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 

작가
박윤선
출판
사계절
발매
2017.04.22.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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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할때면, 특히나 그곳이 외국의 어떤 곳이라면, 그곳이 막연히 좋아보입니다. 여행지와 내가 사는 곳이 한없이 대비되면서 그곳은 더욱 낭만적으로 보이죠. 건물벽에 있는 낙서, 지나는 사람, 창 밖 풍경, 심지어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마저도 낭만적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아, 이런 곳에서 살고싶다’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낯설음 혹은 익숙하지 않음의 효과이고 뻔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익숙한 곳을 과감하게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저를 사로잡습니다. 더군다나 흉물스러울 수 있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도 멋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낭만의 도시 파리를 가진 프랑스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박윤선이라는 낯선 이름의 작가가 쓴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라는 제목의 얇은 만화책을 동경 가득한 시선으로 펼쳤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놓았을지 기대하면서.


‘와, 잘 그렸네!’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흑백 그림에 잔잔하게 읊조리는 듯한 느낌의 짧막한 글이 삽입된 100페이지 남짓의 책입니다.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의 낭만적인 이야기는 없었고, 작가가 프랑스에서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사건들,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잔잔한 시내가 흐르는 듯 이어져 있습니다. 그림이 예쁜 것도,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작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박윤선 작가는 한국에서 일러스트를 그리며 닥치는 대로 일하던 중 2년 동안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집과 작업실을 주고 작업만 하는)에 선정되어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2년간 만화책 작업을 하는 동안 남자 친구가 생겨 프랑스에 더 있고 싶어졌고, 프랑스 출판사와의 계약과 남자친구와의 빡스(PACS: 두 이성 또는 동성 간의 시민 연대 계약, 배우자 자격)을 통해 프랑스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자신이 다녔던 프랑스어 교습소, 동네 거리와 여행지, 자주 가는 까페 등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저자는 잘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며, 그 세계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교습소에서 만났던 아르메니아인을 통해 아르메니아라는 낯선 나라와 20세기 초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역사를 아주 조금이지만 알게 되었습니다. 제겐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르완다 민족간 학살과 콩고 전쟁도 교습소에서 만난 아프리카 출신 수강생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까페에서 만난 ‘하르키’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알제리. 알제리인들은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때 여러가지 사정으로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알제리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하르키’라고 부릅니다. 반전 여론으로 1962년 알제리는 독립하는데 프랑스는 하르키들을 데려가지 않았고 알제리에 남겨진 약 7만명의 하르키들은 거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프랑스로 이주할 수 있었던 약 6만명의 하르키들도 수용소에 감금당했다고 합니다.

 

하르키는 우리로 치면 일본군으로 복무하며 독립군을 때려잡던 조선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어느 카페에서 일본군이었던 한국인 노인을 만난다면 하르키 할아버지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다고 한 저자와 같이 반응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한걸음 물러서 객관적으로 하르키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아 아직은 저자처럼 대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프랑스어 수업시간에 작가는 또 시리아인 피부과 의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눈은 이번에도 이 의사의 나라에서 일어났던 내전으로 향합니다. 수니파, 시아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서방 국가들 간의 관계에서 이슬람 국가(IS)의 탄생, 난민 문제, 파리와 벨기에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으로까지 시선이 이어집니다. 끊이지 않는 테러와 전쟁, 잔인한 복수를 보며 떠오른 작가의 생각과 물음들이 제가 생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브뤼셀 테러를 보자 갑자기 체첸과 러시아가 떠올랐다. 나는 사실 그곳 이야기를 잘 몰랐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중략) 체첸이 받는 탄압도, 체첸이 벌인 테러도 끔찍했다. 그 모든 일들이 생각보다 최근에 벌어졌음에 놀랐다. 내가 잊고 살았을 뿐이구나.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면 그 테러들은 정당한가? 그렇다고 민간인을 죽여도 되나? 그럼 군인들끼리 죽이는 건 괜찮은가?(중략) 몇 달간 벌어진 테러들을 보며, 이건 세상이 망할 징조라고, 정말 곧 망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은 늘 그 꼴이었구나. 그러니 당장 끝장나진 않겠구나 싶었다.”(83쪽)

 

외국에서 살면 으레 그렇듯이 작가도 처음엔 한국을 알리고 인정받으려고 했었으나 점점 한국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권퇴진 시위가 정점에 이르던 2016년 말엔 프랑스 사람들은 “그래도 한국이 낫지 않아요? 우리 프랑스 사람들은 다 무관심해서 투정만 부리지, 진짜 물러나게는 못할걸?”이라며 말을 시키곤 해 저자가 다시 한국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자는 탄핵반대 집회 사진들을 보며 국가와 애국에 대한 생각도 적어내려갑니다.

 

“그들 입에서 ‘애국’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묘하게 웃겼다. 나는 내가 애국자라 생각하지 않으니, 저리 되진 않겠지? 꼭 그 ‘애국’의 문제만은 아닐 테니, 나중 일을 누가 알까. 그러다 문득 ‘국가’란 내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이상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국가와 관련된 것들이 그렇게 거슬렸나 보다.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피해 다닌 것 같다. 여전히 국가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적어도 애증은 떼고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애꿎게 미워한 다른 관계들도.”(93쪽)

 

나라를 떠나 있어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볼 수 있는 박윤선 작가가 부럽기도 합니다. 부정한 정권을 바꾸는 저력을 가진 시민과 여전히 탄핵을 부정하며 애국을 외치는 시민,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시민과 사드로는 부족하니 핵을 한반도에 다시 들이자며 핵핵대는 시민 등이 얽혀 공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뉴스들을 접하면 기대와 분노/혐오로 제 마음도 복잡해집니다. 그럴때면 저자처럼 애증을 떼내고 이 사회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에 더해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세계’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또 선진국 혹은 강대국 중심인지도 깨닫습니다. 작가가 책에서 짧게 짧게 소개한 아르메니아, 르완다, 콩고, 알제리 등 오래 전 비극적 역사들과 최근의 시리아 내전, 유럽 등지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들을 자세히 찾아보면서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은 확장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관조하는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이 책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너무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져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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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공부

작가
엄기호
출판
따비
발매
201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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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한 지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전 공부를 합니다. 학창시절과 지금 공부의 의미와 목적이 다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선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농사를 짓던 저의 부모님께서는 “힘들게 농사 지을래, 공부할래” 라고 묻곤 하셨습니다. 따로 공부하란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데 전 힘들게만 보였던 농사를 피하기 위해 보다 손쉬워 보이는 공부를 택했습니다.


부모님은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으셨습니다. 저 역시 당시엔 이 믿음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노력하면 보상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범생이가 되어 대입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받아서 좋다는 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범생이로 생활했고, 역시 운좋게 괜찮다는 기업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으로 공부는 끝이 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적이 아닌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이 지배하는 직장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일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등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범생이로 살면서 미뤄두었던 것들(악기, 언어 등)도 배우고 싶었기에 시간을 쪼개가며 학생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왔습니다.


새로운 시대, 과거의 목적은 효력을 다했다.


어느 날 엄기호 작가의 <공부공부>를 읽다 “공부를 왜 할까?"라는 물음에 멈칫했습니다. 저자는 지난 시절 한국 사회에서 '공부'의 이유가 '1990년대 이전: 신분상승, 1990년대: 자아실현,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생존'으로 변화해 왔다고 분석합니다. 제가 공부하며 성장했던 시기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기인데 제가 공부했던 목적도 저자의 구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공부 목적은 이제 그 효력을 다했다고 저자는 선언합니다. 또한 전국민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공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공부가 신분상승의 도구도 되지 못하고, 자아실현에 이르게도 못합니다. 더군다나 철저한 성과 중심의 경쟁 사회에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노력이 성과로 인정받기는 커녕 탈락의 근거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할까요?


네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요. 저자는 "자신이 망가지지 않게 돌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공부란 단순히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도우며 성장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를 고양하며 기쁨을 주는 관계를 맺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공부를 통해 아래와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자기 삶을 다루는 데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 남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기술은 기가 막히게 발달했지만 자기를 돌보는 언어와 기예는 없다. 자기계발 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하며 능력을 쌓고 있지만, 계발한다는 자기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무얼 계발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계발만 하고 있으니, 그 계발은 자기 자신을 파헤치는 삽질에 불과하다.”(14쪽)


자신을 돌보는 공부로의 전환


저자가 제안하는 공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탐색하고 준비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긴 호흡으로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며 개인적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며 토론하는 공부를 하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134쪽)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과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남과 비교되기 때문에 한계는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남과의 비교에서 벗어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한계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한계를 다룸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위에 성장의 발판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한계를 인정한다는 말은 자기 능력에 미리 선을 긋고 노력하지 말라거나 주제 파악하고 찌그러져 살라는 뜻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 극복이 아니라 다룸의 문제가 되면,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늘 잠정적이다. 지금은 내 능력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먼저 집중한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가진 능력을 능수능란하게 잘 활용할 수 있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며, 넘어갈 용기와 자신도 생긴다.”(141쪽)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가장 먼저 자신의 한계를 알려면 무엇인가를 충분히 해봐야 합니다. 이 '충분히'를 혼자서 아는 것이 쉽지 않기에 객관적으로 바라봐 줄 수 있는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이와 함께 개인은 자신이 모르는 게 뭔지 알기 위해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은 것에 끌려다니는 삶에서 벗어나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는 힘을 키우며 욕망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자신을 배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재산(소유), 육체, 지위나 정체성, 욕망 등 내게 속한 것들은 자신을 알아가는 데 활용해야 하는 도구들입니다. 또한 나를 알아가기 위해선 자신에 대해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는 과정에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배우고 있는지 관찰하고 파악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는 것'이 너무 많아 그 '하는 것'에서 '겪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체험의 과잉/경험의 빈곤에 시달린다.”(188쪽)


자기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도모하며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부에서 이 체험의 과잉/경험의 빈곤을 주의해야겠습니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기에 이를 다루기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게되어 느끼는 매력(지적쾌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주지해야겠습니다. 이제부턴 기쁨을 주는 공부를 해보려고 합니다.


“두 가지 기쁨이 있다. 자유와 창조의 기쁨, 향유의 기쁨이 있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능수능란한 기예를 배우고 익히며 연마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창조하고 향유하는 삶, 이것이 멋진 삶이며, 멋지게 사는 것은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쓸모다. (중략) 창조와 향유에서 인간이 느끼는 것은 성장의 기쁨이다. 공부는 성장을 통해 기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공부의 목적은 재미가 아니라 기쁨이다. (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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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서로 돕는다 

작가
표트르 A. 크로포트킨
출판
여름언덕
발매
201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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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하고 무자비한 생존경쟁', 동물세계에서나 인간사회에서나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져버린 개념인 듯 합니다.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을 종교처럼 받들고 있던 세계에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아나키즘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표트르 A. 크로포트킨(Kropotkin)입니다.


크로포트킨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책에서 생존경쟁이라는 자연법칙에 반하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며 동물과 인간의 삶을 유지시켜왔던 다른 측면의 자연법칙을 소개합니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며 저자는 우리가 다윈의 생존경쟁 가설을 어떤식으로 오해했는지 알려줍니다. 이전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다윈의 생각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라는 책에서 '생존 수단 확보를 위한 개체들 간의 투쟁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투쟁이 어떻게 협동으로 대체되는지, 이로 인해 생존을 위한 최적 조건을 어떻게 발전시키는지'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이 때 “적자는 신체적인 힘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교활한 종이 아니라 강한 개체들과 약한 개체들이 모두 함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연합해서 서로 돕는 법을 익히는 종이라는 것을 암시했다."는군요.


하지만 "다윈의 추종자들은 동물세계를 반쯤 굶어 서로 피를 탐하는 개체들 간의 끝없는 투쟁의 세계로 여기게 되었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라야 하는 생물학적 원리로까지 삼았다”(24쪽)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크로포트킨은 자연이 도살장인 것만도 아니고 조화와 평화가 깃들어 있는 곳만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상호부조'라는 다른 한쪽의 자연법칙을 내세웁니다.


“다양한 부류의 동물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많은 전투와 몰살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종에 속하는 동물 혹은 적어도 같은 집단에 속하는 동물 사이에서는 상호지원과 상호부조, 공동 방어도 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한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호투쟁이 자연법칙이라면 사회성 역시 자연법칙이다.”(26쪽)


저 역시 이제껏 자연계는 당연히 생존을 위한 무한 투쟁을 통해 유지되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식하지도 못한채 다윈주의자들의 생각을 당연시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개미나 벌과 같은 아주 작은 동물들에서부터 독수리같은 맹금류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다양한 포유류에서부터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홉스 식의 투쟁'을 따르고 있지 않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다윈주의자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동물계에서고 인간 세계에서고 간에 경쟁이 철칙은 아니다. 동물들 사이의 경쟁은 예외적인 시기로만 국한되며, 자연선택은 그것이 작동하기에 더 좋은 장을 찾아다닌다.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경쟁이 배제됨으로써 더 나은 조건이 만들어진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해 삶의 더없는 충만함과 강렬함을 맛보기 위한 엄청난 생존경쟁 속에서 자연선택은 가급적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는다.”(97쪽)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늘 해당 종에게 해로우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것이야말로 항상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으나 항상 존재하는 자연의 성향이다. 이것이 바로 덤불과 숲, 강, 바다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슬로건이다. “그러므로 연합해서 상호부조를 실천하라! 그것이야말로 각자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최대의 안전을 제공해주고, 신체적이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삶과 진보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98쪽)


저자는 동물사회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상호부조라는 한 축의 원리가 이어져왔다는 증거도 제시합니다. 미개인으로 분류되는 부시먼과 호텐토트 족, 에스키모인들의 서로 돕는 관습과 커바일 족으로 대표되는 야만족의 마을 공동체 운영 사례 등을 통해 그간 우리가 얼마나 편향된 시각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봐 왔는지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갖게 된 이유도 알려줍니다.


"언론사나 법정, 관공서뿐만 아니라 시인과 작가들까지도 미래 역사가의 연구자료가 될 막대한 기록을 똑같은 편향적 관점을 갖고서 쓰고 있다. 그들은 모든 전쟁과 전투, 사소한 충돌, 다툼과 폭력행위, 온갖 종류의 개인적 고통을 더없이 세밀하게 서술해서 후손에게 전해준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상호지원과 헌신의 자취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곧 우리의 사회적 본능과 관례는 거의 무시하고 넘어가 버린다.”(140-141쪽)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저자가 주장한 상호부조의 원리로 세상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중세시대에도 인류는 길드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조직을 운영했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말 등장하기 시작한 강력한 국가 조직과 함께 “일인의 권력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연합주의 원리는 시들어버렸고, 대중의 창조적인 능력도 소멸되었다.”(238쪽)라고 크로포트킨은 안타까워합니다. 더욱이 민중의 실수를 언급한 부분에선 저자의 안타까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민중은 정부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으로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민중은 새로운 쟁점을 제기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국가가 개입해 들어와 그들이 마지막으로 누리고 있던 자유를 분쇄해버렸다.”(240쪽)


저자가 활동했던 19세기 말의 상황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이 여전히 이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크로포트킨의 말처럼 연합 혹은 연대의 정신이 오랜 인류의 역사를 거치며 본능처럼 우리 안에 상속되어 왔더라면 어땠을까 상상도 해봅니다. 저자가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 국가가 지배하던 때에도 상호부조는 이어져왔다는 주장을 하는데 크로포트킨이 묘사한 당시의 세태를 보면 현대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국가가 모든 사회 기능을 흡수하면서 필연적으로 방종하고 편협한 개인주의가 판을 쳤다.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의 가짓수가 불어난 것만큼 서로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났다. 모든 사람이 길드나 우애 단체에 속해 있던 중세에는 길드 내의 두 '형제'가 병든 형제를 번갈아가며 보살펴 줘야 했다. 한데 이제는 이웃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빈민 병원의 주소를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245쪽)


“오늘날 점잖은 시민들은 가난한 사람이 곁에서 굶어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저 약간의 세금만 내면 된다. 그 결과,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궁핍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법과 학문과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대세가 되었다. 그런 이론이야말로 이 시대의 종교며, 그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삶은 위험한 유토피아주의자가 되어 버린다.”(245-246쪽)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들은 상호부조의 원리가 살아 있는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공유지를 몰수하려는 지배계급에 투쟁해 왔다는 점을 크로포트킨은 강조합니다. 물론 그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해 상호부조의 정신이 후손들인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한 듯 합니다. 하지만 더이상 나뉠 수 없을 정도로 원자화된 개인으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정신이 있다면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부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 심리에는 근본이 되는 것이 있다.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미쳐 돌아가는 상태가 아니라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에 응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법이다.(중략)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적인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런 감정은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의 수십만 년에 걸친 집단생활에 의해서, 수천 년에 걸친 인간 사회생활에 의해서 배양된 것이기 때문이다.”(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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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

작가
애슈턴 애플화이트
출판
시공사
발매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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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이시네요.”


이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는 없었습니다. 저 역시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고 흐믓합니다. 우리는 왜 '젊다 혹은 젊어 보인다'는 말에 이렇게 반응할까요?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라는 책에서 애슈턴 애플화이트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이 태도에 차별이 스며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애플화이트는 인간 사회에 인종차별, 성차별과 같이 연령차별(나이에 따른 차별)도 만연하다는 걸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이에 따른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나자고 촉구합니다. 저자 자신도 “나이 드는 것을 생각하면 '막연한 불안'과 '속이 매스꺼워 죽을 것 같은 두려움' 사이의 무언가가 나를 잠식해온다”(8쪽)라며 연령차별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하며 논의를 시작합니다.


아직은 젊은 저도 나이드는 것을 생각하면 구부정해진 허리, 깊게 패인 주름살, 얼굴에 핀 검버섯 등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하철역 계단에서 힘겨워하는 노인들을 보면 타임머신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나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처럼 노년의 삶에 대해선 긍정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 역시 편견이라는 것을 저자는 알려줍니다.


“나의 미래가 지금의 나보다 못하다는 편견. 나이 든 내가 젊은 시절의 나보다 못하다는 편견. 이 편견이 '나이 부정'의 핵심이다.”(16쪽)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의 나와 만년의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 관점의 기저에 나이에 따른 차별이 놓여 있습니다. 60세부터 100세 이상의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을 그냥 '노인'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저자가 지적할 때 당연하게 불렀던 '노인'이란 말엔 엄청난 편견이 반영되어 있음에 놀랐습니다. 10세부터 50세를 같은 범주에 놓지는 않으니까요.


“우리 주변의 연령차별을 인식하고 나이 듦에 대해 좀 더 미묘하고도 정확한 시각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행동에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애플화이트는 말합니다. 나이가 매우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연령차별이 존재합니다. 의식하기 힘들게 우리 문화에 스며있는 편견 중의 하나인 연령차별에서 벗어나 볼까요?


우리 안에 뿌리내린 부정적 편견


'청년'을 생각하면 미래, 열정, 도전 등 긍정적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애플화이트가 활동하고 있는 미국에도 태평양 너머 한국 사회에도 젊음은 숭배됩니다. 반면 '노년'을 떠올리면 어떤가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신체의 변화를 수치스러워하게 만드는 문화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저자는 연령차별이란 개념을 만든 로버트 버틀러 박사를 인용하면서 이런 문화는 나이 든 사람들을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고 이들의 인권이나 안녕도 개의치 않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나이 드는 것이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로 논의됩니다. 얼마 있지 않아 병들고 노쇠한 노인들이 세상을 뒤덮어 나머지 세대는 이 노인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통을 겪을 것이란 관점이 지배적입니다. 연금도 건강보험 기금도 곧 바닥날 것이고 부족한 재원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통해 채워질 것이란 예상이 전 인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나이 듦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세대간의 반목을 조장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인 노년을 '추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또한 '나이에 걸맞지 않다'는 편견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성적인 활동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저자가 '성욕이 없는 노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라고 말하는데 제게도 깊이 박혀 있는 편견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노인들의 성생활을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저를 보며 나이에 따른 편견이 제게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노년의 재발견


과연 노년은 정말 이런걸까요?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각자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다른 속도로 나이가 듭니다. 우리 모두를 '노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습니다. 노년은 혹은 나이 든 우리를 하나의 정형화된 이미지 안에 구겨넣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궤적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사랑하고 놓아주면서 그 길을 항해해왔다. 자녀든, 집이든, 꿈이든, 살아오면서 쌓은 다양한 경험과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의 총합이 지금의 우리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금 이 모습으로 빚었다. 이것이 바로 풍요롭고 깊이 있고 너무나도 소중한 'agefulness'다.”(83쪽)


나이가 든다고 자연스럽게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들은 지혜를 얻는데 훌륭한 자양분이 됩니다. 은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나이 든 사람들이 일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축적된 경험들은 세대 간 협력을 이끌어내며 혁신적인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은퇴한 사람들을 자원으로 바라보고 의미 있는 일을 찾을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꼭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경제적 성과를 창출해야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가정에서의 돌봄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 등을 통해 사회 공동체에도 분명히 기여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자원을 축내는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사람들은 좀 더 행복해집니다. 이 행복감이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순간을 산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인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노인들도 순간을 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면 행복해진다.”(329쪽)


연령차별이 없는 사회를 향해


저자가 연령차별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으로 제안하는 것은 '인정'입니다. 저도 세상에 태어나면서 시작된 나이 먹는다는 변화 과정을 받아들이고 '나이 듦=살아가는 것'이란 사실을 떠올리면서 편견을 깨는 과정을 시작합니다. 이 편견은 꼭 젊은 사람들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애플화이트는 어느 연령대에든지 늙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로도 연령차별적 태도를 가진 것이라 말합니다.


노인장, 시니어, 어르신이란 표현을 버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 칭하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늙은이/젊은이의 구분은 없다. 우리는 다만 어떤 사람보다는 나이가 많고 어떤 사람보다는 나이가 적을 뿐이다.”(22쪽)라는 점을 마음에 새깁니다. “'young'이 매력적이라거나 시대를 앞서 간다거나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듯, 'old'는 추하다거나 시대에 뒤처진다거나 현명하다는 뜻이 아니다.”(66쪽)라는 것도.


저자는 모든 연령에 친화적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이와 같은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실천 방법들도 말합니다. 특히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에겐 독서, 악기연주, 댄스, 그림그리기 등 뇌에 자극을 주는 활동을 지속하고 사회적 관계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성욕이 여전하다는 것도 인정하고 신체 변화에 따라 성생활도 변화되어야 함을 언급합니다. 의존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상호의존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진리"라는 점을 잊지 않기를 강조합니다.


"노인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존재다.”(319쪽)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마지막까지 예측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인생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326쪽)


책의 마지막 장(9장)엔 다양한 정책적 제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경제에 나이 든 사람들이 이바지할 기회를 늘리는 프로그램 마련, 지속적 직무 및 평생 교육시스템, 돌봄 노동에 대한 경제적 지원, 장기 요양 서비스 제공을 위한 공공/민관 협력 파트너십 개발 등 다양한 접근 방식들은 고령화 사회를 준비하는 데 시도해 볼 만한 일들이라 생각합니다.


참고: 애슈턴 애플화이트(Ashton Applewhite)의 TED 강연(Let's end egeism)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https://www.ted.com/talks/ashton_applewhite_let_s_end_ag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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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작가
이반 일리치
출판
느린걸음
발매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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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발견해가는 혹은 인정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제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하고 있는 일, 가족 돌봄, 사회에의 기여 혹은 봉사 등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지만 계좌의 잔고와 소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시대흐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자급자족'이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된지 오래인 요즘 상품이든 서비스든 소비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산업화 이전엔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현대 산업사회를 지나오면서 소비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40년 전 이반 일리치는 '현대화된 가난'이라는 표현으로 자유와 생산의 기쁨은 사라지고 모두가 획일화된 경험을 하며, 상품이 넘쳐나지만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 시대를 정의했습니다. 세계적 사상가 반열에 오른 이반 일리치는 1978년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라는 짧막한 에세이에서 성장으로 인한 풍요속의 빈곤과 그 안에서 무력해진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 어디서든,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공인된 전문가의 허가 없이 집을 짓거나 아픈 사람을 치료했다가는 법을 우습게 아는 겁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10-11쪽)


매일 거대한 경제구조에 발맞추기 위해 행진하는 다수의 무리에 합류하며, 자신의 능력을 낙관하는 믿음과 타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틀에서 빼낸 듯한 미디어가 무한 침범하는 일상에서 청중이자 고객, 소비자로 전락한 인간. 이반 일리치가 봤던 시대의 모습이 40년 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아니 더 심화되었기에 이 책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자율성을 잃은 채 무력하게 시장에 의존하는 우리들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상품 중심의 시장 중심 사회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상품에 덜 의존하는 새로운 사회구조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모험을 선택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일상을 보면 인간들은 시장 중심 구조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시장과 일체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상품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힘도 없게 되는 무기력이다. 땀을 흘려야 기쁨을 얻는 인간의 조건이 소수 부자만 누리는 사치스러운 특권이 된다.(중략) 새로운 상품이 생겨나 전통적인 자급 기술이 쓸모없어질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직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 버렸다.”(33-34쪽)


이 역시 지금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인간이 스스로 움직여 필요를 만족시키는 시대를 열기 위해선 대중이 자신과 이웃의 만족을 위해서, 권력이 생산하는 상품의 최대 생산량을 파악하고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절제가 시장 의존 사회를 벗어나는데 기반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후기 산업사회의 거짓 풍요와 자유의 소멸을 막기 위해선 한 사회가 생산할 부와 일자리에 한계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부와 일자리가 공평하게 배분되고 함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풍요의 한계를 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량 생산품은 한계를 모르고 넘쳐나고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가난하게 만드는 부'의 생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자리는 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대규모의 추가 정부 예산을 급히 투입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풀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능사일까요? 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자,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한 것은 지금의 무한 상품 소비 시대를 먼저 돌아보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동 시장에 연연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을 탐구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문가가 대중을 불구로 만들다


일리치는 20세기 중반을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라고 정의했습니다. 스스로를 각종 구속에 가두며 살아온 시민들의 안일함을 먹고 교육자, 의사, 사회사업가, 과학자 등 전문가들이 시대를 지배해왔다는 것인데 상당히 수긍이 됩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딱 이렇지 않은가요? 수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있는, 전문가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자율성을 잃은 소비자들인 것이죠.


“갈수록 광고 문구가 필요를 만들고, 소비자는 전문의, 미용사, 산부인과 의사 등 수십 명의 치료 전문가가 내리는 지시를 따라 구매를 하게 된다. 광고가 되었든 전문가의 처방이 되었든, 모임에서 토론을 하든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하는 사회는 개인이 만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행동하거나 결정할 수 없는 문화에서 나온다. 이런 문화에서 소비자는 스스로 배우기보다 만들어진 필요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데려다 필요를 배우는 데 유능한 학생으로 만드는 사회에서는 스스로 경험한 만족에 기반해 자신의 욕구를 만드는 능력은 보기 드물어진다.”(72쪽)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우리는 단순한 소비자로 태어난 것이라는 세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생산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과거 마을 공동체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활동들을 통해 사회 전체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해왔던 경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과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렸기에 인간의 자율적 행동이 마비되었다(일리치는 이를 '반생산성'이라 표현)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자율성 상실을 경제성장의 부작용, 자원 부족, 공해 등의 문제 때문이라 혼동하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인간의 자율적 필요를 상품이 대신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일치리는 노동에 관해서도 “노동은 더이상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창조가 아니라, 주로 사회적 관계인 직업을 의미한다. 무직은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 노동의 가치나 만족을 느끼지는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언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속한 문화에서 얻을 수 있는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필요를 만들지 못할 때 더 이상 인간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중략) 지금은 남자건 여자건 모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도구를 작동하여 생산한 표준화되고 쪼개진 상품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지금까지 인간과 문화의 진화를 촉진시킨 도구를 직접 사용해 얻는 만족감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욕구와 소비는 수십 배가 증가했지만, 도구를 다루며 얻는 만족감은 드물다. (중략)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기와 만들어진 물건이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며 균형을 이루는 동안에만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쉽게 잊힌다.”(89-90쪽)


그래도 작은 희망의 빛줄기가 보인다


그래도 최근엔 우리 사회에 작은 희망이 보입니다. 전통적 일자리가 늘어나기엔 근본적 한계가 있는 시대에 들어섰기에 실업 문제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기존의 상품의존 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움직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에도 몇몇 곳에 누구나 도구를 사용해 물건을 만들 수 있는 팹 랩(Fab Lab)들이 도입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정부 일자리 예산을 이런 곳에 확대해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팹 랩은 일반인 아무나 이용할 수도 있고,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며, 창업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실들이 확대되어 대중화된다면 일리치가 말했던 상실한 자율성을 회복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만들어 얻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노동의 기쁨과 가치를 되찾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준화된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 사회에서 이렇게 한 걸음씩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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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정

작가
장 자끄 상뻬
출판
열린책들
발매
201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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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낙서한 것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와..'하고 작은 탄성이 나오곤 합니다. 조금 서툰것 같아 보이는 그림들에 우리들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것처럼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꼬마 니꼴라로 유명해진 삽화가 장 자끄 상뻬의 <진정한 우정>을 휴가를 보내는 중간 중간 펼쳐봅니다.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라 불리게 된 후 '우정'이라는 말은 매우 낯설어졌습니다. 어린 딸들이 즐겨보는 어린이 만화영화 같은데서나 가끔씩 접하게 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년의 마르크 르카르팡티에(프랑스의 잡지 텔레라마의 전 편집장 겸 대표)와 장 자끄 상뻬 두 사람이 '진정한 우정'에 대해서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 책은 마르크 르카르팡티에(L로 표기)와 장 자끄 상뻬(S로 표기)의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르카르팡티에는 상뻬에게 우정의 의미는 무엇인지, 우정관계에 있다는 증거와 사례, 우정을 나눴던 상뻬의 경험 등에 대해 집요하게 묻습니다. 상뻬는 자신이 생각하는 '우정'에 대해 조곤조곤 대답합니다.


“(우정은) 갑자기 생겨나 당신 안에 척 하니 자리를 잡으면, 그다음엔 알아서 그 감정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거죠. 같이 살자니 거기에 의무도 있고, 나름대로 의식도 있고, 규칙 같은 것도 있을 테죠.”(7쪽)


우정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면서 '우정'이라는 낯설어진 가치를 찬찬히 곱씹어봅니다. 이와 함께 중간중간 삽입된 상뻬의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아주 쏠쏠합니다. 단순히 삽화가라는 말로 장 자끄 상뻬를 표현하기엔 부족합니다. “사회학 논문 1천 편보다 현대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평을 들을 정도인 상뻬의 그림에 빠져들기에 충분한 책입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절대 풀리지 않을 엄청난 문제는 고독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혼자라고 느끼게 마련입니다.”(43쪽)라고 말하는 상뻬인데 그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왜 우정관계가 필요한 걸까요? 저는 상뻬의 이 말에 대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한거죠.


“우리는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행운이죠.”(61쪽)

“우리가 걸음을 걷는 것만 해도 수많은 모순된 힘들이 서로 보완하고 조직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겁니다.”(68쪽)


상뻬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 그리고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함께 걸을 수 있는 관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의 인생이 그렇게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어떠한가요?


“직업이 뭡니까? 라거나 어제저녁은 누구와 먹었어? 라거나 바캉스는 어디로 갈거야? 따위의 질문은 할 필요도 없는 거죠. 오늘날의 인간관계는 그저 불안감을 누그러뜨릴 요량으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63쪽)

“학교에서부터 경쟁은 시작됩니다. 1등, 2등, 3등…사람들은 경쟁에 혈안입니다. 정치가들은 여론조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백분율에 열광하고요…점수를 내지 않는 테니스 경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71쪽)

“우리는 누구나 친구보다는 볼일 있을 때 어울리는 사람들을 더 많이 가진 것 아닐까요?”(85쪽)


매 순간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면서 '아, 나만 이런 것은 아니구나' 혹은 '나는 그래도 좀 낫네'라는 상대적 안도감을 느끼기 위한 인간관계 정도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상대가 되어버린 물결 속에서 빠져나와 친구와 '점수를 내지 않는 테니스 경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상뻬가 생각하는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우정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우정의 의미와 그것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우정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합니다. 우정에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약속된 규칙 같은 게 있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이 따라야 할 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정은 사소한 기적과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고 우연과 필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때론 의례적이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관계가 우정이기도 합니다. 친구라면 서로의 도움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정관계에 있는 두 사람에게는 서로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한편, 조심성있게 그리고 현명하게 적당한 거리를 둘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되도록 상대와 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조심조심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을 하면 오해를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퉁명스럽게 행동해서 공든 탑을 무너뜨리죠. 그러니 어느 정도는 점잔 빼는 태도를 간직하는 편이 더 좋겠지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50쪽)


상뻬는 우정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지금까지 겪어온 인간관계에서 제게 부족했던 것이 이 부분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친구가 되는 것에는 상뻬가 말한 것처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연히 만나게 되어 친구관계를 시작하게는 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데에는 생각보다 세심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상뻬의 말처럼 “거저 주어지는 건 없습니다.”


“사랑의 말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랑의 행위만 있을 뿐이죠”(79쪽)

“오직 노력만이, 설사 아주 미미하고, 상대방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더라도, 부단히 기울이는 노력만이 우정을 지속시킨다고요. 거저 주어지는 건 없어요.”(100쪽)


책을 덮고 찬찬히 제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간 나를 지나쳐간 혹은 내가 지나쳐간 친구라 불렀던 녀석들을 떠올려 봅니다. 내 삶에 매몰되어 돌아보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연락이라도 해봐야겠습니다. 희미하게 자국으로만 남아 있는 '우정의 행위'를 되살려보면서요.


“우정이란, 매우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인간이 받아들여 볼 만한, 자신을 던져 볼 만한 도전입니다.”(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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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래의 자동차를 지배할 것인가

작가
페르디난트 두덴회퍼
출판
미래의창
발매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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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울리는 알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뜹니다. 주말에 다녀온 여행의 여독이 남아 있는지 몸이 찌뿌듯합니다. 그렇다고 월요일 아침부터 지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스마트폰 어플로 자동차를 미리 현관 앞으로 이동시켜 놓습니다. 집을 나와 스스로 이동해 온 자동차에 오릅니다. 모빌리티 서비스 업체에 가입해서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고 있는 자동차인데 아직도 운전대가 사라진 자동차에 오르는 게 어색합니다.


10여년 전만 해도 자동차를 이용하려면 자동차를 사느라 목돈이 들어가고 유지하는데에도 세금, 보험료, 수리비 등 지출되는 항목들이 많았는데 이제 간단히 이용료만 지불하면 됩니다. 게다가 이 업체에선 배출가스가 없는 전기자동차만 제공합니다. 자율주행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어 스마트폰에 원하는 목적지를 입력하기만 하면 자동차 스스로 길을 찾아 갑니다.


간혹 운전대가 있는 클래식카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동료들이 있는데 그걸 보면 운전을 즐기던 시절이 조금 그립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휴식을 취할 수도, 취미 생활을 할 수도, 급한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어 이 서비스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에서 또 하나의 생활 공간으로 변한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살아서 이런 시대를 맞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독일 출신의 자동차 전문가 중의 하나로 꼽히는 페르디난트 두덴회퍼가 <누가 미래의 자동차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예측한 기술 발전 요소를 바탕으로 미래의 자동차 이용 모습을 상상해 봤습니다. 저자는 1)전기자동차와 같은 새로운 동력 기술, 2)인공지능이 적용된 자율주행 기술, 3)소유에서 공동이용으로의 인식 변화로 자동차 산업이 또 한 번의 근본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자동차 강국인 독일의 자동차 전문가가 자국의 자동차 제조사 및 부품 업체들에게 전하는 제언입니다. 애플, 알리바바, 바이두, 구글, 테슬라, 우버와 같은 예상치 못한 경쟁자들이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에 전통적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던 기업들이 사업 모델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며, 어떤 미래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지 저자는 조언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이 국민 경제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나라 자동차 산업 관련 기업들 혹은 종사자들도 두덴회퍼의 분석과 예측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기술/문화 트렌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자도 언급한 것처럼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자동차는 이동 수단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넘어서 새로운 생활 공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자동차 제조사는 개인들의 이동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사업 모델을 변화시켜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고급형보다는 보급형 혹은 대중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용자들의 '감성'입니다.


“그래도 불변의 진리가 있다. 느낌을 주지 못하는 자동차는 구매자를 찾기가 극히 힘들다는 것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은 친환경 기술 수요가 아무리 높아지고 있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미쓰비시 i-MiEV 같은 최초의 대량생산용 전기자동차들은 이 사실을 뼈아프게 체험해야만 했고 무엇보다 이 점 때문에 시장에서 고배를 맛봤다. 반대로 테슬라 설립자인 일론 머스크는 처음부터 감성에 집중해 자동차를 내놨다.”(30쪽)


감성 측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자동차와 인간이 상호작용을 하는 기계적/소프트웨어적 인터페이스 디자인, 외부 디자인 뿐만이 아닌 자동차 실내의 완전히 새로운 공간 디자인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제품과 서비스에 어떻게 실현해 고객들을 만족시키느냐가 해당 기업들의 역량일 것입니다.


저자는 내연기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친환경차로의 급격한 전환을 꾀하고 있는 중국, 최근의 디젤 게이트, 심각해지는 대도시들의 대기오염과 그에 따른 배기가스 규제 등을 고려하면 이것이 과장된 예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초의 자동차가 발명되었을 때부터 심장의 역할을 해왔던 엔진을 무엇이 대체하게 될까요? 배터리? 연료전지? 이럴 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날아가보고 싶어집니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배터리를 이용하는 전기자동차가 우위를 점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두덴회퍼는 테슬라의 모델 S(배터리 전기자동차)와 도요타의 미라이(수소연료전지 자동차)를 비교하며 테슬라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테슬라처럼 주행거리, 배터리 충전시간, 인프라 제공 등을 통해 고객들이 열광하게 할 수 있다면 예상보다 빠르게 새로운 심장이 자동차들에 이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배터리 기술에서의 어려운 도전 과제들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아 저자의 예상이 상당히 낙관적이런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자동차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스스로 운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고, 이와 함께 자동차의 소유 개념은 이용 개념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저자는 예상합니다. 부분적 자율주행 기술이 전 세계 자동차 제조사들 뿐만 아니라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업체들에서도 이미 개발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자율주행으로의 변화는 명백해 보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전통적 자동차 제조사와 새로운 도전자들과의 경쟁입니다.


“디지털 제품과 인공지능이 핵심 역량인 이들 소프트웨어 그룹과 거대 인터넷 기업들은 지금까지 자동차 개발이나 차체 조립, 차체의 기계적 구성요소에는 경험이 전무하다. 이들은 비록 이쪽 분야에선 새내기지만, 업계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기존 업체들로부터 고객을 가로채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진지하게 상대해야만 한다. 과거 모터보트 제작사들이 범선 제작사들의 고객을 빼앗아간 것과 마찬가지다. 산업화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숱하게 많이 벌어졌다.”(129쪽)


자율주행 기술은 사람들에게 '안전', '시간', '미학'을 선물할 것이라는 저자의 언급을 전통적 자동차 산업 종사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율주행 기술에 인터넷의 연결성의 조합으로 자동차 이용 형태가 변화할 것입니다. 최근에는 공유경제가 또 다른 착취 구조가 된 듯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버 등을 넘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유경제가 자동차 산업에 찾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상당히 낙관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산업 및 기술 분야에서의 논의는 법률적 그리고 윤리적인 부분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기술의 적용보다 선행되어야 함을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의 기술 개발자들, 정책입안자들,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사안들입니다.


“자율주행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것들이 포함돼 있으며,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율주행은 일련의 법적, 윤리적 문제들로 우리와 충돌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누가 배상 책임을 질 것인가? 어떤 정보보호법과 인격권이 지켜져야 하는가? 예기치 못한 교통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규칙과 원칙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 틀을 아직까지는 직접 형성할 수 있는 한, 어서 서둘러 행동에 나서야만 한다. 기술 발전이 일단 그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게 되면, 뒤늦은 논의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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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처럼 살기

작가
최문형
출판
사람의무늬
발매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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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호모 사피엔스의 일종인 동물입니다. 다만 다른 동물들보다 지능이 높고 언어와 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지금은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죠.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동물적 인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자 최문형님은 책 <식물처럼 살기>에서 인간의 '동물화'에 따른 부작용을 지적하는데, 지금껏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이어서 잔잔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근대, 현대에 이르러 인간들은 자신들의 부도덕, 탐욕, 폭력과 공격성 등을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 동물세계의 원리로 합리화해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지구도 엉망이 되었다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했습니다.


“동물과 닮았다는 인간이 주인이 된 지구는 전쟁, 살육, 테러, 총기난사, 난민, 영토분쟁, 종교분쟁, 각종 바이러스의 창궐, 토양과 해양의 오염, 미세먼지, 온난화 등등으로 아주 만신창이가 되었다. 동종끼리의 전쟁 타종의 착취로도 성이 안 찼는지 인류는 생명의 터전인 지구조차도 마구 다루었다.”(17쪽)


인간은 식물들에게 배워야 한다


저자는 동물적 인간들이 둔 자충수를 무르기 위해선 기존의 동물적 인간 개념에서 벗어나 지구를 온통 뒤덮고 있었으나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온 존재인 식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존의 동물적 인간 사회 개념을 벗어나보자는 의견은 신선하다 생각했지만 식물들의 지혜를 배우자는 것에 대해선 의문이 생겼습니다. 지능을 가진 동물들처럼 어느 정도 소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식물들에게서 지혜를 배운다니요. 식물인간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숨만 쉬고 살아가는 식물들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소개하는 여러 가지 식물 이야기들을 읽어가면서 생각외로 인간이 식물들과 항상 함께 있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신성시되었던 나무들, 인간에게 행복과 기쁨뿐 아니라 유용함도 제공했던 꽃들, 무엇보다 인류의 문명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곡물과 채소,과일 등을 보면 식물과 인간의 관계는 동물들보다 더 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식물들을 그 동안 얼마나 하찮게 여겨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보면 식물은 인간과 지구상 모든 생물에게 산소와 수분,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특히 인간에겐 '공기와 물, 꽃과 열매, 건강한 흙, 약재' 등 수 없는 유익을 제공합니다. 저자가 대표적으로 예로 든 각종 치료제, 고추, 커피, 카카오, 코코넛 등이 없었다면 인간들이 누리는 행복은 심각하게 쪼그라들었을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말합니다.


“(식물은) 무기력해 보이지만 엄청난 초능력자다. 식물에게는 모든 것이 풍부하다. 자기가 충분히 쓰고 누리고도 나누어줄 여유가 있다. 우리도 그렇게 넉넉하게 살 수 없을까? (중략) 양로원에서 미용봉사를 하는 분, 김치와 밑반찬으로 고아원을 방문하는 분, 소외된 이들에게 지식나눔과 의료봉사를 하는 분들…(중략) 이런 작은 연민과 나눔이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중략)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주진 못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눈다면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누군가의 '보리수', '사과나무', '말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식물처럼, 나무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53-54쪽)


식물 세계의 공생과 생존경쟁


한편 식물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동물들이 필요합니다. 물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계를 둘러보면 식물과 동물의 공생 관계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저자는 식물들의 수분을 예로 들어 그 신비로움을 설명해 줍니다. 게다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통념도 깨뜨려 줍니다. 현대의 인간들이 곱씹어 생각해 보고 실제 삶에 적용해야만 하는 중요한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오랜 진화의 역사를 보면 생명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는지를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호의와 친절에 보답할 줄 아는 착한 개체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 꼭 대가나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움은 다른 도움을 부른다. 한 번 도와주면 언젠가 누군가에게서든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이기적인 집단이 더 번성할 것 같지만, 진화는 오히려 이타적 집단의 손을 들어주었다.”(74쪽)


모순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책에 따르면 식물들의 세계에도 생존 경쟁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식물들의 치열한 생존전략에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동할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가진 식물들은 수십억 년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어떤 식물들은 특수한 화학물질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물들은 18%정도까지는 피해를 참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독성물질을 사용하는데, 이는 동물들과의 공생을 위한 배려라고 합니다.


또 어떤 식물은 애벌레의 공격을 받으면 애벌레 위에 기생하는 말벌을 지원군으로 부르기도 하고, 자신들의 생장을 돕고 공격자들을 막기 위해 미리 주둔군을 두기도 한다고 합니다. 알면 알수록 신비한 식물들의 세계입니다. 저자는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것을 성공이라 여기며 추구해왔던 인간들에게 신비함과 지혜로 가득찬 '식물병법'을 제안합니다.


식물의 방어와 공격은 결코 자신의 성장과 실현을 방해하지 않으며 동시에 적을 말살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적들이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존재임을 안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공존한다. 그들의 삶의 기술은 그대로 하나의 예술이다. 인간도 그렇지 않은가? 힘들고 아픈 시간들도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적들의 핍박이 나를 얼마나 성숙하게 키워 주었는지 알게 된다.”(99쪽)


현대 인류에게 시급히 필요한 식물의 속성들


저자가 소개하는 식물들의 삶 중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상생과 공존이었습니다. 식물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면서도 이것을 다른 생명체와 나눕니다. 참나무 뿌리 주변 개미, 지렁이, 굼벵이 등, 나무 둥치의 이끼와 버섯, 나무 가지의 새 둥지, 땅을 건강하게 하는 것, 균류와의 상생 등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무한할 정도입니다. 무한한 다양성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를 유지하는 세계가 각종 차별이 만연한 인간 사회에도 깃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함께 식물의 우수한 적응력과 수용성 또한 급변하는 환경에 놓인 현대의 인간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식물은 강풍, 추위, 강한 빛, 홍수, 가뭄 등에도 스스로를 '무한변화'시키면서 환경에 적응한다고 합니다. 변화를 조절하는 능력인 '항상성'은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대 인류가 참고할 만한 속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자의 조언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들은 식물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들의 포용력과 넉넉함을. 그들의 뛰어난 생산능력과 생존기교를. 그들의 고독과 재활능력을. 그리고 그들의 기민성과 생활력을. '식물처럼 살기'는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우리도 결국 식물에게로 돌아가니까. 문명의 끝에서 결국 식물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식물처럼 살지 않으면 인간 또한 공룡처럼 멸종할 위기에 처할 것이다. 식물을 배우자. 급변하는 세상에서 비록 천천히 움직여도 식물처럼 적응하고 변화하여 항상성을 유지하자.”(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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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작가
도선우
출판
나무옆의자
발매
201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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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혹은 인생을 망칠 정도의 해를 입힌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할까? 그 사회의 법에 따라 정당하게 재판을 하고 형량을 선고하고 그 결과에 따르게 하면 되는걸까? 사람의 생명 혹은 인생을 법정에서의 형량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일까? 인터넷에 항상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쉼없이 손바닥에 올라오는 강력 범죄 뉴스와 그에 대한 처벌 소식을 듣다보면 이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나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적 처벌과 형벌제도, 특히 사형제도의 모순, 진정한 속죄와 용서 등을 고민했었다. 최근 출판된 소설이고 세계일보사가 주관하는 문학상(13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저스티스맨, 도선우 지음>을 읽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겹쳐진다.


두 소설이 정확히 같은 내용이나 주제를 다룬것은 아니지만 <저스티스맨>을 통해서도 <공허한 십자가>에서와 같이 범죄, 처벌, 속죄 등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에 더해 <저스티스맨>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종종 일어나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감정적 댓글 싸움, 가상공간에서 주어지는 익명성의 두 얼굴, 언론과 휘발성을 갖는 인터넷 여론, 사법 및 경찰 제도의 허점, 정의에 대한 생각들을 뽑아낼 수 있다.


일곱 건의 살인이 일어나는 동안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 인터넷에 급속히 퍼지는 연쇄살인 사건 현장 사진.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닉네임 저스티스맨이 운영하는 포털 사이트 까페에 사건의 동기와 사건들의 연관성을 추측한 글들이 올라오자 누리꾼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대중들이 저스티스맨의 가설에 열광하면서 까페에는 수십만 명이 몰려들며 사회적 이슈가 된다.


별다른 꿈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육군부사관학교에 지원한 '그'. 부사관으로 중사까지 근무하다 전역해 별다른 기반 없이 시작할 수 있는 보험설계사가 된다. '그'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지만 그저 그런 일상에 찌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어느 날 회식 때 과하게 취한 나머지 인사불성이 되어 길거리 화단에서 토하고 변도 보고 쓰러져 잠들고 만다. 어찌보면 이 또한 여느 일상의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틑날 회사에 출근한 '그'는 '오물충의 만행'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발견한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자 그의 신분이 인터넷 상에 공개되기 시작한다. 결국 오물충이 '그'라는 것이 알려지고, '그'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 가족들의 비난에 표현할 수 없는 모욕감을 안고 '그'는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연쇄살인의 피해자들이 이 '오물충'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까페 운영자 저스티스맨의 주장이었다. 저스티스맨은 일곱 건의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소상한 근거들을 제시하며 누리꾼들을 설득해 간다. 오물충 사진을 처음으로 인터넷에 올린 고등학생, 오물충의 정체를 밝힌 오물충의 동창생, 이 사건을 기사로 써 전국민에게 오물충을 알린 인터넷 언론사 사회부 기자가 차례대로 피살되었다고 저스티스맨은 썼다.


이 세명의 피살자들은 죽을 만한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 일상에 찌들어 살다 술로 스트레스를 풀어보려다 한 두 번쯤 '그'와 같은 실수는 할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이 실수로 인해 '그'처럼 인생 전체가 망가지게 되었다면 그 가해자들의 책임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 사진 한 장을 인터넷에 올리고 흥미거리로 쓴 기사가 어떤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채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누리꾼들은 주로 “단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한 실수 혹은 고의를 저질러도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빳빳이 들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니”(38쪽) 라며 사회의 현실을 씁쓸해 했다. 그런데 네 번째 피살자에 대한 글에서부터는 누리꾼들의 반응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성년 성매매 동영상에 나온 한 여고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네 번째 피살자는 수리하던 휴대폰에서 우연히 이 동영상을 보고 성인사이트 운영자인 친구에게 보낸 전자회사 서비스센터 직원이었다. 이 동영상을 친구인 네번째 피살자로부터 건네받아 이를 인터넷에 처음으로 게시한 성인사이트 운영자가 다섯 번째 피살자.살인 사건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오물충의 복수란 개인적 관점에서 허술한 법망의 대리 집행자 탄생이라는 사회적 관점으로 변화된다.”


저스티스맨의 까페에 달렸다는 댓글들을 읽어가는데 마치 엊그제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실감난다. 이제 연쇄살인범은 마땅히 죽어야 할 놈들을 처단하는 킬러라고까지 불리며 누리꾼의 지지를 얻어간다. 하지만 여섯 번째 피살자인 청소년 성매매 영상을 찍었던 중년의 국어교사에게 중학생 딸이 있었다는 저스티스맨의 글은 누리꾼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고 그에 따라 반응도 엇갈렸다.


“어떤 누리꾼은 자신한테도 중학생 딸이 있으면서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과 청소년 성매매를 일삼는 파렴치한의 죽음을 막무가내로 통쾌해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신분과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아내의 심경과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딸의 형편 때문에 못내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중략)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죽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과 그 어떤 이유로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었다.”(118쪽)


어찌보면 해묵은 논쟁이지만 여전히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해법은 없는 문제가 아닌가. 소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어지는 누리꾼들의 댓글 싸움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익명성이 허용된 가상 공간에서 현실의 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우리 사회 누리꾼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생생하다.


살인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섯 번째 피살자가 살해되었던 장소인 한 펜션과 관련되어 있는 세 명의 사람이 더 살해된다. 그 펜션 주인을 농락했던 여행자 까페 운영자, 사회적 이슈가 된 저스티스맨의 까페를 비판했던 기초단체장을 살해했던 건달, 이 기초단체장과 연결되어 있던 국회의원까지. 소위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살해된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살인사건까지 일어나는데…


각 살인 사건에서 피살당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분명히 '나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잘못을 목숨으로 바꾸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사법제도의 허점을 노리거나 사법기관에 힘을 행사해 처벌을 빠져 나가는 이들, 혹은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인가를 묻게 되는 잔혹한 범죄자 등을 보게 될 때면 감정적으론 킬러의 출현을 바라게도 된다. 무엇이 정의이고 속죄인지 참 어려운 문제다.


이에 더해 소설에서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물결치는대로 휩쓸려 다니는 누리꾼들의 모습을 통해 자그마한 스마트폰 안에 세상이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나의 모습 또한 돌아보게 된다.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붕어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꼭두각시처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뜨는 기사만 수동적으로 클릭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기사만 취향대로 골라서 읽다 보니 그것이 오로지 그들이 아는 세상의 전부가 되었을 따름이었다. 타자의 숨겨진 사생활이나 파헤쳐 먹고사는 자들이 키보드를 두들겨 올리는 활자가 곧 이 세계의 실체라고 믿고 사는 붕어 인간들.”(241쪽)
 

저자는 각 살인 사건이 인물, 장소, 사건 등의 단서들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구성했다. 책을 들고는 마치 물 흐르듯 잘 짜인 각본으로 만들어진 추리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내리달아 읽었다. 스토리 자체도 재미 있고 그 안에서 제기하는 사회적 물음들도 의미가 있는 매력 있는 소설을 만나 기쁘다. 도선우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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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미래

작가
팀 던럽
출판
비즈니스맵
발매
201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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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


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개역개정)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말을 했던 사도바울이 <노동없는 미래>를 읽는다면 어떤 말을 하게 될까 궁금해집니다. 이 표현을 공산주의의 원칙으로 삼아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노동에 높은 가치를 뒀던 레닌이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궁금합니다.

 

매일 노동과 돈을 맞바꾸며 살고 있는 제게 '노동없는 미래'는 항상 꿈꾸지만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해 로봇에게 일자리를 내어주고 원하지 않게 이상향에 도달하게 되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몰린 노동없는 미래는 '실직'이라는 두렵고도 슬픈 미래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요? 팀 던럽은 인공지능, 로봇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기술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변화는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중심이 된 급료를 받는 일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것인가라는 물음 대신 일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일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고 유용한 부의 재분배 방식이 아니다. 이제 일은 최저 생활 임금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몸부림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처절해져 가고 있을 뿐이다."(16쪽)


일을 바라보는 위와 같은 관점은 제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가 굳이 일하지 않아도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자는 일의 과거와 현재, 기술과 일자리의 관계, 기본소득 제도 등을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불안감의 뿌리는 일자리에 대한 관점의 차이


고대에 '노동'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활동으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었는데 반해 '일'은 자유인이 온전한 시민권과 인간적 성취를 추구하는 활동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엔 이 경계가 희미해졌을 뿐만 아니라 일 혹은 노동이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애덤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를 거치면서 노동은 개인적 생존 차원을 넘어선 유익하고 '생산적'인 일로 격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일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자긍심을 앗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은 상품이 되었고, 일자리는 귀해졌습니다. 때문에 고용인과 고용주의 불평등한 관계는 심화되었습니다. 여기에 막스 베버의 '개신교적 노동 윤리'가 등장해 자본주의와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천직 혹은 소명이란 개념이 등장합니다. 천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일을 기계들이 대신하는 것에 큰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라면 아마 기꺼이 로봇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라고 말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듯한 상상입니다. 기계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가진 불안감의 뿌리는 일에 대한 관점에 있습니다.


"우리 삶을 일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 일을 앗아가는 모든 기술을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이는 현재 우리의 경제적 행복이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가진 일자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47쪽) 


기술과 일자리, 그리고 기본소득


저자는 묻습니다. "과연 로봇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인가? 그리고 과연 내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자동화를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일의 미래와 관련되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고용의 미래'라는 보고서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를 살펴봅니다. 그러면서 '자동화와 노동이 상호 보완 작용을 하면서 생산성과 수입을 증대시키고 노동 수요를 늘린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양쪽의 입장엔 각각의 전제와 가정이 있기 때문에 전망도 엇갈릴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팀 던럽은 "인간이 미래에 관해 얘기하면, 신들이 웃는다"라는 중국 속담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증거들을 면밀히 살펴 가장 그럴듯한 미래를 추측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보고서들에는 많은 변수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할 여지가 항상 있다는 것이죠. 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로봇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인가 하는 의문 속에 갇혀 있지 말고, 일의 미래에 대해 더 나은 사고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무도 우리가 겪을 커다란 변화를 부정하지 않으며, 그래서 의문은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로 맞춰지게 된다. 우리는 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걸까?"(130쪽)


저자는 자동화 시대의 일자리를 이야기하다 갑자기 기본소득을 말합니다. 뜸금없는 것 같지만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보면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사람들이 낭비하고 나태해지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우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술로 인한 일자리 감소 및 실업에 대처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입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미래로 돌아가는', '탈 노동'이라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할 것인지, 복지와 다양한 노동 보호 정책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제거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유급 고용 중심 체제를 벗어나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뒷받침되는 세상을 꿈꿔볼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의 재능을 소득을 올리거나 이익을 내는 데 쏟지 않고 개인적 만족을 위해 쓸 수 있는 세상, 또 급여나 각종 수당을 못 받게 되거나 일자리 자체를 잃게 될까 두려워 늘 시간 맞춰 출퇴근하고 온종일 뼈 빠지게 일하는 게 아니라 가족 및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세상 말이다."(222쪽)


말미에 인용된 제임스 퍼거슨의 주장이 신선합니다.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면 하루를 배부르게 해줄 것이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 먹고 살수 있게 해줄 것이다'라는 격언은 저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개념입니다. 하지만 제임스 퍼거슨의 주장처럼 지구촌 전체에서 나오는 수확물의 일정 몫을 사람들이 나누어 받게 된다면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울 필요 없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일자리 상실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저자가 제안하듯 '탈 노동'의 미래에 대해 상상해 보고 논의해보면 어떨까요? 새로운 정부에서도 일자리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일'에 대한 개념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조금 더 나아가 '일의 대안'을 찾아보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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