 떠나보낸 산송장처럼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햇빛을 보지 않고 어두운 방에만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밤이 되면 장대비 쏟아지듯 울기만 했습니다. 어머니 옆에서 같이 자던 나도 따라 울었습니다. 그러면 건넌방에선 큰 언니가 울고 부엌에선 작은 언니가 울었습니다. 울다가 지쳐 탈진한 어머니에게 물을 드리려고 밖으로 나가면 벌겋게 부은 눈의 작은 언니가 눈을 흘기며 물을 따라 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흘겨보고 미워하며 등을 돌리곤 했습니다. 마음 속의 증오와 절망, 혼까지 태워버릴 것 같은 분노를 서로에게 말고는 아무에게도 표현할 수가 없었으니까요."(68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은 뒤 우홍선씨의 딸은 학교에서 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합니다. 학교에선 마치 자신들의 부모가 죽은 듯 온 교실이 울음바다였고, 단체로 추모행사에도 참석해야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 사람의 죽음을 추모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마음은 글로 전해읽는 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우홍선)가 돌아가신 뒤 정신적 고통이란, 바로 내가 살아 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 한 귀퉁이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지는 암세포와 같은 것입니다."(74쪽)

하재완씨의 아내가 겪었던 일 역시 독자들을 말할 수 없는 참담함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국가는 사건을 조작해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고 국민들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당시 모습을 상상하니 서글픔과 비참함이 밀려듭니다.

"동네 아이들이 네 살짜리 막내아들을 마을 앞 당산나무에 묶어 놓고 간첩이라고 죽여야 한다면서 장난감 총으로 총살시키는 장난을 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장난 치고는 너무나 지나친 그 장면을 동네 어른들이 지켜보면서 꾸중은커녕 구경하며 웃었다 하니 얼마나 기가 차고 비참했는지 모릅니다."(185쪽)

진실이 밝혀진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05년 12월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러면 끝나는 것일까요? 명예는 회복되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여덟 명의 무고한 생명과 그 유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삶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나마 국가가 자행했던 이 살인 사건을 대한민국 시민들 모두가 기억하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이 작으나마 보상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내 남편과 나를 유린했는데 세상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 유신, 온갖 불법적인 만행은 잊고 온 국민이 보릿고개를 없애고 경제를 발전시켜 우리를 잘 살게 해 준 대통령으로 기억합니다."라고 말하는 도예종씨 아내의 말에서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실천해야 할 과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박정희에 대한 모든 예우와 기념사업을 전부 폐기하는 것이 옳습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은 비단 이 사건만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시절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국가가 국민들에게 행한 폭력은 계속 있었습니다. 주된 이유는 책임자들에 대한 적절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이 재심을 받은 것처럼 이 무자비한 사법살인의 책임자들에 대해서도 재판과 철저한 처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당시 도예종씨의 딸이 종로경찰서 정보과에 가서 항의하자 경찰들이 했던 대답이 더는 나오지 않는 국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대적인 희생이지. 우리도 살기 위해서 위에서 시키는대로 할 뿐이야."(268쪽)

최근 박근혜 정부 시절 양승태 대법원장과 그 동조자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를 했던 정황 증거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박정희 당시 살기 위해 시키는대로 사형 선고를 했던 판사들의 모습과 박근혜 정부 때 판사들이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했던 판사들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대한민국은 불의한 권력 탄핵이후 정상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또 한 번의 기로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살인의 책임자들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 민복기 대법원장, 황산덕 법무부 장관, 서종철 국방부 장관, 김치열 검찰총장,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 윤종원 중앙정보부 수사팀장, 문호철 서울고등법원 검사.

1심 보통군법회의 판결 판사들: 박현식, 류병현, 박희동, 이희성, 강신탁, 신현수, 권종근, 신정철, 박천식
2심 고등군법회의 판사들: 이세호, 윤성민, 차규헌, 문영극, 박정근
3심 대법원 판사들: 민복기,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 한환진, 임창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홀로 반대의견 제출)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작가
헤르만 헤세
출판
뜨인돌
발매
200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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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들이 하나 하나 결합해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을 만듭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지식수준에서 확인한 바로는 세상 만물은 단 100여개의 기본 원소들이 조합되어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조합인지에 따라 무기물이 되기도 하고 유기물이 되기도 합니다. 생명이 없는 기본 원소들의 결합으로 생명이 만들어지는 신비로운 세상. 이 신비를 매순간 알아채며 살아가진 못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연의 신비를 깨닫고 감탄하곤 합니다.


책의 세계도 비슷합니다. 따로 흩어져 있을 땐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자음과 모음들이 결합되어 글자가 되면 비로소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자연계의 원소와 같은 작은 기본 그릇이 만들어집니다. 이 글자들이 모여 단어가 되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문장들은 문단이 되고 문단이 쌓여 글이 되고 책이 됩니다. 세상 만물과 같이 책들도 어느 하나 똑같지 않습니다. 만물이 이루어지는 신비에 놀라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책 세상의 신비를 깨닫고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길을 지나다 나도 모르게 눈에 띈 헌책방에 들어섰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릅니다. 그냥 발길이 그쪽을 향했습니다. 발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은 책 무더기를 둘러보는데 책 한 권이 시야 전체를 차지합니다. 운명처럼.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이었습니다. 어릴 적 권장도서란 말에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힘겹게 읽었던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 추억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요? 다른 책들은 둘러보지도 않고 이 책을 들고 책방을 나왔습니다.


헤르만 헤세라는 추억속 이름 하나와 독서라는 단어에 이끌려 선택한 헌 책. 책과 읽기, 쓰기, 도서목록 등에 대한 헤세의 짧은 생각들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대목들에 공감해 에세이들 전체를 옮기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서평기사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헤르만 헤세가 이야기한 것들을 우겨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워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헤르만 헤세와 공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과 독서법에 대하여


‘뭐든 읽으면 피가되고 살이 된다’며 책 읽기를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헤세는 책이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독서란 “소중한 보물을 모으고 친구를 얻고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방편”이라고 정의합니다. 독서가 무조건 유익한 행위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에 그 동안 책을 읽어왔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그러니 금방 잊어버릴 게 뻔한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일정 도움도 안되고 소화해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짓 아닌가? (중략)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문학사를 줄줄 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무 생각 없이 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는 건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11쪽)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 잘 팔려나간 베스트셀러? 유명한 독서가들이 추천하는 책 목록에서? 아니면 오랜 세월을 통해 위대한 작품이란 평가를 받은 고전들? 책을 읽는다는 건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이라고 말하는 헤세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자녀나 학생들에게 양서를 읽히고자 애쓰는 분들이 참고할 만합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나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누군가는 문학작품으로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수월하다고 느끼는 반면, 그런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참으로 멋지고 감미로운 일임을 깨닫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호메로스에서 시작해서 도스토예프스키로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있으며, 문학을 끼고 성장하여 나중에 철학으로 넘어갈 수도 있고 또 그 반대도 있으니, 길은 수백가지다.”(108-109쪽)


헤세는 특정한 추천도서 목록같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각자가 끌리고 수긍하고 아끼는, 그래서 좋아하게 되어 선택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이렇게 책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읽을까요? 이 물음에도 헤세는 “글에 대한 경의, 이해하고자 하는 인내, 수용하고 경청하려는 겸손함”을 가지고 읽으라고 대답합니다. 책을 대하는 제 태도를 돌아보며 헤세의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저 시간이나 때우려고 읽는 사람은 좋은 책을 아무리 많이 읽은들 읽고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니, 읽기 전이나 후나 그의 정신은 여전히 빈곤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책을 읽는 사람에게 책들은 자신을 활짝 열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읽는 것은 흘러가거나 소실되지 않고, 그의 곁에 남고 그의 일부가 되어, 깊은 우정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위로를 전해주리라.”(109쪽)


글쓰기와 작가, 그리고 비평가


책을 읽다보면 글을 쓰게 됩니다. 아니면 최소한 글쓰기에 관심은 가지게 됩니다. 짧은 감상을 적는 메모에서 시작해 인터넷의 개인 공간에 조금 긴 글을 남기다가 서평쓰기로까지 독서는 글쓰기 그리고 비평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헤세는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글을 쓸 때 “큰일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당연시하는 태도는 쇠퇴의 시작”이라는 헤세의 충고는 모든 작가들이 유념하면 좋을 말입니다.


독서인구가 계속 감소한다고들 하는데 책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과거 등단을 통해 작가가 되는 구조가 무너지면서 작가가 되는 길이 다양해진 것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젠 정말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인 듯 합니다. 하지만 작가라는 업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헤세는 권하고 있습니다. 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굳이 작가가 되려 하시는지요? 재능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작가를 꿈꾸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를 독창적이고 마음이 순수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섬세한 감각과 정제된 정서의 소유자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덕목들은 작가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갖출 수 있으며, 어정쩡한 문학적 재능 대신 그런 쪽으로 연마하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또 혹시 어떻게 명성을 얻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라면, 작가보다는 배우가 되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요?”(58쪽)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명확히 알아가고 체험의 힘을 고양시키고 양심의 날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한은, 문학창작을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장차 작가가 되건 안되건 상관없이 당신은 맑은 눈으로 깨어 있는 유용한 정신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희망하듯 그것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그리고 혹시문학을 감상하거나 창작함에 있어서 일말의 장애라도 감지되거나, 순수한 삶의 감정의 희석이라든지 허영심과 같은 빗나간 샛길로 빠질 유혹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그럴 때는 문학을 일체 집어치우십시오.”(59쪽)


타고난 작가보다 타고난 비평가가 드물다고 합니다. 서평에도 일정 부분의 비평이 포함될 수 있으므로 헤세의 말에서 서평을 쓰는 이들도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와 허물없이 친숙해 오용하는 법이 없는” 진정한 비평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서평을 읽는 사람들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 봅니다.


더욱 풍요롭고 신명나는 삶을 향해


헤르만 헤세는 교양을 갖춘다는 것을 신체를 단련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특정한 능력이나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과거를 이해하며 준비된 자세로 두려움 없이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헤세가 제안하는 것처럼 읽기와 쓰기를 통해 우리 삶은 좀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헤세는 여러 민족들의 사상과 경험, 상징, 상상과 소망의 엄청난 보고인 세계문학을 탐구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대한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좋은 작품들을 자유롭게 택해 틈날 때마다 읽으면서 타인들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그 깊고 넓은 세계를 감지하고 인류의 삶과 맥, 아니 그 총제와 더불어 활발하게 공명하는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118쪽)


하지만 이 과정을 억지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정해진 길은 없습니다. 책에서 헤세는 자신이 마음껏 상상하는 세계문학 도서관을 그려보았습니다. 물론 그 도서 목록에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헤세는 반복해서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잘못된 태도라고 주장합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끌려서 작품과 생동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명한 작품을 모른다고 창피해서 억지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책의 세계에 들어와 한 권 한 권 읽은 지 10여년이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에 간간히 서평을 올린지도 2년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쓰는 활동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앞에 두고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꼭 읽어야만 한다는 책들에 손을 댔다가 덮어두곤 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이 에세이집을 이제서야 만난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헤세의 말들을 통해 앞으로 조금 더 자유로운 독서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헤세와 친구가 되어 새로운 독서의 세계로 한걸음 나아갑니다.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 행복과 교양을 위한 필독 도서목록 따위는 없다. 단지 각자 나름대로 만족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정량의 책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책들을 서서히 찾아가는 것, 이 책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 가급적 이 책들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늘 소유하여 조금씩 완전히 제것으로 삼는 것,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다.”(162-163쪽)

“문학과 예술 방면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못한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소박하되 넘치는 애정으로 독서생활을 가꾸어 나가며 삶의 기쁨과 내면의 가치를 키울 줄 아는 진지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172쪽)


망작들

작가
리카르도 보치
출판
꿈꾼문고
발매
2018.03.16.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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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플라톤, 단테,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허먼 멜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프루스트, 카뮈, 헤밍웨이… 세계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품들을 쓴 작가들입니다. 이 작가들의 작품이 훌륭한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읽으려고 하면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라고 물으면 아주 흔하게 듣는 대답은 ‘고전’입니다. 이때 아마도 위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들은 거의 빠지지 않고 거론될 겁니다.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은 각 작품들의 훌륭함, 작가와 작품이 세계 문학사에 남긴 의미,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 작가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 등을 말하며 추천합니다. 죽기 전엔 이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감상할 수 있어야 교양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고전을 읽으면 좋겠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도처에 널린 고전이 좋다는 말들을 듣고 독서 목록에 추천되는 작가와 작품들을 넣어두지만 쉽사리 이들 작품을 읽지는 못합니다. 읽어보라고 가장 많은 추천을 받지만 가장 읽히지 않는 작품들을 ‘고전’이라고도 하는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도 흔히 듣습니다. 답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정말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고전 읽기입니다.


고전은 부담스럽다? 유쾌하고 가볍게 대해보자


고전 혹은 걸작을 앞에 두면 일단 작품과 작가의 명성에 지레 겁을 먹어 부담감이 상당합니다. 물론 작품이 어렵기도 하겠지만 수많은 평가와 해석이 붙은 걸작에 대한 부담스러움은 가벼운 마음으로 고전 문학작품들을 읽어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담감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책이 한권 출현했습니다. 한 이탈리아 일간지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리카르도 보치가 쓴 <망작들>입니다.


책을 얼핏 보면 너무 성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책을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간단하고 짧습니다. 과거부터 얻은 명성으로 거장이 된 작가들이 지금, 21세기의 한 출판편집자에게 자신들의 걸작 원고를 제출하게 된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까요? 황당무계한 설정이긴 합니다만 저자의 관점에서 고전 작품들을 소개받으니 다가가기 어렵고 부담스럽기만 했던 작가와 그 작품들이 좀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은 현대의 한 출판 편집자가 역사속 문학의 거장들이 보낸 원고에 대해 아주 무성의해 보일 정도로 짧게 ‘당신의 작품을 출간할 수 없는 이유’를 담은 회신을 한다는 설정으로 쓴 것입니다. 


기원전 호메로스부터 성경의 저자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작품들에 대한 저자의 답변을 읽다보면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나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근거없이 원고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의 합리적 이유를 대면서 거절합니다. 게다가 그 이유들이 그럴법 하다는 것이 <망작들>의 매력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다른 출판사를 알아보세요


이 편집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에겐 ‘사무실 책상에서 원고를 읽다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고 하고, 알렉상드르 뒤마에겐 ‘작품에서 활약하는 총사는 네 명인데 왜 헷갈리게 제목이 <삼총사>’냐고 묻습니다. <노인과 바다>를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겐 낚시나 사냥에 대한 잡지를 내는 곳에 투고하라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이 편집자의 편지를 받았다면 부들부들 떨었을 것만 같습니다.


“작가님의 <대화편>에는 몸을 쓰는 액션 장면이 없어요. 사람들이 만만 하고 또 말만 하고 아무 짓도 안해요. 출판할 만한 책이 아닙니다. 작가님, 아이디어(idea)를 짜내보세요. 이데아(idea)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분이니까요.”(46쪽)


편집자의 대답은 거침이 없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선 제목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구글에서 ‘변신’이라고 검색하면 비슷한 책이 많아 검색 결과에서 상단을 차지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조언을 합니다. 21세기 출판마케팅에 적합하지 않은 제목이라는 것이죠. 찰스 디킨스에겐 <위대한 유산>의 분량이 너무 많다고 하고,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대해선 이젠 모험물에서 벗어나라고 충고를 합니다.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에게는 독자들이 ‘브리짓 존스’스러운 작품을 원하기에 요즘 문학 흐름을 반영하지 못해 자기네 출판사에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합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는 러시아의 전쟁보다는 좀 더 잘 알려진 미국의 남북전쟁 같이 할리우드 영화계에 매력적인 소재로 작품을 쓰면 좋겠다는 조언을 보냅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 호메로스에겐 서점에 가서 서사시로 된 작품이 있는지 보라고 합니다. 게다가 오디세이아는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간단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썼다고 지적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뮈엘 베케트에게 전하는 말을 읽으면 웃음이 나옵니다.


“엄청난 작품입니다. 실존이라는 주제를 아주 재치 넘치는 방식으로 다루셨어요. 그런데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작가님이 연극과 비평 양쪽에서 실패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요. 마지막에 고도가 모습을 꼭 드러내야 합니다!”(127쪽)


편집자는 급기야 <성경>의 저자인 하느님에게까지 한 마디 합니다. 성경을 읽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지적합니다. 우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세부적인 묘사와 서술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기는데 솔직히 제가 하느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해 무척 공감했습니다.


“제발 좀 상세한 묘사를 집어넣으세요. 우주의 탄생에 대해 쓰고 싶으시다고요? 몇 년만이라도 사람들이 기억해줄 작품을 남기고 싶으신 거죠? 이건 아니에요.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마침표. 이렇게 말을 아끼는 이유가 뭐죠? 이 세상의(아니면 저세상의) 누구와 경쟁하려고 이러시나요? 혹시 사뮈엘 베케트인가요? 성숙한 자세로 글을 쓰세요. 자세하게 쓰고, 곁가지 이야기도 좀 하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세요. 주여!”(132쪽)


고전, 독자, 편집자 모두를 풍자하다


편집자는 위 저자들의 작품들 이외에도 총 50권의 책들에 대해 가감없이 솔직한 의견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선 가상의 편집자 의견이 너무 성의없어 보이고 무례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각 작품들을 읽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지점들을 툭 던지듯 풀어놓고 있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다가가기엔 한없이 부담스러운 걸작들을 이렇게 평하는 것을 보니 마음속의 부담이 한결 해소되었습니다. 거장들의 작품들에 이전보다는 좀 더 가볍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 리카르도 보치는 가상의 편집자를 통해 역사 속 걸작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솔직한 평가를 합니다. 작품과 작가들이 가진 과거의 명성, 평가, 해설에 전혀 기대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선 이 명성에 기대 고전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 한 번쯤은 평론가들이나 해설가들의 의견 없이 오로지 스스로 작품을 읽고 감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고전을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출판사의 편집자들을 풍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책 속의 편집자가 ‘망작’이라고 평가한 작품들은 사실 전 세계에 셀 수 없는 독자를 거느린 명작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집자는 길게는 수 세기, 짧게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원래의 책 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등으로 끊임 없이 재해석되며 재생산되는 말 그대로 걸작들을 출판할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 셈이니까요.


<망작들>은 정말 어이 없게도 짧고 ‘이런 걸 책이라고 내도 되는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책이지만 세계문학사 속의 거장과 그들의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을 적절히 자극해줍니다. 이 책은 고전 읽기에 도전하고 싶은 혹은 도전하고 있는 독자들, 원고를 들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작가들, 작가들의 원고를 받아들고 고민하는 출판 편집자들 모두가 재미있게 읽으며 긴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작가
벨 훅스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7.03.27.
평점

리뷰보기


가부장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살아오다가 그것이 주로 남성에게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습니다. 남성이란 이유만으로 가정, 학교, 직장 등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우대를 받아왔다는 점도 알아갑니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한 성차별 혹은 성폭력 사건들도 조금씩이지만 페미니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도 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되어가며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해야지’ 마음도 먹었습니다.


직장에서 남성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성차별이 스며든 말들에도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대화하는 그 자리에서 남성 동료들에게 그 말들의 잘못된 점을 언급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이젠 여성 상위 시대’, ‘세상 많이 좋아졌다’, ‘어머니들은 맞고 살았다’, ‘역차별이다’ 등의 말들이 나오곤 합니다. 동료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대답과 함께 페미니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페미니즘을 알아야 합니다.


벨 훅스라는 페미니스트가 우리 모두에게 페미니즘에 한 걸음 더 다가오라고 초청하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으로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기초를 다져봅니다. 저자는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혐오한다’, ‘페미니즘은 반남성주의다’, ‘페미니스트는 전부 레즈비언이다’ 등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입문서로 이 책을 썼습니다. 벨 훅스는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 정의하며 이 정신으로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합니다.


“(제도화된 성차별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가부장제를 철폐하기 위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정신부터 바꾸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버리고 그 자리에 페미니즘적 사고와 행동을 들이지 않는 한, 우리 모두가 성차별주의를 영구화하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19쪽)


페미니즘 운동의 간략한 역사


현재까지 이어져 온 페미니즘 운동을 이해하는데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저자는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크게 혁명 그룹과 개혁 그룹으로 나뉘어졌다고 말합니다. 혁명 그룹은 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제 구조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기존체계 내에서 성평등을 추구하던 개혁 그룹에 비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반면 일터에서의 젠더 평등, 동일 노동 동일 임금, 가사 노동과 육아 분담 등을 의제로 다루는 개혁 그룹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페미니즘 운동 초기 혁명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사고의 해방을 경험하며 성차별주의적 사고를 되돌아 보게 하는 의식화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라는 틀에서 여성학이 제도화되면서 초기 의식화 모임들을 여성학 강의실이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페미니즘 운동은 대중적 기반을 다질 가능성을 잃으며 직장에서의 평등,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저항 등으로 운동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은 가부장제에 의해 사회화되어 성차별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의식의 변화를 주문했습니다. 여성들은 여성의 몸이 남자의 소유물이 아님을 인식하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결정권, 효과적인 피임, 임신선택권, 강간과 성폭펵 근절 등을 요구하며 운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최근에 더욱 세분화된 페미니즘 운동 그룹까지는 다루지 않아 부족하다 느낄 수 있겠으나 입문자인 제 수준에선 이 정도의 간략한 역사로 시작하는 것이 페미니즘에 다가서는데 도움이 됩니다.


교육을 위해 책을 썼기에 저자는 페미니즘 교육을 강조합니다. 저자의 경우 가부장제적 가정에서 남성중심주의에 저항하다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사상에 눈을 떴으나, 이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페미니즘 강의실에서 페미니즘 사상과 이론을 배우면서 비로소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의 교육에 관심을 가질 것을 제안합니다.


“아이들은 신념과 정체성이 아직 형성되는 과정이므로 어린이 문학은 비판 의식을 키우기 위한 페미니즘 교육에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대개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젠더에 대한 편협한 사고를 일상적으로 접하게 된다.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 분야에서 편견이 배제된 커리큘럼이 사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68쪽)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제공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지 않으면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주류 언론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정보로 인해 늘 힘을 잃고 말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이 우리 사람에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했는지 직접 나서서 널리 홍보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의 시민들은 페미니즘이 어떤 결실을 거두었는지 모를 것이다.”(70쪽)


페미니즘 운동이 다뤄왔던 의제들-성과와 한계 및 전망


저자는 페미니즘 사상과 이론 교육을 강조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기 위해 그 동안 페미니즘 운동에서 다뤄왔던 다양한 의제들을 소개했습니다. 각 주제들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설명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에게 자유를 허하는데 핵심이 되는 임신선택권을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현대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여전히 임신선택권과 관련된 이슈를 중점적으로 다뤄야 할 것을 벨 훅스는 제안합니다.


페미니즘은 외모에만 치중되어 있던 남성 중심 미의 기준에서 여성들이 벗어나는데도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과거 ‘미의 기준’을 온전히 대체할만한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 역시 앞으로 페미니즘 운동에서 주목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사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비판해왔지만, 여성들은 뭐가 건강한 선택인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을 뿐이다. 나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체중이 늘었으나 자기혐오에 찌든 성차별주의적 몸매를 목표로 삼지 않고 체중을 줄이기로 했다. 요즘 패션업계에서는, 특히 소비자 입장에서 봤을 때 빼빼 마른 십대 소녀들만을 위해 디자인한 것 같은 옷밖에 없으니 연령을 불문하고 모든 여성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몸매에 신경을 쓰고 살을 골칫거리로 여기도록 사회화될 수 밖에 없다.”(92쪽)


미국의 경우엔 페미니즘 운동에서 고학력 백인 여성으로 대표되는 그룹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그 이외의 많은 여성들(특히 저소득 비백인 여성)은 기존의 차별 구조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페미니즘 그룹 내에서도 젠더 차별을 넘어서는 인종차별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일터에서 남성들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일부 백인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여성들이 ‘이미 해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도 합니다. 저자는 일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것이 앞으로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 전망합니다.


가정폭력 문제에서도 페미니즘 운동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만 이전까지는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 부각되었는데 저자는 그 어떤 폭력도 거부하는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아동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 중 여성이 많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사회에서건 가정에서건 폭력이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현재의 지배 문화는 모두에게 폭력을 사회 통제 수단으로 허용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내면화시킨다. 남녀관계든 부모 자식 간이든 기존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면 지배자들은 언제든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폭력적 처벌을 가할 수 있다고 위협하면서 지배를 유지한다.”(154-155쪽)


이외에도 여성성과 남성성, 사랑과 결혼, 성적욕망 및 쾌락, 성적 자유와 성적 문란, 동성애와 성정체성, 종교적 억압, 가사 및 육아 노동 분담, 여성의 어머니 역할 논쟁 등 저자가 소개한 페미니즘 운동의 영역은 광범위합니다. 벨 훅스가 페미니즘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말할 만합니다. 저자는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게끔 만들어 페미니즘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어떤 페미니스트가 될 것인가?


남성인 저는 지금까지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수강했던 여성학 수업 이외에는 그 어떤 교육의 기회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부장제에 사회화되어 일상생활에 만연한 성차별을 경험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아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페미니즘을 알아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대부분의 남성들도 저자가 말한 미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일 것입니다.


“이제껏 남자아이들에게 말을 걸어, 성차별주의에 뿌리를 두지 않은 정체성을 키우는 법을 알려주는 적절한 페미니즘 도서들은 없었다.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남성들이 소년 시절, 특히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성장에 중심을 두고 비판 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을 한 적은 없다.”(167쪽)


성차별주의가 유지해온 구조와 그 안에서 착취, 억압당했고 여전히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이제서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공고히 유지되고 있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생활하다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전의 자연스러운 차별적 사고가 치고 들어오곤 합니다.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교육하지 않는다면 페미니즘 운동 노선에서 벗어나고 말 것입니다.


저자가 제안한 것처럼 “페미니즘의 기치를 들고 가부장제에 맞서는” 페미니스트로 전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형태와 방향을 유연하게 변화시키며 이어져 온 페미니즘의 세계를 계속 탐구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부장적 부모님과 대화할 때 그리고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일터에서 남성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회식자리에서, 혐오가 점점 더 심해지는 온라인 공간에서, 삶의 구석구석에서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고 합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없어질 때까지.


“페미니즘 운동은 연령과 여남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차별주의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해야 진보한다.(중략)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가르치며 페미니즘을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중략)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천차만별이므로 각자의 삶에 곧장 말을 건네는 페미니즘 이론이 필요하다.”(259-260쪽)


지난 4월 17일 삼성은 ‘무노조 경영’이라는 반헌법적 경영 방침에서 한 발 물러나 노조를 인정하고 협력업체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를 직접고용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2013년 7월 14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출범 이래 노동조합은 이 두가지를 얻어내기 위해 5년을 싸워왔고 그 과정에서 2명의 동료를 잃었다고 합니다.(‘골리앗 삼성 이긴 다윗’ 합의서 쓴 날은 세상 뒤집은 날_오마이뉴스 4월 18일)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노동조합설립을 위해 노동자가 왜 목숨을 버릴 정도로 싸워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어도 꿈쩍하지 않던 회사가 검찰 수사 등의 압박에 마지못해 노동조합을 인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경영의 걸림돌로 여기는 회사는 삼성만이 아닙니다. 노동조합 설립을 막으려하거나 결성된 노동조합을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들을 언론을 통해 종종 만나게 됩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노동조합인데 언론 등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노동조합의 이미지는 너무나 부정적입니다. 회사 사정과는 상관없이 임금인상을 요구한다거나 무작정 떼를 쓰는 듯한 이미지로 그려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한편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 것인지, 노동조합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노동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헌법이나 노동법을 읽으며 공부해 노동조합 활동 혹은 노동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노동운동을 다룬 <송곳>같은 만화는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의 필요성, 노동조합의 역할, 사용자와의 관계 등에 친숙하게 다가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최규석 작가의 <송곳>은 웹툰으로 연재되다가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기도 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작가의 훌륭한 작품은 연재보다는 한데 모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장을 넘기며 보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총 여섯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된 <송곳>을 뒤늦게 구입해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매 에피소드에 있는 등장인물들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하며 읽었습니다. 대한민국 노동현장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초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각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걸림돌’같은 인간들에게서 변화가 시작된다


작품의 배경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가는 대형마트입니다.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다 같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트에서 직접 채용한 정규직이 있고, 비정규직도 있고, 협력업체에서 파견을 보낸 직원도 있고. 겉으로 보기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고용형태에 따라 급여나 처우 등은 차이가 나는 현장이 작품에 그려져 있습니다.


외국계 대형마트 푸르미. 복잡한 노동생태계 안에서 나름대로 균형있게 운영되는 듯 보였던 이곳에 어느 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판매사원들을 해고라라는 지시가 내려옵니다. 관리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이 지시를 눈 딱 감고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불법이든 합법이든.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타납니다. 판매과장 중 한 명인 이수인 과장이 그랬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공을 꿈꾸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군의 부정선거 압력에 복종할 수 없었던 사관생도. 이수인은 조직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을 말했다가 조직으로부터 노골적인 괴롭힘을 당합니다. 결국 이수인 생도에게 상해를 입히기까지 하는 조직. 이수인은 병원에 입원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다음에 같은 상황이어도 이렇게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될 자신이 두렵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육사를 무사히 졸업해 장교로 복무를 시작하지만 군대에서의 노골적인 불법들에 저항하다 견디지 못하고 결국 10년 만에 전역했던 유별난 청년 이수인. 이런 청년이 외국계 유통회사에 들어와 만난 현실은 자신이 경험했던 사관학교,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수인이 지나온 삶을 통해 깨달은 것은 일어나는 일들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면 나 하나는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항상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던 이수인은 회사의 불법적인 해고 지시에도 또 걸림돌이 되는 선택을 하고 맙니다. 이수인 과장은 회사의 지시에 대항하고자 노동조합을 조직하게 되고 힘겨운 또 하나의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관학교,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도 걸림돌에 대한 반응은 비슷합니다. 회사의 명령을 따르는 상사와 동료들은 이수인을 괴롭히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합니다.


이수인은 고민하다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을 돕는 노동상담소를 찾아갑니다. 상담소에서 노동법을 강의 중인 구고신 소장의 말 중에서 이수인의 귀에 들어와 박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말하는 듯한 말. “시키면 시키는대로 못 하고 주면 주는대로 못 받는 인간들. 세상의 걸림돌 같은 인간들”. 노조에 우호적인 프랑스 회사가 왜 노조를 거부하는 것인지 이수인이 묻자 구고신 소장은 대답합니다.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사람은 대부분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는거요. 노동운동 10년 해도 사장 되면 노조 깰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게 인간이란 말이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1권 204-205쪽)


이 말은 정말 이 세상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신입사원 때 ‘저런 선배는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흘러 선배가 되면 내가 욕하던 선배의 모습이 되어 있기도 하고, 부모님께 듣기 싫었던 그 말을 부모가 되어서 하고 있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구고신 소장이 했던 저 말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규석 작가의 이런 대사들은 만화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와 마음에 박힙니다.


자신이 속한 마트의 지점에서 노조를 만들겠다는 이수인을 구고신은 만류합니다. 회사의 지시를 따라 판매직원들만 내보내면 되는, 자신의 싸움도 아닌 데 섣불리 나서지 말라면서. 하지만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같은 인간”(1권)이었던 이수인은 싸움에 뛰어들고 맙니다.


다양한 노조파괴 전략과 노동자의 투쟁


작품의 스토리는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직원들을 괴롭히는 회사의 다양한 방법과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업체의 향응 접대 자리에 있던 노조원을 모략해 해고시키기, 직원들의 약점을 잡아서 노동조합을 탈퇴하라고 압박하기, 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 회유하기, 사문화된 취업규칙을 꺼내 사소한 트집을 잡아 직원들 괴롭히기, 교활하고 폭력적인 관리자 배치 등 회사의 노조파괴 전술은 다양하고도 집요합니다.


작품에는 위와 같은 회사의 집요한 공격들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노동조합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인 노동상담소 구고신 소장은 변호인으로, 상담가로 때론 투쟁전략가로 노동조합을 도우며 투쟁을 이어갑니다. 헌법에 보장된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한 노동조합 활동이 투쟁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회사의 압박과 회유에 굴복해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노동자들 간의 갈등, 노동조합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노동자들의 고민, 정규직/비정규직/협력업체 파견직 등 속한 위치에서 오는 노동자 각자의 이익과 갈등, 노동운동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노선 차이에 따른 노동운동 조직 간의 갈등 등이 작품 전반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노동조합을 조직해 가는 과정에서 회사의 전방위적 압박에 노조원들 간의 갈등이 커질 때 주인공 이수인 과장이 한 말에 노동조합의 역할과 목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대하는 태도,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의 위치 등이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가실 분들은 나가셔도 됩니다. 탈퇴한 분들은 배신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은 무게를 견딜 수는 없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와 함께 싸우다 우리보다 먼저 쓰러진 것뿐입니다. 저는 부상당한 동료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아직 노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저보다는 여러분들께 여러분들보다는 반달치 월급때문에 탈퇴한 사람들에게, 탈퇴자보다는 가입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입 자격도 불확실한 계약자들에게 노조는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더 절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지 않은 노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남으시면 더 고생할 겁니다. 고생한 사람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면 모두가 성공할 것이고 실패하면 아마도 우리만 실패할 겁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짐만 지세요.”(3권 194-197쪽)


목숨을 바치지 않아도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려면


회사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 노동조합은 결국 파업이라는 마지막 투쟁카드를 꺼내듭니다. 회사는 노동조합이 파업을 시작한 지 3일만에 직장폐쇄라는 극단적 조치로 맞섭니다. 노동조합과 회사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주인공 이수인 과장은 말합니다.


“도망도 쳤고, 비겁한 순간도 많았고, 타협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절차 지켜서 정리해고 명단 올리라고 했으면, 아마… 눈 질끈 감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직원을 괴롭혀서 내보낼 수는 없는 거잖습니까? 사람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잖아요. 우리 조합원들도 각자가 넘을 수 없는 선 앞에서 찾은 돌파구가 노동조합이었던 거겠죠.”(6권 20쪽)

“하기 싫죠. 그런데 방법이 없어요. 차마 넘기 싫은 선 앞에 서기 전에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사람끼리 상처를 주고받게 돼요. 제때 호루라기를 불어줄 심판이 필요해요. 더 많은 아군이 아니라…”(6권 22-23쪽)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 노동운동 역사에 끊이지 않고 등장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덕에 조금은 개선된 노동현장에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작품에선 파업기간이 길어지자 노조 내부의 갈등이 커져 투쟁의 동력을 읽고 파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막 농성장에 홀로 남은 노동조합 지도부 이수인 과장.


“천막은 위화감을 잃고 풍경이 되었다. 독을 품지 않은 경고색은 단지 무늬에 불과하다. 이미 끝났는데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다. 이래서…다들 죽는거구나…”(6권 151-153쪽)


이런 상황에 몰려 죽음이라는 마지막 투쟁을 선택한 노동운동가들이 많습니다. 청계천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 외치며 자신을 불태웠던 전태일 열사부터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전전자서비스 지회 염호석 열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고 싶었던 선배 노동자들.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보다 개선된 노동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노동자의 편이 아닙니다. 한국을 대표한다고 하는 최고 기업이 무노조경영을 원칙으로 삼고 있고 한 계열사의 노조를 인정하기까지 두 명의 목숨과 5년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세상의 걸림돌같은 사람들이 ‘송곳’처럼 세상에 작은 구멍을 내고 튀어나와 아주 조금씩이지만 노동환경을 바꿔온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동운동가들의 출현과 희생에 더해 진정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최규석 작가가 주인공 이수인 과장의 입을 빌려 말한 것처럼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졌을 때 ‘제때 호루라기를 불어줄 심판’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지금까지는 언론도, 정부도, 사법기관도, 사회구성원들도, 심지어 같은 노동자들까지도 노동자보다는 자본의 편에 서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공정한 심판관이 세워진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목숨을 건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이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본에 치중되어 있었던 주요 언론들의 보도행태도 견제할 수 있는 심판관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전체 사회구성원들이 전 생애 동안에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교육 시스템도 시급히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복종에 반대한다

작가
아르노 그륀
출판
더숲
발매
2018.01.03.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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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 지났지만 세월호 참사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에게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참사를 겪은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의 치열한 진상규명 요구에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 있습니다. 세월호는 뭍으로 올라왔지만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은 무엇인지, 침몰하고 있는 상황에서 왜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았는지, 당시 정부는 진상규명 노력을 왜 조직적으로 방해하려 했는지 등 진실은 아직도 침몰한 상태 그대로입니다.


직접 참사를 겪은 당사자가 아님에도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아픔으로 가슴이 저립니다.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의 불의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혹은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국정원, 경찰, 행정기관들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중에는 촛불을 들고 불의한 정권 퇴진 운동에 나왔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인데 자신들의 자리에선 왜 저항하지 못했을까요?


세월호 참사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사고 후 구조 과정에서 그리고 진상규명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사람들의 행동도 저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왜 사람들은 양심의 소리보다는 권력자들의 부당한 명령과 지시를 따르게 되는 것일까요? 한편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나는 과연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며 권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인간은 생각보다 약하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본질을 일상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우리 문화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되어 버렸다. 즉, 우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80쪽)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복종을 권하는 구조 안에 있었다면 비록 잘못된 권위일지라도 쉽게 저항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 아르노 그륀의 책 <복종에 반대한다>를 읽으며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을 연습해 봅니다. 왜 복종하게 되는지, 맹목적 복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면 실제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복종의 복잡한 양상을 잘 파악하고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지배함으로써 복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이러한 역사(사회변혁 시대에 전체주의적 통치자가 권력을 장악하는)에 반기를 들 수 있다.”(25쪽)


왜 복종이 자연스러울까?


저자는 가장 먼저 복종이 우리 안에 어떻게 자리잡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륀은 유아기 때 겪은 부모의 힘과 권위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사람들이 복종에 익숙해진다고 봤습니다. 특히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들의 경우 고유한 정체성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들은 타인을 공감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파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에게 복종이 스며드는 과정과 그 결과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권위가 지닌 위협적인 냉혹함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나약하고 무가치하다고 단정하기 때문에 아이는 그런 부모로부터 자기 고유의 감정, 자신의 본질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배운다. (중략) 그 결과 아이는 자존감을 상실한 인격체로 자라난다. 자존감 상실은 복종의 원동력, 다시 말해 부모의 명령의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58-59쪽)


“우리는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감정과 자각을 포기하게 된다. 정체성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자기감정과 자각을 포기하도록 강요받게 되면 (중략) 권위에 매달리는 것이 삶의 기본원칙이 된다. 권위를 증오하면서도 자신을 그 권위와 동일화시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살아남기 위한 다른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위에 매달리기 위해 자신의 본질을 억누르면 증오와 공격성이 생겨난다. 문제는 이런 증오와 공격성의 대상이 억압자가 아닌, 다른 희생자를 향한다는 것이다.”(59-60쪽)


지난 해 불의한 정권은 물러나라고 외치던 촛불 집회 현장에 태극기, 미국국기, 이스라엘 국기 등을 들고서 맞불집회를 하던 이들이 떠오릅니다. 이들은 여전히 박근혜는 죄가 없다고 악다구니를 부립니다. 자신과 동일시하던 권위가 박근혜로 상징되는 권력이었기에 이 사람들은 드러난 진실조차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폭력적인 행동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저자의 설명을 읽으니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실 복종에의 강요는 유아기때 시작되지만 그 과정은 한 사람의 성장과정 전체에 걸쳐 지속됩니다. 초중고교의 교실에서, 대학의 선후배/교수-학생 관계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어찌보면 평생토록 우리는 복종을 권하는 구조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구조에서 복종이 권력의 토대를 만들어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강력한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복종은 태극기를 들고 외치는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복종하라는 압박은 매우 강력하다


권위 혹은 권력에의 맹목적인 복종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대표적인 곳은 직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직급에 따른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관리자들을 통해 위로부터의 상명하복의 문화가 당연시되는 곳. 이와 같은 조직 내에서 명령이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복종의 부작용이 큽니다. 복종은 스스로를 왜곡시키고 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권위자에게 순응하게 하고 때로는 권위자의 잘못된 행동까지도 숨기거나 정당화시키게 됩니다.


저자는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에 대하여> 중 일부를 인용해 권력구조 안에서 자발적 복종이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라 보에시는 권력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매우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데, 무서운 것은 보통 직장에서 이런 사람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래 인용구에서 ‘독재자’를 조직 내 최고권력자로 바꾸면 흔한 대한민국 직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독재자는 자신의 곁에서 총애를 구걸하고 자신에게 알랑거리는 사람들을 늘 주시한다. 이 사람들은 독재자가 말하는 대로만 해서는 안되며, 독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또한 독재자의 요구에 응해야 하며, 심지어 독재자의 생각을 미리 알아차리기도 해야 한다. 그들은 독재자에게 복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독재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며, 독재자를 위해 자신을 갈기갈기 찢고 들볶고 망가뜨려야 한다. 또 독재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재미있어야 하며, 자신의 기질에 압박을 가하고 자신의 천성을 거부해야 하며, 독재자의 말과 목소리, 눈짓, 눈을 주시해야 한다.


그들은 당연히 군주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자신들에게 떨어진 악운을 꽤 잘 견딘다. 그들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받은 모멸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준 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처럼 불행을 참고 견디며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들에게 악습을 그대로 반복한다.” <자발적 복종에 대하여> 에서


용기와 관심, 열린 생각


우리는 어떻게 맹목적인 혹은 자발적인 복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 강력한 틀을 깨기 위한 시작은 자신을 억압하는 복종을 마주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타인의 낯선 견해를 만났을 때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견해를 따르게 될 때 잃어버리게 되는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복종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인식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복종하는 사람들이 다수이기는 하지만 통계적으로 사람들의 약 20-30%정도는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에 비판적이고 실제로 복종을 거부해 왔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공감,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은 복종에 맞서 싸우게 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저자는 “용기와 관심, 열린 생각”이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고 썼습니다.


‘복종에 반대한다’는 선언적이고 강한 느낌의 책 제목에 비해 결론은 상당히 상식적이고 일반적이어서 책을 다 읽은 후 김이 빠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취약하고 순응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는 인간의 불완전한 속성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은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은 확실합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민주주의를 굳건히 하려면 복종을 권하는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썼습니다. 대한민국은 촛불 혁명을 조금씩 조금씩 완성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사법부의 몇몇 판결들을 보면 실망스럽습니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 가장 시급히 필요한 선언과 행동은 ‘복종에 반대한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라는 우주를 만나

작가
김경아
출판
IVP
발매
2018.02.22.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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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씩 아내는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들로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결혼하기 전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는 어느 날 제게 물었습니다.


“우리 결혼하면 입양하는 건 어때?”


결혼도 안했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입양이라는 주제는 제게 너무나 먼 주제였습니다. 특히나 현재에 충실한 성향을 가진 제게는 더욱. 그래도 물음에 답은 해야 하기에 힘겹게 상상을 해 보고 제가 했던 대답은 ‘입양을 한다고 해도 그 아이를 내가 낳은 아이만큼 사랑할 자신이 없다’였습니다.(사실 제가 낳지도 않았네요. ‘제 정자를 제공해 잉태되고 아내가 낳은’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네요)


그 동안 결혼을 하고 아이도 두 명이나 낳았는데 아내는 가끔씩 입양이야기를 합니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제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입양은 두려운, 그래서 자신이 없는 일입니다. 자녀가 생긴다는 관점으로 냉정하게 생각하면 출산이냐 입양이냐는 차이점이 없습니다. 똑같이 한 생명을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입양은 더 없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두 아이가 있는데도 아이를 입양한 이유


‘핏줄’이라는 사회적 인식, 미디어에서 입양을 다뤄왔던 부정적 모습들, 입양에 대한 무지 등이 함께 얼버무려져서 입양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고 있는 듯 합니다. 아내의 책장에서 ‘인생의 울타리를 넓히는 행복한 선택, 입양’이라는 부제가 붙은 <너라는 우주를 만나>라는 책을 꺼냈습니다. 아이 둘을 낳고도 셋째를 입양해 가족으로 맞이한 저자 김경아님이 자신의 입양이야기를 꼭꼭 눌러담은 책입니다.


열아홉 살에 발병한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통증과 함께 살았던 저자는 24세에 결혼해 그 이듬해 첫째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픈 몸으로 처음 경험하는 육아에 영양실조에 걸리기까지 했다는 저자. 그리고 몇 년 후 미국 유학생활을 하는 중에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저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주치의는 출산을 반대했지만 저자는 한 생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출산해 둘째를 가족으로 맞이했습니다.


귀국 후 대전에 정착해 힘겹게 두 아이 육아를 감당해가고 있던 차 양쪽 고관절을 인공관절로 바꾸는 수술까지 하게 됩니다. 그나마 수술 후 통증이 줄고 둘째도 어느 정도 커가면서 육아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둘째 아이를 잘 대해주는 것을 보던 남편은 셋째를 갖자고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저자는 남편의 요구를 무시로 일관했는데 남편이 입양을 제안했다고.


책을 읽다 이 대목에선 ‘이 남편 참 이기적이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가 입양 제안에 대해선 무시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미 두 아이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않고, 둘째는 동생을 원치 않고. 입양을 거절할 이유가 넘쳐났었는데 저자는 이상하게도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회상합니다.


이렇게 입양을 고민하던 시기에 저자는 남편이 가르치던 대학생 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갓 피운 꽃봉우리처럼 생기넘치는 청년 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사건을 계기로 저자는 입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입양과 인과관계가 있는 사건은 아니었지만 한 생명의 허무한 스러짐에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본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자에겐 입양하지 않을 이유가 훨씬 더 많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죽기 밖에 더할까. 죽더라도 한 아이에게 가족은 남겨줄 수 있으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입양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입양을 나와 내 가족 중심으로만 이해했던 제게 저자의 이런 마음은 입양을 입양되는 아이 관점에서 입양을 생각하게끔 도와주었습니다.


“내가 아이 하나 입양했다고 세상이 달라지겠는가마는, 입양된 아이의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10-11쪽)


특별한 사람들만 입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마음을 정한 저자는 두 아이와 함께 입양 가족 모임에 참석해 입양부모들을 만나면서 특별한 사람들만 입양을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고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또한 입양 기관에 방문에 입양 상담도 받고 입양의 실제적인 면들을 알아갑니다. 상담 후 찾아간 일시보호소에서 아이들을 보고 난 후 저자와 저자의 가족은 입양을 하기로 한 결심을 확고히 굳히게 됩니다.


“숱한 고통 중에서 특히 내가 시설에서 지내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인 이유는 그 아이들에게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를 낳아 준 부모와의 이별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중략)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최선의 돌봄은 과연 무엇일까?”(56-57쪽)


저자는 입양을 했다고 하는 자신에게 ‘존경스럽다’며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입양을 하는 사람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라 말합니다. 특별히 잘살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는 사람만 입양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살아온 인생과 입양을 결정하고 한 아이를 가족으로 맞이하는 과정이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입양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거나 아이가 필요한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보통 사람이지만 생명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있는 이들이 입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양을 저자가 말한 것처럼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지만 ‘가족을 이루는 또 다른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제가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입양에 대한 두려움은 상당히 사라졌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한 아이를 저자는 이렇게 입양했고 그 가족들은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끝.’


이런 결말을 기대하시지는 않았겠죠? 저자의 입양 이야기는 입양 후에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이에게 입양된 사실을 알릴 것인지 비밀로 할 것인지, 아이가 성장해가면서 입양된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낳아준 부모를 찾아가겠다 하면 어떻게 할 지 등 입양을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걱정거리가 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양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 사회를 바라며


우리 나라와 같이 입양된 아이를 ‘업둥이’처럼 생각하는 문화에선 입양 사실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입양아 본인에게 입양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공개입양’을 선택합니다. 물론 두 딸에게 동생의 입양 사실을 숨기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할 것 같았기에 공개입양을 선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입양아도 자신의 역사를 알 권리가 있고, 입양이 부끄럽거나 잘못된 일도 아닐 뿐더러 입양되었다는 것 때문에 차별받거나 편견에 시달려서는 안되기 때문에 저자는 입양에 관한 사회적 편견을 바꿔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도 그 노력의 일환입니다. 또한 저자는 입양을 계기로 입양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입양 교육 강사로도 활동합니다. 책에는 저자가 7년 동안의 강의에서 받았던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을 실었습니다.

 

이름하여 입양 FAQ


 

-왜 입양을 했나요?
-딸이 둘이나 있는데 셋째까지 딸을 입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른 아이도 있었을텐데 왜 희은이(입양한 셋째 이름)를 입양했나요?
-입양할 때 다른 가족, 특히 어르신들이 반대하지는 않았나요?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알린 이유는 무엇이낙요? 그리고 어떻게 알렸나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상처받지 않을까요?
-입양한 아이가 나중에 낳아 준 부모를 찾아가겠다고 하면 어떡하나요?
-희은이의 진짜 엄마는 누구인가요?
-입양을 할 때 돈을 내나요? 혹은 입양을 하면 돈을 받나요?
-입양은 몇 명까지 할 수 있나요?
-입양부모의 나이에 제한이 있나요?
-입양한 아이를 다시 입양 보내기도 하나요?
-만약 입양 기관에 신청해서 심사를 받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입양하면 어떻게 되나요?
-아이를 낳지 않으면 모성애가 없을 텐데 어떻게 아이를 사랑하나요?
-아이가 입양을 원하지 않는데 입양을 하는 건 인권침해 아닌가요?
-입양한 아이가 친자매가 아닌 언니들과 잘 지내나요?

 

이 정도면 입양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 질문에 대해 저자는 체험에서 나온 생생한 대답을 적어놨기에 입양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거나 실제로 입양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유용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엔 입양도서 추천목록과 함께 입양 기관 및 모금 안내 정보도 실어 입양을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훌륭한 안내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입양 이야기의 마지막엔 입양된 셋째 딸 희은이가 짧막한 글을 썼습니다. 입양을 한 엄마의 이야기에 이어 입양되어 성장한 아이가 글을 쓰다니 참 인상적입니다. 게다가 희은이의 말들이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입양은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엄마가 알려 주셨고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숨겨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내 입양 사실을 공개해서 입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203쪽)


“내가 입양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본다. 예를 들어, 나를 낳아 준 부모님과 살았으면 어땠을까? 과연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외동으로 입양되었다면 더 사랑받았을까?”(204쪽)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

작가
마크 A. 호킨스
출판
틈새책방
발매
2018.01.02.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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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산만함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의미를 애타게 갈구하지만,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락과 몰입에 중독된 나머지, 인생을 의미 있게 느끼기 위해 더 많은 갈등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지금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세상만사와 치르는 끊임없는 전쟁은 나날이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의미와 몰입 대상을 찾고, 무엇인가에 매달리려는 잠재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얄궂게도 주의를 흩뜨리는 온갖 것들 때문에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인생을 찾고 만들어 나갈 기회가 사라진다.”(135쪽)


마크 A. 호킨스의 책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우리 사회와 우리의 모습을 아주 정확히 표현했다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인생을 찾고 싶어 부단히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노력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데 방해가 되는 형국입니다. 주의를 흩뜨리지 않고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가면 좋을까요?


간혹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일찌감치 발견하고 즐겁게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의 인생은 목적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로 출항한 배들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몰아치는 바람과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다 우연히 어떤 섬을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육지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내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부유하듯 살아가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은 연습없는 단 한번 뿐인 항해이기에 우리 모두는 인생이란 항해에서 의미와 목적, 그리고 몰입할 대상을 찾고 싶어합니다. 어릴 때는 잘 모르지만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인생에서 남은 시간은 더욱 귀하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집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갖은 활동으로 시간을 가득 채워보지만 그리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삶이 공허해집니다.


삶에서 지루함을 허용해야 할 이유


취미생활, 교육, 인간관계 등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보지만 정작 삶을 톺아보고 의미를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마크 A. 호킨스는 삶에서 의미와 충만함을 얻기 위해 ‘지루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호킨스는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인생을 탐구하고 바꿀 완벽한 기회인 ‘지루함’을 삶에 들이라고 조언합니다.


성실, 근면, 생산성 등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지루하다’는 것은 사실 불편한 감정입니다. 저 역시 조금 지루해지기가 무섭게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티비를 켜거나 라디오를 듣는 등 뭐라도 했습니다. 특히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부터는 지루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광활한 인터넷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지루함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제가 지루함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지루함을 어떤 범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지루함이 왜 필요한 지에 대해서 말하는 이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만해도 피하고 싶은 지루함이라는 주제로 책을 쓰다니요. 그런데 저자의 생각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지루함’이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호킨스가 쓴 것처럼 “지루함은 인생의 작업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시간을 무언가로 채운다면,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영영 갖지 못하게 된다.”(37쪽)


지루함을 피하는 이유와 방법


저자는 지루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 우리가 왜 지루함을 피하게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지루함을 빈둥거림, 나태, 게으름, 목표없음 등과 연결시키도록 교육받았습니다. 비어 있는 시간엔 뭔가 생산적인 것을 하라고 훈련받기도 했습니다. 경쟁이 심화되는 사회에서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지루함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텔레비전, 쇼핑, 인터넷, 게임, 회식, 독서, 창고정리 등을 하며 시간을 때우기도 하고, 울트라마라톤 같은 극단적 신체활동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혹은 직업 세계에서의 성공을 위해 과도하게 일하거나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며 일상을 더욱 바쁘게 만들어가기도 하고, 강박적으로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지루할 틈을 만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호킨스가 경고합니다.


“너무 바쁜 스케줄 탓에 지루할 틈이 없다면,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데서 오는 고통,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그리고 인생의 부조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63쪽)


지루함도 연습해야 한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던 제게 호킨스의 경고가 먹혀들었습니다. 지루함을 ‘우리의 삶과 존재를 탐구하는 출발점’으로 삼아보자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일터와 가정을 오가며 분주한 가운데 지루할 시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분명히 지루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시간을 저자가 말한 것처럼 다른 활동들로 채우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주말 얻게 된 잠시 동안의 한가로운 시간에 이 책을 읽다가 책을 덮었습니다. 저자가 ‘지루함은 주위 대상이나 행위와의 관련성이 완벽히 제거된 상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책에 쓴 것처럼 독서도 지루함을 피하려는 활동 중의 하나이기에 읽기도 멈추고 가만히 있어봤습니다.


“지루함은 존재의 한계를 폭로하고, 완벽한 존재를 찾아 헤매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완벽한 존재를 찾으려다 정말 잘살 수 있는 길에서 이탈한다. 인생에 대한 완벽한 해답 찾기를 무한정 시도하는 건 인생의 모든 가능성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놓치는 일이다.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에는 한계가 있고, 우주를 아우르는 의미는 없으며,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열린다.”(82-83쪽)


지루함을 받아들여보기로 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살펴보곤 했던 것도 잊고 말 그대로 잠시 동안 멍때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자꾸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다시 책을 펴고 읽고 싶었습니다. 연습하는 셈 치고 그대로 있어보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지루함 가운데 머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지루한 시간을 갖는 것도 연습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지루함을 느낄 때는 신체, 정신, 또는 호흡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대신 떠오르는 온갖 생각과 감정이 자유롭게 날개를 펴도록 허락하고 지켜봐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 달려들도록 내버려두어라. 모든 생각, 공포, 감정이 그 공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아마도 지루함은 냉온을 오갈 것이다. 그러면서 오래 전에 겪었어야 할 카타르시스가 몰려온다. 모든 감정 작용이 그러하듯, 지루함을 느낄 때도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수준까지만 허용해야 한다. 강렬한 감정이 올 것에 대비하며 파도타기를 즐기면 된다.”(92쪽)


영혼의 휴양지인 지루함과 친해지기로 했다


호킨스는 이와 같은 경지를 ‘지루함이 알아서 하도록’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책을 잔치 국수 마시듯 후루룩 읽고선 저자가 말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짧게나마 제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갈 수 있겠다는 깨달음은 얻었습니다.


잠시 동안 지루함이라는 감정과 있어본 후 좀더 친숙해져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지루함은 자신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를 깨닫게”해주고 “우리가 나고 자란 의미 쳬계의 쇠사슬”을 끊어볼 수 있게 합니다. 지루함은 과거의 나를 규정하던 틀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 제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책을 찬찬히 다시 한번 읽어보고 일상에서 틈틈이 지루함을 허용해보고 있습니다. 지루함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 보는 자유로운 공간을 우리에게 허락합니다. 나를 가두고 있는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빠져나와 마음껏 방랑할 수 있는 영혼의 공간을 선사합니다. 이 공간 안에서 머물면서 삶에 대한 통찰도 얻게 됩니다. 제 정체성에 대해서도 보다 자유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루함은 허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루함은 영혼의 휴양지와 같다고 할까요.


“술을 몇 잔 마시고, 열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고, 넷플릭스에서 시리즈 하나를 탐닉하는 게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의하는 게 이 책의 의도가 아니다. 지루함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게 올바른 지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어떤 개인적 이유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지루함을 채우기 위해 그 순간 당신에게 최선인 활동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인생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깊이 생각한 후에는, 언제든 필요가 느껴지면 지루함의 공간을 이용해 자신의 미래상을 고찰하고 수정해야 한다.”(107쪽)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

작가
오연호
출판
오마이북
발매
2018.02.23.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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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행복의 날이 있는걸 아시나요? 유엔(UN)은 2012년부터 3월 20일을 세계 행복의 날(International Day of Happiness)로 정하고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해왔습니다. 유엔 자문기관인 SDSN(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 Network)에서 작성하는 이 보고서는 1인당 GDP, 사회적 지원, 건강 수명 기대치, 인생 선택의 자유도, 관용, 정부와 기업의 투명성 등에 대한 자료와 설문응답을 기초로 작성됩니다.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보고서를 행복에 대한 절대적 평가로 여기기보다는 사람들이 행복하다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이 얼마나 마련되어 있는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2017년 기준에서도 1위 노르웨이를 이어 덴마크, 아이슬란드, 스위스, 핀란드, 네덜란드 등의 유럽국가들이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네 56위입니다.


스스로 행복하다 생각하는 이들 국가들이 ‘왜 행복할까’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마이뉴스 대표인 오연호 기자는 세계행복지수 순위에서 당시 세계1위였던 덴마크를 여행하며 취재해 2014년에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오연호 기자는 ‘행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방방곡곡 강연을 다니고,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를 모델로 한 인생학교도 만들었습니다.


2016년에 뒤늦게 이 책을 읽고 오연호 기자의 활동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연호 기자가 소개한 덴마크의 사회복지 및 교육제도,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 직장의 모습 등을 보면 그곳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에서의 팍팍한 삶과 덴마크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대비되어 덴마크가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오연호 기자가 그곳의 좋은면만 부각시키고 단점은 간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생겼습니다.


이 의심이 계기가 되어 그해 여름휴가 때 덴마크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행복하다는 사회를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여행일정을 확정한 후에 뒤늦게 ‘꿈틀 비행기’라는 덴마크 탐방프로그램을 오연호 기자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6번째 꿈틀 비행기 일정과 제가 덴마크를 방문하는 일정이 3일 정도 겹쳤습니다. 책에 있는 오연호 대표 연락처로 현지에서 꿈틀비행기에 합류할 수 있을까 문의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다행히 오연호 기자는 꿈틀비행기 일정 중 하루 저녁 시간을 내주겠다 하셨습니다. 단 며칠간의 여행이었지만 가능하면 덴마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코펜하겐 현지인들의 집을 숙소로 정했습니다. 코펜하겐에 도착해 숙소 호스트들에게 오연호 기자의 책을 보여주며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 사회복지 시스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책의 내용에 동의했습니다.


제가 묵었던 두 집의 주인들은 무상교육 및 의료, 안전하다는 느낌, 실업급여, 부패가 없고 상호간의 신뢰가 있는 사회, 평등함 등을 덴마크 사회의 장점으로 꼽았습니다. 물론 행복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은 무엇이냐 물었더니 높은 세율(하지만 그만큼 혜택이 있으니 괜찮다), 오르는 집값, 예전만 못한 젊은이들의 고용사정 등을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만족도는 세계행복지수에서 말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코펜하겐 시내를 여행하면서 무턱대고 사람들에게 묻고, 초등/중학교도 방문하는 등 며칠을 보낸 후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호텔로 오연호 기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날 오연호 기자는 꿈틀비행기 일행을 안내하고 돌아온 직후였습니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점과 며칠 동안 덴마크를 여행하며 느꼈던 점들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가져갔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에 저자 사인도 받았습니다.


길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오연호 기자가 말했던 덴마크의 행복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사회시스템과 그들이 자신과 타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부러웠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선 우리사회가 더욱 비관적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도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회의가 더 컸습니다. ‘덴마크는 행복해서 좋겠네’라는 추억만 기억한 채 저는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오연호 기자는 행복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근까지도 행복강연을 이어가며 800회를 돌파했고,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행복한 덴마크 사회를 보여주기 위해 꿈틀비행기라는 프로그램을 여전히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행복이야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학교를 운영하며 느끼고 생각했던 점들을 정리해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새로 펴냈습니다.


4년 전 책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에선 ‘덴마크는 이렇게 행복한 사회를 일궈왔다’는 이야기를 다뤘다면 이번 책에선 우리도 행복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오연호 기자는 덴마크와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봤습니다. 다만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헌법에도 명시된 행복추구권에 대한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가’와 ‘그 가치를 위해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점이 덴마크와 가장 큰 차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엔 행복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꼼지락거리는 작은 실천이 모여 이루어지는 매일매일의 사회교체를 제안합니다. 정권교체는 5년마다 이뤄지지만 사회는 매일매일 교체될 수 있다는 오연호 기자의 말에 덴마크를 여행하던 추억이 다시금 꿈틀거렸습니다. 그의 제안처럼 오늘 나의 작은 실천을 통해 “초등학생 때 표정이 고3때까지 유지되는”, “경제활동을 하는 성인들이 주말뿐 아니라 주중에도 즐거운”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다시 품었습니다.


오연호 기자는 덴마크 행복의 비밀을 ‘스스로, 더불어, 즐겁게’라는 세 단어에 담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책에선 이를 실천하는 대명제로 “먼저 나를 사랑하고 그 힘을 기반으로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고 썼습니다. 너무 식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식상하다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며 자존감이 있어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회를 이뤄가기 위해 어디에서부터 변화를 시작하면 좋을까요? 오연호 기자가 어느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다가 학생들에게 학교의 주인이 누구냐 물었을 때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의 주인이 자신들이라 말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며 오연호 기자가 느낀점에서 변화의 출발점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고등학생들이 학교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주인이 되는 체험을 해왔어야 가능하다. 어느 공간에 있든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나도 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스스로 선택하는 즐거움을 체험한 뒤 그것이 문화가 되어 내 몸에 배어야 가능한 것이다.”(71쪽)


그렇습니다. 덴마크 유치원에서 교육 프로그램 없이 “그저 몸과 마음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을 지켜나간다는 원장과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연호 대표는 자신의 어린 시절 시골 마을도 덴마크의 유치원과 다를 바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뤄가는 동안 이 소중한 경험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버려진 우리 과거를 되살리는 것이 행복사회를 만들어가는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잘하지 않아도 혹은 못해도 괜찮다’라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게 해야 한다고 오연호 기자는 강조합니다. 그래야 소수의 승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면 나머지 대다수는 루저가 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를 바꾸어갈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소수만이 승리를 누리게 되어 있는 우리 나라의 구조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불안이 만연하다는 점에 오연호 기자는 주목합니다.


“고등학교 때는 이른바 좋은 대학에 못 갈까 봐 불안하고, 대학에 가서는 좋은 곳에 취업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고, 회사에서는 승진이 늦을까 봐 불안하고…”(149쪽)


오연호 기자는 우리 사회 변화를 위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꿈틀리 인생학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무모한 도전인 것 같아 보였지만 벌써 3년째 인생학교 신입생이 모였고 3기 인생학교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독립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함께 해보고, 스스로 선택하고 공부하고 즐기는 가치있는 경험의 장이 대한민국에 실재한다는 것 자체가 큰 변화라 생각합니다.


꿈틀리 인생학교와 함께 서울시 교육청의 오딧세이학교, 경기도교육청의 꿈의학교, 서울의 꽃다운친구들, 경기도 용인과 고양의 열일곱 인생학교, 경북 상주의 쉴래 등 다양한 인생학교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시도들이 작은 열매들을 맺어가면서 더 많은 학생들이 정해진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겪으며 옆을 볼 자유를 누리며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다보면 분명 실패하고 좌절하는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연호 기자가 책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지금까지 잘 되는 면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성공이라 할 수 있는 사례들에 더 주목하게 되는 모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도전을 강조하는 문화를 위해 성공사례에 집중하는 것처럼요. 개인의 행복과 행복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길은 처음엔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이라고 했던가요. 사회구성원 다수가 행복해지기에는 부족한 여건을 가진 척박한 대한민국에서 포기하지 않고 행복을 이야기하고 실천하고 있는 오연호 기자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지 기대가 됩니다. 혹시 또 책을 내신다고 하면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걸으면서 회사의 대표로서, 인생학교의 설립자로서, 기자로서,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경험했던 아름다운 실패이야기를 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의 훌륭한 사례로서요.

만화 9급 공무원

작가
Sepia
출판
필로소픽
발매
2018.01.31.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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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세대에서 9급 공무원 세대까지


10여 년 전 우석훈, 박권일님은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취업난을 겪으며 어렵게 직장을 구해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청년 세대를 ‘88만원 세대’라 불렀습니다. 88만원은 어린시절에 소위 IMF 시대를 겪으며 불안한 미래를 맞이했던 세대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될 때 받을 것으로 추정되는 급여액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IMF 시대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선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받아들여 경쟁은 격화되고 고용은 더 불안정해졌습니다.


구제금융 시대를 지나 힘겹게 회복해가던 경제는 2008년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또 한번 휘청거립니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성역없이 구조조정을 감행하는데, 구조조정의 대부분은 인력감축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지나며 구조조정은 위기 때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상시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고용의 질은 88만원 세대 때보다 더욱 떨어졌고 어렵게 얻게 되는 일자리마저도 안정적이지 않은 세상이 찾아왔습니다.


대학생들로 대표되는 요즘 청년층에게 이전 세대 선배들이 말하던 캠퍼스의 낭만이란 말은 먼 과거의 흔적일 뿐인 듯 합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취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 스펙을 쌓아 단군이래 최고 스펙을 갖춘 인재들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지만 직장을 구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인생에서 대학생 다음 취업준비생이라는 새로운 단계가 더해졌습니다. 바늘구멍을 통과해 취직에 성공한다고 해도 고용불안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요즘 청년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을 선호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와 함께 가장 말단인 9급 공무원은 해마다 수십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청년층이 몰립니다. 심지어 최근엔 ‘9급 공무원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포착한 것일까요? 출판사 필로소픽에서는 독자들로부터 예기치 않은 호응을 얻었던 일상 웹툰 <9급 공무원>을 단행본으로 출간했습니다.


취업실패 3년 취준생 공무원을 꿈꾸며 노량진으로


만화속 주인공 %%는 지방대학교 문과출신으로 26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생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자신있게 구직활동을 시작했지만 3년 동안 지원했던 모든 회사들에서 불합격되는 열패감만을 안고 29세가 되었습니다. %%는 어느 날 우연히 급여는 좀 적지만 ‘정년보장, 퇴직 후 연금, 정시퇴근, 다양한 복지 혜택’ 등이 제공되는 공무원 광고를 보곤 공시생의 길로 들어서기로 합니다.


인터넷 공시생 커뮤니티를 돌아보며 얻은 정보, 다양한 합격수기 등을 보며 %%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키워갑니다. 자신은 수월하게 합격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요. 주인공은 공무원 시험 설명회에도 참석해 맘잡고 1년만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다는 상담사의 말에 합격의 희망을 품습니다. 인터넷 강의도 신청하고 시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하지 않았던 공부를 하려니 쉽지 않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계획대로 공부가 되지 않고 졸기만 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감을 점점 잃어갑니다. 결국 %%는 집에서는 공부할 수 없다 선언하며 어머님의 퇴직금을 받아들고 1년을 목표로 노량진 공시생의 일원이 됩니다. 환경이 바뀌기는 했지만 %%의 공부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흘러 첫 공무원 필기시험을 치지만 탈락하고 맙니다.


%%는 첫 시험 실패 후 함께 공부하기 위해 스터디 그룹에도 가입했습니다. 스터디 그룹 멤버들은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모두들 시험에 합격해 노량진 생활을 끝냈지만 %%는 여전히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동료들의 노량진 탈출을 지켜보면서 %%도 느끼는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게 남은 건 셀수 없이 많은 취업 실패경험, 서울 일반행정 불합격, 노량진 이사, 9급 공무원 시험 2년 연속 불합격, 그리고 32살이라는 나이였습니다.


“%%는 노량진에서의 시간이 계속되길 원했던 건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희생하면서라도. 그렇게 이번 연도도 또 똑같이 학원에 돈을 주고 또 잠을 자고 또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을 기다려주지 않았다.”(132쪽)


공시생 %%에게 노량진 생활이 남긴 것


다시 한 해를 보낸 33살의 %%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합격 커트라인이 낮은 직렬로 목표를 수정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공부를 단 한번도 열심히 해본 적이 없기에 의자에 1시간 앉아 있는 것도 자신에겐 힘들다는 사실을 공시공부 4년차에 알게 되었다. %%은 그날 화장실에서 조용히 울었다. 공부하려는 마음가짐은 생겼지만 따라 주지 않는 자신의 몸이 너무 싫었다. 노량진으로 올라온지 3년, %%은 그렇게 진짜 공시공부를 시작했다. 남들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남들만큼 책도 보고 문제도 풀었다.”(136-137쪽)


공무원 시험 합격의 영광은 %%에게 끝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섯 번째 도전에서도 불합격한 후 %%는 시험 준비를 그만두고 노량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은 5년이란 시간 동안 무엇을 한 걸까? 그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었을까? 조금만 더 일찍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더라면, 차라리 5년 전에 눈을 낮춰 중소기업에 들어갔더라면, 아니면 고등학교 때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지잡대에 안 갔더라면, 애초에 공무원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더라면, 이 상황이 바뀔 수 있었을까? 책을 펴는 게 무서웠다. 노량진 특유의 우울함은 %%을 도저히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시간은 계속 흘렀다.”(148-151쪽)


멈추지 않는 후회가 밀려오는 %%에게 남은 것은 5년 동안의 노량진 생활로 늘어난 빚과 병에 걸린 어머니, 그리고 회복할 수 없는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지역의 작은 신문 한켠에 %%와 어머니의 기사가 실리는데…


잘그린 그림도 아니고 뭔가 심오한 내용을 다루었던 것도 아닌데 독자들은 왜 이 웹툰에 공감하고 호응했던 걸까요. 아마도 노량진이라는 공간에서 시험준비를 하며 지내봤던 사람들이라면 %%와 자신을 온전하게 동치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허송세월했던 시간을 떠올릴 수도 있겠고, %%를 한심하고 철없는 인간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량진이라는 장소가 가진 압박감과 그곳에서의 삶이 가진 척박함에는 공통적으로 공감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최근 한 드라마에서 그린 노량진 학원가의 모습을 지나치듯 본 적이 있습니다. 좋은 자리에서 수업을 듣기 위해 새벽에 나와 자리를 맡으려 길게 줄을 서고,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책을 보고 걸어가며 밥을 먹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열심히 시험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합격자는 지원자의 채 3%가 되지 않습니다.


무뎌진 공감능력 회복과 국가적 논의가 함께 가야


만화를 다 읽은 후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갑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사회를, 특히 청년들을 이와 같은 상황으로 내모는 걸까요? 요즘의 청년들이 ‘열정’과 ‘노력’이 부족해서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청년 실업은 노력하지 않는 혹은 눈만 높아진 청년들의 책임일까요? 누구 말처럼 아픈게 청춘이니까 참고 지내라 하면 될까요? 이들을 ‘9급 공무원 세대’라고 단순화된 범주로 취급하는 것이 정당할까요?


주인공 %%보다는 약 10여년 정도 앞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저와 같은 선배세대들은 이 만화를 어떻게 읽을지 궁금합니다. 제 경우 대학시절 공무원 시험 준비라 하면 사법,행정,기술 등 고시를 의미했습니다. 9급 공무원에 대학졸업생들이 몰린다는 뉴스를 보면서 한심하다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새 저도 모르게 ‘요즘 젊은 애들은 파이팅이 없다’던 제 선배세대들처럼 되어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화 <9급 공무원>을 통해 타인의 처지와 감정에 무뎌져가던 공감의 감각을 되살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몇 년을 제대로 노력하지 않고 허송세월하는 %%의 모습을 보며 야단이라도 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노력하라 야단치고 %%가 더 열심히 공부를 했으면 %%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그렇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매년 지원자의 97%는 합격이라는 영광을 품에 안을 수 없는 게임이니까요. 이 문제,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최근 몇 년 동안 심화되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부에서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저임금을 인상한다거나 청년들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보겠다거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거나 하는 시도를 하고는 있습니다. 청년배당 혹은 청년수당이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을 지원하는 정책들을 마련해 실행하고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명확히 진단하지 않은채 언발에 오줌누는 것 같은 처방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또한 주도하는 정치 세력의 변화에 따라 정책의 유동성이 큰 것도 걱정입니다. 사람들의 심리, 사회분위기, 경제상황, 교육정책, 정치지형 등 다양한 영역이 얽히고설킨 청년 문제라는 실타래를 어디에서부터 풀어가야 하는 것인지 국가적인 논의가 지속되어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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