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끄기의 기술

작가
마크 맨슨 지음
출판
갤리온
발매
2017.10.27.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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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열심히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직업도 바꿔봅니다. 부단한 노력끝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다면 그만한 행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이런 행운을 누리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엄기호 작가는 <공부공부>라는 책에서 우리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자기계발 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하며 능력을 쌓고 있지만 계발한다는 자기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무얼 계발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계발만 하고 있으니, 그 계발은 자기 자신을 파헤치는 삽질에 불과하다.”<공부공부>(14쪽)


“때로는 사람들은 ‘하는 것’이 너무 많아 그 ‘하는 것’에서 ‘겪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체험의 과잉/경험의 빈곤에 시달린다.”<공부공부>(188쪽)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지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한 채 표류하듯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적절한 조언을 하는 젊은이가 한 명 있습니다. 마크 맨슨이라는 젊은 작가인데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사람들이 삶에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고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는 질문을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에 정리했습니다.


“인생의 목적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뭘 포기해야 하는지’모른다는 거다.(중략) 어떤 부족함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 모든 걸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인생을 ‘지옥의 무한궤도’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경 끄기의 기술’이다.”(10-11쪽)


삶에 대한 통찰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생각들에서 삶의 지혜가 묻어납니다.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미국의 한 젊은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에 몰두하게 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극복하면 성공한다는 터무니 없는 긍정성을 갖도록 자극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도 흙수저가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분투해 성공하는 이야기에 온통 집중합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성공을 거둔 소설 미디어 기업들은 ‘더 나은 직업, 더 멋진 차와 집, 더 멋진 삶’을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저자가 말하듯 우리는 모든 것들에 항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미디어 속 세상에는 행복이 넘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집안에 틀어박혀 고양이 오줌이 묻은 모래나 갈아주면서’ 내가 속한 현실은 시궁창이라 생각한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소셜 미디어의 뉴스피드를 보는 제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경 끄기’가 꼭 필요한 시대


도저히 집중을 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신경을 끄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에 지나치게 신경쓰느라 몸부림 치며 살아간다’라는 저자의 생각에 100% 동의합니다. 매 순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세상 모든 걱정을 하고 있는 제게도 신경 끄기의 기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신경 끄기란 세상 모든 것에 무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자신의 가치관을 정교하게 다듬은 후 이것에 기초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선별해야 합니다. 저자는 중요한 것을 하는 데 마주치는 역경들에 신경을 쓰지 말자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문제는 항상 있음을 인정하고 이 문제들에 너무 신경을 써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단, 이 때 “모두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회가 보여주는 성공스토리를 머릿속에서 지워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평범함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한다. 그걸 받아들이면 뭔가를 성취하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해서 별 볼일 없이 살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61-62쪽)


이 말이 참 마음에 듭니다. 세상이 평범한 삶의 가치를 높여 쳐주지 않는 것 같기에 뭔가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 ‘내 인생 대부분이 지루하고 평범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와 같은 자세를 가지려고 합니다. 저자는 보통의 자기계발서들에서 말하는 ‘너는 특별해’, ‘너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라는 메시지 대신에 ‘너는 특별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평범한 존재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어떤 평가나 거창한 기대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이루게 될 것이다. 또한 삶의 근본이 되는 경험을 깊이 음미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소한 우정을 나눈다거나, 무언가를 창작한다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거나, 좋은 책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웃는 일 등에서 즐거움을 찾게 될 것이다.”(63쪽)


“최첨단 기술과 매스미디어 마케팅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것이 범람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더 못났다고 느끼게 됐다. 그리고 주목받거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더 극단적이고 더 근본적으로 행동하고 더 자신감을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71쪽)


이를 위해 저자는 세상이 주입하는 ‘엉터리 가치’들인 쾌락, 물질적 성공, 나는 다 안다는 태도, 무한 긍정을 벗어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가치 다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물론 이것이 인생의 목적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가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가치를 정한 것처럼 자신을 돌아보며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어떻게 가르고 선택할 것인지 정해보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계발이라는 건 곧 더 나은 가치를 우선하는 것이며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문제를 다뤄야 삶이 나아진다. 그렇다면 좋은 가치와 나쁜 가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좋은 가치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사회에 이로우며 직접 통제할 수 있다. 나쁜 가치는 미신적이고 사회에 해로우며 직접 통제할 수 없다.”(109쪽)


신경 써야 할 다섯 가지 가치


마크 맨슨은 이 다섯 가지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외부 환경이 어떠하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국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저자는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전부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결국 삶은 내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진리가 아닐까요.


자신의 삶이 옳아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말 것을 저자는 제안합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하라는 조언입니다. 또한 ‘너 자신을 믿으라’는, ‘가슴이 시키는대로 해’라는 달콤한 말들 대신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점검하고 자신의 믿음과 가정에서 틀린 것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 성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저자는 돈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대신 자유와 자율이라는 가치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기가 생기지 않을 땐 ‘뭐라도 해’라는 은사의 조언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동기가 있어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때론 행동이 동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저자는 자신의 삶에서 경험했습니다. 이 부분에 공감합니다. 동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때로는 소모적일 때가 많습니다.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머뭇거릴 때 ‘뭐라도 해’라는 조언은 적절합니다.


“뭔가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자신을 거기에 제한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와 즐거움에는 수준이 있다. 수준 높은 의미와 즐거움에 닿으려면, 하나의 관계, 기술, 직업에 수십 년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 수십 년을 바치려면, 나머지 선택지를 거부해야 한다. 하나의 가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가치들을 거부해야 한다.”(197쪽)


이 말에도 우리가 어떤 것에 신경을 꺼야 할 지 나와 있습니다. 대중매체는 성공담을 끊임 없이 보여주지만 정작 그것에 이르는데 필요한 수천 시간의 단조로운 연습과 지루함은 보여주지 않기에 우리는 결과에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선택하는 긴 과정과 그것을 살아내는 지루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많은 작가들이 말하듯 이 책의 저자도 ‘몰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선택해 집중하고 정신 사납게 하는 온갖 대안을 거부함으로써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고 밝힙니다. ‘몰입하면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다’는 저자의 조언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번쯤은 몰입의 경험을 해 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삶을 생각할 때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자신이 결국 소멸한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덧없고 피상적인 엉터리 가치들을 삶에서 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다른 모든 가치와 결정의 방향을 정해주는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죽음은 인생의 의미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빛이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걸 하찮게 느낄 것이며, 모든 경험을 제멋대로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준과 가치가 갑자기 무의미해질 것이다.”(222쪽)


<신경 끄기의 기술>은 미국의 한 젊은이가 겪은 인생 경험에 대한 책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겪은 개인적 경험을 다른 사회에 속한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들로 변환시키는 재주가 있습니다. 저자가 제안한 ‘인생에 대한 강한 책임감’,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신에 대한 가치평가 기준’, ‘선택과 집중’, ‘죽음을 생각하기’는 삶을 살아가는 데 물어봄직한 질문들이라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 했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입니다. 소셜미디어에서 흘러나오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사건 사고, 만나야 할 것만 같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신경 쓰이는 일들이 그득한 연말입니다. 신경쓰이는 온갖 일들에 저자가 말하듯 ‘신경을 끄고’ 잠잠히 제 삶과 가치들을 생각해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기꺼이 투쟁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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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원하는 아이 

작가
문석현
출판
메디치미디어
발매
201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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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에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세간엔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란 비관적 전망도 있고, 수고스러운 노동은 로봇들에게 맡기고 만족스런 자유 시간을 갖자는 낙관적 제안도 있습니다. 두 쪽의 주장엔 나름의 근거와 논리가 있기에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 혼란스럽습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 자신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게 될 자녀들을 염려하며 벌써부터 불안해 합니다.

짧게는 다음 해에 유행할 트렌드에 대한 전망부터 길게는 30-40년 후 미래 예측에 이르기까지 미래 사회를 다룬 책들도 넘쳐납니다. 하지만 이런 전망에는 많은 가정과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 예측 도서들을 읽는다고 해도 앞날에 대한 불안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까지 있었던 사회적 변화 양상을 근거로 가장 그럴 법한 사회를 추측하는 것 뿐입니다.

다른 분야보다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빠른 소프트웨어 업계에 있으면서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최전선에서 체험했던 한 아빠도 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인공지능 전문가이자 데이터경영연구소 소장인 문석현 박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세상의 변화를 바탕으로 <미래가 원하는 아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인터넷 서비스 및 소프트웨어 업계에서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숨막힐듯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요즘의 아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대비하면 좋을 지 저자가 생각했던 사항들을 다른 부모들과 가볍게 이야기 나누는 정도의 책입니다. 딱딱한 느낌의 ‘미래 전망 보고서’류의 책들과는 달리 최근의 변화상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직업의 변화상, 미래를 위한 교육, 미래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 등의 주제들을 대화하듯 편안하게 풀어갑니다.

하지만 저자가 미래 직업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꽤 냉정한 편입니다. 저자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공과 실패가 단기간 내에 명확히 구분되는 분야에 있었던 만큼 직업의 양극화, 일당백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성 향상 도구, 승자독식인 혹독한 경쟁 등 세상은 지금보다 더 냉험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생산성 향상 도구 활용 능력, 새로운 분야를 탐색하는 능력, 자율성과 결과에 책임지는 태도 등을 키울 것을 제안합니다.

꿈 속을 날아다니는 듯한 마냥 밝은 미래 전망보다는 현실에 기반한 미래 직업세계에 대한 저자의 예상은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면에선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냉혹한 미래 직업 세계를 대비하기 위한 인공지능 전문가의 조언치고는 막연하고 진부한 느낌이어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는 말 그대로 예측해보는 것이기에 그리고 불특정 다수에 대한 조언이기에 저자의 제안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정보통신 분야에서와 같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분야는 아니지만 저 역시 공학/기술분야에 종사하고 있기에 기술발전에 관심을 가지라는 저자의 제안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예를 든 드론, 3D프린터, 생물유전자 조작 등의 기술은 이미 실용화에 접어든 것들이어서 미래 기술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느낌입니다. 차라리 저자의 전문 분야인 인공지능과 데이터 사이언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소개했으면 보다 유익했을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저자의 제안에 공감하는 부분은 과학을 공부하고 체험해보라는 것입니다. 과학을 공부하면 좀 더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고,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더 커지고 있기에 과학을 모르면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가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꼭 과학자나 공학자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공학도로 인생 절반을 살아온 저 역시 자녀들에겐 상식적인 선에서라도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알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미래가 원하는 아이>라는 책 제목과 ‘인공지능 박사 아빠가 말하는 미래의 일과 행복’이라는 부제목을 보고 너무 큰 기대를 한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과 데이터가 주된 역할을 하게 될 좀 더 구체적인 미래 전망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육시스템의 문제, 책의 중요성, 말하기와 글쓰기, 영어와 중국어 습득, 실패에 대한 태도, 부단한 연습, 다양성의 추구 등의 이야기거리는 너무 일반적인 내용들이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저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처럼 소프트웨어 중심의 디지털 혁명은 계속될 것이고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기술은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입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계와 알고리즘이 기존에 사람들이 하던 일들을 대체하게 될 것도 자명해 보입니다. 아이들이 이와 같은 미래 세계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갈 수 있다면 좋겠지요.

미래를 바라보는 현실적 시각에 비해 이 책의 중/후반부에서 저자가 하는 제안들에선 교과서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야를 넓히는 기회로서 과학과 새로운 기술에 관심을 갖게 하자는 부분에 있어선 매우 공감했지만, 인공지능 및 데이터 전문가로서 알고리즘이 가진 한계나 사람이 보다 잘 할 수 있는 일, 데이터로 할 수 있는 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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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뭄 

작가
애너벨 크랩, 정희진
출판
동양북스
발매
20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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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 공고]

 

- 담당직무: 생기 넘치지만 종종 정신없기도 한 환경에서 활달한 소규모 팀 이끌기

 

- 팀원성향: 변덕이 심하고 옹졸하기도 하며 대놓고 반항을 하는 경향이 있음

 

- 지원자 요건

1.참을성

2.청소, 세탁, 학습지도, 유지보수, 온갖것 조달업무, 안전/보건, 작업치료, 영양, 도덕적 지침과 상담, 교통편의 제공, 기술교육, 팀 내 인적 자원 관리, 아웃소싱, 멘토링, 중재, 교육과 위생 책임

3.탁월한 운동 조절 능력과 침착한 성격 필수

4.기초적 가정용품으로 10분 안에 그럴듯한 배트맨 의상 만들 수 있는 능력

 

- 참고사항

1.반복 업무를 해야 할 때가 많음

2.정식 업무 평가는 없지만 절망적 순간에 지원자가 정기적으로 자체 평가를 할 수도 있음

 

- 급여: 없음

 

이 구인공고에 지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 아주 흔합니다. 여성이 거의 대다수인 ‘아내’들입니다. 호주의 정치평론가인 애너벨 크랩은 책 <아내가뭄>에서 성별에 따른 불평등의 원인이 가사 노동 불평등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위 구인공고와 같은 일을 해주는 아내가 있었기에 남성들이 사회에서 주도적 위치에 올랐다는 것을 다양한 통계자료를 근거로 보여줍니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보면 이는 호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사회의 공통적인 경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양성평등 혁명이 일어났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혁명적인 부분은 주로 ‘유급 여성 노동자의 증가’로 기업의 계산 장부 한쪽에서만 일어났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은 가정에서 여전히 무급 노동을 하고 있으며 남성들은 여성의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일하는 엄마에게 부담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마치 직업이 없는 사람처럼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일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것이다. 만약 두 곳에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양쪽 모두에서 실패한 것처럼 느낀다.”(40쪽)

 

성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을 일터로 끌어들여 주류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할 것이 아니라 남성을 일터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애너벨 크랩이 썼듯이 지금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여자들, 일터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남자들, 아버지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 아이들...”(58쪽) 모두가 패자인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지만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가정 내 노동 세계에 남성들이 진입하지 않았기(혹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남성들에겐 가사 노동을 권하지 않습니다. 직장에선 남성들이 육아 휴직을 사용하거나 재택근무를 한다고 하면 부정적으로 봅니다. 가족을 돌보려는 남성들은 일터에서 괴롭힘을 당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것처럼 문제 해결 방법의 관점을 여성의 사회진출에서 남성의 가정 진입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호주의 남성들이 결혼 프리미엄을 누려왔다고 했는데 지구 반대편에 살아가는 저 역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결혼한 남자를 더 능력있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아내가 가정을 안정적으로 꾸리면서 남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며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낳아주면서 남자들의 노동 능력을 향상시켜’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주로 남자들이 유급 노동을, 여자들이 무급 노동을 담당한다. 그래서 남편들은 일터에서 더욱 잘나가게 되고 지루하고 고된 그 모든 허드렛일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깔끔하게 정리된 가정에서 영양가 높은 음식, 깨끗한 옷, 안정감과 목표 의식, 아이들, 엘리베이터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상사와 무리 없이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 등을 모조리 얻는다. 그동안 이러한 합의를 통해 밥벌이에 나설 필요가 없어진 아내들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학예회가 오늘 밤인지 다음 주인지 알아두고, 우유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등 무급 노동에 능숙해진다.”(175쪽)

 

우리는 은연 중에 남자와 여자가 각각 더 잘하는 것이 있다는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저자는 ‘여성스러운 일, 남성스러운 일’ 등에 대한 편견, 여성의 최우선 순위는 집이라는 편견, 남편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고 아내가 살림과 육아를 책임지는 게 더 낫다는 편견 등을 꼬집습니다. 이와 같은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체적으로 집안일과 육아에 대한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누가 무슨 일을 맡아야 한다는 식의 관습적인 행동 패턴은 남녀 모두를 괴롭힌다. (중략) 일반적으로 여성이 집안일과 육아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혹시 여성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생각에 의심이 든다면, 텔레비전 광고를 한번 보라. 바닥 세제, 화장실용 세제, 유리창용 세제, 지퍼백, 기저귀, 아기용 물티슈, 분유, 식빵 광고에 거시기가 달린 사람이 나오던가?”

 

“그런데 여자들이 집안일에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대부분 여자 잘못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이가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거나 집이 더러우면, 부주의하다면서 여성을 맹비난한다. 여성과 남성이 청결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남녀의 득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212쪽)

 

남녀의 득실이 서로 다르다는 저자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가사 노동에 조금이나마 참여하려고 노력하면서 아내의 높은 기준을 언급하며 불평했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집안일을 주로 하게 되는 아내의 기준이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에게 기준을 맞춰달라는 요구가 아내에겐 또 하나의 스트레스일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자가 육아를 더 잘한다? 여자가 아이를 기르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그래서 ‘여자가 육아를 더 많이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도 편견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도 그런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여자가 혹은 엄마가 육아를 더 잘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다 보면 는다”, “여성이 능력치를 쌓을 기회가 많이 주어졌기 때문이다.”는 저자의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빠를 육아 젬병”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르웨이의 제도를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노르웨이는 1993년 표준 유급 육아휴식을 쓰는 사람이 아빠여야만 수당의 상당 부분을 지급하도록 법을 정했다. 이 제도는 부모기 초기에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 생계부양자라는 기존의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노르웨이는 재정적 혜택을 ‘안쓰면 소멸하는’ 식으로 바꿔서 휴직을 하지 않으면 재정적으로 오히려 손해를 보게 한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몇 주 동안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은 충동과 실천하는 아버지 노릇이 대개의 경우처럼 충돌하기보다는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257-258쪽)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여성들에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성은 가정에서의 역할을 감당할뿐만 아니라 일터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높은 위치로 갈수록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여성들의 사회진출 만큼 늘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책의 주된 주장과 같이 이젠 남자들이 변화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러려면 남성들도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느꼈던 혼란스러움 혹은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요즘의 남자들은 가족을 보호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는 구시대의 역할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강할 때는 강해야 하는 요구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남자들은 저자가 제안하는 것과 같이 “삶의 짜임새를 바꾸고 성공이란 무엇이며, 좋은 아버지란 무엇인지, 좋은 노동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가늠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할지도”(403쪽) 모릅니다. 성평등 사회를 위해 저자의 주장을 기초로 남자들의 논의와 실천이 활발해지는 것을 기대해 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거다. 우리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일과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이 완전히 다른 영역인 것처럼 군다. 그래서 일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만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고 고민하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수년 동안 여성을 리더의 자리로 올리려고 할당제니 차별 철폐 조처니 온갖 보조적인 수단을 두고 왈가왈부했지만, 그동안 등식의 나머지 반은 간과했다. 여성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열심히 독려할 뿐, 남성에게 가끔 뒤로 빠져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남성들(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직장 세계 전체를 얽매고 있는 남성에 대한 기대감을 당당하게 물리치고 있는)이 아마도 변화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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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작가
줄리언 반스
출판
다산책방
발매
20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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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좌파척결’이라는 국정철학을 실행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각에 반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압박하고 심지어 퇴출시키기까지 했던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민주 국가라는 곳에서도 이런 일이 자행될 수 있었는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던 공산당이 통치하던 구 소련에서는 어땠을까요? 블랙리스트 시대를 끝내기 위해 정치권력과 예술, 그리고 예술인들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안성맞춤인 소설이 한 권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줄리언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입니다.

저자는 구 소련의 폭압적 독재하에서 활동했던 천재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자서전이나 평전이 아닌 소설로 재해석했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지만 줄리언 반스는 쇼스타코비치를 공포의 시대에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 타협하기도 하고 저항을 하기도 했던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서로 극단이라고도 할 수 있을 한국의 보수정권도 스탈린 치하의 공산당도 왜 예술가들에게 유독 집착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줄리언 반스가 ‘인간 영혼의 기술자들’이라고 표현한 예술가들의 꿈 혹은 환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영혼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류까지는 아니라도 온 나라의 미래가 다시 만들어지고 있던 시절에는, 모든 예술이 마침내 하나의 영광스러운 공동 프로젝트로 합쳐질 것처럼 보였다. 음악과 문학과 연극과 영화와 건축과 발레와 사진은 사회를 반영하거나 비판하거나 풍자할 뿐 아니라 사회를 만드는, 역동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룰 것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정치적 지시도 없이 오직 그들의 자유의지로 동료 인간들의 정신이 개발되고 꽃피우도록 도울 것이다.”(63쪽)

권력의 요구에 순응? 타협? 저항?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며 소련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던 쇼스타코비치. 그의 작품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당의 기관지와도 같은 매체로부터 갑작스런 비난을 받게 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비난에 대항하고자 권력층에 있던 후원자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권력자들은 그의 작품들을 모두 금지해버리는 등 압박을 가해 쇼스타코비치를 무릎 꿇게 만듭니다.

하지만 얼마 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5번을 통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당당히 일어섭니다. 줄리언 반스의 관점에 따르면 권력층은 쇼스타코비치가 이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대중적으로 성공한 그의 음악을 이전처럼 뜸금없는 비난으로 더럽힐 수는 없었습니다. 

“그 표현은 또한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이들이 그의 교향곡에서 자기네가 듣고 싶은 것을 듣게 해주었다. 그들은 종결부의 끽끽거리는 아이러니를, 승리의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승리 그 자체만을, 소비에트 음악, 소비에트 음악학, 스탈린 체제의 태양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을 향한 충성스러운 지지만을 들었다.”(87-88쪽)

체제의 인정을 받은 쇼스타코비치는 뉴욕에서 열리는 문화 과학 세계 평화 회의에 소련 대표로 참석을 하게도 되지만 이는 예술가로서의 인생에선 굴욕이었다고 반스는 상상합니다. 이 때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에 대한 경멸감을 느꼈으며 완벽한 덫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권력층은 그와 그의 작품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한국의 보수정권 당시 이와 같은 평을 받는 예술가가 있었다면 쇼스타코비치와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는 가망 없는 실패자가 아니며, 적절히 지도를 받기만 한다면 명쾌하고 사실주의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최고위층의 견해였다. 레닌이 천명했듯이 예술은 인민의 것이었다. 영화는 오페라보다 소비에트 인민에게 훨씬 더 쓸모 있고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이제 적절한 지도를 받았고, 그 결과 1940년 그의 영화음악에 대한 분명한 보상으로 붉은 노동기를 받았다. 그가 옳은 길을 계속 걸어간다면, 이는 틀림없이 앞으로 주어질 수많은 영예의 시작이 될 것이었다.”(112쪽)

예술가의 무기, 아이러니?

저자는 쇼스타코비치가 권력층의 요구에 마음속으론 진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죽음이 눈앞에 있기에 위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러니’로 진실을 위장했다고 쇼스타코비치를 변호하는 느낌입니다. 소련의 독재체제 하에선 받아들일 만한 관점이지만 이것을 한국의 보수정권에 충성했던 예술가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했으니까요.

“아이러니는 파괴자와 사보타주 주동자들의 언어로 통했기에, 그것을 쓰면 위험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는-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중략) 아이러니가 그의 음악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잘못된 귀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중한 것을 숨겨서 통과시킬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음악이 남아 있는 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암호로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127쪽)

진정한 예술가라면 이렇게 좀이 쑤시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충분한 공포 아래에서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어야 했지만 그 안에서도 진심을 어떻게든 말하려던 소련의 예술가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입맛에 들기 위해 충성경쟁을 벌였던 예술가의 가면을 쓴 자들이 대조됩니다. 한국의 보수정권 하에서 “예술이 권력에 혀가 묶이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진실을 말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이 진정한 예술가들일 것입니다.

줄리언 반스가 상상한 쇼스타코비치가 살아서 우리 나라의 블랙리스트 예술인들 소식을 들었다면 아마도 부러움과 존경을 표했을 것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권력층의 집요한 압박에 자신이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입당이라는 선을 넘으며 자아에 “금이가고 쪼개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가 마주한 것은 자살에 필요한 자존감마저 잃게 만드는 정도의 공포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쇼스타코비치가 시대의 소음에 맞설 수 있는 최대의 무기는 아이러니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어서서 권력층에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그들의 용기와 도덕적 고결함을 존경했다. 그리고 가끔은 그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는 이유 중에는 그들이 죽어서 살아 있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점도 있었으므로, 복잡한 문제였다. (중략) 공포 속에 한편으로는 제거되어 버리고 싶은 가슴 두근거리는 욕망이 뒤섞였다. 더하여 덧없는 용기의 허영도 느꼈다.”(161쪽)

자, 예술은 누구의 것이지?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중략)

그는 모든 이를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가장 잘 즐겨듣는 이들을 위해서 작곡을 했다. 들을 수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한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135-136쪽)

어쩌면 이것은 소설 속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통해 줄리언 반스가 독자들에게도 묻고 싶은 물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나라의 두 보수정권 하에서 거의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던 만행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과 더불어 당사자들인 정치권력층, 예술가들, 그리고 예술을 향유하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충분히 묻고 답해야 하는 물음이라 생각합니다. 

좌파척결을 외치며 예술가들의 혀를 묶으려 했던 일부 권력자들은 쫓겨났지만 그들을 옹위하던 세력들은 여전히 뻔뻔한 모습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열과 성을 다했던 자칭 예술가들도 의상을 다시 갈아입고 새로운 권력의 눈에 들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을 것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표현을 빗대어 “우주의 기운이(원문은 마법과 종교가) 지배하던 때에는 괴물들에게도 양심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폭군이 사라지고 시민의 지지를 받는 권력의 시대라고 소음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현대 폭군들의 내면으로 뚫고 들어가 겹겹이 파고들어보라. 그러면 결은 바뀌지 않았고, 화강암 위를 화강암이 덮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양심을 찾아낼 동굴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236쪽)라고 했던 저자의 말처럼 촛불의 정부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폭군들이 곳곳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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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 

작가
박윤선
출판
사계절
발매
201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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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할때면, 특히나 그곳이 외국의 어떤 곳이라면, 그곳이 막연히 좋아보입니다. 여행지와 내가 사는 곳이 한없이 대비되면서 그곳은 더욱 낭만적으로 보이죠. 건물벽에 있는 낙서, 지나는 사람, 창 밖 풍경, 심지어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마저도 낭만적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아, 이런 곳에서 살고싶다’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낯설음 혹은 익숙하지 않음의 효과이고 뻔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익숙한 곳을 과감하게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저를 사로잡습니다. 더군다나 흉물스러울 수 있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도 멋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낭만의 도시 파리를 가진 프랑스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박윤선이라는 낯선 이름의 작가가 쓴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라는 제목의 얇은 만화책을 동경 가득한 시선으로 펼쳤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놓았을지 기대하면서.


‘와, 잘 그렸네!’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흑백 그림에 잔잔하게 읊조리는 듯한 느낌의 짧막한 글이 삽입된 100페이지 남짓의 책입니다.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의 낭만적인 이야기는 없었고, 작가가 프랑스에서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사건들,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잔잔한 시내가 흐르는 듯 이어져 있습니다. 그림이 예쁜 것도,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작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박윤선 작가는 한국에서 일러스트를 그리며 닥치는 대로 일하던 중 2년 동안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집과 작업실을 주고 작업만 하는)에 선정되어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2년간 만화책 작업을 하는 동안 남자 친구가 생겨 프랑스에 더 있고 싶어졌고, 프랑스 출판사와의 계약과 남자친구와의 빡스(PACS: 두 이성 또는 동성 간의 시민 연대 계약, 배우자 자격)을 통해 프랑스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자신이 다녔던 프랑스어 교습소, 동네 거리와 여행지, 자주 가는 까페 등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저자는 잘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며, 그 세계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교습소에서 만났던 아르메니아인을 통해 아르메니아라는 낯선 나라와 20세기 초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역사를 아주 조금이지만 알게 되었습니다. 제겐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르완다 민족간 학살과 콩고 전쟁도 교습소에서 만난 아프리카 출신 수강생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까페에서 만난 ‘하르키’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알제리. 알제리인들은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때 여러가지 사정으로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알제리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하르키’라고 부릅니다. 반전 여론으로 1962년 알제리는 독립하는데 프랑스는 하르키들을 데려가지 않았고 알제리에 남겨진 약 7만명의 하르키들은 거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프랑스로 이주할 수 있었던 약 6만명의 하르키들도 수용소에 감금당했다고 합니다.

 

하르키는 우리로 치면 일본군으로 복무하며 독립군을 때려잡던 조선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어느 카페에서 일본군이었던 한국인 노인을 만난다면 하르키 할아버지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다고 한 저자와 같이 반응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한걸음 물러서 객관적으로 하르키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도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아 아직은 저자처럼 대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프랑스어 수업시간에 작가는 또 시리아인 피부과 의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눈은 이번에도 이 의사의 나라에서 일어났던 내전으로 향합니다. 수니파, 시아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서방 국가들 간의 관계에서 이슬람 국가(IS)의 탄생, 난민 문제, 파리와 벨기에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으로까지 시선이 이어집니다. 끊이지 않는 테러와 전쟁, 잔인한 복수를 보며 떠오른 작가의 생각과 물음들이 제가 생각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브뤼셀 테러를 보자 갑자기 체첸과 러시아가 떠올랐다. 나는 사실 그곳 이야기를 잘 몰랐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중략) 체첸이 받는 탄압도, 체첸이 벌인 테러도 끔찍했다. 그 모든 일들이 생각보다 최근에 벌어졌음에 놀랐다. 내가 잊고 살았을 뿐이구나.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면 그 테러들은 정당한가? 그렇다고 민간인을 죽여도 되나? 그럼 군인들끼리 죽이는 건 괜찮은가?(중략) 몇 달간 벌어진 테러들을 보며, 이건 세상이 망할 징조라고, 정말 곧 망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은 늘 그 꼴이었구나. 그러니 당장 끝장나진 않겠구나 싶었다.”(83쪽)

 

외국에서 살면 으레 그렇듯이 작가도 처음엔 한국을 알리고 인정받으려고 했었으나 점점 한국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권퇴진 시위가 정점에 이르던 2016년 말엔 프랑스 사람들은 “그래도 한국이 낫지 않아요? 우리 프랑스 사람들은 다 무관심해서 투정만 부리지, 진짜 물러나게는 못할걸?”이라며 말을 시키곤 해 저자가 다시 한국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자는 탄핵반대 집회 사진들을 보며 국가와 애국에 대한 생각도 적어내려갑니다.

 

“그들 입에서 ‘애국’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묘하게 웃겼다. 나는 내가 애국자라 생각하지 않으니, 저리 되진 않겠지? 꼭 그 ‘애국’의 문제만은 아닐 테니, 나중 일을 누가 알까. 그러다 문득 ‘국가’란 내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이상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국가와 관련된 것들이 그렇게 거슬렸나 보다.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피해 다닌 것 같다. 여전히 국가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적어도 애증은 떼고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애꿎게 미워한 다른 관계들도.”(93쪽)

 

나라를 떠나 있어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볼 수 있는 박윤선 작가가 부럽기도 합니다. 부정한 정권을 바꾸는 저력을 가진 시민과 여전히 탄핵을 부정하며 애국을 외치는 시민,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시민과 사드로는 부족하니 핵을 한반도에 다시 들이자며 핵핵대는 시민 등이 얽혀 공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뉴스들을 접하면 기대와 분노/혐오로 제 마음도 복잡해집니다. 그럴때면 저자처럼 애증을 떼내고 이 사회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에 더해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세계’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또 선진국 혹은 강대국 중심인지도 깨닫습니다. 작가가 책에서 짧게 짧게 소개한 아르메니아, 르완다, 콩고, 알제리 등 오래 전 비극적 역사들과 최근의 시리아 내전, 유럽 등지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들을 자세히 찾아보면서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은 확장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관조하는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이 책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너무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져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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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공부

작가
엄기호
출판
따비
발매
201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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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한 지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전 공부를 합니다. 학창시절과 지금 공부의 의미와 목적이 다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선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농사를 짓던 저의 부모님께서는 “힘들게 농사 지을래, 공부할래” 라고 묻곤 하셨습니다. 따로 공부하란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데 전 힘들게만 보였던 농사를 피하기 위해 보다 손쉬워 보이는 공부를 택했습니다.


부모님은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으셨습니다. 저 역시 당시엔 이 믿음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노력하면 보상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범생이가 되어 대입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받아서 좋다는 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범생이로 생활했고, 역시 운좋게 괜찮다는 기업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으로 공부는 끝이 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적이 아닌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이 지배하는 직장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일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등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범생이로 살면서 미뤄두었던 것들(악기, 언어 등)도 배우고 싶었기에 시간을 쪼개가며 학생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왔습니다.


새로운 시대, 과거의 목적은 효력을 다했다.


어느 날 엄기호 작가의 <공부공부>를 읽다 “공부를 왜 할까?"라는 물음에 멈칫했습니다. 저자는 지난 시절 한국 사회에서 '공부'의 이유가 '1990년대 이전: 신분상승, 1990년대: 자아실현,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생존'으로 변화해 왔다고 분석합니다. 제가 공부하며 성장했던 시기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기인데 제가 공부했던 목적도 저자의 구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공부 목적은 이제 그 효력을 다했다고 저자는 선언합니다. 또한 전국민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공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공부가 신분상승의 도구도 되지 못하고, 자아실현에 이르게도 못합니다. 더군다나 철저한 성과 중심의 경쟁 사회에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노력이 성과로 인정받기는 커녕 탈락의 근거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할까요?


네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요. 저자는 "자신이 망가지지 않게 돌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공부란 단순히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도우며 성장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를 고양하며 기쁨을 주는 관계를 맺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공부를 통해 아래와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자기 삶을 다루는 데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 남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기술은 기가 막히게 발달했지만 자기를 돌보는 언어와 기예는 없다. 자기계발 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하며 능력을 쌓고 있지만, 계발한다는 자기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무얼 계발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계발만 하고 있으니, 그 계발은 자기 자신을 파헤치는 삽질에 불과하다.”(14쪽)


자신을 돌보는 공부로의 전환


저자가 제안하는 공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탐색하고 준비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긴 호흡으로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며 개인적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며 토론하는 공부를 하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134쪽)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과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남과 비교되기 때문에 한계는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남과의 비교에서 벗어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한계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한계를 다룸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위에 성장의 발판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한계를 인정한다는 말은 자기 능력에 미리 선을 긋고 노력하지 말라거나 주제 파악하고 찌그러져 살라는 뜻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 극복이 아니라 다룸의 문제가 되면,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늘 잠정적이다. 지금은 내 능력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먼저 집중한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가진 능력을 능수능란하게 잘 활용할 수 있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며, 넘어갈 용기와 자신도 생긴다.”(141쪽)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가장 먼저 자신의 한계를 알려면 무엇인가를 충분히 해봐야 합니다. 이 '충분히'를 혼자서 아는 것이 쉽지 않기에 객관적으로 바라봐 줄 수 있는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이와 함께 개인은 자신이 모르는 게 뭔지 알기 위해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은 것에 끌려다니는 삶에서 벗어나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는 힘을 키우며 욕망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자신을 배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재산(소유), 육체, 지위나 정체성, 욕망 등 내게 속한 것들은 자신을 알아가는 데 활용해야 하는 도구들입니다. 또한 나를 알아가기 위해선 자신에 대해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는 과정에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배우고 있는지 관찰하고 파악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는 것'이 너무 많아 그 '하는 것'에서 '겪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체험의 과잉/경험의 빈곤에 시달린다.”(188쪽)


자기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도모하며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부에서 이 체험의 과잉/경험의 빈곤을 주의해야겠습니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기에 이를 다루기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게되어 느끼는 매력(지적쾌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도 주지해야겠습니다. 이제부턴 기쁨을 주는 공부를 해보려고 합니다.


“두 가지 기쁨이 있다. 자유와 창조의 기쁨, 향유의 기쁨이 있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능수능란한 기예를 배우고 익히며 연마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창조하고 향유하는 삶, 이것이 멋진 삶이며, 멋지게 사는 것은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쓸모다. (중략) 창조와 향유에서 인간이 느끼는 것은 성장의 기쁨이다. 공부는 성장을 통해 기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공부의 목적은 재미가 아니라 기쁨이다. (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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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서로 돕는다 

작가
표트르 A. 크로포트킨
출판
여름언덕
발매
201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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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하고 무자비한 생존경쟁', 동물세계에서나 인간사회에서나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져버린 개념인 듯 합니다.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을 종교처럼 받들고 있던 세계에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아나키즘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표트르 A. 크로포트킨(Kropotkin)입니다.


크로포트킨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책에서 생존경쟁이라는 자연법칙에 반하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며 동물과 인간의 삶을 유지시켜왔던 다른 측면의 자연법칙을 소개합니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며 저자는 우리가 다윈의 생존경쟁 가설을 어떤식으로 오해했는지 알려줍니다. 이전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다윈의 생각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라는 책에서 '생존 수단 확보를 위한 개체들 간의 투쟁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투쟁이 어떻게 협동으로 대체되는지, 이로 인해 생존을 위한 최적 조건을 어떻게 발전시키는지'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이 때 “적자는 신체적인 힘이 가장 강하거나 가장 교활한 종이 아니라 강한 개체들과 약한 개체들이 모두 함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연합해서 서로 돕는 법을 익히는 종이라는 것을 암시했다."는군요.


하지만 "다윈의 추종자들은 동물세계를 반쯤 굶어 서로 피를 탐하는 개체들 간의 끝없는 투쟁의 세계로 여기게 되었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라야 하는 생물학적 원리로까지 삼았다”(24쪽)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크로포트킨은 자연이 도살장인 것만도 아니고 조화와 평화가 깃들어 있는 곳만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상호부조'라는 다른 한쪽의 자연법칙을 내세웁니다.


“다양한 부류의 동물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많은 전투와 몰살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종에 속하는 동물 혹은 적어도 같은 집단에 속하는 동물 사이에서는 상호지원과 상호부조, 공동 방어도 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한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호투쟁이 자연법칙이라면 사회성 역시 자연법칙이다.”(26쪽)


저 역시 이제껏 자연계는 당연히 생존을 위한 무한 투쟁을 통해 유지되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식하지도 못한채 다윈주의자들의 생각을 당연시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개미나 벌과 같은 아주 작은 동물들에서부터 독수리같은 맹금류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다양한 포유류에서부터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홉스 식의 투쟁'을 따르고 있지 않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다윈주의자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동물계에서고 인간 세계에서고 간에 경쟁이 철칙은 아니다. 동물들 사이의 경쟁은 예외적인 시기로만 국한되며, 자연선택은 그것이 작동하기에 더 좋은 장을 찾아다닌다.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경쟁이 배제됨으로써 더 나은 조건이 만들어진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해 삶의 더없는 충만함과 강렬함을 맛보기 위한 엄청난 생존경쟁 속에서 자연선택은 가급적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는다.”(97쪽)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늘 해당 종에게 해로우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것이야말로 항상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으나 항상 존재하는 자연의 성향이다. 이것이 바로 덤불과 숲, 강, 바다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슬로건이다. “그러므로 연합해서 상호부조를 실천하라! 그것이야말로 각자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최대의 안전을 제공해주고, 신체적이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삶과 진보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98쪽)


저자는 동물사회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상호부조라는 한 축의 원리가 이어져왔다는 증거도 제시합니다. 미개인으로 분류되는 부시먼과 호텐토트 족, 에스키모인들의 서로 돕는 관습과 커바일 족으로 대표되는 야만족의 마을 공동체 운영 사례 등을 통해 그간 우리가 얼마나 편향된 시각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봐 왔는지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갖게 된 이유도 알려줍니다.


"언론사나 법정, 관공서뿐만 아니라 시인과 작가들까지도 미래 역사가의 연구자료가 될 막대한 기록을 똑같은 편향적 관점을 갖고서 쓰고 있다. 그들은 모든 전쟁과 전투, 사소한 충돌, 다툼과 폭력행위, 온갖 종류의 개인적 고통을 더없이 세밀하게 서술해서 후손에게 전해준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무수히 많은 상호지원과 헌신의 자취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곧 우리의 사회적 본능과 관례는 거의 무시하고 넘어가 버린다.”(140-141쪽)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저자가 주장한 상호부조의 원리로 세상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중세시대에도 인류는 길드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조직을 운영했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말 등장하기 시작한 강력한 국가 조직과 함께 “일인의 권력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연합주의 원리는 시들어버렸고, 대중의 창조적인 능력도 소멸되었다.”(238쪽)라고 크로포트킨은 안타까워합니다. 더욱이 민중의 실수를 언급한 부분에선 저자의 안타까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민중은 정부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으로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민중은 새로운 쟁점을 제기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국가가 개입해 들어와 그들이 마지막으로 누리고 있던 자유를 분쇄해버렸다.”(240쪽)


저자가 활동했던 19세기 말의 상황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이 여전히 이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크로포트킨의 말처럼 연합 혹은 연대의 정신이 오랜 인류의 역사를 거치며 본능처럼 우리 안에 상속되어 왔더라면 어땠을까 상상도 해봅니다. 저자가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 국가가 지배하던 때에도 상호부조는 이어져왔다는 주장을 하는데 크로포트킨이 묘사한 당시의 세태를 보면 현대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국가가 모든 사회 기능을 흡수하면서 필연적으로 방종하고 편협한 개인주의가 판을 쳤다.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의 가짓수가 불어난 것만큼 서로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났다. 모든 사람이 길드나 우애 단체에 속해 있던 중세에는 길드 내의 두 '형제'가 병든 형제를 번갈아가며 보살펴 줘야 했다. 한데 이제는 이웃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빈민 병원의 주소를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245쪽)


“오늘날 점잖은 시민들은 가난한 사람이 곁에서 굶어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저 약간의 세금만 내면 된다. 그 결과,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궁핍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법과 학문과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대세가 되었다. 그런 이론이야말로 이 시대의 종교며, 그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삶은 위험한 유토피아주의자가 되어 버린다.”(245-246쪽)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들은 상호부조의 원리가 살아 있는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공유지를 몰수하려는 지배계급에 투쟁해 왔다는 점을 크로포트킨은 강조합니다. 물론 그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해 상호부조의 정신이 후손들인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한 듯 합니다. 하지만 더이상 나뉠 수 없을 정도로 원자화된 개인으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정신이 있다면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부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 심리에는 근본이 되는 것이 있다.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미쳐 돌아가는 상태가 아니라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에 응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법이다.(중략)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적인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런 감정은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의 수십만 년에 걸친 집단생활에 의해서, 수천 년에 걸친 인간 사회생활에 의해서 배양된 것이기 때문이다.”(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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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

작가
애슈턴 애플화이트
출판
시공사
발매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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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이시네요.”


이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는 없었습니다. 저 역시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고 흐믓합니다. 우리는 왜 '젊다 혹은 젊어 보인다'는 말에 이렇게 반응할까요?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라는 책에서 애슈턴 애플화이트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이 태도에 차별이 스며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애플화이트는 인간 사회에 인종차별, 성차별과 같이 연령차별(나이에 따른 차별)도 만연하다는 걸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이에 따른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나자고 촉구합니다. 저자 자신도 “나이 드는 것을 생각하면 '막연한 불안'과 '속이 매스꺼워 죽을 것 같은 두려움' 사이의 무언가가 나를 잠식해온다”(8쪽)라며 연령차별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하며 논의를 시작합니다.


아직은 젊은 저도 나이드는 것을 생각하면 구부정해진 허리, 깊게 패인 주름살, 얼굴에 핀 검버섯 등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하철역 계단에서 힘겨워하는 노인들을 보면 타임머신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나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처럼 노년의 삶에 대해선 긍정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 역시 편견이라는 것을 저자는 알려줍니다.


“나의 미래가 지금의 나보다 못하다는 편견. 나이 든 내가 젊은 시절의 나보다 못하다는 편견. 이 편견이 '나이 부정'의 핵심이다.”(16쪽)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의 나와 만년의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 관점의 기저에 나이에 따른 차별이 놓여 있습니다. 60세부터 100세 이상의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을 그냥 '노인'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저자가 지적할 때 당연하게 불렀던 '노인'이란 말엔 엄청난 편견이 반영되어 있음에 놀랐습니다. 10세부터 50세를 같은 범주에 놓지는 않으니까요.


“우리 주변의 연령차별을 인식하고 나이 듦에 대해 좀 더 미묘하고도 정확한 시각을 가지도록 격려하고 행동에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애플화이트는 말합니다. 나이가 매우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연령차별이 존재합니다. 의식하기 힘들게 우리 문화에 스며있는 편견 중의 하나인 연령차별에서 벗어나 볼까요?


우리 안에 뿌리내린 부정적 편견


'청년'을 생각하면 미래, 열정, 도전 등 긍정적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애플화이트가 활동하고 있는 미국에도 태평양 너머 한국 사회에도 젊음은 숭배됩니다. 반면 '노년'을 떠올리면 어떤가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신체의 변화를 수치스러워하게 만드는 문화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저자는 연령차별이란 개념을 만든 로버트 버틀러 박사를 인용하면서 이런 문화는 나이 든 사람들을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고 이들의 인권이나 안녕도 개의치 않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나이 드는 것이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로 논의됩니다. 얼마 있지 않아 병들고 노쇠한 노인들이 세상을 뒤덮어 나머지 세대는 이 노인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통을 겪을 것이란 관점이 지배적입니다. 연금도 건강보험 기금도 곧 바닥날 것이고 부족한 재원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통해 채워질 것이란 예상이 전 인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나이 듦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세대간의 반목을 조장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인 노년을 '추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또한 '나이에 걸맞지 않다'는 편견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성적인 활동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저자가 '성욕이 없는 노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라고 말하는데 제게도 깊이 박혀 있는 편견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노인들의 성생활을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저를 보며 나이에 따른 편견이 제게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노년의 재발견


과연 노년은 정말 이런걸까요?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각자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다른 속도로 나이가 듭니다. 우리 모두를 '노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습니다. 노년은 혹은 나이 든 우리를 하나의 정형화된 이미지 안에 구겨넣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궤적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사랑하고 놓아주면서 그 길을 항해해왔다. 자녀든, 집이든, 꿈이든, 살아오면서 쌓은 다양한 경험과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의 총합이 지금의 우리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금 이 모습으로 빚었다. 이것이 바로 풍요롭고 깊이 있고 너무나도 소중한 'agefulness'다.”(83쪽)


나이가 든다고 자연스럽게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들은 지혜를 얻는데 훌륭한 자양분이 됩니다. 은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나이 든 사람들이 일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축적된 경험들은 세대 간 협력을 이끌어내며 혁신적인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은퇴한 사람들을 자원으로 바라보고 의미 있는 일을 찾을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꼭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경제적 성과를 창출해야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가정에서의 돌봄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 등을 통해 사회 공동체에도 분명히 기여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자원을 축내는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사람들은 좀 더 행복해집니다. 이 행복감이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순간을 산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인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노인들도 순간을 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면 행복해진다.”(329쪽)


연령차별이 없는 사회를 향해


저자가 연령차별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으로 제안하는 것은 '인정'입니다. 저도 세상에 태어나면서 시작된 나이 먹는다는 변화 과정을 받아들이고 '나이 듦=살아가는 것'이란 사실을 떠올리면서 편견을 깨는 과정을 시작합니다. 이 편견은 꼭 젊은 사람들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애플화이트는 어느 연령대에든지 늙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로도 연령차별적 태도를 가진 것이라 말합니다.


노인장, 시니어, 어르신이란 표현을 버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 칭하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늙은이/젊은이의 구분은 없다. 우리는 다만 어떤 사람보다는 나이가 많고 어떤 사람보다는 나이가 적을 뿐이다.”(22쪽)라는 점을 마음에 새깁니다. “'young'이 매력적이라거나 시대를 앞서 간다거나 어리석다는 뜻이 아니듯, 'old'는 추하다거나 시대에 뒤처진다거나 현명하다는 뜻이 아니다.”(66쪽)라는 것도.


저자는 모든 연령에 친화적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이와 같은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실천 방법들도 말합니다. 특히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에겐 독서, 악기연주, 댄스, 그림그리기 등 뇌에 자극을 주는 활동을 지속하고 사회적 관계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성욕이 여전하다는 것도 인정하고 신체 변화에 따라 성생활도 변화되어야 함을 언급합니다. 의존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상호의존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진리"라는 점을 잊지 않기를 강조합니다.


"노인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존재다.”(319쪽)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마지막까지 예측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인생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326쪽)


책의 마지막 장(9장)엔 다양한 정책적 제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경제에 나이 든 사람들이 이바지할 기회를 늘리는 프로그램 마련, 지속적 직무 및 평생 교육시스템, 돌봄 노동에 대한 경제적 지원, 장기 요양 서비스 제공을 위한 공공/민관 협력 파트너십 개발 등 다양한 접근 방식들은 고령화 사회를 준비하는 데 시도해 볼 만한 일들이라 생각합니다.


참고: 애슈턴 애플화이트(Ashton Applewhite)의 TED 강연(Let's end egeism)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https://www.ted.com/talks/ashton_applewhite_let_s_end_ag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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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작가
이반 일리치
출판
느린걸음
발매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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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발견해가는 혹은 인정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제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하고 있는 일, 가족 돌봄, 사회에의 기여 혹은 봉사 등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지만 계좌의 잔고와 소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시대흐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자급자족'이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된지 오래인 요즘 상품이든 서비스든 소비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산업화 이전엔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현대 산업사회를 지나오면서 소비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40년 전 이반 일리치는 '현대화된 가난'이라는 표현으로 자유와 생산의 기쁨은 사라지고 모두가 획일화된 경험을 하며, 상품이 넘쳐나지만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 시대를 정의했습니다. 세계적 사상가 반열에 오른 이반 일리치는 1978년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라는 짧막한 에세이에서 성장으로 인한 풍요속의 빈곤과 그 안에서 무력해진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 어디서든,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공인된 전문가의 허가 없이 집을 짓거나 아픈 사람을 치료했다가는 법을 우습게 아는 겁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10-11쪽)


매일 거대한 경제구조에 발맞추기 위해 행진하는 다수의 무리에 합류하며, 자신의 능력을 낙관하는 믿음과 타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틀에서 빼낸 듯한 미디어가 무한 침범하는 일상에서 청중이자 고객, 소비자로 전락한 인간. 이반 일리치가 봤던 시대의 모습이 40년 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아니 더 심화되었기에 이 책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자율성을 잃은 채 무력하게 시장에 의존하는 우리들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상품 중심의 시장 중심 사회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상품에 덜 의존하는 새로운 사회구조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모험을 선택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일상을 보면 인간들은 시장 중심 구조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시장과 일체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상품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힘도 없게 되는 무기력이다. 땀을 흘려야 기쁨을 얻는 인간의 조건이 소수 부자만 누리는 사치스러운 특권이 된다.(중략) 새로운 상품이 생겨나 전통적인 자급 기술이 쓸모없어질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직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 버렸다.”(33-34쪽)


이 역시 지금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인간이 스스로 움직여 필요를 만족시키는 시대를 열기 위해선 대중이 자신과 이웃의 만족을 위해서, 권력이 생산하는 상품의 최대 생산량을 파악하고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절제가 시장 의존 사회를 벗어나는데 기반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후기 산업사회의 거짓 풍요와 자유의 소멸을 막기 위해선 한 사회가 생산할 부와 일자리에 한계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부와 일자리가 공평하게 배분되고 함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풍요의 한계를 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량 생산품은 한계를 모르고 넘쳐나고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가난하게 만드는 부'의 생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자리는 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대규모의 추가 정부 예산을 급히 투입할 정도로 심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풀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능사일까요? 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자,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한 것은 지금의 무한 상품 소비 시대를 먼저 돌아보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동 시장에 연연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을 탐구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문가가 대중을 불구로 만들다


일리치는 20세기 중반을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라고 정의했습니다. 스스로를 각종 구속에 가두며 살아온 시민들의 안일함을 먹고 교육자, 의사, 사회사업가, 과학자 등 전문가들이 시대를 지배해왔다는 것인데 상당히 수긍이 됩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딱 이렇지 않은가요? 수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있는, 전문가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자율성을 잃은 소비자들인 것이죠.


“갈수록 광고 문구가 필요를 만들고, 소비자는 전문의, 미용사, 산부인과 의사 등 수십 명의 치료 전문가가 내리는 지시를 따라 구매를 하게 된다. 광고가 되었든 전문가의 처방이 되었든, 모임에서 토론을 하든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하는 사회는 개인이 만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행동하거나 결정할 수 없는 문화에서 나온다. 이런 문화에서 소비자는 스스로 배우기보다 만들어진 필요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데려다 필요를 배우는 데 유능한 학생으로 만드는 사회에서는 스스로 경험한 만족에 기반해 자신의 욕구를 만드는 능력은 보기 드물어진다.”(72쪽)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우리는 단순한 소비자로 태어난 것이라는 세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생산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과거 마을 공동체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활동들을 통해 사회 전체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해왔던 경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과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렸기에 인간의 자율적 행동이 마비되었다(일리치는 이를 '반생산성'이라 표현)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자율성 상실을 경제성장의 부작용, 자원 부족, 공해 등의 문제 때문이라 혼동하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인간의 자율적 필요를 상품이 대신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일치리는 노동에 관해서도 “노동은 더이상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가치의 창조가 아니라, 주로 사회적 관계인 직업을 의미한다. 무직은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 노동의 가치나 만족을 느끼지는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언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속한 문화에서 얻을 수 있는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필요를 만들지 못할 때 더 이상 인간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중략) 지금은 남자건 여자건 모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도구를 작동하여 생산한 표준화되고 쪼개진 상품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지금까지 인간과 문화의 진화를 촉진시킨 도구를 직접 사용해 얻는 만족감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욕구와 소비는 수십 배가 증가했지만, 도구를 다루며 얻는 만족감은 드물다. (중략)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기와 만들어진 물건이 하나의 목적을 추구하며 균형을 이루는 동안에만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쉽게 잊힌다.”(89-90쪽)


그래도 작은 희망의 빛줄기가 보인다


그래도 최근엔 우리 사회에 작은 희망이 보입니다. 전통적 일자리가 늘어나기엔 근본적 한계가 있는 시대에 들어섰기에 실업 문제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기존의 상품의존 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움직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에도 몇몇 곳에 누구나 도구를 사용해 물건을 만들 수 있는 팹 랩(Fab Lab)들이 도입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정부 일자리 예산을 이런 곳에 확대해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팹 랩은 일반인 아무나 이용할 수도 있고,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며, 창업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실들이 확대되어 대중화된다면 일리치가 말했던 상실한 자율성을 회복하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만들어 얻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노동의 기쁨과 가치를 되찾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준화된 상품 중심의 시장 의존 사회에서 이렇게 한 걸음씩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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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정

작가
장 자끄 상뻬
출판
열린책들
발매
2017.06.30.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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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낙서한 것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와..'하고 작은 탄성이 나오곤 합니다. 조금 서툰것 같아 보이는 그림들에 우리들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것처럼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꼬마 니꼴라로 유명해진 삽화가 장 자끄 상뻬의 <진정한 우정>을 휴가를 보내는 중간 중간 펼쳐봅니다.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라 불리게 된 후 '우정'이라는 말은 매우 낯설어졌습니다. 어린 딸들이 즐겨보는 어린이 만화영화 같은데서나 가끔씩 접하게 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년의 마르크 르카르팡티에(프랑스의 잡지 텔레라마의 전 편집장 겸 대표)와 장 자끄 상뻬 두 사람이 '진정한 우정'에 대해서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 책은 마르크 르카르팡티에(L로 표기)와 장 자끄 상뻬(S로 표기)의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르카르팡티에는 상뻬에게 우정의 의미는 무엇인지, 우정관계에 있다는 증거와 사례, 우정을 나눴던 상뻬의 경험 등에 대해 집요하게 묻습니다. 상뻬는 자신이 생각하는 '우정'에 대해 조곤조곤 대답합니다.


“(우정은) 갑자기 생겨나 당신 안에 척 하니 자리를 잡으면, 그다음엔 알아서 그 감정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거죠. 같이 살자니 거기에 의무도 있고, 나름대로 의식도 있고, 규칙 같은 것도 있을 테죠.”(7쪽)


우정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면서 '우정'이라는 낯설어진 가치를 찬찬히 곱씹어봅니다. 이와 함께 중간중간 삽입된 상뻬의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아주 쏠쏠합니다. 단순히 삽화가라는 말로 장 자끄 상뻬를 표현하기엔 부족합니다. “사회학 논문 1천 편보다 현대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평을 들을 정도인 상뻬의 그림에 빠져들기에 충분한 책입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절대 풀리지 않을 엄청난 문제는 고독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혼자라고 느끼게 마련입니다.”(43쪽)라고 말하는 상뻬인데 그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왜 우정관계가 필요한 걸까요? 저는 상뻬의 이 말에 대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한거죠.


“우리는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행운이죠.”(61쪽)

“우리가 걸음을 걷는 것만 해도 수많은 모순된 힘들이 서로 보완하고 조직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겁니다.”(68쪽)


상뻬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 그리고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함께 걸을 수 있는 관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의 인생이 그렇게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어떠한가요?


“직업이 뭡니까? 라거나 어제저녁은 누구와 먹었어? 라거나 바캉스는 어디로 갈거야? 따위의 질문은 할 필요도 없는 거죠. 오늘날의 인간관계는 그저 불안감을 누그러뜨릴 요량으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63쪽)

“학교에서부터 경쟁은 시작됩니다. 1등, 2등, 3등…사람들은 경쟁에 혈안입니다. 정치가들은 여론조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백분율에 열광하고요…점수를 내지 않는 테니스 경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71쪽)

“우리는 누구나 친구보다는 볼일 있을 때 어울리는 사람들을 더 많이 가진 것 아닐까요?”(85쪽)


매 순간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면서 '아, 나만 이런 것은 아니구나' 혹은 '나는 그래도 좀 낫네'라는 상대적 안도감을 느끼기 위한 인간관계 정도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상대가 되어버린 물결 속에서 빠져나와 친구와 '점수를 내지 않는 테니스 경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상뻬가 생각하는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우정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우정의 의미와 그것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우정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합니다. 우정에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약속된 규칙 같은 게 있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이 따라야 할 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정은 사소한 기적과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고 우연과 필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때론 의례적이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관계가 우정이기도 합니다. 친구라면 서로의 도움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정관계에 있는 두 사람에게는 서로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한편, 조심성있게 그리고 현명하게 적당한 거리를 둘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되도록 상대와 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조심조심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을 하면 오해를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퉁명스럽게 행동해서 공든 탑을 무너뜨리죠. 그러니 어느 정도는 점잔 빼는 태도를 간직하는 편이 더 좋겠지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50쪽)


상뻬는 우정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지금까지 겪어온 인간관계에서 제게 부족했던 것이 이 부분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친구가 되는 것에는 상뻬가 말한 것처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연히 만나게 되어 친구관계를 시작하게는 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데에는 생각보다 세심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상뻬의 말처럼 “거저 주어지는 건 없습니다.”


“사랑의 말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랑의 행위만 있을 뿐이죠”(79쪽)

“오직 노력만이, 설사 아주 미미하고, 상대방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더라도, 부단히 기울이는 노력만이 우정을 지속시킨다고요. 거저 주어지는 건 없어요.”(100쪽)


책을 덮고 찬찬히 제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간 나를 지나쳐간 혹은 내가 지나쳐간 친구라 불렀던 녀석들을 떠올려 봅니다. 내 삶에 매몰되어 돌아보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연락이라도 해봐야겠습니다. 희미하게 자국으로만 남아 있는 '우정의 행위'를 되살려보면서요.


“우정이란, 매우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인간이 받아들여 볼 만한, 자신을 던져 볼 만한 도전입니다.”(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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