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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독재자를 그리워하게 되는 이유

초원위의양 2019. 11. 10. 19:59

지난 달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행사들을 다룬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몇 년 전 박정희 탄신제 소식을 전하는 영상기사를 보며 혀를 찼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전 대통령이라고는 하지만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대했던 독재자를 아직도 기리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딸까지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나라이니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생명값으로 민주주의를 이뤄낸 나라에서 제 1야당의 국회의원들까지도 독재자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한 민주공화국이고 이 한 문장을 헌법 첫머리에 기록하기 위해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민주공화국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대체 왜 여전히 독재자를 기념하고 찬양하기까지 할까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아무리 미화해도 독재하며 자신을 거스르는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사실을 덮을 수는 없는데도 말입니다.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교수 등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박정희 시대를 미화하고 독재까지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왜 전제를 찬양하게 되는가?

미국의 정치학자 마크 릴라가 쓴 <분별없는 열정>을 읽으며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인지 의문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지식인들이 왜 전제를 찬양하게 되는지 말해줍니다. 나치즘에 가담했던 위대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 나치에 가입하고 히틀러의 통치를 합리화했던 법학자 카를 슈미트를 사례로 들어 지식인들이 전제를 지지하게 되는 이유를 찾아갑니다.

마크 릴라는 위대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전제를 애호하게 되는 이유를 “분별없는 열정 혹은 정신” 때문이라 봤습니다. 하이데거와 같은 1930년대 독일 지식인들이 히틀러를 우상화하고 그 우상화의 틀에 갇혀 그것을 전체 세계로 착각했다는 한나 아렌트의 평가를 인용하며 지적 열정을 가진 이들이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를 미화하고 그리워하는 지식인들, 정치인들이 아직까지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식에 참석해 그의 따님을 구하겠다고 말하는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분별없는 열정”이 한 사람을 어떻게 이끌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인 방식으로 굴러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지난 2016년 최장집 교수가 한겨레21과 인터뷰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나라는 민주화 이후에도 경제나 국가의 운용 방식을 민주화하지는 못했습니다. 사회가 운용되는 원리와 방식이 박정희 독재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박정희 패러다임을 폐기하라, 한겨레21 제1138호, 2016년)

전제자들이 계속 출현하는 이유

마크 릴라는 <분별없는 열정>의 에필로그에서 레닌,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 마오쩌둥, 호찌민, 카스트로 등을 언급하면서 근대 역사에서도 전제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선 전제자들이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환생했다고 봐도 틀린 해석이 아닐 듯 합니다. 저자가 강조하듯 전제자들은 여전히 살아 남아 세계 곳곳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냉정한 관료제와 잔인한 작업장처럼 여전히 권위주의 사회일 수 있을지언정, 시라쿠사의 전제정 같은 유형의 전제정일 수는 없다. 근대화는 고전적 전제정 개념을 낡은 것으로 만들 것이며,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유럽 밖의 나라들 역시 탈전제의 미래로 진입할 것으로 믿어졌다. 우리는 지금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알고 있다. 고대의 규방과 음식 독 감별사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 자리를 선전장관과 혁명수비대, 마약왕과 스위스 은행가들이 채웠다. 전제자들은 교묘하게 살아남은 것이다.”(226쪽)


전제자들의 지속적인 재등장이 가능했던 이유를 마크 릴라는 분별없는 지식인들의 이야기에 세계가, 즉 사회구성원들이 분별없이 귀를 기울이고 설득되었기 때문이라 진단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교수, 뛰어난 작가들,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한 곳에 결집해 전제자들의 범죄까지도 숭고하다’라는 주장을 사회가 비판없이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근대화가 진행되어 온 우리 나라 역사에 저자의 주장을 적용해봐도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독재까지도 옹호하고 그리워하는 지식인들과 영향력 있는 매체들이 여전히 세력을 갖추고 있는 대한민국에 박정희 탄신제가 열리고 거대한 동상앞에 선을 모으고 절하는 국민들이 여전히 있는 것을 잘 설명해 줍니다. 책에서 저자가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며 “사랑이 광기를 유인한다”고 한 말이 떠오릅니다.

저자는 “어떤 사람 또는 사상과 사랑에 빠지든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종류의 광기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광기가 통제되어서 각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크 릴라는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충동의 노예’가 될 때 사람들이 전제자가 될 수 있다고 했던 플라톤을 인용하며 독자에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우리 나라 정치판에도 새로운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정당들은 국민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받기 위해 국민들이 ‘혹’할 만한 사람들을 발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크 릴라가 말했던 ‘전제자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걸러 낼 수 있는 눈을 갖추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고려하는 또 다른, 좀 더 흔한 전제자의 영혼이 있다. 이 사람들은 지배자로서 공적인 삶에 진입하지 않고, 교사, 연설가, 시인-오늘날 우리가 흔히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무리-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이런 사람들은 위험하다. (중략) 이런 유형의 지식인은 디오니시오스 2세처럼 정신의 삶에 대해 열정을 지니고 있지만, 철학자와 달리 그 열정을 다스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급히 정치적 토론에 뛰어들거나 책을 쓰고 강연하며, 자신의 무능함과 무책임을 거의 다 드러내는 광란의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를 던진다.”(241쪽)


이를 위해 마크 릴라는 독자들에게 ‘사유를 통한 자각’을 요청합니다. 속속 등장하게 될 인물들을 평가하기에 앞서 자기의 내면 깊은 곳에 전제를 애호하는 정신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크 릴라는 “전제정은 죽지 않았고, 어떤 사상의 매력에 굴복하려는 유혹, 그리고 그 사상의 잠재된 전제성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드는 열정을 허용하고 싶은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최근 맞이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정치지형 변화와 과거에 추구해 왔던 이념들의 실패앞에서 모두가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면 더 이상 힘들게, 복잡하게 사유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사유함을 통한 판단 능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자는 재차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떠올려야만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중산층의 공동화,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 엘리트 집단들에 대한 분노, 정당들의 쇠퇴, 공익에 대한 무관심 확산-은 오로지 개인들과 그들의 권리들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만으로는 파악되지도 또 해결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중략) 끝으로, 전제에 대한 유혹이 지식인들을 탈선으로 이끄는 유일한 힘이 아니라는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자기기만은 무수한 형태로 나타난다.”(257쪽)